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99화 (76/264)

#99

다시 사는 인생 - 99

삼풍백화점 붕괴로 미국의 뉴스는 한국 건설기업의 부실시공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었고, 제2의 중동 붐을 조성하려던 한국 건설업계에는 큰 악재로 작용하고 있었다. 그 여파는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었는데 한국기업이 건설하는 곳의 감리감독이 강화되고 있었고 몇몇 입찰에서는 한국 건설업체가 PQ(자격심사)에서 탈락하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한국 건설기업들과의 업무합작을 추진하고 있었던 SHJ도 이 문제를 쉽게 넘길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다.

“사장님, 한국 건설기업과의 업무제휴는 시기가 너무 좋지 않습니다. 국제 여론이 잦아 든 후에 다시 추진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경환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저가 입찰이 심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과의 업무제휴는 SHJ도 아쉬운 입장이었지만, 황태수의 말대로 시기가 너무 좋지 못했다. 서서히 동종업계에 이름을 알리고 있는 SHJ가 부실시공으로 세계 언론의 표적이 되고 있는 한국 건설업체들 위해, 리스크를 무릅쓰고 먼저 면죄부를 줄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미쓰비시중공업이 우리 제안을 받아들인 이상 대후건설과의 합작은 미루는 게 좋겠습니다.”

황태수는 당연한 결정이라는 듯 고개를 끄떡이며 경환의 의견에 동조했지만, 한국 기업과의 합작이 연기된 것에는 황태수도 아쉬워하고 있었다. 삼풍백화점 붕괴는 세계 건설시장에서 이룩했던 한국의 건설신화를 하루아침에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그나저나 타케우치 차장이 고생이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미쓰비시중공업이 쉽게 우리 제안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한국에서의 플랜트 제작을 놓고 미쓰비시중공업은 진퇴양난에 빠져 있었지만, 마침 발생한 삼풍백화점 사고로 대후건설과 합작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는 SHJ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며 버티고 있었다. 코이치는 미쓰비시중공업과의 합작을 중단하고 SHJ의 파트너로 JSC를 선정해 미쓰비시중공업이 일본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겠다는 강수를 둠으로써 미쓰비시중공업의 백기 투항을 받아 낼 수 있었다. 오히려 기존의 요청했던 물량에서 15% 증가한 물량을 받아내는 성과까지 보여, 박화수의 입을 찢어지게 만들었다.

“어떨 때 보면 타케우치 차장의 강단은 사장님과 비슷합니다. 전권을 위임했다고는 하지만, 저도 그 친구는 감당이 안 될 정도입니다.”

“뒤에서 잘 받쳐주세요. SHJ가 그룹경영을 했을 때, 부사장님의 오른팔이 될 사람입니다.”

과거 JSC를 나락에서 일으켜 세워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시킨 코이치였다. 경환은 컨설팅 업무에서 벗어나 SHJ의 이름으로 세계시장에 뛰어들 때 코이치를 전면에 내세울 계획을 갖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저는 이번 일본 출장 후에 잠시 한국에 들러 합작이 지연된 점을 해명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대현 그룹은 계열사로 확대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중공업만 현행대로 계약을 유지하고 건설이나 자동차는 손대지 마십시오.”

국내 제1의 건설회사였던 대현 건설을 경환이 포기했다는 것을 황태수는 쉽게 이해하지 못했지만, 반론을 제기하지는 않았다. 황태수의 의아한 표정을 알고는 있지만, 경환은 대현 그룹의 분열에 대해서 설명해 주지는 않았다. 현재 대현 그룹은 회장의 지시로 진행되는 대북투자협상에 전 그룹이 매달리고 있었지만, 4천억이 넘어가는 대북투자와 지원은 대현의 자금경색을 가져왔고 형제들의 사이를 갈라놓는 원인이 되었다. 결국엔 무모한 대북투자가 대현의 발목을 잡아 그룹이 쪼개진다는 것을 황태수에게 말해 줄 수는 없었다.

“시간이 되었으니 나가시죠. 이번 일본 일정은 타이트하게 진행시켜 주십시오. 오래 머물고 싶지는 않습니다.”

경환은 미쓰비시중공업과의 조인식에 참석하기 위해 서둘러 공항으로 향했다.

“그러니까 우리의 투자를 세 지역으로 분산해서 진행하자는 말이군요.”

린다는 에릭이 작성한 보고서를 들여다보며 흥미롭게 읽어 있었다. FPSO와 여러 입찰 성공은 린다의 투자 폭을 넓혀주고 있었다. 경환은 황태수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회사 수익 대부분을 투자에 집중함으로써 린다에게 전폭적인 신뢰를 주고 있었다.

“현재 우리는 실리콘밸리 하나만 보고 있지만, 투자의 기본은 포트폴리오(분산투자) 아닙니까? 스탠퍼트대학 중심으로 실리콘밸리, MIT 중심으로 루트128, 듀크대학 중심의 리서치트라이앵글 이 세 지역이 앞으로 IT산업을 이끌 겁니다. 우리의 투자중심을 스탠퍼트대학과 실리콘밸리에 두고 나머지 두 곳의 분산투자도 검토해야 된다고 봅니다.”

미래를 위해 투자를 하고 결과를 기다린다는 것은 초조하고 지루한 싸움이었다. 혹시라도 개발에 실패하게 된다면 그동안의 투자는 물거품이 될 수밖에 없으므로, 가능성에 대한 신중한 검토가 반드시 뒤따라야만 했다. 경환은 실패가 두려워 투자를 머뭇거리지 말라는 말로 린다를 독려하고 있지만, 투자 자금을 운용하는 자신은 신중해야만 했다.

“에릭의 말이 맞는 거 같아요. 우선 각 지역에 투자팀을 파견해 대학과 연계하는 방법도 연구해 봐요.”

에릭이 이끄는 투자팀들은 휴스턴에 머물 수 있는 기간이 거의 없었다. 한 달에 반 이상을 미국 전 지역으로 출장을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에릭을 제외하고는 모두 미혼의 젊은 직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경환은 이들을 위해 이동과 숙식은 항상 최고 대우를 해 줄 정도로 투자팀에 거는 기대는 남달랐다.

“그리고 이건 장기플랜이긴 하지만, 투자에서 얻어지는 성과물을 이용할 수 있는 IT 전문업체 설립도 검토해야 된다고 봅니다.”

“나도 이 문제는 에릭과 의견이 같아요. 사장님이 돌아오시면 상의를 해야겠지만, 현재 인도의 IT산업이 커지고 있으니, 인도업체와 합작을 하거나 인수하는 것도 좋을 거 같아요. 이쪽으로 좀 더 연구를 해 줘요.”

경환의 조언이 있었긴 하지만, 린다는 하드웨어에서 소프트웨어로 투자패턴을 변경하고 있었다. 이 변화가 SHJ에 큰 이익을 가져다줄지에 대해선 확신이 없었지만, 경환의 남다른 미래예측과 마이크로소프트의 WINDOWS 95 출시로 인해 가치 창출에 대한 소프트웨어 업체의 역할이 세분되어 성장의 밑거름을 제공하기 시작함으로 인해 린다는 투자에 대한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7월 초지만 습한 동경 날씨는 중동의 더위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경환을 짜증스럽게 했다. 나리타 공항을 나서자 밀려오는 습한 더위가 경환을 덮쳤고 경환은 긴 비행시간에서 오는 피곤함과 땀을 식히기 위해 호텔부터 찾았다. 찬물에 샤워하고 와이셔츠를 갈아입고 한숨을 돌릴 때 이다나가 경환의 방을 찾았다.

“타케우치 차장이 로비에 도착했습니다. 내려가시겠습니까?”

“그래요. 만나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으니, 이다나도 동행을 하도록 해요.”

이다나를 앞세워 로비에 도착한 경환은 미리 내려와 황태수와 함께 있는 코이치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미쓰비시중공업과의 조인식은 내일로 예정되어 있어 호텔에서 휴식을 취할 생각이었지만, JSC와의 만남에 동행해 달라는 코이치의 부탁을 경환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코이치는 케이스케 회장의 요청을 받고, 혹시라도 JSC와의 만남에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많은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타케우치 차장님, 고생 많았습니다. 불편한 건 없었나요?”

“불편한 건 전혀 없었습니다. 쉬지도 못하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JSC의 전략을 확인하는 차원에서도 이번 만남은 우리에게 불리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경환은 코이치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는 것으로 불편한 코이치의 마음을 위로해 주고 싶었다.

코이치와 이다나를 동행하고 도착한 일식집에는 케이스케 회장과 두 아들이 이미 도착해 있었다. 경환은 케이스케 일행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지만, 코이치는 굳은 얼굴로 경환의 뒤를 지키고만 있었다.

“코이치, 이 형들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거냐?”

카이토가 나서자 코이치는 두 주먹을 쥐며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일본어를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좋은 소리를 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눈치챈 경환은 카이토의 면전에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었다.

“전무님, 타케우치 차장은 SHJ의 중책을 맡고 있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동생이라 하더라도 격식을 갖춰 주십시오. 그리고 제가 알아듣지 못하는 일본어는 삼가해 주십시오.”

“흠, 흠”

경환의 표정이 심상치 않은 것을 확인한 료스케가 카이토를 제지하자, 경환은 자신의 좌우에 코이치와 이다나를 앉혔다. 최석현을 통해 코이치가 배다른 형제인 료스케와 카이토에게 핍박을 받았다는 것을 들어서인지 두 사람에 대한 감정은 좋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SHJ와 척을 진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합작제의를 거절하고 미쓰비시중공업을 선택한 이유가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군요.”

싱싱한 도미를 메인으로 여러 요리를 맛보고 있을 때, 케이스케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운을 떼었다. 경환은 도미회를 입에 넣어 맛을 음미한 후 젓가락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SHJ는 미래 가능성이 없는 기업과는 거래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록 미쓰비시중공업과 피 말리는 경쟁을 하긴 했지만, 미쓰비시중공업은 SHJ의 파트너로 손색이 없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JSC는 무슨 비전을 가지고 있나요?”

“말이 지나치지 않습니까? 우리 JSC는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본 플랜트업계의 대부 같은 존재란 말입니다.”

성격 급한 카이토가 경환의 도발에 반발하고 나섰지만, 경환은 전혀 개의치 않고 있었다. JSC와의 만남을 생각하면서 좋게 대화를 이끌 생각은 애당초 없었다. 경환은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시선을 료스케에 맞췄다.

“사장님, JSC가 역사와 전통을 부르짖을 때, 경쟁업체들은 빠르게 변하는 세계 경제에 맞춰가며 기술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JSC가 정유, 가스, LNG 분야에 강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이미 국내 경쟁업체와의 경쟁에서도 밀리고 있습니다. 또한, 후발국가인 한국도 JSC의 턱밑까지 쳐들어온 상태이고요. 과연 이 어려운 상황을 어떻게 헤쳐나가실 겁니까?”

료스케는 탁자 밑으로 두 손을 떨고 있었다. 경환의 도발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마땅한 반박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경환의 지적은 날카로웠다. 알제리 프로젝트에 성공해 JSC를 개혁하기 위한 시간을 벌겠다는 계획이었지만, 느닷없는 SHJ의 등장에 그것마저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우리도 JSC의 개혁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SHJ의 동반자로 손색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JSC의 경험과 SHJ의 컨설팅이 합쳐진다면 세계시장을 주름잡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경환은 입맛이 떨어졌는지 안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고, 료스케와의 대화를 지켜보던 케이스케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타케우치 차장은 사장님과 다른 의견을 저에게 제시하더군요. 방만한 경영과 기술개발을 외면한 JSC는 현재 동맥경화에 걸려있는 상태라고 합니다. 저 또한 SHJ의 미래를 이끌어 가고 있는 타케우치 차장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를 했고요. 이 두 가지 원인이 SHJ를 미쓰비시로 이끌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꽝’

료스케는 참을 수가 없었던지 케이스케를 의식하지도 않고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코이치! 네 놈이 죽으려고 작정을 했구나. 더러운 피가 섞인 네 놈이 우리집안을 헤꼬지 할 줄 내 알고 있었어!”

“료스케, 자리에 어서 앉거라.”

케이스케가 얼굴을 부라리며 료스케의 팔을 끌어당기자 아직 분이 가시지 않은 듯 씩씩거리며 자리에 주저앉아 코이치를 죽일 듯 쳐다보고 있었다. 경환은 오른손으로 코이치의 다리를 잡아 분노를 참도록 했다.

“이 사장님, 제가 자식을 대신해 사과드리겠습니다. 이런 상황이 보기 싫어 코이치를 떠나 보냈는데 운명이란 게 질긴 거 같습니다. 이 사장님은 우리와의 경쟁을 결심한 거 같군요. 코이치, 최선을 다하거라. 우리도 쉽게 지지는 않을 것이야.”

케이스케의 분노를 삭이기 위해 급히 찻잔을 손으로 잡았다. 심할 정도로 JSC를 도발한 이유도 코이치로 하여금 남아 있던 정까지 버리게 하려는 경환의 의도가 있었지만, 코이치는 이미 JSC를 떠나면서 모든 관계를 정리해 버렸다.

“참고로 이번 알제리 프로젝트는 타케우치 차장이 전적으로 담당할 것입니다. 이미 모든 권한을 주었습니다. 회장님도 철저히 준비하셔야 될 겁니다. 조언을 드리자면 제가 만약 타케우치 차장과 경쟁을 했더라도 아마 승패를 장담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 저는 SHJ의 미래를 타케우치 차장에게 걸고 있습니다.”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하다는 것을 느낀 두 사람은 식사를 중단하고 급히 자리를 정리하며 일어섰다. 호텔로 돌아가는 차 안은 적막이 흐르고 있었다.

“내가 좀 심하긴 했죠?”

“아닙니다. 이제 JSC는 저의 경쟁업체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그리고 저를 믿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경환은 남아있던 부자지간의 정까지 끊게 만든 것이 미안했지만, 후회하지는 않았다. SHJ의 미래를 위해서도 코이치는 경환에게도 중요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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