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93화 (70/264)

#93

다시 사는 인생 - 93

린다는 미 대사관의 연락을 받은 후에야 환한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공식적인 사과는 아니지만, 청와대 외교수석의 비공식적인 사과와 함께 재발방지 및 관련자 처벌을 약속받았다는 내용이었다. 린다의 보고를 받은 경환은 그나마 이 정도에서 문제가 봉합되었다는 것에 안도할 수 있었다.

“오성 전자에서 몸이 달아 있어요. 이 정도 했으면 일정을 진행해도 무난하다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도 쿡 부사장님과 같습니다. 청와대 경제 수석의 요청도 있고 하니 우선 제가 경제수석을 만난 후에 취소된 일정을 진행하시죠.”

박재윤 경제수석은 전화로 유감을 표명하며 재발방지를 약속한 것으로 경환은 충분하다고 생각했지만, 박재윤은 경환에게 면담을 요청하고 나섰다. 한번은 만나 볼 생각이었던 경환은 박재윤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박재윤과의 만남을 생각하면서 깊은 사색에 빠져있던 경환은 린다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린다를 바라봤다.

“퀄컴의 제이콥스 사장이 도착하면 같이 회의에 참석할 거에요. 기술적인 면에서는 저희보다는 제이콥스 사장의 말이 무게감이 있을 거 같다고 판단이 들어서요. 이참에 오성 전자가 장난을 못 치게 할 생각도 있고요.”

“오성 전자가 애를 좀 먹겠네요. 받아낼 건 철저히 받아내세요.”

오성 전자를 압박하기 위해 퀄컴의 사장까지 불러들인 린다의 철두철미함에 경환은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향후 2년간 순차적 투자가 될 줄 알았던 3천5백만 불을 SHJ는 지난달 전액 집행했고, 자금난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던 퀄컴은 SHJ의 요청을 거절할 처지가 아니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오성 전자와 금성 전자 이 두 업체를 가지고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 볼게요.”

말을 마친 린다는 매혹적인 미소를 흘렸고, 경환은 린다의 손바닥에서 고생할 두 기업을 생각하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박 사장님은 그동안 마음고생이 많으셨나 봅니다. 그새 얼굴이 반쪽이 되신 걸 보면.”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맛을 봤던 박화수는 경환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경환의 목소리가 재차 들리자 그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박화수는 급히 경환을 주시했다.

“네? 아, 아닙니다.”

“박 사장님은 해외에 제2공장을 투자하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검토해 주십시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미리 준비는 해 놓고 있어야 할 거 같습니다.”

겨우 한숨을 돌렸다 생각했던 박화수는 경환의 해외투자를 거론하자 또다시 긴장감에 사로잡혔다. 이번 본사 직원들의 방한은 박화수를 부쩍 늙게 만들었다.

“정부와 타협을 한 상태인데 해외이전을 준비하라는 말씀이신가요?

“한국은 고부가가치 특수플랜트만 제작하고 일반 철 구조물 해외 공장을 설립해서 이전을 해야 할 거라고 봅니다. 염려하신 게 뭔지는 알겠지만, 일반 철 구조물을 떼어낸다 해도 마산공장엔 전혀 문제가 없을 겁니다.”

그제야 경환의 말을 이해한 박화수는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인건비가 급속히 상승하는 상황에서 일반 철 구조물을 계속 안고 있을 수도 없다는 것은 박화수도 알고 있었다. 아직 해외이전은 시기상조이긴 하지만, 미리 검토는 해 놓을 필요가 있다는 것에는 박화수도 이의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걱정을 했나 봅니다. 우선 일반 철 구조물 해외이전에 대해 검토를 해 놓겠습니다.”

일반 철 구조물의 해외이전이 시작됨과 동시에 SHJ는 컨설팅이라는 단순한 업무에서 벗어나, 해외플랜트 입찰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계획을 구상하고 있었다.

“사장님, 도착했습니다.”

신경 쓸 일이 많아서인지 경환은 최석현이 부르는 소리에 감았던 눈을 겨우 뜰 수 있었다. 최석현이 운전하던 승용차는 삼청동에 있는 한정식집에 도착해 있었고, 검은 슈트를 입은 사내가 급히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SHJ에서 오셨습니까?”

“네, 박재윤 수석님과 약속이 되어 있습니다.”

최석현은 경호원으로 보이는 사내에도 주눅이 들지 않는 모습으로 대답했고, 경환은 그 사내의 안내에 따라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SHJ 대표 이경환입니다. 시간에 맞춰 도착했는데 먼저 와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반갑습니다. 제가 연락을 드린 박재윤 수석입니다. 그리고 이 분은 이학승 안기부장이십니다.”

“본의 아니게 폐를 끼친 점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개인이 독단적으로 저지른 일이고, 그 직원은 현재 내부 규정에 따라 책임을 지게 될 겁니다.”

경제수석과의 만남에 경호원이 보이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한 경환은 이학승이 안기부장이란 사실을 확인하고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안기부장까지 동석하게 될 줄 몰랐던 경환은 내심 당혹스러웠지만, 평정심을 유지하며 태연하게 두 사람과 가벼운 악수를 나누었다.

“이번 일은 안기부장께서도 말했듯이 한국정부와는 관련이 없는 일입니다. 그러다 보니 저희도 매우 당혹스럽기까지 합니다. 아무쪼록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박재윤은 나이는 어리지만, 경환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이학승의 뒤를 이어 박재윤까지 사과를 하자 경환도 이쯤 해서 한국정부와의 껄끄러운 관계를 정리하는 게 좋겠다는 판단이 들어서인지 두 사람에게 고개를 숙였다.

“저도 과민반응을 보인 점에 대해서는 사과를 드립니다. 갑자기 안기부가 제 주위를 감시하고 있다는 생각에 경황없이 이곳저곳 문의를 한다는 게 이렇게까지 일이 확대될 줄은 몰랐습니다.”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감정을 능숙하게 절제하고 있는 모습에 박재윤과 이학승은 경환이 쉽게 이 자리에 올라서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었다.

“다시는 이 사장님이나 SHJ에 불미스러운 일이 없도록 약속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미 대사관을 비롯해 이번 일에 저와 관계된 곳에는 따로 연락을 취해 오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설명하겠습니다.”

이학승의 말을 경환이 받자 긴장감이 흐르던 자리는 분위기는 누그러지고 있었다. 박재윤은 굳어 있던 얼굴을 풀며 넥타이를 풀었다.

“하하하, 이 사장님이 이렇게 말씀해 주니, 한시름 놨습니다. 가볍게 식사부터 하시죠.”

방문이 조용히 열리고 준비했던 요리들로 탁자가 가득 채워졌고, 세 사람은 가벼운 얘기를 나누며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박재윤은 국제 경제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경환을 호기심 있게 바라보았고, 경환 또한 경제학자 출신인 박재윤에게 미래에 있을 국제경제의 변화를 살짝 가미하며 그의 관심을 끌고 있었다. 이동통신 사업과 IT 부분에 대해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며 식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어 가고 있을 때 경환은 박재윤을 향해 하나의 질문을 던졌다.

“박 수석님, 제가 국제경제엔 문외한이지만, 우리 회사 투자 관련 연구원들이 재미있는 보고서를 만들었습니다. 헤지펀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뜬금없이 헤지펀드에 대해 질문을 하는 경환을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쳐다봤지만, 박재윤은 별생각 없이 경환의 질문에 대답해 갔다.

“국제증권이나 외환시장을 공격적으로 투자해 높은 단기차액을 노리는 자금을 운용하는 집단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우리 연구원들의 보고서 내용으로는 현재의 한국이 헤지펀드의 좋은 먹잇감이 될 수도 있다고 하더군요.”

경환의 뜻밖의 말에 박재윤은 고개를 저었다. 무역재정적자로 돌아섰다고는 하지만, 수출경쟁력이 높아졌고 국가신용도가 높은 상태에서 헤지펀드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박재윤이 놓치고 있는 것이 있었다. 이번 정권은 OECD 가입에만 신경을 쓴 나머지 국제경쟁력을 확보하기도 전에 93년 12월에 금융을 전격적으로 개방해 버리는 악수를 범해 버렸다. IMF 사태는 그때부터 헤지펀드의 철저한 각본에 의해 진행이시작되었다고 경환은 생각하고 있었다.

“그건 너무 확대하여 해석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국은 국가신용도도 높고 외환보유액도 충분하므로 헤지펀드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고 봅니다.”

경환은 기가 막혔다. 300억 불이 조금 넘는 수준의 보유액으로 헤지펀드를 막겠다는 박재윤의 말에 경환은 조용히 서류뭉치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우리 SHJ 투자 연구원들이 만든 보고서입니다. 여기서 읽어만 주십시오. SHJ도 투자로 이익을 창출하는 기업이라 외부 유출이 어려운 점 이해 바랍니다. 우리 연구원들이 헤지펀드를 분석하며 작성한 시나리오입니다. 저는 충분히 실현 가능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박재윤은 별 관심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사과하러 나온 자리다 보니 경환의 얼굴을 살려준다는 생각으로 서류를 들춰 보기 시작했다. 서류를 한 장씩 넘길 때마다 박재윤의 인상은 굳어져만 갔고 서류의 마지막 장을 넘길 때까지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있었다. 박재윤이 마지막 장을 넘기자 경환은 보고서를 회수했지만, 박재윤은 뭐에 홀린 사람처럼 눈동자의 초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박 수석님, 왜 그러십니까?”

박재윤의 표정이 심각하다는 걸 느낀 이학승은 서류의 내용이 궁금했지만, 차마 물어볼 수는 없었다. 박재윤은 한숨을 크게 내쉰 후 경환을 바라봤다.

“보고서를 보셔서 아시겠지만, 우리 연구원들의 의견은 헤지펀드는 대만과 한국, 일본을 공격대상으로 보고 있고, 현실적으로 일본의 공격이 어렵기 때문에 대만을 첫 타켓으로 해서 최종 한국을 노린다는 내용입니다.”

97년에 발생한 동남아 금융위기는 대만을 그 시작으로 했지만, 대만은 발 빠르게 고정환율을 사전에 풀어버림으로써 심각한 타격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다. 대만에서 큰 재미를 보지 못한 헤지펀드는 홍콩을 노렸고 홍콩에서 재미를 보자 태국의 바트화를 집중적으로 공략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헤지펀드의 최종목표는 경제력에 비해 상대적으로 금융이 취약한 한국이었다는 것을 경환은 기억하고 있었다.

“현재 퀀덤, 타이거, 베이스펀드가 조용히 작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게 사실입니까?”

“저희는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저희 연구원들의 판단은 원화가치가 고평가 되어 있고, 외환보유고가 3백억 불로 많지 않다는 것에 주목을 했습니다.”

“흠…….”

박재윤은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보고서의 내용을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정확히 한국의 문제점을 집어내고 있었다. 퀀덤과 타이거펀드는 단기차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서슴지 않는다는 것을 자신도 들어 알고 있었다. 외환보유고가 낮은게 문제가 아니라 천백억 불 규모의 외채중에서 반정도가 일년 짜리 단기외채하는 것이 문제였다. 혹시라도 헤지펀드와 손을 잡고 기간연장을 해 주지 않는다면 문제가 심각해 질 수도 있었다.

“이건 어디까지 가상 시나리오입니다. 그러나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다는 게 저희 SHJ의 판단입니다.”

“만약 헤지펀드가 한국공략에 성공한다면 어떤 결과를 가져 오리라 보십니까?”

헤지펀드의 공격이 지나간 후의 한국상황에 대한 부분은 경환이 의도적으로 빼 버렸기 때문에 박재윤은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제가 경제학자도 아니고 너무 어려운 질문을 하시네요. 그러나 외환보유고가 바닥을 치게 된다면, 나라를 완전히 말아먹는 디폴트(채무불이행)나 모라토리움(대외채무지불유예) 같은 양아치 짓은 곤란하겠죠. 결국은 세계은행의 원조를 기대하거나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는 거 말고는 따로 방법이 없을 겁니다. 그러나 그건 헤지펀드가 오히려 노리는 점이라는 걸 아셨으면 좋겠습니다.”

이학승은 경환과 박재윤의 대화를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한국의 경제위기가 올 수도 있다는 말에 바짝 긴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 국민들의 눈밖에 난 안기부였지만, 국가를 지킨다는 사명감은 아직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걸 노린다는 게 무슨 말인가요?”

박재윤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말도 안되는 소리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너무나도 현실적으로 아구가 맞게 돌아가는 경환의 말에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해 지고 있었다. 박재윤은 고개를 저으며 경환의 말을 부정하고 싶었다.

“구제금융으로 한국에 대한 장악력을 높인다면, 제일 먼제 주가가 바닥을 치고 자금이 막힌 기업들은 도산을 하겠죠. 헤지펀드가 마지막 한탕을 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구조조정과 함께 외국자본의 기업지분율을 높여 싼값에 우량 기업의 주식을 대량 확보를 하게 될 겁니다. 그 이후는 박 수석님도 예측이 가능하시겠죠?”

경환은 말을 마친 후 놓여진 술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박재윤은 눈을 한번 감았다 떴다. 99%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1%가 마음속에 걸리고 있었다. 이미 SHJ의 보고서 내용은 머리속에 남아 있었고 그 내용에 대해 차근히 검토를 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아무쪼록 이번 한국 방문이 SHJ나 저희에게 좋은 기회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두 사람과 헤어져 호텔로 돌아가는 경환의 마음은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나라를 망조로 빠트린 IMF사태를 막는 것은 더 이상 경환의 몫은 아니었다. 경환은 97년을 한국정부가 잘 넘기기를 간절히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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