#101
다시 사는 인생 - 101
미쓰비시중공업과의 합작 조인식을 마치자마자 경환은 서둘러 미국으로 돌아왔다. 본격적인 JSC와의 경쟁이 시작되었지만, 모든 권한을 황태수와 코이치에게 위임을 한 상태였기에 마지막 입찰원가 산정에만 참여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번 알제리 프로젝트가 JSC에 낙찰이 된다면 JSC를 인수한다는 경환의 계획은 차질이 생기기 때문에 경환은 수시로 진행상황을 보고 받고 있었다. 내년이면 한국의 CDMA 상용화가 성공하고 97년부터 본격적인 해외시장 개척에 나서는 만큼 SHJ의 비상은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다. 경환은 그 이후를 빠르게 준비하고 있었다.
“상당히 흥미로운 내용이네요.”
경환은 투자팀이 작성한 보고서를 살펴보고 있었다. 경환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서인지 린다를 위시한 투자팀은 공격적으로 투자에 나서고 있었다. 경환은 실리콘밸리만 생각하고 있었지, 루트 129이나 리서치트라이앵글도 IT산업을 육성하고 있다는 것은 투자팀의 보고서를 통해 처음 접하고 있었다.
“우리의 투자패턴이 소프트웨어에 집중한 만큼 두 곳의 분산투자도 연구해야 합니다. 투자팀을 이미 파견을 했으니 보고서가 올라오면 선별투자를 하겠습니다.”
린다는 IT산업의 투자를 위해 많은 인력을 채용하고 있었고 경환은 린다의 요청을 100% 수용을 했다.
“그렇게 하세요. 그리고 대학의 연구소와 연계하는 것도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투자나 라이선스 확보가 모두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지만,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기 바랍니다. 20%만 건질 수 있다면 나머지 80%의 손실은 충분히 메꿀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SHJ는 퀄컴에 투자한 8천만 불을 포함 1억 5천만 불 이상 투자를 집행하고 있었고 그 대부분은 IT산업에 집중되어 있었다. SHJ의 묻지마식의 공격적인 투자는 다른 투자기업의 조롱을 받고 있었지만,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SHJ의 투자를 받으라는 말이 실리콘밸리로부터 조용히 퍼져나가고 있었다.
“퀄컴의 지분인수는 마무리되었습니다. 8천만 불이 투자된 상태에서 한국의 상용화만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좀 힘듭니다. 그래도 오성 전자의 기술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에 기대를 갖게 하지만요.”
린다는 아직도 퀄컴에 집중된 투자를 염려하고 있었다. 에릭이 고사한 퀄컴의 부사장직은 이동통신 전문가를 채용하는 것으로 대체했지만, 새로 투입된 3천만 불로도 퀄컴의 자금난은 쉽게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아 린다를 답답하게 만들고 있었다.
“린다, 다른 투자는 모르겠지만, 퀄컴은 SHJ를 성공으로 이끌 겁니다. 자금만 충분하면 퀄컴의 지분을 100% 인수하고 싶은 생각뿐입니다. 만약 퀄컴의 유동자금에 문제가 생긴다면 투자자들과 직접 협상을 해서 최대한 지분을 인수받으세요.”
“휴우, 알았어요, 제임스. 그렇지 않아도 퀄컴에 투자한 몇 곳에서 지분매각 의사를 보이고 있어요. 조건만 맞는다면 확보를 해 볼게요.”
단둘이 있을 때는 서로의 이름을 부를 정도로 두 사람의 신뢰는 확고했다. 경환은 아직도 불확실한 린다의 어깨를 두드리며 일 년 정도면 좋은 소식이 있을 거라는 말로 린다의 불안함을 해소시켜 주려고 노력했다.
“흠, 마지막으로 IT 전문업체 설립은 당장 급한 건 아니니 계획만 잡도록 하는 게 좋을 거 같네요. 인도와는 별도로 한국도 그 범주에 넣고 연구를 해 줘요.”
아시아 금융위기를 한국이 잘 넘기게 된다면 90년대 말에 한국에 불어닥친 IT 열풍이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겠지만, 예정대로 IMF의 통제체제로 접어들 게 된다면 산업의 구동력을 잃은 한국경제는 IT산업을 새로운 동력체로 내세울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경환은 그런 상황이 오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지만, 대비는 해야 했다.
“그리고 브로드밴드(광대역통신) 쪽으로 연구하거나 라이선스를 가지고 있는 기업이 있다면 투자를 검토해 주세요.”
90년 중반까지 단순한 PC통신의 개념은 브로드밴드가 현실화되면서 인터넷 접속뿐만 아니라 음성과 데이터 통신, 이동전화, 휴대형 디지털 장치 등으로 옮겨가는 발판을 만드는 기술이었다. SHJ가 이 라이선스를 선점하게 된다면 그 가치는 퀄컴을 상회하고도 남았다. 린다는 경환의 지시를 메모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뿐 예전처럼 반대하지는 않고 있었다. 지금은 마이크로소프트가 IT산업의 큰손으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만, 경환은 다가올 2000년을 서서히 준비하기 시작했다.
서소문동을 찾은 황태수는 두 번 다시 찾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오성 건설에 들어서며 남다른 감회에 젖어들었다. SHJ와 오성 전자의 합작으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진행된 오성 건설과의 합작이었다. 그러나 황태수로서도 SHJ의 이익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감정을 가라앉혀야만 했다.
“부사장님, 기분이 묘한데요?”
“수틀리면 때려치우면 돼. 사장님도 오성 건설과의 합작은 달가워하지 않으셔.”
황태수는 박화수의 어깨를 툭 치고는 비서의 안내를 받아 회의실로 들어섰다. 회의실에는 건설뿐만 아니라 전자와 엔지니어링의 임원들도 보이고 있어 이번 SHJ와의 합작에 큰 기대를 보이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하하하, 황 부사장님. 오랜만에 오성 건설에 오시니 감회가 어떠십니까?”
JSC와의 합작 실패의 책임을 박화수에게 떠밀었던 이수혁 사장이 황태수와 박화수를 맞이했다. 박화수의 얼굴이 급히 굳어지는 것을 확인한 황태수는 덤덤히 이수혁의 말을 받았다.
“글쎄요. 무슨 감회가 있겠습니까? 다른 기업과의 일정도 잡혀있어 시간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본론으로 들어갔으면 합니다.”
“흠, 흠. 그럽시다.”
황태수의 싸늘한 대답에 이수혁은 민망했던지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서류를 들췄다. 황태수는 경환이 준 정보를 확인하며 오성 건설의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인사치레를 빼고 핵심부터 집었다.
“오성 건설은 쿠웨이트 제3 정유공장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 SHJ의 정보가 틀렸다면 말씀을 해 주십시오.”
이수혁과 회의에 참석한 계열사 임원들은 황태수의 질문에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SHJ가 이 프로젝트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면 SHJ의 능력으로 볼 때 오성 건설 단독입찰은 이미 물 건너 갔다고 봐야 했다.
“험, 과연 SHJ의 정보력은 대단하군요. SHJ와 합작이 되지 않았다면 큰 낭패를 볼 뻔했습니다. 하하하.”
황태수는 이수혁의 말에 가볍게 웃어 주었다.
“아직 계약서에 사인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프로젝트는 이미 독일의 지멘스와 컨설팅 계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오성 건설과 계약을 체결할 수 없다는 점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황태수의 말은 사실이었다. 지멘스는 황태수가 유럽 출장 중에 KENTZ의 뒤를 이어 SHJ와 계약된 업체였고, 지멘스는 내년에 있을 쿠웨이트 프로젝트에 대해 이미 SHJ와 컨설팅계약을 체결한 상태였다. 이수혁은 마음이 급해졌다. SHJ가 지멘스와 계약을 했다면 오성 건설이 들어갈 틈은 없었다. 황태수는 기다려 주지 않고 다음 말로 이수혁을 절망에 빠트렸다.
“혹시 몰라 말씀드리는 데, 내년 말에 있을 사우디 주베일 1500MW 가스화력발전소 프로젝트는 KENTZ와 계약을 한 상태입니다. SHJ는 한 프로젝트에 한 업체와 계약을 합니다.”
황태수는 유럽 출장의 성과로 대형 계약을 체결하고 있었다. 올해는 소형 프로젝트에 참여해 경쟁력을 높이는 전략으로 이미 목표를 달성한 후였기에,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대형 입찰에 참여를 준비하고 있었다. 물론 대형 입찰의 경우 경환의 정보력이 필요하지만, SHJ 자체 컨설팅 능력도 이미 목표치에 도달해 있었다.
“그, 그럼 우리와의 합작은 무엇을 의미하는 겁니까? 우리 오성 건설이 추진하는 프로젝트에 SHJ와 합작을 할 수 없다면 우리도 난감합니다.”
이수혁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황태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예전 자신의 부하였던 황태수가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며 비아냥거린다고 생각하자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칼자루는 황태수가 가지고 있다 보니 자신의 감정을 숨겨야만 했다.
“우리와 오성 전자가 한 배를 탄 지금,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제가 드리는 제안을 받아들이지 말지 결정을 해 주십시오.”
“무슨 제안입니까?”
실낱같은 기대감에 이수혁은 황태수가 내놓을 제안이 무엇인지 궁금해하며 독촉했다.
“이번 쿠웨이트 입찰에 지멘스와 합작을 하는 것입니다. 설계와 감독은 지멘스, 시공과 플랜트 제작은 오성 건설이 하는 조건입니다. 물론 플랜트 제작은 SHJ-화성플랜트에 발주돼야 하고요. 이 제안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면, 오성 건설과의 합작은 뒤로 미뤄야 할 거 같습니다.”
설계와 제작이 지멘스와 SHJ-화성플랜트로 빠져나간다면 오성 엔지니어링은 참여 자체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이수혁을 고민하게 만들었다. 오성 전자에 사정해 이 자리를 만든 이수혁은 황태수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하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미쓰비시중공업과의 계약이 마무리되자 코이치는 사무소를 개설하기 위해 동분서주 하고 있었다. 당분간 일본에 머물며 알제리 프로젝트와 사무소 개설 두 가지 일에 대한 권한을 위임받은 코이치는 사소한 실수도 일어나지 않도록 만전을 기하고 있었다. 귀국하라는 경환의 독촉에도 사무소장을 선임할 때까지만 자신이 프로젝트를 수행하겠다는 말로 경환을 설득할 정도였다. 경환도 코이치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빨리 마무리를 하고 돌아오라는 말밖에는 할 수 없었다.
“마사토, 그동안 기다려 줘서 고맙다.”
“차장님,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차장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JSC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따랐던 오카다 마사토는 코이치가 미국으로 떠나자 자신도 미련없이 JSC를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가 버렸다. 항상 마음의 짐으로 남아있던 마사토였기에 경환의 승인이 떨어지자마자 그를 동경으로 불러올렸다.
“너도 소문을 들어서 알겠지만, SHJ는 세계 플랜트시장을 좌지우지하게 될 거야. 네가 자부심을 가져도 된다는 것을 내가 보증하마.”
“차장님이 믿는 회사라면 저도 믿겠습니다. 그런데 사장님이 한국인이라는 말이 들리는데…….”
마사토는 한국과 일본이라는 섞일 수 없는 두 민족이 회사 안에서 융화될 수 있는지 걱정을 하고 있었지만, 코이치는 그런 마사토를 다독였다.
“뭘 걱정하는지 알겠지만, 고정관념은 버리도록 해라. 내가 아는 사장님이라면 끝까지 믿고 따를만한 자격이 충분한 분이시다.”
마사토는 아직 만나보지 못한 SHJ의 사장을 코이치가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모습을 보이자 생전 사람에 대한 믿음을 보이지 않던 코이치를 변화시킨 사람이 누구일지 궁금했다.
“알겠습니다. 전 차장님만 믿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우선 우리는 알제리 프로젝트를 가지고 JSC와 경쟁을 하고 있으니, 마사토 너는 파견 나와 있는 본사 인원들을 뒤에서 지원하는 업무를 먼저 수행하도록 해. 그리고 우리의 정보가 새지 않도록 항상 주의하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JSC와 경쟁을 한다니, 없던 기운도 살아납니다.”
밝은 마사토의 얼굴을 확인 한 코이치는 사무직원들을 채용하기 위해 이력서를 뒤적였다.
컨설팅팀과 투자팀들은 쏟아지는 신규사업으로 제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직원들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황태수와 린다의 업무가 늘어나는 만큼 경환의 업무는 줄어들고 있었지만, 경환은 경환 나름대로 2000년 이후를 대비하기 위해 전생의 기억을 쥐어짜 내고 있었다.
“사장님, 타케우치 차장의 전화입니다. 연결할까요?”
“연결해 주세요.”
코이치의 일본 출장이 길어지면서 퇴근 때마다 마주치는 나츠미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사무소장도 선임한 만큼 무조건 돌아오라는 지시를 내릴 참으로 경환은 급히 전화기를 들었다.
“타케우치 차장님! 내일 중으로 미국 행 비행기를 타세요. 이번에도 지시를 거절하면 부장승진 취소할지도 모릅니다.”
‘하하하, 알겠습니다. 부장승진을 하기 위해서라도 바로 돌아가겠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동경사무소 직원을 채용하는 과정에서 사장님의 허락을 받을 일이 생겼습니다.’
경환의 코이치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분명 동경사무소에 대한 권한을 코이치에게 주었기에 직원채용은 사후 승인만 받으면 되었기 때문이었다.
“제가 권한을 드렸는데 제 허락이 필요하다는 게 무슨 말입니까?”
‘저 사실은 야마시타 하루나라는 여성을 채용하려고 하는데, 능력은 충분히 있어 보이는 데 그게 좀……. 팩스로 이력서를 보냈으니 먼저 보시죠.”
경환이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을 때 이다나가 일본에서 들어 온 팩스를 가져다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았다. 경환은 영문으로 작성된 이력서를 살폈지만, 특별히 이상한 점은 찾을 수 없었다.
“오차노미즈여자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네요. 특별한 점은 없어 보이는 데 문제라도 있나요?”
‘저, 지난번 미쓰비시중공업과 갔던 곳에서…….”
경환은 하루나란 이름을 기억하며 다시 이력서를 살폈다. 흑백으로 된 사진으로는 정확히 알아볼 수 없었지만, 그때 만났던 하루나란 것을 알 수 있었다.
“모든 판단은 타케우치 차장에게 맡기겠습니다. 그러나 혹시라도 미쓰비시중공업이나 JSC의 사주를 받았을 수도 있으니 면밀히 살펴보십시오.”
미인계에 넘어가 입찰을 망치는 경우를 경환은 수 없이 지켜봤었다. 자신이 기억하는 하루나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정도의 미모를 가지고 있는 여성이었다.
‘자세한 건 돌아가서 말씀드리겠지만, 그런 건 아닙니다. 부친의 병원비를 벌기위해 처음 간 날 사장님을 만났다고 합니다. 사장님께서 다른 곳에서 만나자는 말을 듣고 그 곳을 정리하고 지원을 했다고 합니다. 영어도 수준급이고 미국과 일본의 문화적 차이도 이해하는 여성입니다.’
“좀 더 살펴보시고, SHJ에 필요한 인재라면 채용하십시오.”
멋 한번 부리려고 내뱉은 말을 믿고 지원을 하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지만, 코이치가 추천할 정도의 인재라면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