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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인생-85화 (62/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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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인생 - 85

    늦은 밤인데도 불구하고 SHJ 사무실은 불이 꺼지지 않고 있었다. 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휴스턴의 밤은 그지없이 평온하였지만, 경환의 머리는 복잡해져만 갔다. 이번 FPSO 프로젝트는 앞만 보고 달려온 경환에게 결코 실패를 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입찰이기에 내부 정보가 새어나가고 있다는 뱅상의 말은 경환에겐 충격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KBR이나 대현중공업, 최악의 경우 SHJ도 의심을 해봐야 될 상황이었다. 경환은 타 들어가는 담배를 입에 물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입을 굳게 닫은 채, 유리창 밑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승용차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제임스, 늦은 시간에 급한 일이란 게 뭐에요?”

    집에서 쉬고 있던 린다는 경환의 호출을 받고 급히 서둘러 사무실에 오느라 옷도 제대로 갖춰 입지 못한 상태였다.

    “린다, 황 부사장님이 도착할 때까지만 잠시 기다려 줘요. 아직 생각이 정리가 되지 않아서요. 미안해요.”

    경환은 린다를 바라보지도 않고 유리창 밖으로 향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린다는 조용히 소파에 앉아 심각하게 굳어있는 경환의 표정을 물끄러미 살필 수밖에 없었다. 시간은 더디게만 흘러가고 있었다.

    경환은 뱅상과의 개인적인 만난 후 SHJ의 내부 또한 의심선상에 두고 고민을 했지만, 곧 이런 생각을 지워버렸다. 자신의 판단에 의해 SHJ에 합류한 사람들까지 의심했다는 사실이 경환으로 하여금 심한 부끄러움을 느끼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설령 SHJ의 내부인물로 인해 정보가 빠져나가고 이 프로젝트를 실패한다 하더라도, 경환은 자신이 그 책임을 모두 안고 갈 다짐을 하고 있었다. 지금 SHJ는 경환 혼자의 힘이 아닌 이들과 함께 성장을 시켜 나가야 될 미래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미래를 이들과 같이 하겠다는 확신을 포기하게 된다면 이쯤에서 SHJ가 사라지는 게 오히려 좋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경환은 하고 있었다.

    “제임스, 커피 한잔 마셔요. 너무 심각해 보이는 군요.”

    경환이 걱정스러웠던지 린다는 자신이 직접 내린 커피를 건네주며 경환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경환과의 마지막으로 나눈 입맞춤을 항상 마음에 간직하고 있었지만, 결코 겉으로 내색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쓸쓸해 보이는 경환의 뒷모습은 린다의 감춰두었던 감정을 꿈틀거리게 만들고 있었다.

    “고마워요. 잘 마실게요. 지금은 제가 경황이 없네요.”

    경환은 린다가 건네준 커피를 목으로 넘겼다. 뜨거운 커피가 기도를 타고 흘러 들어가자, 종일 긴장에 절어있던 몸이 풀어지며 피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처진 몸을 이끌고 소파에 앉으려 할 때 급히 사무실 문을 열고 황태수가 들어왔다.

    “사장님, 만찬 중간에 나올 수 없어 좀 늦었습니다.”

    황태수는 숨을 헐떡거리며 급히 소파에 앉아 린다가 건네주는 커피를 받아 들었다. 경환은 이들을 의심했다는 생각에 미안함을 느끼며 무겁게 닫혔던 입을 열었다.

    “두 분을 급하게 부른 이유는 이번 FPSO 입찰에 대한 우리 쪽 정보가 경쟁업체인 미쓰비시중공업으로 빠져 나가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네? 일본으로요? 그런 말도 안 되는…….”

    이번 입찰을 반드시 성사시켜야 될 SHJ에겐 청천병력과 같은 소리였다. 황태수와 린다는 경환의 말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한 표정을 지으며 두 사람의 얼굴은 굳어져 가고 있었다.

    “TOTAL에서 확인을 해 준 정보입니다. 일본의 미쓰비시중공업도 이번 입찰에 FPSO 두 기가 동시에 나온다는 정보를 알고 있다고 하더군요. 발주처의 예정 가를 포함해서요.”

    황태수는 주먹을 쥐어 입술에 가져다 대고는 어금니를 깊게 깨물었다. 린다는 급히 경환을 향해 입을 열었다.

    “TOTAL이나 나이지리아정부에서 빠져 나간 정보일 수도 있지 않나요?”

    “그건 아니라고 봅니다. 이 정보는 아직은 TOTAL 내부에만 국한되어 있는 정보입니다. 나이지리아정부는 알 수가 없다는 얘기죠. 제 생각으로는 TOTAL에서 정보가 흘러나가지는 않았을 겁니다. 이런 상황을 종합해 본다면 KBR이나 대현중공업밖에는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경환의 상황판단에 린다와 황태수는 반박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는 두 사람에게 경환은 무겁게 말을 건넸다.

    “무턱대고 KBR이나 대현중공업을 의심할 수도 없는 문제입니다. 그렇다 보니 우리의 대응방법을 마련하기도 지금으로서는 어려운 점이 있다고 보고요. 두 분의 의견은 어떠십니까?”

    경환은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좀 전과는 다르게 불안했던 마음이 가라앉으며 침착해져 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정보가 유출되는 곳을 모르는 상태에서 KBR과 대현중공업에 이 사실을 통보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

    황태수는 말을 잇지 못하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심증도 없는 상태에서 무턱대고 두 회사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볼 수도 없는 문제였기 때문에, SHJ로서도 쉽게 대처를 할 수 없는 지금의 상황이 황태수를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기업정보유출은 FBI에서도 중시하고 있는 범죄입니다. FBI에 의뢰를 하는 건 어떻습니까?”

    린다의 생각에 경환이 재빨리 제동을 걸고 나섰다.

    “물론 FBI의 도움을 받게 되면 유출의 근원은 막을 수 있겠지만, 세 회사의 신뢰는 무너지고 이번 입찰은 참여를 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FBI에 의뢰를 하자는 린다의 답변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FBI의 개입으로 이번 입찰이 무산되는 것을 경환은 바라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번 입찰에 실패를 하게 된다면 SHJ의 앞길은 가시밭길로 변하게 된다는 것을 세 사람 모두 알고 있었기에 회의는 또다시 깊은 침묵에 휩싸여갔다.

    “아직 낙찰가에 대한 정보는 우리 손에 있습니다. 경쟁업체가 노리는 건 우리의 입찰가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니, 저희는 이것을 가지고 마지막 반전을 노릴 수밖에는 없을 거 같습니다.”

    입찰가를 가지고 반전을 노린다 하더라도 입찰서류를 넣는 순간까지 그 정보가 미쓰비시에 흘러 들어가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었지만, 이 방법 외에는 딱히 좋은 수가 보이지 않고 있었다. 세 사람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을 때 최석현과 코이치가 거친 숨을 몰아세우며 사무실 문을 열어 젖혔다.

    “사장님, 사무실에 계신다는 소리를 듣고 급히 왔습니다. 타케우치 차장이 중요한 정보를 가지고 왔습니다.”

    최석현은 숨을 헐떡거리며 코이치를 앞세워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타케우치 차장, 급한 정보가 아니라면 내일 보고를 하지 않겠나?”

    황태수는 최석현과 코이치를 나무라고 있었지만, 경환이 급히 황태수를 제지하고 나섰다.

    “아닙니다. 이왕 오셨으니 보고해 주세요. 중요하다는 정보가 무엇인가요?”

    경환은 정보유출 건으로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 최석현과 코이치까지 급히 회사에 오자 불안한 생각에 코이치의 대답을 독촉했다.

    “JSC의 타케우치 회장님에게 받은 정보입니다. 이번 FPSO 입찰에 대한 저희 쪽 정보를 미쓰비시중공업에서 확보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코이치의 보고를 들은 세 사람은 얼음처럼 몸이 굳어지며 싸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경환은 미쓰비시중공업의 정보를 알려주겠다던 케이스케의 말을 문득 떠올려 보았다. 경환은 사실 케이스케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었다. 국익을 우선시하는 일본인들의 특성을 예전부터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된 정보보다는 역정보를 줄 확률이 많다고 판단을 해서였다. 그러나 딱히 좋은 대응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는 지금 상황에서 케이스케라는 지푸라기라도 잡아야만 했다.

    “자세히 얘기를 해 보게. 우리도 그런 정보를 입수해 놓고 대책을 마련하고 있는 중이었다네.”

    이미 알고 있다는 소리에 최석현과 코이치는 서로를 쳐다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경환이 자신을 직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자 코이치는 급히 자세를 바로 하고 자시의 아버지를 통해 전달받은 내용을 말하기 시작했다.

    “JSC는 미쓰이조선과의 J.V가 실패한 이후 미쓰비시중공업의 행보를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그쪽 정보라인을 통해 확인된 내용은 미쓰비시중공업이 이번 입찰 성공을 기정사실화 하고 있다고 합니다. 또한 경쟁업체의 기술개발현황과 낙찰가를 입수하고 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이번 입찰을 모모이 아키라 상무가 진두지휘를 하고 있다는데 몇 주 전 샌프란시스코로 출장을 다녀온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그때 정보를 입수한 것으로 보입니다.”

    의외의 실마리가 코이치를 통해 풀려나가자 사무실의 분위기는 급반전하고 있었다. 코이치는 자신의 아버지에게 다시 연결을 하려 했으나, 경환은 코이치를 제지하고 나섰다.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회장님은 타케우치 차장이 SHJ에 합류한 것을 자신의 빚으로 생각을 한 거 같습니다. 더 이상은 JSC에 빚을 지고 싶지 않습니다.”

    JSC를 안중에 두고 있는 경환은 이것으로 케이스케와의 인연을 정리하고 싶었다. 경환의 속뜻을 이해한 코이치는 입을 다물며 다시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정보가 유출되고 있다는 사실이 코이치의 정보로 확인된 이상 시급히 대책을 마련해야만 했다.

    “당분간 이 사실은 우리만 알고 있는 거로 하겠습니다. 일반직원들에게도 알리지 마시고 보안을 유지해 주십시오. 여러분들도 아시겠지만, 이번 프로젝트는 SHJ의 사활이 걸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확실한 대응방법을 찾기 전까지는 KBR이나 대현중공업까지 철저히 속여야 될 겁니다.”

    경환의 말이 끝나자 각자의 의견을 말하며 적절한 대응방안을 논의하기 시작했지만, 린다는 조용히 자신의 사무실로 빠져나가 어디론가 급히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통화가 길어질수록 린다의 얼굴은 점점 굳어져 갔다.

    “하하하, 아키라 자네 덕에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 기분이야. 수고했어. 오늘은 자네를 위해 마련한 자리니까 원 없이 즐겨 보세나.”

    “감사합니다. 사장님. 저는 오로지 사장님만 따르겠습니다.”

    긴자의 하키라의 구석진 다다미방에는 치히로와 아키라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기분이 좋았던지 치히로는 여 종업원의 기모노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두툼한 가슴을 주무르며 연거푸 술을 받아 마시고 있었다.

    “오만한 다나카 아사히의 똥 씹은 얼굴을 보게 될 줄이야. 하하하. 사사건건 물고 늘어지던 놈이 오늘은 회장님 앞에서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모습을 자네도 봤지 않나.”

    미쓰비시중공업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다나카 아사히 전무는 치히로와는 다른 파벌로 호시탐탐 자신의 자리를 노리고 있는 인물이었다. 이번 FPSO 입찰을 아사히를 몰아내고 자신의 입지를 다지는 계기로 만들려 노력해왔다. 오늘 회의에 참석한 회장이 그룹차원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말로 치히로의 손을 들어 준 까닭에 아사히를 자신과의 경쟁에서 한발 물러나게 만들 수 있었다.

    “아키라, 입찰이 끝나면 아사히 그 놈을 몰아낼 생각이야. 그럼 그 자리는 자네 자치가 될 것이네. 앞으로도 열심히 하게나.”

    ‘쿵’

    “하! 저는 사장님과 함께 운명을 같이 하겠습니다.”

    아키라는 탁자에 머리를 박으며 충성을 다짐했다. 탁자에 머리를 박고 있는 아키라의 얼굴엔 기쁨에 찬 미소가 번져가고 있었다.

    “입찰이 끝날 때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말게. 이번 자네가 한 일을 회장님도 크게 칭찬을 하시지 않았나. 입찰가는 언제 알아낼 수 있는 겐가?”

    치히로의 한 손은 여전히 기모노 안에서 춤을 추고 있었지만, 아키라의 머리는 여전히 탁자에서 붙어 있었다.

    “SHJ의 정보는 그곳 사장의 개인적인 루트를 통해 입수된다고 합니다. 보안에 상당히 쓰고 있어 정보의 핵심은 파악이 힘든 상태인지만, 입찰 전에는 저희 손에 KBR의 입찰가가 쥐어지게 될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돈 맛을 본 이상 남아있는 천만 불을 포기할 수는 없겠지. 그래도 딴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자네가 철저히 관리를 해야 될 거야.”

    기분이 좋은지 치히로는 손수 아키라의 잔에 술을 채웠고, 아키라는 감격에 겨워하며 술잔을 단숨에 비워냈다.

    “그건 그렇고 SHJ의 사장이 27살 먹은 젊은 친구라는 소리가 들리던데.”

    아키라는 여 종업원이 입에 넣어준 안주를 급히 손에 뱉으며 정자세로 치히로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중국과 미국에 SHJ란 사업체를 설립했다고 합니다. 저희와 거래가 있는 오성그룹을 통해 확인한 바로는 사업적 감각이 뛰어난 것으로 보입니다.”

    아키라는 SHJ를 조사하면서, 미래를 예측하며 과감하게 투자를 해가는 경환의 동물적인 감각에 경탄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철저히 밟아 주어야 했다.

    “젊은 새싹을 짓밟는 건 항상 즐거운 일이야. 일본의 대 미쓰비시그룹과 경쟁을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는 거 자체만으로 그 친구의 인생은 끝난 거지. 자, 아키라 오늘은 사내 대 사내로 멋진 밤을 보내 보자고. 하하하.”

    치히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키라는 재롱이라도 부리려는 듯 여 종업원의 기모노를 거칠게 풀어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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