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다시 사는 인생 - 94
아침 식사를 마친 경환은 급히 린다와 최석현을 불러 업무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한국정부와의 일이 마무리된 상태에서 가족들과 보낼 시간이 필요했던 경환은 회의를 서두르고 있었다.
“제이콥스 사장이 도착한 거 같던데, 앞으로 일정은 어떻게 잡고 있나요?”
“오늘 오성 전자와의 미팅을 시작으로, 내일 금성 전자와 만날 예정입니다. 이와는 별도로 ETRI(한국전자통신연구원)와 기술회의도 잡혀있습니다.”
며칠간 모든 일정을 취소한 상태에서 얼마 남지 않은 귀국 일자를 맞추기 위해서는 서둘러 일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일정이 촉박하다는 이유로 오성 전자나 ETRI에 무턱대고 퍼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이번 회의에 경환이 참석을 하지 않고 린다에게 전적으로 맡긴 이유도 같은 한국인이라는 감정에 휘둘려 SHJ의 이익을 포기하는 것을 방지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기본합의가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철저히 SHJ의 이익이 우선시 되어야 합니다. 쿡 부사장님이 잘하시기라 믿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아쉬운 건 우리가 아니니까요. 오성 전자에서 서두르는 것을 보면 기술개발은 끝나지 않았나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제이콥스 사장이 잠시 면담을 요청하는데 한번 만나 보시겠습니까?”
SHJ의 요청에 흔쾌히 한국을 찾아온 어윈의 요청을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이유가 궁금하기도 했던 경환은 서둘러야만 했다.
“시간이 많이 없으니, 지금 제이콥스 사장과 만나겠습니다.”
경환의 동의에 린다가 자리를 떠나자 최석현이 조용히 다가왔다. 며칠 동안 어려운 상황에서도 항상 자신의 곁을 지켜주었던 최석현을 경환은 고마웠다.
“사장님, 정우 돌잔치에 참석하겠다는 곳이 많습니다. 장소가 비좁을 수도 있겠는데요.”
경환은 묵고 있던 호텔의 중식당에서 가족들과 같이 온 출장자들과 함께 조촐히 치를 생각이었다. 정우의 돌잔치를 치르기 위해 입국을 했지만, 소문을 내지는 않았었다.
“번거롭게 만들고 싶진 않았는데, 참석하겠다는 곳이 어디인가요?”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오성, 대현, 제일, 대후, 아동그룹에서 참석하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박재윤 경제수석도 연락을 해 왔습니다.”
최석현의 말에 경환은 인상을 찡그렸다. 자칫 정우의 돌잔치가 기업들과의 업무회의 장소가 될 것이 염려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한 두 곳만 요청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기에 한참을 고민한 경환은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일 결심을 했다.
“할 수 없네요. 최소인원만 오도록 해 주시고, 절대 축의금은 사절하겠다고 통보를 해 주세요. 금반지 하나도 받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전달해 주세요. 호텔과 상의하셔서 자리를 좀 만들어 주시고요.”
최석현과 정우의 돌잔치에 대해 얘기를 끝낼 무렵, 린다와 어윈이 사무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경환은 자리에서 일어나 급히 어윈을 맞이했다.
“제이콥스 사장님. SHJ의 이경환입니다.”
“어윈 제이콥스입니다. 퀄컴에 투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SHJ와 좋은 협력관계가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미국인답지 않게 크지 않은 키에 두꺼운 안경을 쓰고 있는 어윈은 사업가라기 보다 엔지니어에 가까운 외모를 하고 있었다. SHJ의 도약에 퀄컴이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은 경환 밖에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SHJ의 요청을 받아들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SHJ은 퀄컴의 진정한 파트너가 될 것입니다. 저와 면담을 요청하셨다고 하셨는데 무슨 일이 신가요?”
어윈은 자신의 예상과는 달리 SHJ의 대표가 젊다는 사실에 놀라면서도 거만하지 않고 자신을 낮추는 경환의 모습에 안도하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는 한국의 CDMA 상용화를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SHJ도 퀄컴에 투자했다고 믿습니다.”
경환은 어윈이 절대 사업가 체질은 아니라는 것을 느끼며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97년 이후 세계의 이동통신사업을 이끌며 퀄컴의 회장에 오르는 어윈이지만, 95년 당시엔 회사의 운영자금을 걱정해야 되는 중소기업 대표였을 뿐이었다. 말로는 한국의 CDMA 상용화를 확신한다고 하지만, 속내는 자신도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경환은 그의 표정에서 쉽게 읽을 수 있었다.
“글쎄요. 제가 한국인이라는 사실로 퀄컴에 투자를 결정하긴 했지만, 투자를 담당하고 있는 쿡 부사장도 아직까지 반대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제 모국인 한국을 위해 투자를 결심한 거뿐입니다. 5천만 불이 휴지가 되지 않도록 힘을 써 주십시오.”
어윈의 표정이 굳어졌다. 5천만 불이란 큰돈을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단지 자신의 모국을 위해 투자했을 뿐이라는 경환의 말이 어윈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CDMA 기술은 미래의 이동통신 시장을 장악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더 많은 자금이 투입되어야 하는데…….”
SHJ의 투자로 자금의 유동성은 확보했지만, 기술개발을 위해서는 더 많은 자금이 필요했기에 SHJ에 자금지원 요청을 하려고 했지만, 어윈은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주위의 반대가 계속된다면 경환도 쉽게 재투자를 결정하지 못할 거라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경환은 묵묵히 어윈의 말을 듣고 있었지만, 내색하지 않을 뿐 어윈의 말은 경환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었다.
“기술의 향상을 위해서는 자금이 많이 필요하다는 것은 압니다. 쿡 부사장님, SHJ의 자금상황은 어떻습니까?”
경환의 반짝거리는 눈빛을 확인한 린다는 입꼬리를 슬쩍 말아 올리고는 급히 심각한 표정으로 바꿔버렸다.
“사장님, 현재 실리콘밸리에 집중적으로 투자하고 있는 상태에서 자금을 돌리는 것은 제 개인적으로 반대합니다. 퀄컴의 투자는 5천만 불이 한계임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자신의 뜻에 맞장구를 쳐 주는 린다를 바라보고는 경환은 표정을 바꾸며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허~, 제가 SHJ의 대표이긴 하지만, 투자를 담당하는 쿡 부사장님의 의견을 마냥 반대할 수는 없는 데 고민이네요. 사실 5천만 불을 투자하면서 한국의 로열티를 40%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고 퀄컴의 지분을 6%밖에 확보를 못 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이번엔 어렵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제이콥스 사장님.”
어윈은 불확실한 한국의 상용화에 대한 로열티 40%를 넘겨주는 조건으로 5천만 불의 투자를 받아냈을 때만 해도 공돈을 받는 기분이었다. 경환의 재투자를 쉽게 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던 어윈의 표정을 급히 어두워졌다.
“흠~, 어느 정도의 자금이 필요하십니까? 사장님께서 제가 경영진의 반대를 물리칠 수 있는 명분을 주실 수 있다면 좋겠는데…….”
경환은 오른손을 들어 이마를 눌러가며 심각한 표정으로 어윈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때 린다가 급히 경환을 제지하고 나섰다.
“사장님! 한국의 상용화가 실패하거나 성공하더라도 폭발력이 크지 않다면 SHJ의 손해는 너무 큽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해 주십시오.”
린다는 퀄컴에 목을 매달고 있는 경환이 이해되지는 않지만, SHJ의 대표인 경환이 결정한 사항에 대해 반대할 생각은 없었다. 그동안의 모든 결과가 자신의 예측을 벗어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였다. 어윈은 린다가 반대하고 있지만, 경환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경환을 움직이기 위해 머리를 급히 굴리고 있었다. 경환의 흥미를 끌어낼 정도의 조건이 무엇인지 고민을 하던 어윈은 굳게 닫혀있던 입을 열었다.
“지분 10%를 3천만 불에 넘기겠습니다.”
어윈은 말을 마치고 경환의 눈치를 살폈지만, 경환의 표정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어윈이 불안한 듯 눈동자를 굴리고 있을 때 경환이 고민을 마친 듯 담배를 입에 물었다.
“제이콥스 사장님, 너무 어려운 숙제를 저에게 주시네요. 흠, 14%라면 제가 경영진을 설득해 보겠습니다.
린다의 경악하는 모습을 옆에서 바라보던 어윈은 혹시라도 경환이 생각을 바꾸지 못하도록 급히 경환의 말을 받았다.
“좋습니다. 14%를 인정하겠습니다. 좋은 결정을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윈은 오른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고, 경환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환하게 웃고 있는 어윈의 손을 잡았다. 홍콩의 자금의 끌어온다면 본사의 자금에 손을 대지 않고도 충분히 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에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99년을 시작으로 고공행진을 하는 퀄컴의 지분 20%를 확보 한다는 생각에 경환은 쾌재를 부르고 싶었지만, 굳은 표정을 짓고 있는 린다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쿡 부사장님이 투자에 대한 지분인수에 대해 제이콥스 사장님과 협의를 해 주십시오. 물론 쿡 부사장님의 걱정을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퀄컴에 이미 투자를 한 상태에서 파트너의 어려움을 외면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제 의견을 따라 주셨으면 합니다.”
린다의 잔소리를 들을 생각에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지만, 경환은 급히 어윈과의 만남을 린다에게 넘기고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한국에 와서도 제대로 가족들과 식사도 하지 못한 경환은 수정의 잔소리를 들어가며 본가에 도착했다. 오전 회의를 빨리 마치려고 했지만, 시간은 이미 점심때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버님, 어머님. 저희 왔어요. 정우는 보채지 않았나요?”
집에 들어서자 수정은 급히 정우를 확인했고, 정우는 뭐가 좋은지 연신 웃어대며 거실 바닥을 기어 다니고 있었다. 경환은 일 때문에 제대로 찾아오지 못한 것이 미안했던지 머리를 긁적이며 집에 들어섰고 역시나 경환의 어머니의 잔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너는 어떻게 된 애가 첫날 얼굴만 보이고는 지금에서야 찾아오니? 아무리 일이 바쁘다고 하더라도 그렇지. 처가에도 아직 못 가 봤다며?”
“죄송해요. 한국에 오자마자 복잡한 일이 생겨서 어쩔 수 없었어요. 처가에는 저녁에 찾을 생각이에요.”
“사업하는 애가 당연히 바빠야지, 당신은 잔소리 좀 그만해. 그래 일은 잘 해결된 거냐?”
“네. 잘 해결되었어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중간에 나서 준 아버지 덕분에 경환은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사실 김수철과의 일이 생기지 않았다면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며 지낼 생각이었다. 숙소까지 직원들과의 빠른 업무처리를 위해 호텔로 정했기 때문에 어머니의 잔소리는 어쩌면 당연할 수도 있었다. 경환은 급히 정우를 안으려 했지만, 정우는 수정의 품에서 벗어나기가 싫었던지 경환의 손을 외면해 버렸다.
“정우가 자기 얼굴 잊었나 보네요. 어서 씻고 나오세요. 어머님이 점심 준비를 다 해 놓았어요.”
뻘쭘해진 경환은 싫다는 정우를 억지로 안아 들고 식탁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한국을 찾은 아들 내외를 위해 경환의 어머니는 푸짐하게 점심을 차렸고 경환은 그리웠던 한국 음식을 정신없이 흡입했다. 식사를 끝내고 경환은 준비했던 생각을 부모님에게 꺼내 놓았다.
“아버지, 저도 이 연립이 맘에 들기는 하지만, 아파트로 옮기시는 게 좋으실 거 같아요.”
“그렇게 하세요. 어머님도 연세가 더 드시면 아파트에서 생활하시는 게 좋으실 거에요. 정우 아빠가 항상 맘이 불편했나 봐요. 이참에 옮기세요.”
경환과 수정의 요청에도 경환의 아버지는 쉽게 답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 경환이 사업을 한다고는 하지만, 자식의 도움을 받아 집을 넓히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퇴직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이 자신을 고민하게 만들고 있었다.
“여보, 자식 덕 좀 봅시다. 좀 있으면 승연이도 제대를 하는데…….”
“아버님, 어머님 말씀대로 도련님도 곧 제대를 하는데 좀 큰 곳으로 옮기세요. 이번엔 저희 뜻을 받아주세요.”
수정까지 경환의 어머님을 거들고 나서자, 경환 아버지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떡였다.
“당신 뜻대로 하구려. 그리고 처가도 경환이 네가 신경을 써야 된다.”
경환 아버지의 허락이 떨어지자 경환도 크게 안도를 할 수 있었다. 대쪽 같은 아버지 성품이 은근히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었다. 경환은 수정에게 어머니를 모시고 부동산을 찾아가라고 했고, 경환의 어머니는 환한 웃음을 얼굴에서 떨치지 않았다.
“어머님, 내일 저와 함께 부동산에 가 봐요. 집보러 다니는 거 재미있을 거 같아요.”
“호호호, 그래, 그러자꾸나. 너희들 덕분에 편하게 살겠다. 고맙다.”
두 사람은 뭐가 좋은지 내일 집 보러 다닐 얘기를 나누고 있었지만, 경환의 아버지는 표정을 풀지 않고 있었다. 경환은 그런 아버지의 고민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버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퇴직하시면 제 회사의 고문으로 출근하시도록 준비를 해 놨습니다. 그리고 건강에도 신경 쓰시고요.”
“알겠다. 건강은 너도 신경을 쓰도록 해라.
전생과는 달라지겠지만, 그래도 경환은 일찍 돌아가시는 아버지를 항상 걱정하고 있었다. 자신의 뜻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을 확인한 경환은 본가에서 가족들과의 재회를 마치고 경환과 수정은 보채는 정우를 간신히 달래 처가로 발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