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98화 (75/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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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인생 - 98

    “제 아내의 형편을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경환은 수정이 휴스턴대학에 입학한 후 매년 50만 불을 장학금으로 학교에 기부하고 있었다. 출산과 육아 문제로 자주 수업에 빠질 수밖에 없던 수정의 형편을 학교에 장학금을 기부함으로써 무마시키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휴스턴대학의 인재를 SHJ로 이끌기 위한 것이었다. 경환은 며칠 앞으로 다가온 수정의 졸업식 전에 장학금을 정례회 하기 위해 학장과 면담을 하고 있었다.

    “아닙니다. 미시즈 리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성실하게 수업에 임했습니다. 졸업에는 문제가 없었다고 봅니다. 그리고 졸업 논문과 작품도 훌륭했고요.”

    경환은 수정이 일반 석사과정의 학생이었다면 졸업장을 받는 건 어려웠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경환은 한국이나 미국이나 돈이 갖는 위력을 다시 한 번 느끼며 씁쓸해할 수밖에 없었다. 학장은 경환이 꺼내 놓을 선물이 무엇일지 궁금해하며 미소를 지어 보이고 있었다.

    “학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제 아내가 휴스턴대학을 졸업하지만, 저희 SHJ에서는 현재 기부하는 장학금 50만 불을 100만 불로 늘려 매년 기부할 생각입니다. 늘리는 기부금은 공학부의 발전기금으로 사용해 주십시오.”

    학장은 휴스턴에서 주목을 받는 기업이라고 듣긴 했지만, 장학금을 배로 늘리겠다는 경환의 말에 크게 놀라고 있었다. 대학 입장에서도 100만 불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기에 흔쾌히 100만 불을 기부하겠다는 경환의 말에 SHJ란 기업에 관해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휴스턴에 SHJ 같은 기업이 있다는 게 자랑스럽습니다. 공학부의 발전을 위해 투명하게 집행을 하겠습니다.”

    “SHJ는 휴스턴대학의 많은 인재에 관심이 많습니다. 아무쪼록 학장님의 지원을 부탁합니다.”

    경환은 이다나가 준비한 SHJ 명의의 기부약정서를 학장에게 전달하자 내용을 자세히 확인하지도 않고 학장은 급히 사인하기 시작했다. 경환의 입장에서도 어차피 세금으로 빠져나갈 돈을 대학에 기부함으로써 지역사회에 이바지 하는 기업이라는 명분과 함께 휴스턴대학의 인재들을 확보할 수 있어 결코 손해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두 사람 모두 만족할 만한 결과를 만들었다는 생각에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대화를 이어 갈 수 있었다.

    JSC 본사 사장실은 침울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오랜 전통 속에서 일본 내 최고의 플랜트 기업이라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버블경제가 붕괴하며 찾아온 불황을 JSC도 벗어날 수 없었다. 금융권의 붕괴는 자금조달에 어려움으로 나타났고, JSC는 자금의 유동성이 확보되지 않아 심각한 경영위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기업의 사활을 걸고 추진 중인 알제리 프로젝트를 유일한 돌파구로 생각할 정도였다.

    “형님, SHJ가 미쓰비시중공업과 합작을 한다는 게 찝찝합니다.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않겠습니까?”

    이번 알제리 프로젝트를 전담하는 타케우치 카이토 전무가 심각한 얼굴로 자신의 형이자 사장인 타케우치 료스케의 의중을 확인하기 위해 사장실을 찾았다. 국내 플랜트의 후발주자인 미쓰비시중공업의 공격적인 영업으로 JSC는 국내 플랜트 입찰에서도 고배를 마시고 있었기 때문에 해외 프로젝트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료스케는 미간을 찡그리며 물을 한 컵 급히 마셨다.

    “알제리는 우리가 몇 년 전부터 관리해 오던 곳이야. 쉽게 진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 단지 마음에 걸리는 건 이번 SHJ의 팀장으로 코이치가 왔다는 거야.”

    “네?, 설마 했는데 코이치 그 자식이……..”

    료스케는 말을 끝내고 굳게 입을 닫았다. 코이치 스스로 JSC의 경영권을 노린 적은 없었지만, 탁월한 기획능력과 조직장악능력으로 JSC의 일부 경영진과 특히 자신의 아버지인 회장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 코이치를 핍박하여 서울로 쫓아내고 결국에는 JSC를 퇴사했을 때만 해도 자신의 앞길을 더 이상 방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코이치가 SHJ의 팀장으로 자신의 등에 칼을 꽂으러 온 지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코이치나 미쓰비시중공업은 사실 큰 문제는 아니지 않습니까? SHJ가 왜 우리가 아닌 미쓰비시중공업을 선택했느냐는 것입니다. SHJ가 손을 댄 프로젝트는 실패한 적이 없다는 게 걱정입니다.”

    코이치가 서울사무소 소장으로 근무할 때부터 SHJ와의 업무제휴를 추진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알제리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SHJ와의 합작을 끊임없이 제안했지만, 그때마다 SHJ는 특별한 이유도 없이 제안을 거절했었다. 미쓰비시중공업과는 FPSO 입찰로 감정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이번 SHJ와 미쓰비시중공업 간의 합작은 료스케와 카이토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카이토, 네가 코이치를 한번 만나보는 게 어떻겠냐?”

    “네? 제가요?”

    카이토는 망설이고 있었다. 코이치가 어렸을 때부터 가장 심하게 괴롭히고 핍박한 사람이 자신이었기에 코이치를 만난다는 게 썩 좋은 방법이 아니란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형님, 제가 코이치를 만나봐야 역효과만 나옵니다. 아버지께 부탁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래도 코이치를 설득할 만한 사람은 아버지밖에는 없지 않습니까?”

    료스케는 인상을 구겼다. 경영과 코이치 문제로 그룹 회장인 자신의 아버지와는 벌어질 대로 벌어진 상태였다. 그러나 알제리 프로젝트가 실패라도 한다면 지금의 사장 자리를 지키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료스케는 어금니를 꽉 깨물며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일 년 만에 찾은 동경의 거리는 버블경제가 붕괴함으로써 기업의 도산과 부동산의 몰락, 금융권의 위축 등으로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은 생기마저 잃은 모습이었다. 코이치는 차창 밖으로 보이는 동경의 모습을 말없이 바라만 보고 있었다. SHJ에 합류하지 않았다면 자신도 생기 잃은 모습으로 동경을 배회하고 있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렸을 때부터 배다른 형들에게 갖은 구타와 모욕, 협박 속에 자라왔지만, 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다른 기업을 마다하고 단지 자신을 낳아 준 아버지를 위한다는 생각에 JSC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결국엔 자신의 아버지도 자신을 지켜줄 수는 없었다. 앞으로 철저히 SHJ를 위해 JSC를 나락으로 떨어트리겠다고 재차 다짐하고 있을 때 승용차는 미쓰비시중공업에 도착했다.

    “하하하, 환영합니다. 모모이 아키라 전무입니다.”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타케우치 코이치입니다. 저를 제외하고는 일본어를 하지 못하니 영어를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키라는 회사 정문까지 마중을 나와 일본어로 코이치를 환영했지만, 코이치는 영어로 응수하고 나섰다. 코이치는 자신이 일본인이라는 사실을 지워버리고 SHJ의 실무팀장으로서 회사의 이익을 위해 아키라와 기선 싸움을 하고 있었다.

    “실례했습니다. SHJ에 일본인이 있다는 사실이 절 흥분시켰나 봅니다. 자, 회의실로 같이 올라갑시다.”

    코이치의 도발에도 아키라는 특유의 친화력으로 대수롭지 않게 넘겨 버렸다. 나리타 치히로가 FPSO 실패를 책임지고 물러났어도 SHJ와의 합작을 추진하겠다는 명분을 만들어 한때는 자신의 정적이었던 다나카 아사히 사장을 설득할 수 있었다. 자신의 자리는 SHJ와의 합작에 성공하느냐에 달려있다 보니 아키라는 코이치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는 없었다.

    “좋지 않았던 감정은 이번 기회에 다 털어버리고, 좋은 동반자로 SHJ와 우리 미쓰비시중공업이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서로 경쟁을 했을 뿐입니다. 우리 SHJ는 미쓰비시중공업을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 또한, 좋은 결과가 나오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이전의 감정에 대해 개의치 않는다는 코이치의 말은 아키라를 안심시켰고, 회의는 눈치를 보는 아키라에 의해 코이치의 의도대로 흘러갔지만, 회의 막바지에 나온 코이치의 제안에 아키라의 표정은 굳어져 갔다.

    “우리 미쓰비시중공업에는 자체 플랜트제작공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부라고는 하지만, 특수플랜트 일부를 한국에 넘긴다는 것을 쉽게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코이치는 특수플랜트 일부를 SHJ-화성플랜트에 발주하라는 요청에 아키라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자체 제작공장을 가지고 있는 미쓰비시중공업이 특수플랜트를 외부 특히 한국에 발주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였다.

    “어려운 결정이란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미쓰비시중공업과의 합작을 성공시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제가 이 제안을 하는 것입니다. 휴~, 이런 말을 드리면 제가 문책을 받을 수도 있지만, 지금 한국의 SHJ-화성플랜트는 대후건설의 합작 제안을 받고 검토 중에 있습니다. 동일한 알제리 프로젝트를 가지고 말입니다.”

    코이치의 말에 아키라는 침을 삼켰다. 가격 경쟁력만 보자면 대후건설을 이길 수는 없었다. 이번 합작이 만에 하나 대후건설로 넘어가게 된다면 내일 당장에라도 자신은 짐을 쌀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자신이 결정할 문제도 아니었기에 아키라는 애간장이 녹고 있었다. 코이치가 미쓰비시중공업을 위해 이런 말을 하지는 않겠지만, SHJ의 능력은 나이지리아에서 충분히 확인하고도 남았기 때문에 대후건설과의 합작은 막아야만 했다.

    “컨설팅 비용을 5%로 상향 조정하는 선에서 이 제안을 철회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코이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본으로 출장오기 전 컨설팅 비용은 1%에서 3%까지 조정이 가능하도록 경환의 승인을 받았다. JSC와의 경쟁을 이기기 위해서는 컨설팅 비용까지 포기를 할 생각이었다.

    “이번 입찰의 최대 경쟁상대는 JSC입니다. JSC는 플랜트 제작을 OEM 방식으로 제3국에서 제작을 합니다. 일본에서 제작하겠다는 미쓰비시중공업이 과연 JSC를 원가에서 이길 수 있겠습니까? 우리 SHJ는 기존 3%의 컨설팅비용도 인하할 생각입니다. 미쓰비시중공업이 결단하지 못한다면 대세는 대후건설로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코이치가 JSC 회장의 사생아라는 것을 알고 의심을 했지만, JSC와의 경쟁에서 이기겠다는 강한 의지를 확인한 아키라는 의심을 지워버렸다. 그렇다고 자신이 결정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아키라는 급히 사장실에 인터폰을 걸었다.

    졸업식을 마치고 학생의 신분에서 주부로 변신한 수정은 자고 있는 경환을 깨우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육아와 학업에 신경을 쓰느라 상대적으로 경환에게 소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미안했던 수정은 학업이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난 후부터 경환의 건강을 최우선적으로 챙겼다. 곤하게 잠들어 있는 경환과 정우를 확인한 수정은 서둘러 주방으로 향해 일찍 출근하는 경환을 위해 아침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미국생활에 적응되어 가고 있었지만, 경환의 입맛만큼은 절대 변하지 않고 있어, 수정은 한국에서 가져온 뚝배기에 된장을 풀고 있었다. 된장찌개와 함께 밑반찬을 준비하던 수정은 항상 해 오던 대로 리모컨을 들어 TV를 틀고는 몸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자기야! 정우 아빠! 빨리 좀 나와 봐요! 정우 아빠!”

    수정의 급박한 외침에 화들짝 놀라 경환은 울고 있는 정우를 챙길 새도 없이 거실로 뛰쳐나갔다. 거실에는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한 채 서 있는 수정을 발견하고는 급히 수정에게 뛰어갔다.

    “자기야,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수정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입술을 파르르 떨며 TV를 바라보다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급히 TV를 바라본 경환은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TV 하단 면에는 BREAKING NEWS라는 커다란 자막과 함께 한국의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를 실시간으로 전달하고 있었다. 삼풍백화점 붕괴를 두 번 경험하게 된 경환은 마음이 찢어지고 있었다. 이 사고를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밀려들었다.

    “어, 엄마, 엄…마.”

    처가가 삼풍백화점 뒷편의 삼호가든이었기 때문에 수정은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걸고 있었지만, 전화는 통 연결이 되지 않고 있었다. 급히 수정을 소파에 앉힌 후 전화기를 뺏어 들어 수십 번의 전화 끝에 처형과 연결되었다.

    “처, 처형. 저 정우 아빱니다. 지금 뉴스를 보고 전화 드리는 건데, 다들 무사하신 거죠?”

    경환은 미국으로 돌아오기 전 삼풍백화점에서 골조가 균열하는 소리를 들었다는 이유로 절대 삼풍백화점에 출입을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었다. 그러나 사람 일이라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이 경환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정우 아빠, 그러지 않아도 전화를 하려고 했어요. 다들 무사하시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 큰 언니 집으로 가시는 중이라 연결이 안될 거에요.’

    경환은 울고 있는 수정에게 전화기를 넘기고는 휴대폰으로 본가도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허탈한 기분에 소파에 주저앉아 버렸다. 사고를 알고 있었음에도 막을 수 없었던 죄책감과 자괴감이 경환의 심장을 갈기갈기 찢는 거 같았다. 앞으로 일어날 수많은 사고에서 절대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에 경환의 눈에선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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