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84화 (61/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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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인생 - 84

    TOTAL 뱅상과의 만남을 위해 경환은 시간 전에 KBR을 찾았다. 요즘 윌리엄과 삐거덕거리고 있어 불편하기는 했지만, FPSO 입찰이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어 마냥 얼굴을 안 보고 지낼 수는 없었다. 접견실에서 마주친 윌리엄은 여전히 굳은 얼굴로 경환을 맞이하고 있었다.

    “제임스, 자주 연락 좀 하고 지내세. 우리 사이가 예전만 못한 거 같아 섭섭해.”

    “죄송합니다. 아이가 태어나다 보니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조만간 따로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윌리엄의 급하고 개인주의적인 성격을 모르지 않았지만, 자신의 밥그릇을 윌리엄의 손에 쥐어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사실 윌리엄이 요청하는 정보의 공유라는 게 경환이 독자적으로 가지고 있는 정보루트를 공개해 달라는 것이었기 때문에 설사 경환이 사실을 말해준다 해도 믿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뱅상의 방문은 입찰 공시가 떨어지기 전 우리의 준비상황을 확인해 보려는 차원이라고 생각되네. 그 동안 큰소리를 쳐 왔지만, 사실 불안한 것도 사실이야.”

    “ABS의 심의도 무사히 넘겼다는 보고가 있는데, 큰 문제는 없지 않겠습니까? 단지 TOTAL에서는 KBR로 인해 최대의 이득을 볼 수 있냐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 할 거라고 봅니다.”

    처음으로 참여하는 FPSO는 KBR 내부에서도 반신반의하고 있는 상태로 윌리엄이 느끼는 압박감은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나이지리아 석유화학단지의 저가입찰을 했다는 오명을 벗어버리기 위해서도 FPSO 입찰은 반드시 성공을 시켜야 했지만, 윌리엄은 초창기의 자신감을 점점 상실해 가고 있었다.

    “자네는 오늘도 나에게 낙찰가에 대한 정보를 주지 않을 생각인가?”

    윌리엄은 큰 기대를 하지 않는 눈빛으로 경환에게 질문을 했지만, 경환은 그런 윌리엄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 쉬었다.

    “후~, 윌리엄,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습니다. 저도 정확한 정보는 입수를 못한 상태고요. 입찰 전에는 반드시 정보를 넘겨 드리겠다고 몇 번을 말했습니다. 없는 정보를 달라고 하니 저도 답답하네요.”

    경환의 전하고 다른 강경한 태도에 윌리엄은 굳게 입을 닫아 버렸다. 묘한 긴장감이 흐르며 접견실은 깊은 침묵에 빠져 들었고, 이런 두 사람의 반목은 황태수와 잭을 당황시키기에 충분했다.

    “윌리엄, 제임스. KBR과 SHJ는 좋은 파트너십을 유지해 왔습니다. PQ(자격심사)가 얼마 남지 않은 상태에서 서로 믿고 가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자칫 TOTAL에서 이런 모습을 본다면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잭은 두 사람을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을 하였고 황태수 역시 잭의 말의 이어갔다.

    “사장님 중요한 시기입니다. 좀 더 냉철하게 상황을 판단하셔야 됩니다. 미스터 유트, 또한 너무 재촉하지 말아 주십시오. 저희도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잭과 황태수의 말에 경환은 정우로 인해 잠이 부족한 상태에서 입찰에 대한 부담감과 긴장감에 자신이 실수를 했다는 것을 느끼고 서둘러 입을 열었다.

    “윌리엄, 냉정을 찾아야 될 시기에 앞뒤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정식으로 사과드립니다. 제가 요새 스트레스가 많았나 봅니다.”

    “아닐세. 나도 자네에게 정식으로 사과 하겠네. 기분 상했다면 풀게.”

    경환과 윌리엄이 서로의 행동에 대해 사과를 하는 사이 뱅상이 접견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경환과 윌리엄은 어정쩡한 상태로 자리에서 일어나 뱅상을 맞아 주었다.

    “회의실 분위기가 어째 냉랭한 거 같습니다. 제가 시간을 잘못 맞춰 왔나요?”

    경환과 윌리엄의 분위기가 좋지 않다는 것을 느낀 뱅상은 윌리엄과 경환에게 손을 뻗어 악수를 청하며 은근슬쩍 뼈있는 말을 던지며 회의의 주도권을 가져오려 했다.

    “오해를 하셨군요. 제가 요새 몸이 좋지 않습니다. 미스터 지라드가 오기 전에 휴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뱅상은 경환의 말에도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지정된 자리에 앉았다.

    “지난번 대후와의 입찰은 한편의 드라마였습니다. 대후건설과 KENTZ는 아직도 그 여파에 시달리고 있는 거 같고요. 사실 저희 TOTAL에서도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그래서 이번 FPSO입찰에도 KBR과 대현중공업의 선전을 은근히 바라고 있을 정도입니다.”

    뱅상의 극찬에도 경환과 윌리엄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었다. 뱅상의 언변에 넘어가기에는 경험으로 쌓여진 두 사람의 내공이 너무 컸다.

    “저희는 ABS의 심의를 마친 상태입니다. PQ통과에는 전혀 문제가 없음을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자칫 시간을 더 주었다가는 뱅상이 주도권을 확보해 회의를 자신의 입맛대로 진행할 거라고 판단한 윌리엄은 기술개발을 완료했다는 말로 분위기를 바꿔나가고 있었다. 경환은 자신까지 나설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우선은 윌리엄에 분위기를 맡기려 했다.

    “대단하군요. 설계를 시작했다는 보고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ABS와 심의까지 진행을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뱅상은 진심으로 놀라고 있었다. FPSO에 대한 경험이나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최소한 일 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고 있었지만, KBR과 대현중공업은 반년이란 짧은 시간에 이미 기술력을 확보했다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ABS의 심의는 국제적으로도 인정을 해 주고 있었기 때문에 KBR과 대현중공업의 기술력과 선박건조에는 문제가 없다는 것이 증명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저희 정보로는 이번 FPSO 입찰은 1,2기 두 기가 나온다고 하는데 미스터 지라드가 확인을 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결국은 윌리엄이 사고를 치고 말았다. 경환은 급히 윌리엄의 말을 중단시키려 했지만, 이미 윌리엄은 말을 마치고 뱅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TOTAL의 입찰공시 전에 이런 사실을 꺼내 봐야 KBR에 전혀 유리한 점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윌리엄은 경환을 압박하는 수단으로 지금 이 자리에서 터드리고 말았다. 경환은 속으로 욕을 해대고 있었지만,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험, 험. 미스터 유트 그런 정보는 어디에서 입수를 하셨나요?”

    경환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뱅상의 얼굴을 살폈지만, 뱅상은 의외로 표정의 변화가 없이 차분했다.

    “하하하, 저희야 실력이 막강한 컨설팅업체가 있지 않습니까?”

    경환은 짜증이 밀려오고 있었지만, 이 입찰은 절대 포기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이 경환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이번 입찰을 끝으로 KBR과의 관계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을 하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을 때, 뱅상이 경환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미스터 리, 사람을 놀라게 하시네요. 미스터 유트가 말한 것처럼 이번 입찰은 두 기를 동시에 입찰을 하게 될 겁니다. 두 기를 찢느니 한 업체에 몰아주는 게 유리하다는 판단을 했습니다. SHJ는 이런 정보를 어디에서 입수했는지 확인해 주지는 않겠죠?”

    “그 부분은 확인시켜 드릴 수 없어 죄송합니다. 단지 대현중공업과 KBR이 TOTAL을 최대 수혜자로 만들어 드릴 수 있다는 것만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대현중공업의 선박건조 기술은 이미 세계적으로도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또한 KBR의 플랜트 기술은 말하면 입만 아프죠.”

    경환의 말에 뱅상은 고개만 끄떡이고 있었다. 경환은 뱅상의 태도가 어딘가 모르게 부자연스럽다는 것을 느꼈지만, 윌리엄을 의식하며 말을 길게 이어가지는 않았다.

    “조만간 입찰공시가 나올 겁니다. 다른 업체들과의 형평성을 고려해서 입찰 전까지는 이런 자리를 가질 수가 없겠네요. 무리를 하더라도 이번 회의를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갔으면 합니다. 제가 말씀 드릴 수 있는 것은 나이지리아 정부와 TOTAL에서는 여러분들에게 기대를 많이 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뱅상의 요청으로 회의는 오랫동안 지속되었고, 윌리엄에 대한 실망으로 경환은 서서히 지쳐갔다. 회의가 마무리 되고 경환은 몸이 좋지 못하다는 핑계로 윌리엄이 준비한 만찬을 정중히 사양하고 급히 자리를 정리하고 있었다.

    “사장님, 만찬은 제가 참석을 하겠습니다. 돌아가셔서 쉬십시오.”

    “그렇게 하는 게 좋겠습니다. 오늘은 영 힘이 나질 않네요. 죄송합니다.”

    황태수는 경환의 심기가 좋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최석현에게 대신 운전을 하도록 지시를 하고 있었다. 접견실 밖으로 자리를 옮기고 있는 경환에게 뱅상이 다가와 조용히 말을 건넸다.

    “시간이 있으시면 제가 묵는 호텔에서 잠시 대화를 나눴으면 합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판단한 경환은 조용히 고개를 끄떡였다. 밖에서 대기 중인 최석현과 함께 호텔에 도착한 경환은 뱅상과 함께 바에서 맥주를 한 병 시켜 회의로 마른입을 축였다.

    “이번 입찰이 두 기로 진행한다는 것도 SHJ가 알고 있다면 발주 예정가도 입수를 하셨겠지요?”

    뱅상은 윌리엄과 약속된 만찬에 참석하기 위해 서둘러 경환에게 질문을 했다.

    “네, 그렇습니다. 1기 18억 불, 2기 20억 불 총 38억 불로 알고 있습니다.”

    예상을 했다는 듯이 뱅상은 고개를 끄떡였다.

    “SHJ는 낙찰가를 어느 정도 선으로 판단을 하시나요?”

    경환은 이 문제로 윌리엄과 장시간 입씨름을 했던 것이 생각나 ‘피식’ 웃어 보이고는 급히 맥주병을 들었다.

    “아직 낙찰가에 대한 정보는 없습니다. 단지 38억 불은 미스터 지라드도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합당한 선에서 낙찰이 이뤄지도록 저희는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말을 마친 경환은 뱅상으로 인해 좀 전의 좋지 못한 기억을 떠올리며 맥주를 들이켰다. 뱅상도 경환과 보조를 맞춰가며 맥주를 마시고는 맥주병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더 이상 묻지 않겠습니다. 금번입찰에 FPSO 두 기가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는 곳이 SHJ말고 더 있습니다. 일본의 미쓰비시중공업에서 제가 미국에 오기 전 접촉을 시도해 왔습니다. 일본에서도 알고 있더군요. 이 정보를 미스터 리에게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뱅상의 말에 경환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이 정보는 전체회의에서 자신이 처음 말을 꺼낸 것으로 미쓰비시중공업은 절대 알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윌리엄의 폭탄발언에도 전혀 놀라는 표정을 보이지 않았던 뱅상의 모습이 이제야 이해가 되고 있었다. 경환은 머리가 깨져옴을 느꼈다. 일 년을 넘게 피 터지게 준비하고 SHJ의 미래를 위해서는 이번 입찰을 반드시 성공을 시켜야 했지만, 이미 정보는 새어나가고 있었다. 경환은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헤치고 있었다. 새는 정보의 출처를 확인하고 막아야만 했다.

    코이치는 JSC의 전략을 연구하며 SHJ의 향후 JSC와의 경쟁에 대비하느라 늦게 퇴근을 했고 나츠미는 피곤해 보이는 코이치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여보, 어서 씻고 식사하세요. 일이 너무 힘든 거 아니에요?”

    미국에 온 이후 말수가 많아지고 활발해진 나츠미를 코이치는 가볍게 안아 주었다.

    “힘들긴 하지만, 보람을 많이 느껴. 밝아진 당신 모습을 보니 내가 안심이 된다.”

    나츠미는 결혼 후 배다른 형제들의 시기와 질투, 협박을 겪으면서 말을 잃어가고 있었다. 바뀌는 환경이 싫어 미국행도 반대했지만, 수정과 케이티와 어울리면서 예전의 활발함을 되찾아가고 있는 지금 나츠미나 코이치 모두 미국 생활에 만족하며 빠르게 적응을 해갔다.

    “애들도 당신 기다리고 있잖아요. 빨리 씻고 나오세요.”

    ‘띠리리~, 띠리리~’

    씻으러 들어가던 코이치는 급히 수화기를 집에 들었다.

    “여보세요?”

    ‘코이치냐. 애비다.’

    전화기로는 자신의 아버지인 케이스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고, 코이치는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회장님, 건강하십니까?”

    ‘아버지란 소리는 끝내 하질 않는구나. 나츠미는 적응을 잘 하고 있겠지?’

    코이치는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불만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나라도 더 주려는 아버지를 위해 JSC를 키워보려고 했지만, 주변의 시선은 코이치를 곱게 보지 않았다. 결국은 케이스케도 코이치의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다들 잘 지내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회장님.”

    코이치는 최대한 감정을 가다듬고 사무적으로 케이스케를 대하려 했다.

    ‘SHJ에 너를 맡기며 이경환이라는 친구에 내가 빚을 갚겠다고 했다. 너에게 지금 알려주는 정보를 네가 알아서 판단하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말씀 하십시오. 경청하겠습니다.”

    코이치는 케이스케와의 통화가 길어질수록 얼굴색이 변해가고 있었다. 통화를 마친 코이치는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떨리는 손을 주체하지 못했다.

    “여보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예요? 당신 얼굴이 너무 창백해졌어요.”

    “나츠미, 저녁은 애들하고 먼저 먹어. 난 급한 일이 생겨서 나가 봐야 되겠어. 오늘은 늦을지도 모르니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

    코이치는 물을 한 잔 급히 마시고는 빠르게 집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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