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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인생-97화 (74/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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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인생 - 97

    주말을 맞아 수정과 정우를 데리고 허먼 파크를 찾은 경환은 유모차를 끌며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일요일이라 그런지 허먼 파크에는 휴스턴 시민들과 관광객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수정은 유모차를 끄는 경환의 팔짱을 끼고는 물끄러미 경환을 올려다보았다.

    “왜? 내가 너무 잘 생겨서 불안해?”

    “응, 불안해요. 이렇게 잘난 남편을 주위에서 가만 놔두지 않으면 어쩌나 겁도 나고요.”

    수정은 경환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고, 경환은 근처에 보이는 벤치를 향해 유모차를 끌었다. 다람쥐들이 유모차 주위를 지나가자 정우는 뭐가 좋은지 손을 뻗어 다람쥐를 잡으려 했지만, 유모차 밖을 빠져나갈 수는 없었다. 경환은 정우를 안아 들고는 풀밭에 털썩 주저앉았다.

    “정우야, 다람쥐랑 놀고 싶어?”

    이미 정우는 다람쥐에 정신이 팔렸는지 경환의 말에도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고 시선을 다람쥐에 고정해 버렸다. 수정도 경환을 따라 풀밭에 앉아 잔잔한 호수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동안 내 투정을 받아줘서 고마워요. 밖에서 고생하는 거 알면서도 자기한테는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나 봐요. 이젠 내가 자기를 챙겨주고 싶어요. 우리를 위해 열심히 일해줘서 정말 고마워요.”

    경환은 어깨에 기댄 수정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인생을 다시 살게 되면 모든 거에 감사한 마음이 든다는 것을 말해 줄 수는 없었다. 경환은 수정을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가 오히려 고맙지. 결혼하자마자 중국으로 미국으로 옮겨 다녔어도 자기는 불평 한마다 하지 않았잖아. 자기가 내 옆을 지켜줘서 내가 일에만 매진할 수 있었어. 자기야말로 잘 참아줘서 고마워.”

    경환은 수정의 손을 살포시 잡으며 조그만 상자를 수정의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우리 열심히 재미있게 살자. 그리고 크지는 않지만, 자기한테 주는 선물이야.”

    상자 안에는 삼풍백화점에서 구매한 다이아 반지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경환은 집안 형편으로 결혼식 예물도 제대로 해 주지 못한 것이 항상 마음에 걸렸었다. 경환의 앞에서 결코 내색한 적은 없었지만, 수정이 친구들의 결혼식에 참석하고 의기소침한 모습을 기억하고 있던 경환은 그런 수정이가 너무 고맙고도 미안했다. 경환은 반지를 꺼내 들고 수정의 손가락에 살며시 밀어 넣었다. 수정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눈물을 글썽일 뿐이었다.

    “너무 예뻐요. 그래도, 많이 비쌀 텐데…….”

    수정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경환은 고개를 숙여 수정의 입술을 찾았고 수정도 경환의 입술을 받아들였다. 엄마 아빠의 키스하는 모습에 샘이 났던지 정우가 급히 몸부림을 쳤고 경환과 수정은 정우를 달래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돈은 어디서 나서 산 거에요?”

    경환은 급히 정우를 안아 들고 다람쥐를 찾겠다며 뛰어갔고, 수정은 경환의 뒷모습을 보며 어이없이 웃을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출근과 동시에 황태수는 코이치와 함께 경환의 집무실을 찾았다. 본격적으로 JSC와의 경쟁을 준비하며 미쓰비시중공업과의 합작을 추진하기 위해 코이치를 선발팀의 팀장으로 출장을 보낼 계획이었다. 오늘은 코이치의 최종 브리핑을 듣는 자리였다.

    “타케우치 차장님, 보고서는 잘 읽었습니다. 눈으로 보는 거 보다는 차장님의 의견을 직접 듣고 싶어서 불렀습니다. 가장 궁금한 내용이 해외사무소 개설인데 SHJ에 필요하다고 보십니까? 제 생각에는 불필요하지 않나 생각이 들어서요.”

    경환은 코이치의 보고서를 확인하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알제리 프로젝트를 성공한 JSC가 90년대 말 위기를 돌파하는 계기가 되는 것이 해외사무소의 개설을 통해 빠른 정보를 입수하는 것부터 시작했다는 것을 알아서였다. 코이치가 SHJ에 합류하지 않았다면 이 제안은 JSC의 것이 되었을 것이었다. 경환은 코이치의 입을 통해 직접 듣고 싶었다.

    “기업은 생물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70년대는 관리, 80년대부터 지금까지 영업이 기업의 생명을 좌지우지했다고 봅니다. 그러나 이후에는 정보가 최우선이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남들보다 얼마나 빨리 새로운 정보를 입수해 활용하느냐가 기업의 경쟁력을 높이는 척도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현지에 사무소를 두고 남들보다 빠르게 현지화에 성공하고 정보를 입수해야 합니다.”

    경환은 황태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황태수 역시 경환과 마찬가지로 놀라움을 표시하고 있었다. 경환은 고개를 끄떡이며 코이치를 지지하고 나섰다.

    “좋은 지적을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터케우치 차장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이번 일본 출장을 시작으로 해외 거점확보에 대한 것은 타케우치 차장님의 주관하에 추진해 주십시오. 전폭적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황태수는 코이치의 어깨를 두드리며 신뢰를 표시했고 경환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어 낸 코이치는 SHJ 합류 이후 처음으로 큰 보람을 맛보게 되었다. 경환은 잠시 숨을 고른 후 다음 질문을 코이치에게 던졌다.

    “미쓰비시 중공업과 대후건설을 비교하면서 알제리 프로젝트에 대응한다고 보고서에 나와 있는데 설명을 부탁합니다.”

    “아프리카는 예전부터 일본기업의 강세지역입니다. 그러나 10년 전부터 대후건설이 공격적으로 아프리카에 진출한 결과 현재 미쓰비시중공업과 동등한 지위를 받고 있습니다. 우리의 목적이 JSC의 철저한 고립이고 미쓰비시중공업의 도움이 필요하지만, 대후건설을 미쓰비시중공업의 대항마로 이용할 생각입니다.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모르겠으나 미쓰비시중공업이 우리의 의견에 부합되지 않는다면 대후건설을 파트너로 선정해도 무난하다는 생각입니다.”

    경환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코이치에게 추가 질문을 던졌다.

    “타케우치 차장은 JSC를 인수하기 위해서는 미쓰비시중공업과 공동인수를 해야 된다고 제안을 하지 않았습니까? 만약 대후건설과 이번 프로젝트를 진행한다면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고 보는데.”

    경환도 JSC 인수의 최대 걸림돌을 보수적인 일본정부를 꼽고 있었다. SHJ의 부족한 부분을 메꾸기 위해서는 JSC의 설계능력과 경험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경환은 코이치의 의견에 쉽게 동의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미쓰비시중공업은 아직 우리가 JSC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알제리 프로젝트를 대후건설과 성공한다면 오히려 우리의 발목을 잡고 사정을 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아니 그렇게 만들어 보겠습니다.”

    일본에 대해서는 특별한 경험을 가지고 있지 못했던 경환은 자신보다 일본 사정에 밝은 코이치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믿을 수 없지만, 코이치에 대한 믿음은 확고했기 때문이었다.

    “부사장님, 타케우치 차장이 돌아오면 최석현 차장과 존슨 차장과 함께 부장으로 승진발령을 내리겠습니다. 준비해 주십시오.”

    경환은 자리에서 일어나 코이치와 악수를 나누었다. JSC는 코이치로 인해 더 깊은 수렁에 빠지게 되겠지만, 미래를 준비하지 못하는 기업에 동정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경환이 생각하는 미래가 코이치로 인해 서서히 현실화되고 있었다. 황태수와 코이치가 집무실을 벗어나자 이다나가 메모지를 가지고 들어왔다.

    “사장님, 한국영사관에서 전화가 왔었습니다.”

    메모지에는 김창수 영사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혀있었다. 경환은 메모지를 확인하자 인상부터 찡그렸다. 교민들의 보호는 뒷전이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뛰어다니는 한국외교관들의 행태를 너무 많이 봐서 그런지 만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린다가 자신의 시계를 가리키며 독촉하자 경환은 메모지를 꾸겨 휴지통에 던져 버리고는 린다를 따라 나섰다.

    “미안해요. 타케우치 차장의 브리핑에 몰입하느라 시간 가는지 전혀 몰랐네요.”

    “제시간에 도착할 수 있을 거예요. 우리까지 초대할 줄 몰랐어요.”

    휴스턴을 방문한 주지사가 주최하는 오찬에 경환과 린다가 초대를 받아 호텔로 향하고 있었다. 오찬에 참석하기 위해서는 따로 막대한 기부금이 필요하긴 했지만, 경환은 순순히 주 정부의 초대를 받아들였다. 아직 규모가 작은 SHJ를 무슨 이유로 초대를 했는지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띠리리~, 띠리리~’

    휴대폰이 울리지 경환은 번호를 확인하지도 않고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제임스 리입니다.”

    ‘안녕하십니까. 한국 영사관의 김창수 영사입니다. 전화 드렸더니 외출을 하셨다고 해서 실례를 무릅쓰고 휴대폰으로 전화를 드렸습니다. 잠시 통화를 할 수 있겠습니까?’

    반갑지 않은 전화였지만, 걸려 온 전화를 일방적으로 끊을 수는 없었다.

    “제가 중요한 약속이 있어 급히 나오느라 연락을 못 했습니다. 시간이 많지 않으니 짧게 말씀해 주십시오.”

    김창수와 오래 통화를 할 기분도 아니었지만, 목적지 도착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라도 통화는 길게 할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대통령의 방미를 맞아 SHJ 대표이신 이경환 사장님을 청와대에서 정식으로 초청하려고 합니다. 특별한 요청이니 워싱턴을 방문해 주시기 바랍니다. 초청장은 공문형식으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경환은 기가 막혔다. 휴스턴에서 워싱턴이 가까운 것도 아니고, 어렵게 초청했으니 워싱턴으로 무조건 오라는 식의 김창수의 말에 경환은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죄송합니다. 아직 그런 중요한 모임에 참석할 만한 규모의 회사는 아닙니다. 더 좋은 기업가들이 그런 자리를 빛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쉽지만, 저는 참석을 하지 못할 거 같습니다. 제가 장소에 도착해서 전화를 끊겠습니다.”

    ‘저, 저. 이 사장님……’

    경환은 김창수의 말을 듣기도 전에 휴대폰을 접어 버렸다. 박재윤의 부탁을 받고 잠시 고민을 하기도 했지만, 김창수의 거들먹거리는 태도가 경환의 생각을 바꿔버렸다. 경환의 대화를 옆에서 듣던 린다가 조용히 한마디를 던졌다.

    “휴스턴 시 정부의 조언도 있었는데, 이번 기회에 시민권을 받는 게 어떠세요?”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국적을 바꾼다는 것을 결정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단지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인으로 성장했다는 것이 경환의 발목을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린다의 조언을 받고 다시 한 번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차는 호텔의 정문에 도착해 있었다. 초대장을 제시하고도 몇 번의 보안 검색을 받은 후에야 오찬이 열리는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던 두 사람은 자신들의 이름이 적혀있는 탁자를 찾아 앉았다.

    “텍사스 주지사인 조시 W 부시가 입장하십니다.”

    사회자의 목소리가 들리자 단상 오른쪽 문의 통해 부시가 들어오고 있었고, 참석자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로 그를 맞아 주었다. 그들 중에는 경환과 린다의 모습도 보이고 있었다. 단상에 올라선 부시는 마이크를 확인한 후 긴 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대선에 출마하기 위해 기반을 다시지 시작한 부시는 텍사스의 확고한 지지를 받고 있는 인물이었다.

    “휴스턴을 방문해서 대단히 기쁩니다. 정유산업과 항공산업이 밀집되어 있는 휴스턴은 텍사스주를 떠나 미국의 안보에 지대한 역할을 하는 중요한 도시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워싱턴의 정책들은 강한 미국정신을 퇴조시키고 있습니다. 북한의 핵 개발 의지를 원천적으로 분쇄하지 못하는 것도 큰 실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팍스아메리카의 위상을 되찾아야 합니다. …………”

    부사의 긴 연설은 경환을 지치게 만들어 가고 있었다. 한국 국적의 경환에게는 팍스아메리카의 위상을 되찾자는 부시의 말이 피부에 와 닿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클린턴 행정부의 대화 우선의 정책으로 북한의 핵 개발 의지를 저지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정유업체와 군수업체를 등에 업고 무지막지한 힘으로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을 전쟁의 도가니로 만든 부시도 크게 잘난 것이 없다는 걸 경환은 알고 있었다. 연설이 끝났는지참석자들은 기립박수를 보냈고 경환도 엉거주춤 일어나 박수를 칠 수밖에 없었다.

    “SHJ의 제임스 리 사장입니다. 주 정부에서 개최하는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고, 기부도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연설이 끝나고 각 테이블을 돌면서 참석자들과 눈도장을 찍고 있던 부시는 경환의 앞에 도착해 비서의 소개를 간단히 받은 후 경환과 악수를 나누었다.

    “지난번 한국에서 있었던 불미스러운 사건은 들었습니다. 우리 주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대처하도록 지시를 내렸는데 이만해서 다행입니다.”

    “주 정부에서 신경을 써 주셔서 다시 한 번 감사 드립니다.”

    “지금은 일정이 바빠 시간을 낼 수 없지만, 언제 오스틴을 한번 방문해 주십시오. 미스터 리와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경환은 부시가 자신을 알고 있는 점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주 정부가 위치한 오스틴을 방문해 달라는 요청은 경환을 더욱 고민하게 만들었다. 부시와 인연을 만들 생각은 가지고는 있었지만, 아직까지는 SHJ나 자신에게 이득이 될지 확신을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찬을 마치고 회사로 복귀하는 경환은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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