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88화 (65/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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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인생 - 88

    FPSO 입찰 성공은 경환에게 기쁨과 아쉬움을 동시에 맛보게 했다. 1억2천6백만 불의 컨설팅비용과 입찰원가 42억불에서 1억불이 추가됨으로써 받은 3천만 불이 더해져 1억5천만 불이 넘는 비용을 챙기게 됨으로 SHJ는 본격적으로 사업 확대를 시작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러나 SHJ와 KBR의 중간역할을 담당하며 두 회사의 업무조율을 해오던 잭의 이탈은 KBR과의 틈을 조금씩 벌어지게 만들고 있었다. 또한 잭을 나락으로떨어트렸다는 자책감으로 경환을 한동안 슬럼프에 빠지게 하기도 했다.

    FPSO 입찰 성공은 또한 SHJ의 위상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KBR의 연이은 입찰 성공이 SHJ의 컨설팅에 기초하고 있다는 인식이 동종업계로 빠르게 퍼져나가며 SHJ와의 업무합작을 하려는 기업들의 러브콜로 인해 황태수는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발 빠른 기업들은 SHJ-화성플랜트에 플랜트제작을 의뢰하면서 SHJ-화성플랜트는 때 아닌 특수에 공장 확장을 심각하게 검토를 해야만 했다. 이번 입찰 성공의 최대 수혜자였던 대현중공업은 FPSO 건조기술까지 확보함으로 세계1위 조선기업을 굳건히 지킬 수 있었고, 정권의 눈치를 보며 위축된 대현그룹의 재도약을 위해 그룹차원에서 SHJ와의 합작을 준비하고 있었다.

    KBR은 윌리엄이 그룹경영에까지 진출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지만, SHJ의 의존도가 너무 높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커짐에 따라 SHJ와의 업무합작을 서서히 줄여가고 있었다. 이렇게 SHJ가 설립된 이후 가장 중요했던 94년도 서서히 저물어가고 있었다.

    경환의 사무실에는 SHJ의 중추라고 할 수 있는 황태수와 린다가 자리를 함께하고 있었다. 자신감에 가득 찬 SHJ의 직원들과는 달리 경환의 표정은 무거워 보였다.

    “쿡 부사장님, 잭이 휴스턴을 떠났다고 들었습니다. 연락은 되시나요?”

    잭의 이번 사건은 SHJ의 핵심인원들과 윌리엄만 알고 있었지만, 잭은 부담을 느꼈는지 서둘러 휴스턴을 떠나고 말았다. KBR을 그만두고 나왔다는 소식에 잭을 스카우트하기 위해 많은 기업들이 접근을 해왔지만, 잭은 이를 마다하고 플랜트업계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연락이 되지 않고 있어요. 당분간 잭을 찾기는 힘들 거 같습니다.”

    자신이 SHJ에 합류한 이후 잭이 변했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린다도 마음이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사장님 탓이 아니니 너무 자책하지 마십시오. 저희 SHJ에겐 내년도가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만큼 사장님의 이런 모습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황태수는 아직도 잭을 신경 쓰는 경환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잭과의 관계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잭으로 인해 큰 곤욕을 당했던 기억을 황태수는 쉽게 잊을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좋게 시작된 인연이라 쉽게 놓치지 싫었나 봅니다. 업무내용을 보고해 주십시오.”

    경환은 잭과의 인연을 다음기회로 넘기로 빠르게 업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경환의 이런 모습에 안도를 한 황태수는 빠르게 보고서를 펼쳐 들었다.

    “이번 FPSO 성공으로 저희는 자금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울러 내년도 사업 확장도 탄력을 받게 되었고요. 지금 시급한 부분은 인력의 보충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대대적인 인력 확충을 해야 될 거 같습니다.”

    “저도 황 부사장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인원이 없는 관계로 에릭을 퀄컴에 파견 보냈지만, 에릭을 불러들이기 위해서는 인원 보충이 필요합니다.”

    황태수의 첫 보고에 린다 또한 수긍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최소한의 인원으로 업무를 진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직원들의 업무 과다로 피로도는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경환 또한 이 문제에 대해 시급히 처리할 뜻을 보였다.

    “좋습니다. 저도 두 분과 같은 의견입니다. 필요한 인원에 대한 확충은 두 분 주관으로 선별을 하시기 바랍니다. 자금은 언제 들어올 예정인가요?”

    “TOTAL과 계약이 완료되었기 때문에 내년 2월이면 자금이 입금 될 예정입니다.”

    경환은 KBR-대현중공업 J.V에 참여하면서 입찰 성공에 따른 컨설팅비용을 발주처와의 계약과 동시에 일시불로 받기로 했다. 1억5천만 불은 SHJ에겐 크고 중요했지만, KBR이나 대현중공업에게는 큰 무리가 따르지 않는 금액이었기 때문에 두 회사는 경환의 조건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가능하면 2월에 맞춰 인원확충을 마무리하시기 바랍니다. 들어올 자금 중에서 5천만 불을 제외한 1억불은 투자부분에 집중을 하겠습니다. 쿡 부사장님은 투자에 대한 보고서는 바로 준비를 해 주십시오.”

    경환의 말에 황태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보였다. 한화로 700억 원이나 하는 돈을 눈 한번 깜짝거리지 않고 확실한 결과가 보장되지도 않은 투자에 집중하겠다는 말을 이해하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황태수는 반대를 할 수도 없었다. 지금까지 누구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경환의 예감과 추진력으로 성공을 시켜 왔기에 이번 결정도 그런 경환을 믿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이미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조만간 보고서를 제출하겠습니다.”

    황태수와는 반대로 린다는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는 사실에 밝은 표정을 보이고 있었다.

    “KBR과의 관계가 예전 같지 않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저희도 KBR의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본격적으로 컨설팅업무를 확대해 나가십시오. 이 업무는 황 부사장님의 재량에 맡기겠습니다.”

    경환의 한마디에 황태수는 숨통이 트이는 것을 느꼈다. 물밀듯이 들어오고 있는 기업들의 러브콜을 언제까지 거절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황태수 또한 이번이 KBR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날 절호의 기회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기업의 생존과 이익에 있어 어제의 적도 오늘의 아군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FPSO 입찰 성공에 따라 동종업계의 합작제의로 인해 업무가 마비될 정도입니다. 우선 적극적으로 합작제의를 하고 있는 KENTZ와 대현그룹을 시작으로 추진을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십시오. 당분간은 제 정보력으로 황 부사장님을 돕겠습니다. 그러나 정보력에 의지하지 않고 SHJ가 자력으로 컨설팅을 할 수 있게끔 황 부사장님이 힘을 써 주십시오.”

    경환의 정보가 없었다면 그 동안의 입찰 성공은 힘들었던 게 사실이었다. 경환은 자신의 회귀로 인해 바뀌어가는 상황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SHJ의 자생력확보를 시급한 과제로 보고 있었다.

    “그 점을 최우선으로 놓고 조직을 확대 개편할 생각입니다. 아울러 SHJ이란 프리미엄을 가지고 컨설팅 비용을 올리기 보다는 특수플랜트의 설계부분과 기술력을 확보하는 데 신경을 쓸 생각입니다. SHJ-화성플랜트를 좀 더 키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경환은 자신이 생각하지 못한 부분까지 준비를 하고 있는 황태수를 보며 감탄하고 있었다. 오성건설의 해외입찰을 반석 위에 올려놓았던 황태수는 과연 명불허전이라고 생각한 경환은 황태수의 의견에 적극 동의를 할 수밖에 없었다.

    “SHJ-화성 플랜트의 공장 확장 건의는 수용해 주십시오. 일반 플랜트보다는 특수플랜트 쪽으로 전환을 해서 진행을 하도록 지시해 주세요.”

    최승호의 지원을 받은 박화수는 탁월한 경영능력을 보이며 차입금을 모두 상환하고 늘어나는 물량을 처리하기 위해 공장 확장을 건의해 놓고 있었다. 입찰을 성공시켰고 업무합작을 원하는 기업들이 많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거절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리고 제가 제안을 하다 드리겠습니다. 이번 FPSO 입찰까지 직원들의 많은 노력이 있었다고 봅니다. 많지는 않더라도 모든 직원들에게 성과급을 지급해 주십시오. 일반직원들은 아직까지는 SHJ에 대한 소속감은 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돈으로 환심을 사는 건 좋지 않지만, 개인생활이 필요한 직원들에게는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전 직원에게 성과급을 지급하겠다는 경환의 말을 개인에 대한 성과를 중요시하는 미국기업문화에 익숙한 린다는 쉽게 이해를 하지 못했지만, 반대를 하지는 않았다. 경환이 생각하는 방식이 직원의 소속감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좋은 방안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쿡 부사장님, 지난번 지시했던 스톡옵션을 빨리 진행을 하십시오. 에릭과 코이치는 아직 시기상조라고 생각하니 우선 두 분에겐 3%, 최석현 차장, 박화수 사장, 김창동 부장에겐 2%의 자격을 부여하도록 하겠습니다.”

    자본금 3백만 불로 시작한 SHJ의 지분 3%는 단순계산상으로 9만 불에 해당하는 소액이지만, 성장해 나가는 SHJ의 미래를 생각했을 때 그 가치는 계산을 할 수 없는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린다와 황태수는 스톡옵션을 결정한 경환을 놀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성장이 확실한 SHJ의 지분 12%를 직원들에게 준다는 것은 자신들의 머리로는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타케우치 차장은 요새 어떻습니까?”

    경환의 속뜻을 알고 있는 황태수는 급히 경환의 말을 받았다.

    “그 친구 보면 볼수록 대단한 친구입니다. 사장님께서 지시하신 JSC와의 경쟁을 위해 정신이 없습니다. 거기에 미쓰비시중공업까지 추가를 해서, 10시 전에 퇴근하는 모습을 보기 힘듭니다. 그 친구 부인을 보기 민망할 정도이니, 사장님께서 말씀 좀 하셔야겠습니다.”

    “직속상관이 황 부사장님인데 제가 왜 말을 합니까? 부하직원을 죽이던 살리던 그건 알아서 하세요.”

    경환이 시치미를 떼자 황태수는 난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회사가 커질 것에 대비해서 모든 것을 자신이 결정해 나갈 수 없다는 것을 느낀 경환은 황태수와 린다에게 일정부분 힘을 심어줄 계획을 하고 있었다. SHJ는 그렇게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며 숨고르기에 들어갔다.

    서울의 무교동 빌딩숲으로 하루 일과를 마감하고 지친 몸을 이끌고 퇴근을 하는 직장인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 빌딩숲 사이로 정권실세의 아들이 운영하는 자칭 ‘무교동 사무실’에는 고급 승용차 한대가 빠르게 주차를 하고 있었다.

    “소장님, 김 차장께서 오셨습니다.”

    여 비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환한 웃음으로 보이며 전형섭 안기부 운영차장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소장님, 저 전형섭입니다. 연락을 받고 급히 찾아 왔습니다.”

    “잘 오셨습니다. 어서 자리에 앉으세요. 왕 비서는 커피 좀 부탁해요.”

    늘씬한 여 비서의 엉덩이를 보며 입맛을 다시던 전형섭은 각을 세우며 급히 자리에 앉았다. 지난번 대선의 브레인역할을 수행한 무교동 사무실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한 덕분에 안기부 내에서 탄탄한 입지를 구축하고 있는 전형섭은 소장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는 김수철을 하늘처럼 떠받들고 있었다. 여 비서가 커피를 탁자에 놓고 나가자 전형섭은 자세를 바로 하며 급히 말문을 열었다.

    “소장님께서 부탁하신 자료를 휴스턴영사관을 통해 확보를 했습니다.”

    전형섭이 전한 서류를 김수철은 급히 꼼꼼히 살피기 시작했다.

    “흠~, 아주 놀랍네요. 단시간 내에 이렇게 성장을 할 수 있다니, 대단한 친구라고 밖에는 딱히 표현 할 수가 없겠네요.”

    “그렇습니다. 전 정권에 의해서 중국유학을 보낼 때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중국정부의 신임을 받으면서 급성장을 시작한 거 같습니다. 플랜트업계에서는 SHJ와의 업무합작에 혈안이 되어 있을 정도라고 합니다.”

    체신부를 통해 한국인이 사장으로 있는 SHJ가 퀄컴의 지분 6%를 인수하고 한국의 CDMA 권리 40%를 확보했다는 보고를 받고, 김수철은 SHJ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도록 김형섭에 지시를 했었다. 이권사업에 개입을 하면서 정치자금과 비자금을 확보하고 있었던 김수철에게는 국책사업으로 진행하고 있는 이동통신 사업에 관심을 보이는 와중에 SHJ라는 기업의 사장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주목했다.

    “허, 참. 사장이 아직 20대로 젊네요. 자금의 출처는 확인이 되셨나요?”

    “그렇습니다. 홍콩에 법인을 두고 있는데, 유연탄 사업을 통해 자금을 확보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딱히 불법적인 내용은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김형섭의 보고에 김수철을 인상을 찌푸렸다. 비집고 들어갈 자리가 있어야만 했다. 김수철의 심기가 좋지 못하다는 것을 느낀 김형섭은 급히 몸을 숙여 김수철에게도 향했다.

    “그런데 좋은 정보가 하나 있습니다. 예전 화성산업이란 곳이 SHJ의 사장인 이경환이란 친구에게 10%의 지분을 무상으로 양도한 사실이 있었는데 이것을 이용하면 어떻겠습니까? SHJ란 곳이 화성산업을 인수하는 과정을 조사하면서 밝혀진 내용입니다.”

    김수철은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이기 시작했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곳은 없다는 생각이 그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좀 더 세부적인 내용을 조사해 보세요. 이동통신 사업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될 겁니다. SHJ란 기업이 미국기업인 줄 알았는데 한국인이 사장일 줄을 전혀 몰랐습니다. 김 차장님 덕분에 좋은 정보를 알게 되었으니 오늘은 술 한 잔 거하게 대접을 해야겠습니다. 하하하.”

    경환의 생각과는 다르게 일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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