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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인생-90화 (67/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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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인생 - 90

    다음날 황태수의 보고를 전해 들은 경환은 밀려오는 짜증에 애꿎은 최석현만 잡고 있었다.

    “최 차장님, 딸을 예뻐하는 건 이해를 하겠는데, 티 좀 나게 하지 마세요. 최 자장님 때문에 저나 타케우치 차장이 얼마나 시달리며 사는 줄 아십니까? 회사 그만두시고 보육원이라도 차릴 생각이신가 보죠?”

    최석현의 지극정성에 하루에도 몇 번씩 수정의 잔소리를 들어야만 했던 경환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최석현에 핀잔을 주고 있었지만, 정작 최석현은 태연하기만 했다.

    “사모님이 지금 하신 말씀을 알기라도 한다면 사장님 더 힘드실 텐데.”

    최석현의 협박에 경한은 뒤 목을 잡으며 쓰러지는 흉내를 내며 최석현의 판정승을 끝났다. 무거웠던 분위기가 두 사람으로 인해 어느 정도 풀리자 경환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번은 부딪칠 거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습니다. 겸사겸사 한번 가려고 했습니다. 황 부사장님께서 일정을 통보해 주시고 본사를 당분간 지켜주십시오. 쿡 부사장님은 이번 한국방문에 저와 동행을 하시는 거로 하시죠.”

    “알겠습니다. 팀을 꾸려 일정을 조율하겠습니다.”

    SHJ는 인원보강을 완료하고 휴스턴에서 주목 받는 기업으로 성장해 나가고 있었다. 경환은 법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지역 정치인들에게 꾸준히 후원금을 지원하고 있었고, 그들이 주최하는 행사나 자선사업에 SHJ 이름으로 적극적인 참여를 하였다. 택사스주 자체가 공화당 위주의 보수지역이긴 하였지만, 경환은 공화당과 민주당을 가리지 않고 지역발전을 위해 달라는 명목으로 꾸준히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지역 정치인들 사이로 SHJ의이름이 회자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번 한국방문은 길게는 보름 정도 예상을 하고 있습니다. 회사는 당분간 황 부사장님이 이끌어 주십시오. 그리고 최 차장님과 이다나는 이번 출장부터 저를 수행해 주시기 바랍니다.”

    최석현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떡였고, 이다나는 첫 해외출장에 대한 기대감에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회사의 규모가 확대되면서 최석현과 이다나는 경환의 전담비서직분을 수행하고 있었다.

    “한국정부의 요청이 있다고는 하지만, 정확히 어느 라인에서 사장님의 한국방문을 요청했는지에 대한 정보는 아직 입수되지 않고 있습니다. 정식으로 체신부의 공문을 받은 뒤 움직이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황태수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는 생각하지만, 부딪혀 볼 생각이었었다. 영사관을 통했다고는 하지만, 비공식적인 한국방문을 요청했다는 것은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비공식적인 만남을 요청하는 곳을 경환은 대충 감을 잡고 있었다.

    “쿡 부사장님은 저희의 한국방문을 휴스턴 시 정부와 주정부에 통보를 해 놓으시기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그쪽에서도 저희를 주목하고 있으니, 서로 도움을 주려고 할겁니다.”

    문민정부라고는 하지만, 아직은 공권력을 무시하지 못하는 한국이었기 때문에 경환으로서도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는 해 둬야 했다.

    “황 부사장님께서 출장에서 돌아오시면 바로 한국으로 들어갈 수 있게 쿡 부사장님과 최 차장님은 일정을 조정하시기 바랍니다. 황 부사장님은 출장준비는 다 되셨나요?”

    SHJ와 KBR은 서로간의 이해관계로 인해 더 이상의 업무합작은 진행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FPSO 입찰 성공 이후 각 기업들의 합작제의가 넘치는 지금 경환도 딱히 KBR과의 합작에 연연할 생각이 없었다. 이번 황태수와 코이치의 해외 출장은 영국의 KENTZ를 시작으로 각 유럽의 플랜트 업체와의 합작을 추진하고 아울러 중동과 아프리카를 돌면서 발주 처들과의 우호관계 수립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경환은 전권을 황태수에 위임한 상태였다.

    “차질 없이 준비를 완료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미쓰비시중공업에서 저희와의 업무합작을 협의하자는 제의를 또 해왔습니다. 좋지 못한 관계 때문에 거절을 하려 했으나 타케우치 차장이 재미있는 의견을 내 놓아서 고민 중입니다.”

    FPSO입찰이 끝난 이후 미쓰비시중공업은 나리타 치히로 사장이 물러나고 새롭게 다나카 아사히 사장체제로 넘어가 있었다. 그러나 질긴 생명력을 자랑이라도 하듯 모모이 아키라 상무는 무슨이유에서인지 자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아키라의 의견을 아사히 사장이 받아들여 미쓰비시중공에서는 끊임없이 업무제휴를 SHJ에 요청하고 있었다. 그러나 경환은 일언지하에 이를 거절하고 오히려 미쓰비시중공업을 당분간 해외입찰에 나서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다.

    “그래요? 타케우치 차장님이 직접 말씀해 주겠습니까?”

    코이치는 경환의 엄명에 야근을 하는 횟수는 현저히 줄었지만, 아직도 SHJ내에서 워커홀릭이란 별명으로 불리고 있었다. 이번 출장을 준비하면서 모든 협상전략을 수립할 정도로 코이치는 탁월한 업무능력을 보이고 있어 황태수와 경환을 만족시키고 있었다.

    “우선 저희의 전략은 JSC와 미쓰비시중공업의 해외입찰을 철저히 막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JSC와 달리 일본의 대형 그룹계열인 미쓰비시중공업에 큰 타격을 줄 수는 없습니다. 이럴 바에야 미쓰비시중공업와의 업무합작으로 JSC를 더 압박한다면 JSC 인수시점이 빨라질 수도 있다고 봅니다.”

    경환은 코이치의 의견에 멍한 기분으로 고개만 끄떡이고 있었다. 자신은 잭을 이용했다라는 분노에 사로잡혀 단순하게 미쓰비시중공업을 배척하고 있었지만, 코이치는 냉철한 시각으로 여러 상황을 분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코이치 말대로 미쓰비시중공업을 이용해 JSC의 해외입찰을 철저히 막는 것도 좋은 방법이란 생각이 들었다.

    “타케우치 차장님, 본래 계획은 한국 기업들의 이용해서 JSC나 미쓰비시중공업과 경쟁을 한다는 방침 아니었나요?”

    “발주국가의 특성에 맞게 저희가 대처를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나이지리아는 한국의 대후가 강하지만, 알제리나 오만은 한국기업보다는 일본기업에 대해 호의적입니다. 미쓰비시중공업을 이용해야 될 또 한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각 나라의 호감 도에 따라 JSC의 경쟁업체를 결정하자라는 코이치의 의견은 상당히 현실적이고 검토해 볼 가치가 있다고 경환은 판단하고 있었다.

    “다른 이유라뇨? 말씀해 주세요.”

    “보수적인 일본의 특성상 대표적인 플랜트업체인 JSC가 해외자본에 넘어가는 것을 일본정부가 수수방관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일부 지분참여를 허용하는 조건으로 미쓰비시그룹을 이용한다면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다고 판단됩니다.”

    경환의 코이치의 제안을 들으며 합리적인 그의 판단에 동의를 하고 있었다. 경환도 일본정부가 쉽사리 JSC의 인수를 방관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타케우치 차장님의 제안이 흥미로운 것은 사실입니다. 제 감정에 사로잡혀 미쓰비시중공업을 적대시 한 것이 부끄럽네요. 이번 출장에서 돌아온 후에 좀 더 검토를 해서 보고를 해 주십시오.”

    처음 코이치가 합류했을 때 JSC회장의 아들이란 이유로 달갑지 않게 바라보는 시선이 많았지만, 코이치는 그런 의식에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이 맡은 일에 매진하는 모습을 통해 부정적인 시각을 모두 불식시켰다. 이제는 SHJ의 모든 영업전략은 그의 머리에서 나오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며칠 후 황태수는 타케우치와 실무 팀을 이끌고 장기 출장을 떠났고, 린다는 경환과의 한국방문일정을 조율하며 대대적인 투자를 집행하고 있었다.

    “제임스, 오성전자에서 북미지역에 대한 독점판매권에 대해 전향적으로 검토를 하겠다는 답변을 받았어요. 그런데 한가지 조건이 있어서…….”

    린다는 경환과 단둘이 있을 땐 이름을 부르기를 좋아했다. 경환도 처음부터 서로 이름을 불렀기 때문에 별로 개의치 않고 있었다.

    “린다, 오성건설에서 저희와의 업무제휴를 조건으로 내세웠나요?”

    린다는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냐며 눈을 동그랗게 떠 경환을 바라보았다. 오성그룹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

    “대현중공업과 아동건설이 아마 자극을 줬을 겁니다. 흠, 린다 생각은 어때요?”

    경환은 점차적으로 업무를 린다와 황태수에게 일임하면서 그들의 의견을 최우선으로 반영을 하며 SHJ를 운영하고 있었다.

    “황 부사장과 의견은 교환을 했어요. 황 부사장은 제임스가 반대만 하지 않는다면 오성건설과의 업무제휴에 반대하지 않겠다고 하더군요. 제임스 말대로 오성전자의 이동통신 단말기 사업이 노키아나 모토롤라의 아성에 도전을 할 정도라면 오성의 조건을 받아들여야 된다고 생각해요.”

    95년만 하더라도 오성전자의 단말기가 전세계 1위로 올라선다는 예측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더욱이 지금은 CDMA 상용화가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었다.

    “황 부사장님이 그렇게 말했다면 나도 반대할 생각은 없습니다. 오성그룹과의 일은 린다가 맡아서 하세요. 제일 좋은 것은 오성전자에 우리가 투자를 하는 건데, 직접투자에 대해서도 린다가 검토를 해 보세요.”

    투자와 컨설팅을 분리했지만, 이 둘은 서로 시너지효과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회사의 규모가 커지고 있었지만, 업무체계가 잡혀가면서 경환의 업무는 이전보다 줄어들고 있었다.

    “정우야, 거긴 위험해.”

    경환은 급히 뛰어가 정우를 안아 들었다. 태어난 지 일년이 되가는 정우는 집안구석구석을 기어 다니고 있어 경환과 수정을 항상 긴장시키고 있었다.

    “으앙~, 으앙~”

    자신의 의지가 꺾인 게 억울해서인지 정우는 경환의 품에서 몸부림을 치며 울고 있었지만, 경환은 정우를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자식이 누굴 닮아서 고집이 이렇게 센지”.

    “닮긴 누굴 닮았겠어요? 자기 판박인데.”

    수정은 이 년 만에 한국에 간다는 생각에 들떠, 여러 개의 여행가방을 펼쳐 놓은 채 짐 정리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렇게 좋아? 한국에서 사는 거 보단, 여기가 좋지 않아? 맏며느리 노릇 안 해도 되잖아.”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날 그런 속물도 봤다 이거에요?”

    수정은 짐 싸던 손을 놓고 뒤를 돌아 경환을 째려 보았다. 수정의 시선이 따가웠던지 경환은 정우를 안은 채 급히 베란다로 향했다. 정우는 경환의 품이 좋았던지 울음을 멈추고 경환의 품 안에서 조용히 잠이 들었다. 경환은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고민에 빠져 있었다. 내년 희수가 태어난 이후의 계획이 아직 세워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좀 더 많은 시간을 가족들과 보내고 싶었지만, 아직 SHJ를 손에서 놓을 수는 없었다. 황태수나 린다를 못 믿는다는 것은 아니지만, 아직 SHJ는 모래성 위에 세워진 집이었다. 다행히 시간적 여유가 아직 있는 상태였기에 경환은 좀 더 고민을 할 생각이었다.

    경환을 포함한 십여 명의 SHJ 직원들이 김포공항 입국장을 통과하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수정과 정우의 모습도 보이고 있었다. 이다나는 SHJ-화성플랜트에서 준비한 차량을 확인하기 위해 서둘러 피켓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사장님, 호텔로 먼저 가시겠습니까?”

    경환을 수행하기 위해 같이 입국한 최석현이 급히 경환에게 다가와 물었다.

    “아닙니다. 저와 식구들은 먼저 본가로 가겠습니다. 호텔은 저녁에 들어갈 생각이니 우선 차장님이 체크인만 해 놓으십시오.”

    직원들과 공식적인 출장을 온 상태라 경환은 직원들과 함께 호텔에서 지낼 생각이었다. 여러 가지 변수를 생각하고 있는 경환은 본가나 처가보다는 호텔에서 지내는 게 여러모로 유리하다고 판단을 한 이유가 있기도 했다. 본가로 먼저 간다는 경환의 말에 최석현은 당황을 하기 시작했고, 그런 최석현을 경환은 웃으며 바라 보았다.

    “걱정하지 마세요. 여기서 택시를 타고 가면 됩니다. 차장님은 직원들이 한국에 익숙하지 않으니 쿡 부사장님을 지원해 주세요.”

    경환은 린다와 몇 마디 말을 나눈 뒤 정우를 안은 수정과 함께 택시승강장을 향하고 있었다.

    “이경환 사장님이시죠?”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급히 뒤를 돌아본 경환의 곁으로 말끔한 양복을 차려 입은 중년의 사내가 다가오고 있었다.

    “맞습니다. 누구십니까?”

    “김형섭이라고 합니다. 안기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안기부하고는 엮일 일이 없다고 생각한 경환은 인상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안기부와 연결되어 좋은 일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경환은 가방을 수정에게 맡기고 김형섭에게 다가갔다.

    “제가 오늘 입국했습니다. 몸도 피곤하고 기다리는 직원들도 있으니 오늘은 대화를 짧게 했으면 합니다. 무슨 일이신가요?”

    김형섭은 경환의 말을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떡이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우선 이번 방한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이 사장님을 만나고 싶어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내일이라도 시간을 내 주셨으면 합니다.”

    경환은 김형섭이라는 인물에 대한 기억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겪어야 될 일이라면 빨리 처리하는 게 낫다라는 생각이었다.

    “내일 오후에 잠시 시간을 내겠습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오후에 차를 호텔로 보내겠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말을 마친 김형섭은 경환에게 악수를 청한 뒤 빠르게 사라졌다. 집으로 돌아가는 경환은 오랜만에 서울을 찾아 들떠있는 수정과 달리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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