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91화 (68/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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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인생 - 91

    본가에 도착한 경환은 간단히 인사만 드리고 수정과 정우를 남겨둔 채 호텔로 향했다. 서운해 하시는 부모님들께 죄송하긴 했지만, 안기부에서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경환을 급히 서두르게 만들었다. SHJ가 미국법률의 보호를 받는 미국기업이긴 하지만, 아직 한국에는 자신이 지켜야 될 가족들이 있었다. 서둘러 호텔에 도착한 경환은 급히 린다와 최석현을 커피숍으로 불러 내렸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예상보다 이른 시간에 호텔에 도착한 경환을 살피던 린다는 심상치 않은 일이 경환의 주변에 발생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저희가 예상했던 일들이 서울에서 진행되고 있는 거 같습니다. 공항에 KCIA 직원이 나와 있더군요.”

    KCIA라는 소리에 린다는 인상을 쓰고 있었다. 한국에 오기 전 한국정부의 압력이 들어올 수 있다는 경환의 말을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었다. SHJ는 엄연히 미국기업이고 이번 퀄컴의 지분인수도 합법적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한국정부가 나설 일이 아니라고 린다는 생각했었다. 단지 경환이 한국인이란 사실이 KCIA를 움직였다는 사실을 감지한 린다는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사장님이 한국인이란 사실이 그들을 움직인 거 같네요. 우선은 저희가 만들어 놓은 매뉴얼대로 진행을 하겠습니다. 만남 자체를 무산시켜야 될까요?”

    린다는 경환이 한국인이지만, 미국기업의 대표를 건드린 대가를 받아 낼 생각이었다. 미국인인 린다는 아직 한국은 미국의 입김에서 자유로운 나라는 아니라고 보고 있었다.

    “아니에요. 아직 어느 선에서 움직이는지 확인이 안 되니, 내일 만남은 가져 볼 생각입니다. 그들이 움직이기 전에 우리가 먼저 움직여야겠습니다. 그리고 당분간 사무실이나 호텔방에서의 대화는 가급적 조심을 하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경환의 말을 들은 두 사람은 호텔과 단기 임대한 사무실이 아닌 커피숍으로 부른 이유를 그제서야 이해하고 있었다. 시계를 확인한 최 석현은 휴스턴이 새벽시간임에도 불구하고 휴대폰을 들어 황태수에게 연락을 취하기 시작했고 린다 또한 비상연락망을 통해 전화를 시도할 무렵 박화수가 빠르게 다가왔다.

    “급하게 박 사장님을 불러서 죄송합니다. 좀 확인할 일이 있어서요.”

    “아닙니다. 사장님. 말씀 하십시오.”

    공항으로도 나오지 못하게 한 경환의 급한 호출을 받은 박화수는 직감적으로 심각한 일이 진행되고 있다라는 것을 느꼈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커피숍에 모인 사람들의 표정은 무거웠다.

    “SHJ-화성플랜트를 인수하는 과정에서 잡음은 없었다고 보고를 받았습니다. 혹시 세무관련이나 인수하는 과정에서 실수를 한 부분이 있나요?”

    경환이 자신을 부른 이유를 어림잡아 감을 잡은 박화수는 긴장된 표정으로 경환의 질문에 빠르게 답해나갔다.

    “전혀 없습니다. 사장님 지시대로 투명하게 일을 처리했습니다. 해외자본을 들여오는 과정에서 세금탕감을 해 주겠다는 제안도 거절하고 화성산업의 체납된 세금을 전액 완납을 했습니다.”

    박화수의 말을 전적으로 믿지만, 한국의 공권력을 믿을 수는 없었다. 투명하다고 소리쳐 봐야 여론을 움직여 기업 하나를 매도시키는 것은 일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경환은 미간을 찡그리며 한 동안 깊은 생각을 한 후 박화수를 향해 입을 열었다.

    “만약에 말입니다. SHJ-화성플랜트 전체를 해외로 이전시키거나, 최악의 경우 폐업을 하게 된다면 손실이 어느 정도입니까? 이런 일이 생기지는 않겠지만, 배수진을 좀 쳐야 될 일이 있을 거 같아서요.”

    경환의 예상치 못한 말에 박화수의 등에선 식은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죽어라 고생한 끝에 은행 차입금을 모두 상환하고 제2공장을 건설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이고 있는 상태에서 경환의 입에서 나온 폐업이란 소리는 박화수를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금년도 신규 계약 건은 미화로 1억불에 근접하고 있고 계약을 추진하고 있는 물량은 그 이상입니다. 공장전체를 해외로 이전시킨다면 마산지역경제에도 큰 타격을 줄 수 있습니다. 폐업이라도 한다면 그 동안 쌓아온 SHJ의 좋은 이미지가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특수플랜트제작으로 방향을 전환한 SHJ-화성플랜트는 일반 철구조물의 제작은 아웃소싱을 줘야 될 정도로 물량이 넘쳐나고 있었다. 박화수는 어떤일이 진행되고 있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저희가 지분을 가지고 있는 한국의 이동통신사업 부분에 숟가락을 올려 놓으려는 세력이 있는 거 같습니다. 다른 건 문제가 안되지만, SHJ-화성플랜트가 맘에 좀 걸려서요. 검토만 해 놓으십시오. 큰일이야 있겠습니까?”

    경환은 박화수를 안심시켜 주려고 했지만, 표정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박화수는 자초지정을 알기 위해 최석현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SHJ와의 회의를 낙관하던 오성전자는 냉랭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는 SHJ 협상 팀들로 인해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협상을 주도하는 이세일 사장은 갑작스러운 SHJ의 변화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쿡 부사장님, 이유가 뭡니까? 기본적인 사항에 대해서는 이미 합의를 하지 않았습니까? 느닷없이 모든 아젠다를 원점으로 돌리자고 하시면 곤란합니다.”

    이미 그룹회장에 보고까지 된 사항이라 일이 틀어지기라도 한다면 회장의 질책을 온전히 자신이 감당해야만 했다. 린다는 이세일의 급한 마음은 안중에도 없었다.

    “오성전자와의 거래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모든 것을 원점으로 돌리자는 소리도 아니지 않습니까? 단지 기술이전에 대한 속도를 조절하겠다는 겁니다.”

    퀄컴의 라이선스를 기술을 제공하지 않겠다라는 말은 막바지에 와 있는 단말기제조에 큰 문제를 초래하는 중차대한 일이었지만, 린다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이를 거절하고 나섰다. 이세일은 오성건설과의 합작건이 마음에 걸렸다.

    “오성건설과의 합작제의에 대해서는 그룹차원에서 다시 검토를 하겠습니다. 그러니 SHJ도 기본 합의대로 움직였으면 합니다.”

    “오성건설과의 합작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염려를 하는 것은 이권사업 개입하며 투명성을 보이지 않는 한국정부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희 SHJ는 투명성이 확보되기 전까지 이 문제를 보류하겠다는 겁니다.”

    린다의 말에 이세일은 미치고 팔짝 뛰고 싶었다. 정치인들의 이권개입은 어제 오늘일이 아니었다. 그나마 이번 정권은 예전보다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파리들은 꼬이고 있었고 이 문제는 자신의 선에서 해결할 문제는 아니었다.

    “저희의 방문을 한국의 정보기관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SHJ 대표의 국적이 한국이란 것을 제외하고는 엄연히 미국기업입니다. 저희는 이번 일을 상당히 심각하게 보고 있습니다.”

    그제서야 갑작스런 SHJ의 변화를 이해할 수 있었다. 오성그룹은 정부도 막 할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이세일은 이를 갈며 안기부를 씹기 시작했다.

    김형섭이 보낸 승용차엔 경환과 경환을 수행하기 위해 이다나가 함께 동승을 한 채로 무교동에 도착했고, 경환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보이고는 급히 최석현에 전화를 돌렸다. 직원의 안내에 따라 들어선 사무실에는 김형섭이 문 앞까지 나와 경환을 반갑게 맞이했다.

    “하하하, 이 사장님. 먼길 오시느라 고생했습니다.”

    “무교동 사무실에서 절 보자고 하실 줄을 몰랐습니다. 김 소장님은 자리에 계시겠죠?”

    자신의 신분을 밝혔음에도 전혀 기죽지 않고 이곳이 어떤 사무실인지 알고 있는 경환을 재미있다는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김형섭은 경환을 소장실 안으로 인도했고 소장실에는 자그마한 키에 단단한 인상을 한 김수철이 경환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 직원은 밖에서 기다리게 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하시죠.”

    경환은 밖에서 대기하라는 지시를 내렸지만, 이다나는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미 린다가 경환을 주위에서 보좌하라는 지시를 따로 내렸고, 미국인인 자신이 경환의 옆에 있는 것이 좋다라는 판단을 해서인지 직원에게 의자를 요청한 이다나는 사무실에 터를 잡고 앉아 버렸다.

    “누추한 사무실을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김수철 소장이라고 합니다.”

    “SHJ대표 이경환입니다.”

    짧게 소개를 마친 경환은 묵묵히 커피만 마시고 있었다. 김수철은 탐색전이라도 하듯 경환을 살폈지만, 경환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음에도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젊은 분이 대단하십니다. 미국에서 사업을 일으킨 것도 놀라운데 동종업계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들었습니다. 같은 한국인으로써 자랑스럽습니다.”

    김수철의 공치사를 가벼운 미소로 흘려버린 경환은 김수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감을 잡기 시작했다. 무교동사무실로 불리는 이곳은 선거 기획과 정책을 연구한다는 처음 의도와는 다르게 이권에 개입을 하면서 변질되어가고 있었다. 이런 이권사업의 개입은 차기 정권을 노리는 세력에게는 좋은 먹이감이 될 수밖에 없었고 결국은 법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는 경환은 김수철과의 인연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었다.

    “제가 한국인이라고 해서 SHJ가 한국기업인 것은 아닙니다. 소장님께서 저를 만나시자고 하신 이유가 아마 이동통신사업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만……”

    경환은 말을 돌리지 않고 김수철을 향해 도발을 시도했다. 김수철은 의외로 적극적으로 나서는 경환과의 대화가 쉽게 풀릴 수도 있다라고 생각을 했는지 미소가 가득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SHJ가 화성플랜트를 인수하는 과정에서 이 사장님의 지분 10%가 무상으로 양도된 사실이 좀 복잡해 질 수 있다는 소문이 있더군요. 그리고 SHJ 홍콩법인이 제일그룹과 대후와의 거래에서 막대한 비자금을 운용하고 있다는 내용도 있고요. 여기 계신 김형섭 차장님이 급히 근원지를 찾아 봉합을 해 놓긴 했지만, 주위에 말 전하는 걸 좋아하는 인간들이 많다 보니…….”

    사실이 확인된 내용은 아니었지만, 뒤가 켕긴다면 지레 겁을 먹을 것이란 예상을 했던 김수철은 담담히 자신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떡이는 경환을 보며 어색한 미소를 보였다.

    “죄가 있다면 벌을 받아야 되는 게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만약 저희가 화성플랜트를 인수하는 과정에서 불법적인 일에 관여가 되었다면, 마산지역의 경제가 걱정은 되지만, SHJ-화성플랜트를 폐업시키겠습니다. 한국기업과 달리 미국기업들은 투명성을 생명으로 하고 있습니다. 홍콩법인에 대한 유언비어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대응을 할 생각입니다.”

    경환의 강경한 발언에 김수철과 김형섭은 급히 얼굴색이 변하기 시작했다. 김수철의 심기기 불편해 지고 있다는 생각에 김형섭이 급히 나섰다.

    “저, 이경환씨, 나이가 어려서 뭔가 착각을 하고 있나 본데, 한국에서 사업을 하려면 그에 맞는 과정과 격식이 필요한 겁니다. 잘 생각해 봐요.”

    김형섭의 협박에도 경환의 얼굴색에는 변화가 없었다. 힘을 누르기 위해 더 큰 힘을 이용하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밖에서는 린다와 황태수가 미리 준비한 매뉴얼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한국에서 사업을 하지 않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SHJ-화성플랜트 외에는 한국과 연결된 사업은 없습니다. 제 개인에 대한 핍박을 생각하신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경환은 마음의 정리가 끝났는지 미소까지 지어보이며 김수철과 김형섭의 심기를 긁고 있었다.

    “아~, 한가지 말씀 드릴 것이 있습니다. 지금쯤 청와대 외교수석과 경제수석은 상당히 시달리고 있을 겁니다. 제가 겁이 좀 많다 보니 소장님을 뵈러 오기 전에 몇 군데에 자문을 구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거절을 했는데도 직접 무슨 일인지 알아보겠다며 발벗고 나서더군요. 혹시라도 문제가 된다면 제 의도와는 다르게 확대된 것이니 이해를 부탁드리겠습니다.”

    경환의 빠른 대응에 김수철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가고 있었다. 경환의 말처럼 혹시라도 이런 내용이 청와대에 들어간다면 정치입성을 노리는 자신의 입지는 한순간에 무너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대통령의 방미가 얼마남지 않은 상태에서 청와대는 이런 문제에 예민하게 반응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김수철을 구석으로 몰고 있었다.

    “저희는 이 사장님의 사업에 도움을 드리기 위해 이 자리를 마련한 겁니다.”

    김수철은 궁색한 변명으로 이 자리를 모면하려 했다.

    “제가 좀 경솔했군요. 저도 한국인인데 안기부가 얼마나 두렵겠습니까? 이것 저것 생각할 여유도 없이 행동을 했으니, 큰일이네요. 상원의원 몇 명과 미국대사관에 자문을 구한 거라서……, 제가 호텔로 돌아가서 오해에서 생긴 일이라고 얘기는 해 보겠습니다.”

    얼굴에 인상을 쓰면서도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하는 김수철과 김형섭을 놔두고 대기하고 있던 이다나와 함께 무교동을 빠져 나가고 있었다. 경환은 결코 두 사람에 당한 이번 일을 묻어 둘 생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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