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다시 사는 인생 - 95
정상길은 급한 마음에 돌잔치가 시작되기도 전에 호텔에 도착해 경환과 자리를 하고 있었다. 오성 전자가 발 빠르게 SHJ와의 합작을 추진하고 있는 데 비해 대현 그룹과의 합작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자 정상길은 앞뒤 가리지 않고 경환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오성 전자가 오성 건설과 SHJ의 합작을 추진하면서 북미 시장의 독점권을 넘긴다는 소문 때문에 그룹 회장의 독촉도 나날이 심해지고 것도 한몫을 하고 있었다.
“하하하, 이 사장님. 제가 좀 일찍 도착했습니다. 커피라도 한 잔 주십시오.”
넉살 좋게 웃으며 사무실로 들어서는 정상길을 반갑게 맞아주는 경환은 이다나에게 커피를 부탁하고 그를 회의실로 인도했다.
“FPSO 건조 때문에 정신이 없으실 텐데, 이렇게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현장에 나가 있는 직원을 통해 건조작업이 수월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FPSO를 건조 중인 울산에는 철통보안 속에 대현 중공업과 KBR, SHJ의 실무팀이 밤낮없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애초 SHJ의 내부에서도 현장에 팀을 파견하는 거에 대해서 불필요한 작업이라는 의견이 있었지만, 경환은 SHJ도 기술력을 습득해야 한다는 주장을 들어 전격적으로 한 개의 팀을 상주시키고 있었다.
“하하하, 현장은 제가 일주일에 한 번씩 내려가 확인을 하고 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대현 그룹과의 컨설팅 제휴가 자꾸 지연되다 보니 제가 맘이 급해서 실례를 무릅쓰고 일찍 찾아왔습니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정상길은 누가 대현 그룹 사람이 아니랄까 봐 먼저 이유를 말하고 있었다. 오성 건설과의 컨설팅 제휴가 이미 확정된 상태에서 경환은 정상길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황 부사장님이 회사를 이끌고 있다 보니 경황이 없으셔서 지연되고 있다고 보고를 들었습니다. 다음 달에 부사장님이 한국을 방문할 예정이니 그때 대현 그룹과 계약하는 거로 진행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경환의 확답을 받은 후에야 정상길의 얼굴을 환하게 펴지고 있었다. 그룹 회장의 독촉을 매일 당하던 정상길은 오늘에서야 자신 있게 보고할 수 있다는 생각에 어깨를 활짝 펼 수 있었다.
“하하하, 한 달 정도야 못 기다리겠습니까? 그룹 회장님께서 축의금을 넉넉히 보내 주셨는데 받지를 않으시니 제가 드릴 것도 없고 난감합니다.”
“뇌물은 사절입니다. 제가 받기라도 한다면 황 부사장님에게 혼납니다. 하하하.”
경환은 축의금으로 한몫 잡을 생각은 없었다. 적지 않은 돈이겠지만, 그 정도에 코를 꿰이고 싶지는 않았다.
“대현 그룹과의 업무제휴는 계열사별로 계약하는 거로 방향을 잡고 있습니다. 그룹 전체와 계약을 하는 건 SHJ에게도 부담이 된다고 판단을 했습니다.”
대현 그룹의 분열을 알고 있는 경환은 대현과의 컨설팅 계약에 신중하게 접근하고 싶었다. 정상길은 경환의 말을 쉽게 이해하기 힘들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하하, 대현 그룹을 저희 SHJ가 먹기에 너무 커서 그렇습니다.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니니 너무 심각한 표정 하시지 마십시오. 제가 정 사장님을 많이 좋아하는 거 아시지 않습니까?”
경환은 대현 중공업과의 합작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며 정상길의 마음을 달래줄 수밖에 없었다. 두 회사의 합작을 논의하던 경환은 시간을 확인하고 나서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정상길의 눈에 띄었다.
“사장님, 제가 부탁 좀 하고 싶은 게 있는데, 결혼하고도 아내에게 변변한 선물을 해 준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반지를 하나 고르려고 하는데 같이 가 주실 수 있으십니까?”
생각지도 않은 경환의 부탁을 받은 정상길은 흔쾌히 자리에서 일어나 경환과 같이 호텔을 나섰다. 정상길의 차에 오른 경환은 압구정동에 있는 대현 백화점으로 가려는 정상길을 돌잔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어 호텔에서 가까운 백화점으로 가 달라고 부탁을 했다. 혹시라도 대현 백화점에 가게 된다면 큰 할인을 받거나 혹은 공짜로 반지를 건네 줄 것이 뻔했기 때문에 절대로 그건 막아야만 했다. 정상길은 아쉽기는 하지만, 극구 반대하는경환을 대현 백화점으로 이끌고 갈 수는 없었다.
“이 사장님, 제가 보기에는 사모님이 아직 젊으시니 심플해 보이는 이 두개 중에서 고르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느닷없는 정상길의 출현에 백화점에서는 점장이 직접나와 두 사람을 안내하고 있었다. 점장은 정상길이 대현 백화점을 놔두고 왜 이곳으로 왔는지 전혀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깊게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혹시라도 서비스에 문제가 생긴다면 점장의 자리를 지키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어서 그런지 두 사람의 곁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역시 사장님을 모시고 오길 잘한 거 같습니다. 두 개 모두 맘에 들어서 고르기가 참 어렵네요. 흠, 이걸로 하겠습니다.”
경환은 좀 더 심플해 보이는 다이아 반지를 고른 후에 정상길에 혹시라도 계산을 할까 급하게 신용카드를 꺼내 직원에게 건넸다. 오백만원이 넘는 큰 액수이긴 했지만, 결혼 후 중국과 미국으로 옮겨 다니면서도 불평을 하지 않는 수정을 위해서는 충분히 쓸 수 있는 금액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특별 손님이시기 때문에 10% 디스카운트를 해 드리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정 사장님과 같이 오니 이런 혜택도 받을 수 있네요.”
경환은 점장과 정상길에게 고마움을 표시했고, 점장은 그제서야 환한 얼굴을 보이며 자신의 서비스에 만족하는 두 사람을 바라 볼 수 있었다. 직원이 가져다 준 거래명세서에 사인을 한 경환은 신용카드를 갈무리 한 후 고개를 연신 갸우뚱거리고 있었고 점장은 혹시라도 문제가 생겼나 걱정된 표정으로 경환을 바라 보았다.
“손님,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가요? 말씀해 주시면 해결을 하겠습니다.”
“아닙니다. 제 기분이 이상해서 그런 것인지, 자꾸 이상한 소리가 들려서요. 정 사장님은 아무 소리 안 들리시나요?”
정상길은 자신은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들었나 놨지만, 경환은 여전히 깨름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흠, 점장님이 계셔서 말하기 좀 곤란하긴 하지만, 상층의 압력을 견디지 못해 측면의 골조가 미세하게 균열이 되는 소리인 거 같습니다. 기분이 좋지는 않네요. 제가 이쪽 계통에서 일을 하다 보니 이런 소리에 좀 민감합니다. 실례이긴 하지만, 안전검사를 받아 보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정상길은 경환의 말을 귀에 흘려보내지 않았다. 이런 자리에서 농담할 만한 사람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또한, 경환의 예리한 감각을 무시해선 안 된다는 것을 FPSO 입찰에서 확인한 정상길은 점장에게 조용하게 말을 건넸다.
“이 분은 미국에서 이쪽 계통에서 유명한 기업의 대표입니다. 한번 알아보시는 게 좋으실 겁니다.”
점장은 여러 가지 이상 징후에 대해 보고를 받아 알고 있었기에 경환의 지적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경영진들은 응급조치만 취할 뿐 원인분석에 관해서는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저희 백화점은 안전검사를 얼마 전에 받았습니다. 손님께서 착각하신 듯합니다. 정 사장님이 하신 말씀에 대해서는 위에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점장은 아랫입술을 씹으며 인상을 구기고 있었다. 경환은 시간을 확인하고서 급히 서둘러 삼풍백화점을 빠져나왔다. 돌잔치가 끝나면 바로 미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경환으로서도 답답한 심정이었지만, 정상길을 통해 삼풍백화점 경영진에 조언해달라는 부탁을 하는 방법밖에는 마땅한 대안을 찾지 못했다.
“정 수석님, 어쩐 일이십니까?”
“중요한 약속이 있어 참석하러 가기 전에 강 장관님을 뵙고 싶어서 왔습니다. 제가 보낸 자료는 확인하셨나요?”
강석주 경제부 장관을 찾은 박재윤은 자신이 기억하고 있던 SHJ의 보고서 내용을 간단히 발췌하여 강석주에게 보냈었다. 그러나 강석주가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자 직접 찾아올 수밖에 없었다.
“아~, 네 정 수석님이 보내신 자료는 읽어 봤습니다. 관련 국장들과 얘기는 나눠 봤는데 내용이 너무 허무맹랑하다는 결론이었습니다. 그 자료는 누가 작성을 한 겁니까?”
강석주는 박재윤이 개인적으로 보낸 자료이긴 하지만, 청와대에 있는 박재윤을 무시할 수 없다는 생각에 국장급에 내용을 검토하도록 지시를 내렸었다. 자신도 그렇지만, 국장급들 모두 실현 가능성 1%란 소리에 박재윤에 따로 보고도 하지 않았다.
“저도 강 장관님과 다를 바 없지만, 만에 하나라도 그런 일이 발생하게 된다면 어려워질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1%라도 이에 대해 연구는 해 놓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자세한 출처는 말씀드릴 수 없지만, 무시할 만한 곳은 아닙니다.”
거듭된 박재윤의 부탁에 강석주는 짜증이 밀려오고 있었다. 가뜩이나 90년대 문민정부가 들어선 후로 무역재정적자가 하루가 다르게 벌어지고 있어 강석주는 머리를 싸 매고 누울 정도였는데 이런 말도 안 되는 일까지 연구를 할 필요를 전혀 느끼지 않고 있었다.
“원화가 고평가되어 있고 이것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고평가되어 있는 원화를 연착륙시켜 원화 공격을 사전에 막자는 게 그 보고서의 주 내용인데, 지금처럼 무역적자가 커지고 있는 상태에서 원화가치를 절하시킨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수입 원자재의 가격 인상과 이에 따른 물가상승은 불 보듯 뻔합니다. 가뜩이나 어려워지는 경제로 전두환 정권을 그리워하는 목소리가 심심치 않게 들리는 마당에 정권퇴진 운동이라도 벌어지면 누가 책임을 지겠습니까?”
강석주의 말에 박재윤은 마땅한 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의 생각 또한 강석주와 별 차이가 없었지만, 마음 한구석의 찝찝함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1%의 가능성이라고 하지만, 그 1%의 가능성이 현실화 된다면 한국 경제는 아사 직전까지 몰리게 되기 때문이었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 고평가된 원화가치를 시장의 영향을 최소화하는 방법으로 서서히 단계적으로 절하시키는 것도 반드시 검토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단기 외채를 장기로 돌리는 것도 협상해야 되고요.”
“알겠습니다. 뭐, 검토는 해 보겠습니다. 제가 회의가 잡혀있어서 길게 대화를 나누지 못하는 점 죄송합니다.”
말을 마친 강석주가 급히 서류를 챙기는 모습을 보자 박재윤은 한숨을 내쉬며 장관실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대통령에게 보고해 봤자 경제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박재윤은 자신이 괜한 걱정을 하는 것은 아닌지 자괴감에 빠져들고 있었다.
돌잔치 시작을 십분 남겨두고 겨우 식장에 도착한 경환을 수정은 매서운 눈으로 째려보고 있었다. 수정의 시선이 부담된 경환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달라진 SHJ의 위상을 대변하는 듯 한국의 대표적 대기업들이 모두 참석을 하고 있었다. 경환은 수정과 함께 자리를 돌면서 감사함을 전했고 오성 전자를 시작으로 오성 건설, 대현 중공업, 제일 그룹, 대후, 아동 건설 등 SHJ와 연관된 혹은 SHJ와 합작을 추진하는 기업 대부분이 참석하는 통에 전경련 회의를 하는 것 같은 착각을 들 정도였다. 손님들과 인사를 나누던 경환은 박재윤이 식장에 들어오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바쁘신데 여긴 어떻게 오셨습니까?”
“허허, 축하합니다. 한국 기업들과의 합작에 힘써주시고 있는데 경제를 담당하는 제가 참석하는 것은 당연하지요.”
경환의 박재윤과 함께 들어오는 커다란 화환을 보고는 매우 놀랄 수밖에 없었다. 대통령 이름으로 쓰여있는 화환은 식장 맨 앞쪽으로 옮겨졌고 다른 기업에서 보내온 화환들을 모두 제치고 가장 눈에 띄는 곳에 놓이게 되었다. 박재윤의 등장에 각 기업에서 나온 사람들은 눈도장이라도 찍어야 한다는 듯이 서로 몰려와 박재윤에게 인사를 청하자 정우의 돌잔치는 주객이 전도되어 가고 있었다.
“이 사장님, 돌잔치가 시작되기 전에 제가 부탁을 좀 할 일이 있습니다. 7월에 대통령께서 방미하십니다. 시간이 되신다면 경제인들과의 만찬 자리에 이 사장님이 참석해 주셨으면 합니다.”
경제인들과의 인사를 마친 박재윤은 경환이 생각지도 못한 뜻밖의 제의를 했지만, 경환은 답을 줄 수 없었다. 김수철과의 좋지 못한 인연을 알고 있는 대통령과의 만남이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긍정적인 답변은 드릴 수 없을 거 같습니다. 미국에 돌아가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큰 기대는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수정의 눈치에 경환은 단상에 마련된 탁자에 앉아 정우를 안아 들었고, 돌잔치는 많은 사람의 참석 속에 순탄하게 진행되었고, 돌잔치의 하이라이트인 돌잡이에서 정우는 뜬금없이 붓을 잡아 들어 주위를 놀라게 했다.
“정우가 엄마를 닮아 그림에 소질을 보이겠는데?”
왜 돌잡이에 붓이 나와 있는지 이해를 할 수 없던 경환은 슬쩍 수정을 바라봤지만, 수정은 자신은 모른다는 듯 능청스런 연기를 보이고 있었다. 경환은 정우가 그림을 그리겠다 하더라도 반대할 생각은 없었다. 사업에 소질이 없다면 SHJ를 물려 줄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