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89화 (66/264)

#89

다시 사는 인생 - 89

경환은 린다의 투자계획서를 살피고 있었다. 90년대 미국경제는 유래 없는 호황기를 누리고 있었다. 클린턴 행정부의 주도하에 정보통신기술혁명이 주도하여 성장을 유도하고 있었지만, 이것을 주도하기 위해 과잉 공급되는 달러가 문제란 사실에 주목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이러한 문제로 버블경제가 꺼지는 2000년 초반부터 미국의 경제는 동력을 잃고 수렁으로 빠지게 된다는 것을 경환은 기억하고 있었다.

“쿡 부사장의 의견은 정보통신을 타킷으로 해서 실리콘밸리에 집중적으로 투자를 하자는 말씀이시네요.”

“네, 이건 현 정권의 취지하고도 일맥상통하고 앞으로 미국의 동력이 될 신 산업이라고 판단됩니다.”

린다의 계획서는 흠잡을 만한 곳이 없었다. 큰 수익을 얻을 수는 없었지만, 마찬가지로 큰 실패도 없는 안정적인 투자패턴을 보여주고 있었다. 막대한 수익을 창출하는 퀄컴을 확보한 이상 경환은 90년대 후반을 기다리며 린다에게 투자에 대한 경험을 쌓게 하고 싶었기 때문에 반대를 할 생각이 없었다.

“알겠습니다. 작성하신 계획서대로 진행을 해 주세요. 그런데 제가 개인적으로 궁금하고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도 부사장님이 연구를 해 줘야겠습니다.”

자신의 계획을 아무런 이유 없이 경환이 승인했다는 생각에 린다는 환한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도 경환이 신경 쓰이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 동안의 경험으로 절대 헛말을 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재를 해 주시면 바로 투자에 대한 협상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말씀을 하시면 바로 연구를 시작하겠습니다.”

경환의 전폭적인 지지로 투자를 집행할 조직이 확대 개편되는 과정에서 경환은 특이하게 미래경제를 예측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하는 연구팀을 구성했다. 물론 린다의 지시에 의해 연구가 진행되고 있었지만, 경환은 린다에게 은연중 연구방향을 제시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나는 현재 정보통신분야의 중심적인 역할로 대두되고 있는 인터넷입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 분야는 미래사회를 변화시킬 중요한 산업분야로 생각되니 인터넷을 통해 발전 가능한 산업에 대해 연구를 해 주십시오. 다른 하나는 헤지펀드의 투자패턴에 대한 연구입니다.”

린다는 요즘 투자가들 사이로 오르내리고 있는 인터넷 관련 사업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어 경환의 지시를 이해하고 있었지만, 헤지펀드에 대한 연구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헤지펀드에 대한 연구는 좀 의외네요. 따로 연구를 해야 될 분야라도 있나요?”

“원유시세가 안정되고 미국경제가 호황기를 맞이하고 있는 상황에서 단기차익을 노리는 헤지펀드가 갈 곳이 없다고 봅니다. 그래서 고정 환율을 고집하는 아시아금융이 헤지펀드의 목표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때를 노린다면 우리도 막대한 이익을 볼 수 있지 않겠어요?”

경환의 대답이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다는 결론을 내릴 정도로 린다의 이해는 빨랐다. 연구원들을 채용한 이상 그들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도 지신의 몫이었기 때문에 헤지펀드의 유형과 패턴에 대해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퇴근을 준비하던 경환은 일에 몰두하고 있는 코이치의 곁으로 조용히 다가가고 있었다. 경환의 발소리도 듣지 못하고 있던 코이치는 누군가 자신의 어깨에 손을 얹자 화들짝 놀라 뒤를 바라보았다.

“사···, 사장님.”

“퇴근합시다. 쉬는 것도 일의 연장입니다.”

금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JSC와 미쓰비시중공업과의 경쟁을 위해 코이치는 삼시세끼를 사무실에서 해결할 정도로 일에 몰입해 있었다.

“조금만 더 하다 퇴근하겠습니다. 사장님 먼저 들어가십시오.”

코이치가 퇴근할 기미를 보이지 않자 경환은 코이치가 작성중인 문서를 덮어버리고 컴퓨터를 급히 꺼버렸다.

“가족을 위해서 하는 일인데 야근을 밥 먹듯이 하면 제가 부인께 면목이 안 섭니다. 저 혼자 퇴근해서 따뜻한 밥이 넘어가겠습니까? 어서 옷 입으세요.”

코이치는 한참을 망설인 후에야 주섬주섬 옷을 챙기며 경환을 따라 나설 수밖에 없었다. 최석현이 작년에 태어난 딸로 인해 칼 퇴근을 하는 통에 코이치의 퇴근은 더더욱 늦어졌다.

“오늘은 저희 집에서 같이 식사를 하면서 술 한 잔 하시죠. 미리 부인께는 제가 연락을 해 두었습니다. 저 먼저 출발합니다. 뒤에서 바로 따라오세요.”

코이치는 SHJ에 합류하고 반년이 훨씬 넘게 지나고 있었음에도 제대로 실적을 내지 못해 초조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이 개발 중인 중동과 북아프리카 입찰에 온 신경을 쓰며 하나의 실수라도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자신의 정력을 쏟아 붓고 있었다. 경환은 누구보다도 코이치의 심정을 이해하지만, 이런 긴장과 스트레스가 중대한 실수로 이어지는 경우를 많이 봐 왔었다. 한 번의 실수는 코이치를 무너지게 할 수도 있었기에 경환은 코이치를 긴장감에서 벗어나게 해 주고 싶었다.

“자기 왔어요? 타케우치 차장님도 어서 오세요.”

“사모님, 감사합니다. 제 아내는······?”

“칸타 엄마는 이미 와 있어요. 같이 식사를 준비했어요.”

“여보, 저 여기 있어요. 어서 들어오세요.”

나츠미의 밝은 목소리를 확인한 코이치는 경환을 따라 들어왔다. 경환은 잠들어 있는 정우를 확인하고는 코이치를 이끌고 식탁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식탁위로는 한국음식과 일본음식이 뒤섞여 놓여 있어 식욕을 자극시키고 있었다. 경환은 소주를 들어 코이치의 잔에 따라 주었다.

“음식도 군침이 도는데 같이 소주한잔 하시죠.”

“자기야, 나하고 칸타 엄마도 한잔 주세요. 우리도 술 마실 줄 안다고요.”

코이치에 건배를 제의하던 경환은 수정의 핀잔에 급히 수정과 나츠미의 눈치를 살핀 후 소주병을 들어 수정과 나츠미의 잔에 따라 주었다.

“하하하, 미안합니다. 제가 눈치가 좀 없었네요. 자 넷이서 술을 마시는 건 처음인 거 같은데, 건배하시죠. 첫 잔은 원샷입니다.”

네 사람은 잔을 들어 건배를 나눈 뒤 잔을 비웠다. 평소 최석현과 친하게 지내는 코이치와 나츠미는 경환이 말하는 원샷의 의미를 알아듣고는 보조를 맞추고 있었다.

“칸타 엄마는 원샷이 무슨 뜻인지 아는 거예요?”

수정은 일본인인 나츠미가 잔을 비우고 머리에 잔을 거꾸로 들어붓는 흉내를 내자 놀란 눈을 했다.

“케이티와 자주 어울리면서 뜻을 알게 됐어요.”

“둘이서만 어울리면서 저는 부르지도 않는 거예요?”

수정은 뾰로통한 표정을 한 채로 나츠미에게 농담을 건넸다. 얼굴이 붉어진 나츠미는 순간 당황을 했지만, 수정의 웃는 모습을 보며 이내 안심을 할 수 있었다. 식사가 시작되고 경환과 코이치는 일본과 한국의 문화에 대해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다 경환은 나츠미를 향해 급히 질문을 던졌다.

“칸타 어머니, 힘드신 점은 없나요? 요새 타케우치 차장님이 일 때문에 늦어 걱정이 많으시죠?”

경환의 질문에 나츠미는 코이치의 눈치를 살피며 대답을 시작했다.

“칸타 아빠는 일본에 있을 때나 한국에 있을 때에도 일에 집중하기 시작하면 항상 그래왔어요. 늦는 건 괜찮지만, 몸을 상할까 걱정은 많이 돼요.”

나츠미는 부끄러운 듯 조심스럽게 얘기를 하고 있지만, 코이치는 그런 아내의 투정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어째 일본남자나 한국남자나 똑 같은지 모르겠네요. 칸타 엄마의 말을 내가 그대로 자기한테 해 주고 싶어요.”

수정이 나츠미의 말을 받자 경환은 왜 자신에게 화살이 돌아오느냐는 듯 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자신은 아니라며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당신은 왜 쓸데없는 말을 하고 그래?”

수정까지 나서 경환에게 핀잔을 주자 코이치는 나츠미를 나무라고 나섰지만, 경환은 그런 코이치를 제지했다.

“틀린 말 하나도 없습니다. 칸타나 칸타 어머니는 차장님만 보고 살지 않습니까. 앞으로 야근이 필요한 일이 있다면 먼저 황 부사장님의 승인을 받으세요. 최 차장처럼 일찍 퇴근하셔서 가족들과 시간을 더 보내도록 하시고요. 그리고 너무 조급해 하지 마세요. 차장님이 SHJ에 있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많이 됩니다.”

나츠미는 경환의 말에 고개를 숙여 감사함을 표하고 있었지만, 코이치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경환은 그런 코이치를 보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지만, 결코 야근을 허락할 생각은 없었다. 식사를 마치고 코이치 가족이 돌아가자 경환은 수정과 오붓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정우가 잠들어 있으니 자기하고 술 한 잔 할 시간이 생기네. 이런 시간을 자주 가져야 되는데 미안해 내가 너무 무심했어.”

“그러게요. 자기하고 오랜만에 술 한 잔 같이 하는 거 같아요. 참, 몇 달 후면 정우 돌인데 한국에 갈 수 있겠어요? 다들 기다리시는데······.”

경환은 본의 아니지만 수정에게 공수표를 남발하고 있었다. FPSO 입찰이 끝나면 여행을 가자고 해 놓고도 쉽게 시간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었다. 수정은 미국에 온 이후 아직 한국에 가보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우의 돌을 핑계로 한국에 가고 싶어 했다. 육아와 학업을 병행하면서도 경환의 뒷바라지에 소홀하지 않는 수정에게 경환은 항상 미안했기에 이번만큼은 한국에 같이 들어갈 생각이었다.

“그래. 다들 기다리시니 정우 돌잔치는 한국에 가서 하도록 하자. 자기 학교수업이 문제긴 하지만, 자기가 교수와 잘 상의를 해봐.”

수정은 경환의 말에 손뼉을 치며 경환의 볼에 입까지 맞추며 기뻐했다. 경환은 이런 수정의 모습을 보며 많은 생각에 잠겼다.

“내가 너무 공수표만 날려서 미안하지만, 내년 2월에 둘이 한 달 정도로 여행 가자. 정우는 부모님들께 맡기고.”

“에고, 또 괜한 소리해서 사람 기대하게 만들지 말아요. 여행 가자는 소리 한번만 더 들으면 아주 백 번을 채우겠네.”

경환의 말에도 수정은 그다지 믿는 표정은 아니었지만 경환은 무조건 여행을 가야 될 이유가 있었다. 그건 6년을 기다려 왔던 경환의 숙명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자기야, 정우도 방해 안하고, 오랜만에 우리 둘만의 시간인데 잠깐 같이 샤워라도 하면 안 될까?”

“흥! 자기는 급할 때만 날 찾는 거 같네요.”

수정은 혀를 입술 사이로 내밀어 경환을 약 올렸지만, 그런 수정의 모습이 경환을 더욱 흥분시켰다. 경환은 수정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수정을 번쩍 안아 들고는 급히 욕실로 향했다.

같은 시간, 황태수는 휴스턴 영사와 식사를 마치고 가볍게 맥주로 입가심을 하는 중이었다. 퇴근시간이 임박해서 느닷없는 영사의 전화를 받은 황태수는 꺼림칙하기는 했지만, 영사의 저녁초대를 거절 할 수는 없었다.

“정부에서는 이동통신 사업에 대한 관심이 지대합니다. 이런 의미로 퀄컴의 한국부분 로열티 40%를 확보하고 있는 SHJ를 정식으로 초청을 하는 것입니다.”

황태수는 이 부분에 대해 자신이 나설 일이 아닌 것을 알고 있었지만, 휴스턴 영사는 막무가내로 황태수의 대답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 부분은 아시겠지만, 린다 쿡 부사장이 담당을 합니다. 저도 자세한 내용은 알지 못하고요. 그리고 SHJ가 한국기업이라고 착각을 하시는 거 같아 다시 말씀 드립니다. SHJ는 미국의 법률 테두리 안에 있는 엄연한 미국기업입니다.”

황태수는 미국기업이라는 말을 강조함으로 한국정부의 간섭을 사전에 방지하려고 애쓰고 있었지만, 영사는 이런 황태수의 의도를 알면서도 무시하고 있었다.

“하하하, 그걸 누가 모릅니까? 그러나 SHJ의 대표가 한국인이고 또 2인자인 부사장님이 한국인인데 한국기업이라고 봐도 무방한 거 아니겠습니까?”

안하무인격인 영사의 행동이 황태수의 심기를 건드리고 있었지만, 내색을 하지는 않았다. 경환과 자신이 한국인이란 사실이 황태수를 위축시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선은 이 자리를 피하는 것이 급하다고 생각한 황태수는 영사와의 대화를 마무리 지으려 했다.

“사업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제 소관도 아니고 아는 바도 없기 때문에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러나 한국정부의 초청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검토를 하겠습니다.”

영사 또한 죽을 맛이었다. 정권실세의 아들인 김수철의 직접적인 요청을 받은 이상 결과물을 보여줘야만 했다. 혹시라도 요청을 무시했다가는 자신은 쥐도 새도 모르게 오지로 발령을 받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하하, 부모님들께서도 한국에 다들 계시니, 한번은 가 보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부사장님이 말씀 좀 잘 해 주십시오. 가능한 빠른 시간으로 결정을 하셔서 통보를 해 주십시오.”

황태수의 미간이 좁혀지며 깊은 시름에 빠져들었다. 경환은 그 동안 한국정부와는 철저히 담을 쌓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특히 이번 정권에 대해서는 자신이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배타적인 모습을 보여 왔기 때문이었다. 황태수는 이 자리에 린다와 동행을 하지 않은 걸 땅을 치며 후회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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