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다시 사는 인생 - 92
청와대 문기석 비서실장 집무실로 정학태 외교수석이 급하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7월에 있을 대통령의 방미를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던 문기석은 정학태의 방문에 급히 하던 일을 멈추었다.
“정 수석, 방미 문제로 바쁘실 텐데, 무슨 일이십니까?”
정학태의 좋지 못한 표정을 의식해서인지 문기석은 급히 정학태와 함께 자리를 잡았다. 미국과 방미 스케줄을 조정하고 있던 정학태의 갑작스런 방문은 혹시라도 미국과의 일정협의에 문제라도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문기석은 긴장하며 정학태를 바라 봤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안기부에서 무슨 장난을 치고 있는 거 같은데, 혹시 실장님은 알고 계십니까?”
“갑자기 무슨 말입니까? 안기부라뇨? 자세히 말해 보세요.”
외교수석의 입에서 안기부란 소리가 나오자 문기석은 의아한 생각이 들어 정학태를 재촉했다. 안기부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오늘 미국, 영국대사관에서 저에게 항의 전화를 해 왔습니다. SHJ란 미국기업이 한국과의 업무협의를 위해 방한 중인데, 안기부에서 사찰을 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SHJ의 사장을 협박한 모양입니다. 공식적인 답변을 주지 않는다면 대통령의 방미에 큰 걸릴 돌이 될 거라고 합니다. 이게 무슨 개망신입니까?”
문기석은 뒷골이 뻐근해지자 급히 손으로 뒷목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자신도 보고를 받지 못한 일이기 때문에 급히 안기부장에 전화를 걸 수밖에 없었다. 문민정부가 시작되고 민간인 사찰에 대해 조심스럽게 접근을 하고 있었다. 이런 때 한국기업도 아니고 미국기업의 대표를 사찰했다는 것은 심각한 외교문제를 대동시킬 수 있는 상황이었고, 특히 야당의 좋은 표적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문기석의 인상은 굳어져 있었다.
“이학승 부장님, 오랜만입니다. 안기부에서 SHJ라는 미국기업을 사찰하고 있다는 소리가 들리던데, 제가 모르는 것이 있나요?”
전화기로는 당황한 이학승이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것이 그대로 전달되고 있었다.
‘SHJ에서 이동통신 사업과 관련해 방한 중인 것은 알고 있지만, 절대 사찰을 지시한 적은 없습니다.’
“지금 미국과 영국대사관에서 정식으로 항의를 했습니다. 대통령의 방미가 얼마 남지 않은 상태에서 이런 문제가 불거지면 상당히 곤란합니다. 조사하셔서 오전 중으로 보고를 해 주세요.”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은 문기석은 이권사업에 관여를 하는 곳이 머리에 떠올랐지만, 입 밖으로 내 뱉지는 않았다. 이때 집무실 문으로 노크소리가 들리더니 박재윤 경제수석이 급히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박 수석은 또 무슨 일이십니까?”
“SHJ란 미국기업 때문에 찾아 왔습니다. 오성그룹과 제일그룹 그리고 대현그룹에서 정부에 불만을 보이고 있습니다. 정부에서 미국기업인 SHJ의 대표를 협박하고 있어, SHJ에서 세 그룹과의 업무합작을 모두 철회하겠다는 통보를 했다고 합니다. 저에게 사실 확인을 해 달라고 아우성입니다. 또한 SHJ에서 현재 투자중인 SHJ-화성플랜트의 해외이전과 폐업을 검토 중이라고 합니다.”
박재윤의 보고에 문기석은 인상을 찡그렸다. 정권실세의 아들이고 대선에 큰 역할을 해 왔기에 어느 정도 알면서도 눈을 감아 주고 있었지만, 이번은 정도가 심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한국기업도 아닌 미국기업을 건드린 것은 자신도 납득을 할 수 없었다.
“도대체 SHJ란 곳이 어떤 회사입니까?”
미국과 영국대사관을 움직이고 한국의 대기업과 합작을 추진하고 있다면 만만히 볼 기업이 아니라는 생각에 급히 경제수석인 박재윤을 찾았다.
“투자와 컨설팅을 하는 회사입니다. 중국의 유연탄을 한국에 공급하고 지난번 대현중공업이 나이지리아 FPSO 입찰을 성공시킨 기업입니다. 또한 한국의 이동통신 사업에 지분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요. 미국에 본사를 두고 홍콩과 한국에 법인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특이한 것은 기업의 대표가 한국국적이라는 겁니다.”
문기석은 대충 그림이 그려졌다. 미국과 홍콩에 법인을 두고 있기 때문에 미국과 영국의 항의는 어쩌면 당연하다고 볼 수 있었다. SHJ의 대표가 한국인이란 사실로 인해 지금의 상황이 만들어졌다고 어렴풋이 생각하고 있을 때, 김소명 민정수석이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고, 문기석은 또 다른 불안감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큰일입니다. 당 원내총무가 노발대발 하더군요. 이번 대통령 방미에 맞춰 의원모임을 추진하고 있던 미국 측 상원의원이 연락을 해서는, 미국기업인 SHJ에 대한 사찰과 협박을 멈추지 않는다면 모든 일정을 취소하겠다고 했답니다.”
문기석은 뒤로 넘어가고 있었다. 이 정도까지 일이 확대되었다면 자신도 더 이상 방패막이를 해줄 수는 없었다.
“이 모든 중심에 SHJ란 기업이 있고, 그 기업의 한국인 사장을 건드린 게 무교동 사무실이겠죠?”
문기석의 말을 들은 세 수석들은 대답은 하지 않고 있지만, 고개를 끄떡이며 동의를 표하고 있었다. 빠른 수습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문기석은 결정을 해야만 했다.
“대통령께는 제가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민정수석께서 무교동을 방문을 해 주셔야겠습니다. 그리고 경제수석은 안기부장과 함께 SHJ대표를 방문해 정중히 사과를 해 주세요. 더 이상 대통령의 방미에 문제가 생기면 안됩니다.”
수석들이 빠져나간 후 문기석은 줄 담배를 피워댔다. 금융실명제를 통해 투명한 정부를 만들겠다는 의지가 이 한번으로 무너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은 무교동의 안하무인 식의 이권개입을 봐 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내지가 쉽지 않을 걸 알고 있었다. 그래도 자신의 임무는 대통령을 보좌하는 것이었기에 결심을 굳힌 문기석은 양복상의를 걸치고 집무실을 빠져 나갔다.
SHJ의 실무 팀들은 모든 일정을 취소한 채 호텔 안의 사무실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경환을 포함한 직원들은 여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반면 경환으로부터 해외이전과 폐업을 검토하라는 지시를 받은 박화수는 좌불안석이었다.
“박 사장님, 너무 긴장하시는 거 같습니다. 잘 풀리지 않겠습니까?”
경환은 대응책을 마련하면서 직접적으로 청와대를 노리는 전략을 수립했다. 외교부와 같이 관련부서를 공략했다면 시간적으로 지체될 수도 있었고 보고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뜻이 변질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미국을 이용해 한국정부를 압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경환을 씁쓸하게 만들었지만, 현실적으로 이 보다 좋은 방법은 없었다.
“그래도 영국정부에서 움직일 줄은 몰랐습니다. 어떻게 된 일 인가요?”
생각하지도 않은 영국까지 경환을 비호하고 나설 줄은 예상하지 못했었다. 혹시라도 자신이 모를 무언가를 가지고 영국과 딜을 한 것은 아닌지 경환은 확인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경환의 예상과는 다르게 궁금증은 린다에 의해 간단히 해결되었다.
“이번 황 부사장의 출장에서 KENTZ와 컨설팅계약을 체결하지 않았습니까? KENTZ에서 SHJ가 홍콩에도 법인이 있다는 구실을 들어 압력을 가하도록 영국정부에 요청을 했다고 합니다.”
경환은 자국의 기업을 위해 발벗고 나서는 영국이나 미국외교관들을 보며 해외교민이나 기업을 무시하고 자신의 보신에만 급급해하는 한국외교관들의 구태의연한 작태에 짜증이 몰려 오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 일에 텍사스 주정부의 도움이 많았습니다. 귀국한다면 인사는 해야 될거에요.”
“그래요. 우선은 주정부에 기부금을 최대로 해 주시고, 주지사와도 관계를 돈독히 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린다의 요청을 받은 주정부에서는 적극적으로 SHJ에 도움을 주었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경환은 주지사가 조지 W 부시인 주정부와의 관계에도 신경을 쓸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이런 방법에도 정부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박화수는 여전히 불안한 표정을 짓도 있었다. 그만큼 SHJ-화성플랜트에 대한 애착이 누구보다도 강했다. 경환은 그런 박화수를 바라보며 가벼운 미소를 보였다.
“대통령의 방미가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을 거라고 봅니다. 혹시라도 바뀐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면, 미국의 여론을 움직일 생각입니다. 그렇지만 그건 최후의 방법입니다.”
각국의 외교문제에 특히 신경을 많이 쓰고 있는 워싱턴포스트지에서 이 문제를 기사화한다면 한국정부로서도 버티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 방법까지 쓰고 싶지는 않았다. 한국정부와 자신과의 싸움에 여론까지 움직이게 된다면 결국 욕먹는 것은 한국이었기 때문이었다. 경환은 이쯤해서 한국정부가 자신과 타협을 해 주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다.
이학승 안기부장은 청와대의 연락을 받은 후 부 전체를 뒤집고 있었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정권실세의 아들에 줄을대고 있는 김형섭 운영차장의 독단적인 행동이란 보고를 받은 이학승은 이를 갈며 김형섭을 호출했다.
‘퍽’
김형섭이 자신의 집무실에 들어오자 이학승은 재떨이를 들어 벽에 던져버렸다.
“야! 이 새끼야, 죽으려면 너 혼자 나가 뒈져! 내가 너한테 이경환이 파라고 지시한적 있었나!”
이학승의 분노에 김형섭은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SHJ의 대처가 이 정도로 빠를지 자신도 예상을 하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저, 부장님, 그게 아니라……, 국익을 위해 움직였을 뿐입니다.”
김수철을 이번 정권이 쉽게 쳐 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김형섭은 최대한 버텨야만 했다.
“어이구, 그러세요? 국익을 위하셨군요. 이 새끼야, 터진 주둥이 함부로 놀리지 말아! 네가 좋아하는 김수철도 끈 떨어졌어. 넌 이 시간 부로 직권남용에 따라 면직처리 됐으니까 감사 팀에 가서 감사나 받아.”
자신이 면직되었다는 소리에 눈을 크게 뜬 김형섭은 말을 할 틈도 없이 수사원들에 의해 명찰이 뜯긴 채로 끌려나갔다. 이학승은 김형섭에 의해 만들어진 SHJ에 대한 기밀서류를 살피며 깊은 한숨을 쉬고 있었다.
김수철은 김형섭과 연락이 되지 않자 불안함에 사무실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어제 경환과의 만남이 끝난 후 청와대의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는 정황이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느닷없는 민정수석의 방문은 김수철을 더욱 초조하게 만들었다. 나이가 어리다는 생각에 경환을 너무 쉽게 생각한 것을 후회하고 있었지만, 이미 상황은 더욱 김수철을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소장님, 대선 이후로 뵙지를 못했군요. 좋지 않은 소식을 가지고 와서 저도 마음이 무겁습니다.”
김소명의 말이 무엇인지 감을 잡은 김수철은 올 것이 왔다라는 생각에 눈을 지긋이 감아버렸다.
“저는 단지 SHJ란 기업이 한국의 이동통신 사업에 뛰어들어 필요 이상으로 국부가 새 나가지 않도록 조율을 하려고 한 것뿐입니다.”
김수철의 변명에도 김소명은 꿈적이지 않고 있었다. 김수철이 이권에 개입을 하고 있다는 것은 청와대 사정 팀에 의해 보고를 받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대표가 한국인이라 하더라도 SHJ는 엄연히 미국기업입니다. 미국과 영국의 반발이 심상치 않고, 더욱이 소장님의 발언이 퍼지면서 중국정부에서도 움직임을 보이려 하고 있고요. SHJ는 한국기업들과의 모든 합작을 중단한 채 한국에서 철수를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소장님이 이번에는 무리를 하신 거 같습니다.”
깊은 늪에 빠진 것을 느낀 김수철은 자신의 꿈인 정치입성이 여기서 좌절될 수는 없다라는 생각에 급히 타협안을 제시하고 나섰다.
“오, 오해라고 하지 않습니까. 제가 이경환 사장을 다시 만나 보겠습니다. 이 문제를 대화로 풀어 보겠으니, 며칠 시간을 주십시오.”
김소명은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김수철을 바라 보고 있었다. 당과 청와대를 의견조정을 담당하는 자신도 요새 들어 김수철에 대한 당 내부의 불만이 많아지고 있어 중간에서 이를 무마하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어, 어르신도 아시는 겁니까?”
김소명이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자 최후의 방어선을 펼치기 시작했다. 대선을 기획하고 승리로 이끈 자신을 쉽게 버리지는 못할 거라는 판단이 들어서였다.
“어르신의 지시를 받고 제가 오늘 소장님을 찾아 온 겁니다.”
담담히 자신이 맡은 일을 수행하고 있는 김소명을 김수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바라보았다.
“어르신께서는 뭐라 하십니까?”
“오늘 부로 무교동 사무실을 해체하고 소장님은 고향으로 내려가 자중하라고 하십니다. 이미 야권에서 냄새를 맡고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첩보도 입수되었습니다. 혹시라도 무교동 사무실이 언론에 들어간다면 사태는 심각해 질 수도 있다는 판단입니다. 그때는 저희도 손을 쓸 수가 없습니다.”
최후의 방어선도 허무하게 무너졌다는 것을 확인 한 김수철은 김소명의 면전에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자신이 지금까지 이룩해 놓은 미래에 대한 청사진이 경환과의 한번의 만남으로 인해 산산이 무너져 버린 것이 믿을 수가 없었다. 김수철은 두 손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쥐어 뜯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