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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인생-87화 (64/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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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인생 - 87

    나이지리아 아부자를 다시 찾은 황태수와 잭은 작년에 있었던 석유화학단지 입찰을 생각하며 감회에 빠져 있었다. 작년과 마찬가지로 아부자 힐튼호텔은 이번 입찰을 준비하는 많은 업체들의 실무 팀들이 모여 들어서인지 북적거리고 있었다.

    “이곳의 습한 더위를 정말 참기 힘드네요. 이런 날씨를 견디는 잭이 부럽습니다.”

    황태수는 여전히 나이지리아의 더위에 맥을 못 추고 있었다. 잭은 황태수의 어깨를 툭 치고는 레스토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더위엔 시원한 맥주만한 게 없습니다. 맥주나 한잔 합시다.”

    황태수는 레스토랑에 들어가며 작년 대후건설 김준성 상무와의 만남을 기억하고는 ‘피식’ 웃어 보였다. 작년 입찰 실패의 후유증이 크긴 했지만, 김준성은 대후건설 핵심에서 밀려나지는 않았다. 오히려 실패를 거울삼아 적극적으로 해외입찰에 뛰어 들고 있다는 소리에 황태수는 김준성과의 재회를 은근히 바라고 있었다.

    “그나저나 윌리엄과 제임스까지 이곳에 온다니, 입찰에 실패하면 저희나 SHJ나 여파가 상당하겠는데요?”

    갑작스런 두 사람의 현지방문통보를 받고 황태수와 잭은 급히 맞을 준비를 했지만, 이유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

    “TOTAL과의 업무협조와 2년 후에 있을 제3기에 대한 작업을 미리 하려는 포석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흠……,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나저나 힘들게 고생해서 이 자리까지 왔으니 반드시 성사를 시키도록 최선을 다해 봅시다.”

    일주일 전에 도착한 입찰 실무 팀들은 경쟁업체들의 동향파악과 나이지리아정부와의 물밑교섭 등으로 파김치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렇다고 일 년에 걸쳐 준비한 이번 입찰을 소홀히 대할 수 없었기에 각자 맡은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맥주를 거의 다 비워갈 무렵, 호텔을 들어서는 윌리엄과 경환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더위에 고생들 많으십니다. 내일이면 그 고생을 보상받으실 수 있으시니, 하루만 더 힘을 내 주십시오.”

    경환은 호텔로비에서 자신과 윌리엄을 맞아주는 실무 팀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며 그들의 고생을 위문해 주고 있었다. 경환의 곁으로 잭이 빠르게 건너왔다.

    “제임스, 깜작 놀랐습니다. 갑자기 여긴 어떻게 오게 된 겁니까?”

    잭은 경환과 악수를 나누며 이해하지 힘들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잭을 향해 경환은 환하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잭, SHJ의 사장이 되어서 현지에 한 번도 안 간다는 게 맘에 걸렸습니다. 입찰현장의 긴박감을 몸으로 느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생각도 되고요.”

    잭은 경환의 말이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끄떡였다. 그러나 경환은 전생이었기는 하지만, 이런 입찰을 수도 없이 했던 경험으로 현장의 분위기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단지 그런 사실을 말해 줄 수 없을 뿐이었다.

    “잭, 수고 많았어. 특별한 문제없이 자네가 팀을 잘 이끌어 주고 있다는 소리는 듣고 있었네. 오늘저녁은 팀원들과 함께 즐기고 싶으니 자네가 준비를 좀 해주게.”

    더위를 먹었는지 윌리엄의 몸 전체는 땀으로 범벅이 되어있었다. 잭에게 저녁준비를 요청한 윌리엄은 방 열쇠가 도착하자 이곳의 더위를 견디지 못하고 자신의 방을 찾아 급히 사라졌다. 경환은 주위를 둘러보다 동양인들이 모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쪽을 향해 서서히 걸어갔다.

    “혹시 미쓰비시중공업에서 나오셨습니까? 저는 SHJ의 사장 이경환이라고 합니다.”

    경환은 로비한구석에 모여 있는 동양인들 중에서 지시를 내리고 있는 인물에서 인사를 건넸다. 느닷없는 경환의 출현에 당황한 동양인들은 대꾸도 못한 채 서로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아! 그러시군요. 저는 미쓰비시중공업의 모모이 아키라 상무입니다. SHJ에 대해선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저희의 컨설팅업무에 대해서도 협의를 했으면 합니다.”

    아키라는 소개를 하는 인물이 경환이라는 사실에 놀랐는지, 명함을 건네는 것도 잊은 채 경환이 내민 손을 잡았다.

    “하하하, 저희야 감사할 따름입니다. 아무쪼록 이번 입찰에 좋은 결과가 있으시길 바랍니다. 저희도 나름 준비를 하긴 했지만, 미쓰비시중공업을 이길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경환의 죽는 소리에 아키라는 속으로 경환을 비웃고 있었다. 이미 KBR의 움직임을 자신의 손에 쥐고 있는 이상 경환의 거들먹거리는 모습이 우습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SHJ의 놀라운 정보력은 아키라도 인정을 해 줄 수밖에 없었다. 2천만 불이라는 거금을 쓰지 않았다면 이번 입찰은 KBR의 차지가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로 아키라는 이번 입찰을 성공시킨 후에 SHJ와의 업무제휴를 진지하게 검토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좋은 경쟁을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저도 SHJ의 선전을 기대하겠습니다. 입찰이 끝나고 정식으로 SHJ에 제안을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연락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저는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어 이만 자리로 돌아가겠습니다.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경환은 웃으며 악수를 나눈 후 돌아서며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몸이 불편하다는 핑계로 윌리엄이 주최한 저녁식사도 거른 채 경환은 호텔방에서 내일 있을 입찰에 대해 생각을 정리를 하고 있었다. 자신의 예상이 빗나가기라도 한다면 비상을 준비하는 SHJ에겐 뼈아픈 타격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에 경환은 그날 밤 쉽게 잠을 청할 수 없었다.

    입찰이 진행되는 NNPC(나이지리아 석유공사)에는 여러 업체들의 입찰 팀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고, 그 사이로 KBR과 대현중공업의 팀원들이 부지런히 정보를 입수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경환은 다른 팀원들의 눈을 피해 윌리엄과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잭과 황태수는 자신들의 입찰 순서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 그들 곁으로 정상길이 다가가고 있었다.

    “하하하, KBR과 SHJ의 사장님이 현지를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저도 급하게 건너왔습니다. 다행히 입찰시간에 맞출 수 있었네요.”

    갑작스런 정상길의 출현에 다들 놀라고 있었지만, 경환과 윌리엄은 웃음을 보이며 정상길을 맞이했다.

    “잘 오셨습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준비는 마친 거 같네요.”

    다들 정상길의 출현에 놀라고 있었지만, 경환과 윌리엄은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정상길의 곁에 다가가고 있었다. 미쓰비시중공업의 입찰서류가 제출된 사실을 확인하고는 잭은 입찰서류를 제출하기 위해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잭, 일어나지 말고 잠시 기다리게.”

    자신의 어깨를 잡고 있는 윌리엄 때문에, 잭은 다시 자리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윌리엄, 무슨 일입니까? 지금 들어가지 않으면 늦을 수도 있습니다.”

    잭은 다시 일어나려 했지만, 윌리엄은 잭의 어깨를 쉽게 놔줄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입찰서류는 미스터 정이 제출을 할 거네. 자네가 가지고 있는 입찰서류는 나에게 건네주도록 하게.”

    잭은 이해를 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찰서류를 윌리엄에게 건네줄 수밖에 없었다. 경환의 눈짓을 확인한 정상길은 자신의 품에서 따로 준비를 한 듯 한 서류를 꺼내 들고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경환과 윌리엄은 입찰현장을 정상길에 맡기고 잭을 이끌고 급히 호텔을 향해 출발했다.

    맥주를 꺼내 잭에게 건넨 경환은 말할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혀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잭은 경환이 건네준 맥주를 받아 한 모금 넘기고는 허탈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하……, 일부러 두 사람이 반목하는 모습을 보여 준건가요?”

    “잭, 자네 일 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했었네. 앞날이 보장된 자네가 도대체 왜!”

    윌리엄은 양복 상의를 벗어 바닥에 던져버리고는 잭의 멱살을 거칠게 움켜쥐었지만, 이내 잡았던 손을 풀어버렸다. 출세를 위해 비열한 짓도 망설이지 않고 해왔지만, 잭에게 만큼은 자신의 진심을 보여줬다고 생각했다. 잭의 배신을 확인한 윌리엄은 요동치는 심장으로 인해 말을 잇지 못했다.

    “제임스 이번에도 자네가 알아차린 거겠지. 제임스 자넨 역시 대단해. 틈이 전혀 보이지 않으니……, 허, 허”

    허탈하게 웃는 잭을 경환은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잭의 절대적인 도움이 없었다면 자신이 이 자리까지 올 수 없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경환은 회환과 분노가 복잡하게 교차되고 있었다.

    “우리 쪽 정보가 일본 업체로 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TOTAL에서 알려주더군요. 정보가 샌프란시스코에서 교환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사립탐정까지 고용했습니다. 사실 잭의 사촌동생이 샌프란시스코에 살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도 반신반의 했습니다. 진심으로 사실이 아니길 바랐지만, 사촌동생을 통해 저희 정보가 미쓰비시중공업에 넘어가는 현장을 포착하고야 말았습니다.”

    경환은 잭에서 사진더미를 건네주었다. NIJIYA라는 마사지가게로 사촌동생이 들어가는 모습과 동양인이 카운터에서 서류를 받아가는 모습들이 찍혀있었다.

    “왜 그랬습니까?”

    “왜 그랬냐고? 하…. 자네가 무서웠네. 린다까지 자네의 곁으로 가는 것을 보고 지금 자네를 꺾지 않으면 내가 꺾일 거 같아 불안했어. 윌리엄 또한 자네로 인해 승승장구하는 모습은 나를 코너로 몰아 세웠어. 후회는 하지만, 자네에게 미안하다는 소리는 하지 않겠네. 어서 경찰에 날 넘기게.”

    잭은 모든 걸 포기한 사람처럼 눈동자의 초점까지 잃어버린 채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자네에 대한 배신감에 신고를 하려고 했지만, 제임스가 나에게 부탁을 했네. KBR은 이번 일을 전혀 알지 못하네. 그러나 자네를 계속 끌고 갈 수도 없으니 조용히 정리를 해서 떠나게. 내 인내심에 한계가 오기 전에.”

    “잭, 저는 항상 당신에게 고마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은 좋지 못한 일로 잠시 헤어지지만, 우리 인연이 여기서 끝났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꼭 다시 만나게 될 겁니다. 그때까지 몸 건강하십시오.”

    경환과 윌리엄의 의외의 결정에 잭은 눈을 감고 고개를 떨구었다. 한참을 망설이던 잭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을 나섰고, 경환은 축 쳐진 잭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NNPC에선 입찰결과를 기다리며 모두를 초조해 하고 있었다. 모두들 초조와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지만, 유독 미쓰비시중공업은 차분하게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중요한 시간에 이 사장과 유트 사장은 어디를 갔기에 나타나지도 않으니……”

    “이 부장, 거 너무 초치지 말고 자리에 좀 앉아있어요. 옆에 있는 일본 애들이 비웃습니다.”

    정상길의 말에 이한주는 고개를 숙이며 자리에 다시 앉았지만, 두근거리는 심장은 자신의 힘으로도 막을 수가 없었다. 아키라는 그런 대현중공업의 모습을 담담히 바라보며 슬쩍 웃음을 보였다.

    ‘니들은 아직 일본의 경쟁상대가 되지 못해. 입찰결과에 좌절할 때의 표정은 어쩔지 몹시 궁금하군. 흐흐흐’

    아키라가 즐거운 상상에 빠져 있을 때, 문이 열리고 NNPC와 TOTAL의 경영진들이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정상길의 주먹 쥔 손으로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지금까지 불모지였던 해양플랜트산업에 당당히 대현중공업의 명함을 내 밀수 있는지가 지금 이 순간에 결정된다는 사실에 정상길 또한 긴장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내가 정리되자 결과를 발표하기 위해 심사위원장이 단상에 올랐다.

    “조용히 해 주십시오. 입찰결과를 발표하겠습니다.”

    장내는 쥐 죽은 듯 적막감에 빠져 들었고 정상길의 입 속의 침까지 바싹 말라가고 있었다. 그런 정상길과는 대조적으로 아키라는 눈을 지그시 감고 팔짱을 낀 채로 입찰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 입찰의 1순위는 43억 불을 입찰한 KBR-대현중공업 J.V입니다. 2순위는 미쓰비시중공업-미쓰이조선 J.V로 입찰가는 43억5천만 불입니다. 3순위는 페드로팍으로…….”

    결과발표에 황태수를 비롯한 KBR과 대현중공업 직원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했고, 정상길은 주먹을 한번 쥐어 보이고는 황태수를 찾아 뜨거운 악수를 나누었다.

    “정 사장님, 축하 합니다. 그 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하하하, 이게 저 혼자 축하 받을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 자리에 이경환 사장과 유트 사장이 없어 아쉬울 따름입니다. 오늘은 너무 감격스러워서 이대로는 잠을 못 자겠습니다. 그리고 지난번 제안했던 대현그룹과 SHJ의 일은 하루라도 빨리 진행이 되게끔 사장님을 설득해 주십시오.”

    말을 마친 정상길은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주변사람들과 악수를 나누며 축하 인사를 받기에 정신이 없었다. 풀 죽은 미쓰비시중공업의 직원들 사이로 아키라는 이번 결과가 믿어지지 않는 다는 듯 멍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있었다.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거냐고! 이건 사실이 아니야. 사실이 아니라고!’

    이천만 불이라는 돈을 허공에 날렸다는 문제보다도 자신의 끈이 떨어져 나갔다는 것에 아키라는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아키라의 눈앞으로 분노하는 치히로의 모습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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