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86화 (63/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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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인생 - 86

    PQ를 마친 FPSO 입찰은 예상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KBR-대현중공업, 미쓰비시중공업-미쓰이조선, 페드로팍 삼파전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기술력에서는 페드로팍이 앞서고 있었지만, 최저가 입찰을 준비하고 있는 나머지 두 회사의 반격도 무시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세 회사는 경쟁 상대들의 눈치를 살피며 치열하게 물밑작전을 펼치고 있었기 때문에 낙찰을 쉽게 낙관하는 회사는 아무 곳도 없었다.

    그러나 윌리엄과 경환의 반목으로 인해, KBR과 SHJ의 관계는 갈수록 악화되어만 가고 있었다. 공식 회의석상에서조차 상대방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어 자칫 입찰에 실패하는 거 아니냐는 우려의 말이 사방에서 들릴 정도였다. 잭과 황태수는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으로 윌리엄과 경환을 보좌하고 있었지만, 두 사람의 틀어져 버린 관계를 복원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T.S, 입찰이 코앞으로 다가왔는데, 두 사람의 관계가 원상복귀 되지 않는다면 낙찰을 쉽게 장담할 수 없는데 정말 걱정입니다.”

    윌리엄과 경환의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 잭은 황태수에 개인적인 만남을 요청을 했다. 황태수 또한 입찰을 한 달여밖에 남지 않은 상태에서 지금의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에 잭의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잭, 어디서부터 둘이 틀어지기 시작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앞이 안보이네요.”

    황태수는 심한 편두통으로 인해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눌러가며 탄식을 토해내고 있었다. 지속적으로 경환에게 자중해달라는 요청을 하고 있었지만, 경환은 황태수의 조언에도 태도에 변화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윌리엄은 이번 입찰을 끝으로 SHJ와의 컨설팅제휴를 종료하겠다는 말을 심심치 않게 꺼내고 있습니다. 이러다간 그 동안 쌓아 올린 두 회사의 신뢰가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 둘이라도 중심을 잡아야 될 거 같습니다.”

    잭의 말에 황태수는 미간을 좁히고 있었다. 사업을 확장하려는 계획은 가지고 있었지만, 당분간의 KBR이라는 울타리가 SHJ에게는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경환은 이런 KBR의 분위기를 알면서도 개의치 않겠다는 뜻으로 보이고 있어 황태수를 더욱 답답하게 만들고 있었다.

    “흠, 저희도 KBR의 이런 분위기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중입니다. 지금은 KBR이나 SHJ 모두 자중을 해야 될 시기입니다. 이런 문제는 입찰이 끝나고 논의가 되어야 됩니다. 잭이 미스터 유트를 최대한 설득을 해 주십시오. 부탁합니다.”

    “좋습니다. 제가 윌리엄을 최대한 설득을 하겠습니다. T.S도 제임스를 입찰이 끝날 때까지 만이라도 윌리엄과의 언쟁을 자제하도록 해 주십시오.”

    윌리엄의 욕심에서 비롯된 경환과의 갈등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져 있음을 잭은 알고 있었다. 윌리엄의 분위기로는 이번 입찰결과에 상관없이 SHJ와의 계약종료를 기정사실화하고 있어 잭의 마음은 무거워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 입찰이 끝날 때까지는 윌리엄을 최대한 붙들고 있어야만 했다. 자신의 손으로 SHJ와의 업무제휴를 만들어 낸 잭으로서도 SHJ와의 계약종료는 아쉬움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SHJ에서는 페드로팍과 미쓰비시중공업에 대한 정보는 아직 없습니까? SHJ에서 넘어오는 정보가 한정이 되어 있다 보니 윌리엄이 더 초조해 한 거 같습니다.”

    잭은 두 사람의 관계가 극악으로 치닫고 있었지만, 자신이 해야 될 일에 대해선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저희 사장님께서 정보를 입수하고 계십니다. 조만간 소식을 드릴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저와 잭이 나이지리아로 넘어가기 전에는 KBR에도 전달이 될 겁니다.”

    황태수의 답변에 잭은 예상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떡였다. 경환의 성격으로 지금 정보를 공유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걸 잭은 그 동안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잭과 황태수는 현명한 결정을 하기 위해 서로 머리를 맞대고 있었지만, 만족할 만한 결과를 만들지는 못하고 있었다.

    입찰이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자 SHJ도 전사적으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내일 있을 세 회사와의 회의를 준비하는 경환은 입찰로 인한 스트레스로 극도로 날카로워져 있었다. 집에서도 쉬지를 못하는 모습에 수정은 안타까워했지만, 경환은 이번 입찰에 목숨이라도 건듯 서재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자기, 좀 쉬면서 해요. 그리고 당분간 새벽에 일부러 일어나지 말고요.”

    수정은 조용히 서재에 들어와 커피한잔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경환은 수정이 서재에 들어온 것조차도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서류에 집중을 하고 있었다.

    “자기 들어온 것도 몰랐네. 마침 커피한잔이 그리웠는데 역시 자긴 내 마누라야.”

    경환은 서류를 내려놓고 수정의 허리를 손으로 감싸 수정을 자신의 무릎에 앉도록 했다. 그 동안 입찰 때문에 매일 야근을 하다 보니 집안일을 모두 수정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던 경환은 한마디도 불평을 하지 않는 수정이 고마웠다.

    “치, 자기 립서비스는 내가 당할 수가 없다니까. 이번 일이 끝나면 자기 쉬어야 돼요. 정우 데리고 며칠 바람이라도 쐬러 가요.”

    “그래, 급한 일 끝나면 며칠 여행이라도 다녀오자.”

    결혼 후에도 급히 중국에 들어가는 바람에 신혼여행도 가지 못했고 미국에 와서도 휴스턴 밖으로 나가 본 적이 없었다. 가족을 위해 일을 한다고는 하지만, 일에만 매달리는 것은 분명 자신이 바라던 삶은 아니란 사실이 문뜩 경환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수정아. 좀만 기다려줘. 지금은 나를 믿고 와준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손에서 일을 놓을 수가 없어. 이번 일이 끝나면 여유를 생길 거야.”

    수정은 경환의 목을 손으로 감싸며 머리를 경환의 어깨에 기댔다. 수정의 머리카락에서 가늘게 흩어지는 샴푸냄새는 경환을 취하게 만들었고 경환은 수정의 머리에 입을 맞췄다.

    KBR 회의실에는 세 회사의 중역이 모여 최종 입찰점검을 위한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지만, 이번 입찰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윌리엄과 경환은 여전히 한랭전선이 흐르고 있었다.

    “이번 회의를 마치고 실무진들이 현지로 떠난다고 들었습니다. 아무쪼록 그 동안의 고생이 헛되지 않게 좋은 결과가 나오기를 희망합니다. 분위기를 풀고자 제가 모두발언을 했습니다.”

    정상길이 헛웃음을 보이며 회의를 시작을 알렸다. 대현중공업은 이번 입찰에 큰 기대를 하고는 있었지만, 입찰의 성공여부 보다는 LNG선박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FPSO에 대한 기술력을 확보했다는 것에 큰 의의를 두고 있었다. FPSO 입찰이 이번 한번만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번 J.V에 참여한 세 회사 중에서 가장 큰 수혜를 받은 것은 단연 대현중공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회의는 민인식으로부터 FPSO에 대한 설계와 기술개발을 마쳤다는 보고로 시작되었고 그 동안의 과정과 미래 해양플랜트산업의 비전제시를 하는 것으로 긴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SHJ에서는 따로 저희에게 제공할 정보가 있는지 궁금하군요.”

    퉁명스럽게 말을 건네는 윌리엄을 경환은 짜증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밥값을 하라는 무언의 압력에 경환은 마이크에 입을 가져다 댔다.

    “지금부터 제가 말할 내용은 보안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원을 최소화 하겠습니다. 죄송하지만, 회의를 정리하고 따로 자리를 마련하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경환의 말에 수긍을 하며 회의에 참석한 기술 인력들과 각 회사의 입찰 팀들은 급히 회의실을 빠져나갔고, 회의실에는 회사별로 두세 명 정도의 인원만 남았다.

    “대단히 중요한 정보라도 입수를 했나 봅니다. 긴장되는데요. 하하하.”

    정상길의 농담에 따라 웃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회의실엔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경환은 회의에 참석한 인원들과 한 번씩 눈을 마주친 후 마이크도 끈 채 입을 열기 시작했다.

    “입찰 팀은 잭의 주관아래 내일 현지로 떠난다고 들었습니다. 맞나요?”

    “그렇습니다. 각 회사의 인원들을 제가 통솔하게 된 걸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이번 입찰이 성공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경환의 질문을 잭이 받아 급히 답변을 했다. 잭의 옆에서 윌리엄은 뭔 서론이 그리 기냐는 듯이 입 꼬리를 말아 올리고 있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드리는 정보는 입찰이 끝나기 전까지 철저하게 보안을 유지해 주십시오. 경쟁업체에 이 정보가 노출이 된다면 입찰 성공을 자신할 수 없습니다.”

    “SHJ는 너무 걱정이 많아서 탈입니다. KBR이나 대현중공업이나 실패를 하려고 지금까지 고생을 했다고 생각합니까? 줄 정보가 있으면 빨리 주세요.”

    윌리엄은 뭐가 언짢은지 경환을 다시 도발하기 시작했지만, 경환은 얼굴을 한번 찡그리는 것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시했다.

    “여기 남아 있는 사람들은 각 회사에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봅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이사장님.”

    정상길까지 윌리엄의 말을 받아 경환을 압박하자 경환은 한숨을 한번 내 쉬고는 말을 이어갔다.

    “좋습니다. 이번 입찰의 경쟁상대는 영국의 페드로팍과 일본의 미쓰비시중공업입니다. 두 회사의 입찰가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TOTAL의 예정 가는 38억 불인 것은 아시리라 봅니다. 패드로팍은 총 45억7천만 불로 준비를 하고 있고, 미쓰비시중공업은 45억 불로 입찰을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경환의 말에 끝나자 회의실은 순간적으로 정적에 싸였다. 이 분위기를 정상길이 깨고 나섰다.

    “우리의 원가계산으로는 42억 불 선에서 가능하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SHJ의 정보를 활용한다면 큰 이익을 볼 수도 있겠습니다. 하하하.”

    윌리엄은 미소를 보이며 수지타산을 머릿속으로 계산하기 시작했다. 정상길의 말대로 45억 불에서 몇 백만 불 빼준다 해도 엄청난 이득을 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최대한 45억 불 근사치로만 입찰을 하면 되겠군요.”

    “그럼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정상길과 윌리엄이 환상에 빠져있을 때 경환이 급히 그들의 말을 끊었다. 두 사람은 영문을 몰라 경환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이유를 설명하라는 눈빛을 보내기 시작했다.

    “TOTAL의 입장도 생각을 해 줘야 됩니다. 또한 우리는 FPSO에 대한 실적이 전혀 없는 관계로 TOTAL에 메리트를 제공하지 못한다면 2순위나 3순위로 수주가 넘어갈 수도 있고 최악의 경우 입찰 무산을 선언할 수도 있습니다.”

    경환은 잠시 말을 끊었다. 주위를 살피며 자신의 말에 수긍하는 모습을 확인한 후에야 다시 말을 이어갔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2순위와는 적어도 1억불 정도의 차이를 보여야만 합니다. 따라서 44억불로 입찰을 하는 게 좋다는 것이 SHJ의 의견입니다.”

    KBR J.V의 입찰가격이 44억불로 정해지는 순간이었다. 경환의 판단에 윌리엄이나 정상길은 토를 달지 않았다. 이미 원가분석으로 42억불이 나온 이상 44억불로 입찰에 성공을 하게 되더라도 2억불을 앉아서 벌 수 있다는 계산이 나와서였다.

    그날 저녁 샌프란시스코 NIJIYA로 양복을 차려 입은 동양인이 급히 문을 열고 들어가고 있었다. 가게를 두리번거리던 사내는 급히 카운터를 향해 백 불짜리 지폐 다섯 장을 올려놓았다.

    “일본에서 왔습니다. 저에게 주실 봉투가 있으시죠?”

    카운터의 종업원은 백 불짜리 지폐를 하나하나 확인을 한 후 허연 이빨을 보이며 사내를 보며 웃어 보이고는 밑에서 밀봉된 서류봉투를 꺼내 건네주었다. 서류를 건네받은 사내는 내용물을 확인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급히 가게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사장님, 저 아키라입니다.”

    아키라가 노크할 새도 없이 사장실 문을 열고 들어오자 치히로는 예상을 했다는 듯이 아키라가 건네주는 서류를 확인해가며 입가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허, 이거 참. SHJ란 곳의 정보력이 무섭긴 무섭구먼. 우리 입찰가를 정확히 파악을 하고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야. 자네는 어디서 우리정보가 유출 되고 있는지 서둘러 확인해보게.”

    치히로는 서류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들의 입찰가 45억 불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는 거 이외에 KBR이 44억 불로 입찰을 해야만 되는 이유가 설득력이 있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흠, 우리가 사전에 이런 정보를 입수하지 못했다면, 이번 입찰은 게임자체가 안 되는 싸움이었겠어.”

    “그렇습니다. SHJ란 곳을 만만하게 보지 않고 미리 대비를 한 것이 천만다행입니다. 사장님의 현명하신 판단이 없었다면 눈 뜨고 KBR에 넘겨 줄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럼 저희는 어느 선에서 입찰을 하는 게 좋겠습니까?”

    치히로는 서류를 쳐다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역정보에 대한 걱정을 하긴 했지만 역정보라고 보기에는 1억불 차이를 보이는 근거가 타당해 보였다. 그러나 항상 대비는 해야만 했다.

    “우리의 마지노선이 43억 불이니 43억 5천만 불로 입찰을 하도록 해. 오천만 불정도 차이를 보여야 안심을 할 수 있겠어.”

    “알겠습니다. 저는 바로 나이지리아로 출발을 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아키라는 서둘러 사무실을 빠져 나갔고, 치히로는 서류를 분쇄기에 넣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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