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다시 사는 인생 - 96
탈도 많고 말도 많았던 보름간의 한국 출장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온 경환은 잠시의 휴식을 취할 틈도 없이 업무에 복귀할 수밖에 없었다. SHJ는 기존의 컨설팅 업무와 투자 업무를 공격적으로 추진하고 있어서인지 회사는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경환의 빈자리를 황태수가 무리 없이 메꾸어가고 있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일 정도였다. 그동안 밀려있던 서류를 확인한 경환은 느긋하게 커피 한잔을 즐기려 했지만, 관리팀을 맡고 있는 어스틴 스미스 차장의 방문에 마시던 커피를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어서 오세요. 스미스 차장님. 커피 한잔 하세요.”
자리에 앉은 어스틴에게 커피를 한잔 건네주며 경환은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어스틴은 린다가 SHJ로 합류할 때 같이 온 직원으로 본사와 해외지점의 관리를 담당하고 있었다.
“바쁘시니 본론만 말씀드리겠습니다. 급하게 직원들을 채용한 관계로 사무실 공간이 상당히 부족합니다. 마침 맞은편에 있던 업체가 이전하는데 그 공간을 저희가 임대하는 게 좋을 거 같아 찾아 뵀습니다.”
경환은 어스틴의 제안에 토를 달지 않았다. 현재 직원의 수는 백 명을 넘어가고 있어, 사무공간이 비좁아 업무효율이 떨어져 가고 있다는 것을 경환도 알고 있었다. 회사가 커지면서 사옥 신축에 대한 유혹이 없는 건 아니지만, 아직은 때를 기다려야만 했다.
“좋은 의견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 개 층을 다 사용할 수 있게 관리사무소와 협의를 해 주시고 공간 활용계획과 인테리어는 따로 계획서를 올리시고요.”
어스틴은 자신의 제안이 받아들여지자 한층 고무된 얼굴로 자리를 벗어났고 그동안의 업무보고를 위해 황태수가 급히 경환의 집무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FPSO 성공 이후 SHJ는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KBR의 그늘에서 벗어나려는 경환의 의지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SHJ의 업무능력에 반신반의하던 업체들이 서둘러 합작제의를 해 옴에 따라 SHJ의 주가가 하루가 다르게 뛰고 있었다. 황태수는 두툼한 보고서를 경환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동안 컨설팅 계약을 체결한 업체별 리스트와 현재 추진 중인 프로젝트를 정리한 내용입니다. 작년 말부터 시작해서 3억 불 이하의 소형 프로젝트를 2건 성공했고 현재 6건을 추진 중에 있습니다. 6건의 입찰 총액은 대략 40억 불 수준입니다.”
경환은 보고서를 살피며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경환은 황태수가 추진하는 소형 프로젝트에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경쟁사들은 SHJ가 참여한 프로젝트의 전략을 대폭 수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회귀에 대한 여파가 서서히 나타나고 있었다. 따라서 SHJ 자체의 컨설팅 능력을 제고시킨다는 목적으로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고, 사실 이번 소형 입찰은 실패를 각오하고 있었다. 그러나 경환의 우려와는 다르게 황태수는 2건 모두 성공을 함으로써 SHJ는 경쟁사들에 공포의 대상으로 자리매김했고 SHJ의 컨설팅비용은 5%까지 뛰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대단하십니다. 부사장님께서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우리의 자체 능력이 증명된 이상, 앞으로 10억 불 이하의 입찰은 현행대로 부사장님 주관으로 추진하시기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추진 중인 6건 중에서 알제리 프로젝트가 20억 불 규모입니다. JSC와의 경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거 같아 타케우치 차장이 전담하고 있습니다.”
경환도 기억을 하는 프로젝트였다. 이 알제리 프로젝트는 JSC로 낙찰되어 JSC를 90년대 말까지 버틸 수 있게 만드는 계기가 된 프로젝트였다. JSC를 품을 생각을 하는 경환도 이 프로젝트를 성공해야만 했다.
“알겠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저도 참여하겠습니다. 보고서가 준비되면 타케우치 차장의 브리핑을 받겠습니다.”
FPSO 성공 이후 97년까지 버틸 수 있는 유동자금이 확보되었기 때문에 경환은 거칠 것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동안은 한 번의 실패가 SHJ를 나락으로 떨어트릴 수 있었지만, 이익 대부분을 투자에 집중시켜 컨설팅을 뒷받침하는 데 성공을 했기 때문에 실패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사우디나 중동지역에 플랜트 공장을 건설하는 방안을 검토해 주십시오. SHJ-화성플랜트의 일반 철 구조물 제작을 해외 이전해야 되겠습니다.”
평소대로라면 반대하고 나섰겠지만, 황태수는 이내 포기하고 말았다. 경환은 자신은 사고방식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여러 번의 경험을 통해 알았고, 미래를 예측하는 부분에서는 자신은 도저히 흉내조차 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궁금한 걸 물어보지 않을 수는 없었다.
“한국의 인건비 상승 폭이 예상을 뛰어넘고 있어서, 공장이전은 저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한국과 지리적으로 가깝고 낮은 인건비와 원자재 수급을 용이한 중국이 아니라 중동지역을 선택하는 이유가 있으십니까?”
전생의 기억만 없었다면 경환도 당연히 중국이전이 최상의 답안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중국 내수와는 전혀 상관없는 플랜트의 중국이전은 손실밖에 없다는 것을 경환은 알고 있었다. 지금은 외국자본 유치에 혈안이 되어 각종 혜택을 부여하고 있지만, 그 혜택은 얼마 가지 못하고 오히려 기술을 카피하는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더욱이 높은 불량률은 SHJ 제품의 신용도 하락을 가져올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저는 중국에 큰 메리트를 느끼지 못합니다. 기술이 도용당하지 않으면 다행이겠죠. 원자재 수급이 걱정되긴 하지만, 미래를 위해서는 중동지역에서 현지제작을 하는 게 우리에게 유리하다고 봅니다.”
황태수는 경환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확인은 해야만 했다.
“컨설팅에서 벗어나 SHJ 이름으로 입찰에 나서겠다는 복안으로 현지 공장을 설립하시는 거로 이해해도 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언제까지 다른 기업 뒤치닥꺼리만 할 수는 없습니다. 현재 우리가 부족한 것은 설계와 경험입니다. JSC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우리의 부족한 부분이 메꿔지게 되면 본격적으로 나설 생각입니다. 그때를 대비하는 차원에서 중동지역에 현지 공장 설립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경환의 큰 포부에 황태수는 고개를 흔들었다. 자신은 컨설팅 업무의 성과에 고무되었던 반면 경환은 컨설팅을 뛰어넘어 직접 SHJ 이름으로 입찰에 나설 뜻을 분명히 밝히고 있었다. 황태수는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나이는 단지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황태수는 절실히 깨달으며 경환을 진정한 자신의 보스로 따르고 있었다.
“그럼 중동지역의 텃세를 감안해서 독자보다는 합작으로 추진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우리의 계획을 위해서라면 사우디의 아람코가 적격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경환은 고개를 끄떡여 황태수의 의견에 동의를 표했다. 앞으로 있을 대형 프로젝트의 많은 부분이 아람코에 의해 발주되기에 아람코와의 합작이 성공하게 된다면 SHJ로도 큰 우군을 얻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좋은 의견이십니다. 박화수 사장에게 아람코와의 합작을 추진하라고 지시를 내려 주세요. 그리고 부사장님이 뒤에서 도와준다면 큰 어려움은 없을 거 같습니다.”
황태수와의 회의를 마친 경환은 집무실을 나와 린다를 찾아 사무실을 통과하고 있었다. FPSO 입찰 이후 늘어난 업무로 인해 직원들은 경환이 지나가는 것도 의식하지 못할 만큼 정신없이 자신의 일에 매진하고 있었다. 아직은 직원들의 급여가 높지는 않지만, 경환은 높지 않은 급여를 보충하고 직원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높은 성과급을 지급하고 있었다. 또한, 고급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직원들 자녀 중 B+이상의 성적을 낸 대학생에게 등록금의 50%를 지원하는 정책을 펴고 있었다. 독립심이 강한 미국인들의 특성에 맞지 않는다는 의견이 있긴 했지만, 대학생을 둔 직원들의 사기를 높이는 의외의 성과를 보이고 있었다. 일부 젊은 직원들의 불만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억울하면 결혼해서 대학에 보낼 때까지 근무하라는 말로 잠재워 버렸다. 이외의 여러 복지정책은 휴스턴 시 정부를 넘어 주 정부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쿡 부사장님, 바쁘신가요?”
경환이 자신의 사무실로 직접 찾아오자 린다는 에릭과 나누던 얘기를 급히 멈추고 경환을 안내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에요. 에릭과 투자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있었어요.”
“잘 되었네요. 존슨 차장과 함께 저도 참여하고 싶군요. 커피 한잔 마시면서 두 분이 나누는 의견을 듣겠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에릭과 악수를 하며 경환이 자리에 앉자 린다는 급히 커피 한잔을 건네주었다. 현재 SHJ에서 제일 바쁜 사람은 경환보다는 에릭이었다. 투자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한 달에 반 이상을 외부로 출장 다니며 투자상담을 해 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족들과 같이 있을 시간이 부족한 에릭에게 경환은 미안했지만, 정작 에릭은 이 일을 즐기고 있었다. 린다는 경환을 의식하지 않고 에릭과의 얘기를 이어나갔다.
“에릭, 퀄컴의 투자는 예정대로 진행되나요?”
린다는 경환이 충동적으로 결정을 내린 퀄컴의 지분인수를 먼저 꺼내 은근히 불만을 표시했지만, 경환은 별걱정이 없는 듯 싱긋 웃어 보이는 거로 말을 대신했다. 린다는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경환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뿐이었다.
“로펌의 검토는 이미 마쳤고, 다음 주 승인이 떨어지면 바로 집행할 겁니다. 사장님 지시대로 투자금 3천만 불은 홍콩에서 이미 송금을 받았습니다.”
2년만 지나면 왜 퀄컴에 목을 매고 투자를 했는지 이해를 하겠지만, 지금은 불확실한 회사에 8천만 불이란 거금을 쏟아 붓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만약 SHJ가 경환의 개인소유가 아니었다면 이번 투자는 많은 반대에 부딪혀 시도도 해 보지 못하고 무산되었을 것이 분명했다.
“실질적인 경영 참여는 어렵겠지만, SHJ의 입김이 항시 작용할 수 있도록 대비를 해 두세요.”
“그렇지 않아도 이번 투자협상을 하면서 한국을 전담하는 부사장 자리를 확보했습니다. 혹시라도 한국이 상용화에 성공한다면 이 자리가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겁니다.”
경환은 예상외의 성과에 에릭을 향해 엄지를 들어 보였다. 에릭은 무언가 찝찝했던지 급히 말을 꺼내 들었다.
“저는 지금 이 일이 좋습니다. 부사장 자리는 저 말고 다른 사람을 보내세요.”
경환의 생각을 미리 읽어 버린 에릭의 선수에 경환은 급히 당황하긴 했지만, 부사장으로 보낼 마땅한 사람은 에릭을 제외하고는 딱히 보이는 사람이 없었다. 적당한 다른 인물이 보이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이 에릭을 설득할 생각이었다.
“그건 나중에 사장님과 협의를 하겠어요. 에릭의 의견은 충분히 반영을 시키겠습니다. 오성 전자에 대한 합작이 마무리 단계에요. 북미지역의 독점공급권을 획득한 만큼 각 지역을 세분화해서 전략을 수립해야 합니다.”
단말기의 독점권을 확보한 상태에서 시급히 각 지역의 대리점을 확보해야만 했지만, 이쪽의 일에는 전혀 경험이 없는 경환으로도 쉽게 조언을 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마땅한 방법이 나오지 않는다면 외부인사를 영입하는 방법밖에는 없어 보였다.
“미국을 5개 권역으로 분리해서 각 권역에 대리점을 선정하는 방안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기존의 오성 전자 대리점을 이용하는 방안도 있으니, 올해 안으로 저희에게 유리한 쪽으로 연구해 보겠습니다.”
경환의 예상대로 투자 분야만큼은 린다의 감각을 따라갈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의 얘기를 묵묵히 듣던 경환이 린다와 에릭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역시 두 사람의 팀워크가 빛을 내고 있네요. 한가지 건의할 것은 지난번 헤지펀드에 대해 연구를 하면서 아시아에 대한 공격이 발생했을 때, 우리가 어떤 식으로 이익을 창출할지와, 현재 집중적으로 투자하고 있는 정보통신 분야의 하드웨어와는 별도로 소프트웨어의 라이선스를 확보하는 방안도 연구해 주십시오.”
린다는 경환의 생각을 쉽게 이해하지 못했던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현재 자신은 반도체와 관련된 기업과 정보통신 분야에 집중적으로 투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확히 어떤 분야의 소프트웨어인지 말씀을 해 주세요.”
“저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도스 운영체제의 퍼스널컴퓨터가 편리함을 원하는 고객의 요청 때문에 윈도우로 운영체제가 바뀌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모바일폰도 단순 전화통화에서 나아가 문자를 보낸다거나 혹은 지금의 퍼스널컴퓨터와 모바일폰이 기능을 결합하여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이유는 인간은 만족을 못 하고 편리함을 추구하기 때문이죠. 이런 기술을 우리가 선점할 수 있게 두 분이 관심을 두고 사소한 정보라도 흘리지 말아 주십시오.”
경환의 발상은 린다의 상상을 뛰어넘고 있었다. 린다와 에릭은 급히 메모하기 시작했다. 정보를 전달한 경환은 린다의 사무실을 천천히 빠져나왔다. 이제부터는 린다와 에릭을 믿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