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83화 (60/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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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인생 - 83

    “사장님!”

    월요일 아침, 업무보고를 진행하던 황태수의 외침에, 눈을 지그시 감고 고개를 까딱거리며 졸던 경환은 화들짝 놀라며 눈을 번쩍 떠 황태수를 쳐다보았다.

    “하, 죄송합니다. 정우 이 자식이 먹성이 워낙 좋다 보니, 새벽에도 몇 번씩 일어나야 돼서 통 잠을 잘 수가 없네요. 죄송하지만, 다시 한 번 말씀을 해 주십시오.”

    고개를 돌려 큰 원을 만든 경환은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 내렸다. 시도 때도 없이 보채는 정우 때문에 경환은 숙면을 취하지 못하고 있었고, 틈만 나면 감기는 눈 때문에 사무실에서 졸기 일쑤였다. 경환이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가족에 대해 집착이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황태수는 경환을 바라보며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

    “기술개발팀의 보고로는 기본적인 설계는 마무리 단계라고 합니다. 금주 중으로 ABS(미국 선급협회)와 기술협의를 거친 후 일부 신기술에 대하여 정식으로 라이선스 출원을 준비하겠다고 합니다.”

    황태수의 보고에 경환은 크게 고무된 표정을 지었다.

    “아, 벌써 그 단계까지 갔군요. 대현과 KBR이 힘을 합치니 확실히 빨리 진행이 되는 거 같습니다. KBR의 친분을 이용하면 ABS와의 협의는 큰 문제없겠네요.”

    미국에서 건조되는 선박의 설계와 설비 등의 감독권한을 선급협회에서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선급협회의 심의만 통과 된다면, 기본적인 FPSO 프로젝트는 큰 고비를 넘겼다고 말할 수 있었다. 따라서 선급협회와의 기술협의는 KBR과 대현중공업에 상당히 중요한 문제였다. LR(영국의 로이드선급협회), DNV(노르웨이 선급협회)와 함께 3대 선급협회에 속하는 ABS가 휴스턴에 소재하고 있어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기술 심의가 통과된다면 저희도 움직여야 될 거 같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KBR의 독촉이 심해지고 있습니다.”

    황태수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는 있었지만, 경환은 낙찰가에 대한 정보를 일찍 알려줄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윌리엄이 부사장님을 재촉을 하고 있나 보군요. 낙찰가에 대한 정보는 아직 때가 아닙니다. 저도 확인을 해야 될 문제가 있고 하니, 부사장님은 계속 모른 척 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리고 아동건설은 나이지리아 공사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일정보다 좀 늦었기는 했지만, 야간작업까지 진행을 해서 기본일정에 차질이 없게 하겠다는 답변을 해 왔습니다.”

    한국의 신문과 박화수를 통해 성수대교의 중앙상판 교체작업을 시작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우회로를 만들지 않은 상태에서 급작스럽게 이뤄진 교체작업으로 인해 서울시와 일부 시민들은 반대를 했지만, 대다수의 시민들은 시민들의 안전을 생각하는 아동건설에 큰 지지와 찬사를 보내고 있었다.

    “부실공사가 발생하지 않도록 KBR에 감리감독에 신경을 쓰라고 해 주세요. SHJ-화성은 상황이 어떻습니까?”

    “이번 나이지리아 물량과 기존 KBR의 공사물량이 계약되어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는 상태입니다. 또한 KBR의 기술이전도 빠르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올 말이면 금융권 차입금은 전액 상환이 가능하다는 박 사장의 보고입니다.”

    SHJ-화성 플랜트도 정상궤도를 찾아 안착을 하고 있었다. KBR은 SHJ가 인수를 마치자마자 중단되었던 기술이전을 전보다 빠른 속도로 진행을 하고 있었는데, 그 이면에는 지분 23%를 통해 SHJ와 끈을 계속 연결하겠다는 KBR의 의지가 내포되어 있었다.

    “당분간 황 부사장님께서 신경을 써 주십시오. 다른 사항은 없으신가요?”

    “대현그룹에서 자동차를 포함한 건설, 중공업에 대한 전반적인 컨설팅 제휴를 해 왔습니다. 컨설팅 업무 확장이라는 사장님의 계획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어 긍정적으로 검토를 해 보려고 합니다.”

    입찰의 결과가 나오지도 않은 상태에서 대현그룹의 제안은 빠르다고 생각을 했지만, 대현그룹의 저돌적이고 공격적인 그룹 경영스타일을 생각해 본다면 이해가 가는 제안이었다. 이런 스타일이 매번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었지만, 혹시라도 성공을 한다면 남들보다 먼저 선점을 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대현그룹 문제는 황 부사장님께 일임을 하겠습니다. SHJ에 무리가 없는 제안이라면 굳이 반대할 생각은 없습니다.”

    이번 입찰을 끝내고 컨설팅업무의 확대를 이미 지시해 놓은 상태였기에, 미리 준비를 한다고 해서 무리가 되지는 않는다는 판단이 들었다. 대현그룹과의 업무제휴를 황태수에 일임한 경환은 린다를 바라보았다.

    “쿡 부사장님은 달리 보고할 내용이 없으신가요?”

    린다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보고서류를 경환과 황태수에 건네주었다.

    “퀄컴에는 직원을 파견해 한국과의 회의에는 반드시 저희를 거치도록 장치를 마련해 두었습니다. 그리고 오성전자와는 아직 줄다리기 중입니다.”

    경환은 린다의 집요함과 치밀함을 화성산업 시절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오성전자와의 협상에 임하는 린다를 전적으로 신뢰를 하는 것도 그 이유가 상당히 작용을 했다,

    “린다가 제시한 내용은 뭔가요? 오성전자에서도 쉽게 답을 주지 못한다면 큰 것을 제안했다고 생각이 드는데…….”

    “후후, 좀 크긴 하죠. 상용화가 가능하다는 사장님의 말을 전적으로 믿었으니까요. 오성전자에 캐나다와 멕시코를 포함한 북중미에 대한 단말기 독점판매권을 SHJ에 달라고 제안을 했어요. 다는 얻지 못하겠지만, 캐나다를 포함한 북미에 대한 독점권은 받아 낼 생각이에요.”

    린다의 말에 경환과 황태수는 눈을 크게 한번 뜨고서는 크게 웃기 시작했다. 린다의 통 큰 베팅에 식은땀을 흘리며 고생할 오성전자를 생각하니,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금성전자도 한번 만나보시고, 모든 것은 쿡 부사장님에게 맡길 테니 결과만 보고해 주세요.”

    경환은 잠시 눈을 붙이기 위해 빨리 회의를 마무리하고 싶었지만, 황태수는 경환의 바람을 모른척하며 회의를 계속 끌고 나가고 있었다.

    니혼마치(日本町)라고 쓰여 있는 높은 망루는 샌프란시스코의 저팬타운이 시작됨을 알려주고 있었다. 일본풍인지 미국풍인지 확인이 불가능한 단층건물들 사이로 NIJIYA라는 마사지가게가 보였고 이곳으로 미쓰비시중공업의 아키라가 빠르게 들어가고 있었다.

    두리번거리며 방 호수를 확인한 아키라는 좌우를 살핀 후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미 방 안에는 마사지침대에 머리를 파묻고 있는 사내의 등위로 동양인 여자가 올라가 등을 밟고 있는 모습이 아키라의 눈에 들어왔다. 아키라의 눈짓을 읽었는지 급히 사내의 등에서 내려왔다.

    “미스터 모모이, 우선 마사지에 집중을 하고 싶습니다. 기다리기 지루하시면 미스터 모모이에게도 마사지를 권하고 싶군요.”

    사내는 파묻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아키라에게 말을 건넸고, 아키라는 조용히 옷을 벗고 옆 침대에 몸을 누였다. 성격 급한 아키라였지만, 사내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마사지사가 한 명 더 들어와 아키라의 몸을 마사지하기 시작했지만, 아키라는 시원하다는 느낌을 전혀 받지 못했다. 시간이 얼추 흐른 후 사내의 마사지가 끝났음을 확인한 아키라는 서둘러 마사지 사들에게 팁을 주고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었다. 누워있던 사내는 예후를 즐기려는 듯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침대에 누워있었고, 아키라는 초조함에 속이 타 들어가고 있었다.

    “저……, 정보를 먼저 확인하고 싶습니다.”

    오랜 기다림이 익숙하지 못했던지 아키라는 사내의 등을 향해 독촉을 하기 시작했지만, 얼굴을 확인시켜 주지 않겠다는 듯 사내의 움직임은 여전히 없었다.

    “돈은?”

    아키라가 기다림에 지쳐갈 무렵, 사내는 입을 열었고 아키라는 입 꼬리를 말며 빠르게 답변을 하기 시작했다.

    “천만 불은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정보가 제 손에 들어오게 된다면 문제없이 바로 송금 될 겁니다. 제 이름을 걸고 하는 약속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키라의 말이 끝나자 누워 있던 사내는 손을 뻗어 서류봉투를 아키라에게 건네주었다. 급하게 서류봉투를 열어 서류를 꺼낸 아키라의 눈은 놀란 듯 커지기 시작했다. 서류봉투엔 KBR, SHJ, 대현중공업의 전체 회의록 사본과 특허 출원을 준비하고 있는 기술개발 현황표가 들어있었다. 빠르게 서류를 확인하던 아키라는 FPSO 두 기가 동시에 입찰될 예정이라는 항목을 확인하고는 마음이 급해졌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말을 마친 아키라는 급히 방문을 열고나서며 안주머니에서 급히 휴대폰을 찾아 꺼냈다. 신호는 계속 가고 있었지만, 전화는 계속 연결이 되지 않고 있어 아키라의 마음은 초조해져만 갔다.

    “사장님! 저 아키라 상무입니다. 중요한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어, 아키라. 고생하는군. 중요한 정보라는 게 뭔가?’

    수화기에서 들리는 큰 기대감에 차 있는 나리타의 목소리를 확인한 아키라는 활짝 열릴 자신의 미래를 생각하며 또박또박 힘주어 정보를 전달했다.

    “이번 입찰에 FPSO 두 기가 동시에 나온다고 합니다. 발주처의 예정 가는 38억 불이라는 정보와 함께 KBR의 기술개발 현황 표를 입수했습니다.”

    아키라의 귀로는 자신감에 가득 찬 나리타의 음성이 들려왔다.

    ‘하하하, 역시 돈 값을 하는군. KBR의 입찰가를 정확히 다시 확인해 보고 약속된 금액을 지불해 주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저는 내일 바로 귀국을 하겠습니다.”

    나리타와의 통화를 끝낸 아키라는 비자금을 관리하는 경리부장에게 천만 불의 송금을 지시한 후 다시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여전히 같은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사내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천만 불은 지정하신 스위스구좌로 오늘 송금이 될 겁니다. 중요한 건 KBR과 대현중공업의 입찰 예정 가인데 언제 정보를 주실 수 있습니까?”

    사내는 깊은 고민에 빠진 듯 오랫동안 침묵을 보이고 있었다.

    “SHJ의 사장은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닙니다. 신중하면서도 상대를 쉽게 믿지 않습니다. 입찰가에 대한 정보는 나이지리아에서 드릴 수 있을 겁니다. 기회를 봐서 다시 연락을 드리도록 하죠.”

    “좋습니다. 연락들 기다리겠습니다. 제 휴대폰은 24시간 열려있으니 편하신 시간에 전화를 주십시오.”

    말을 마친 아키라는 사내의 등에 머리를 숙여 보인 후 서류봉투를 집어 들고는 급히 마사지가게를 빠져나갔다. 아키라가 떠난 것을 확인한 사내는 천천히 몸을 들어 회한에라도 잠긴 듯 담배를 문 입으로 연기를 내 뿜었다. 침대에서 움직이지 않던 사내는 갑자기 깊은 한숨을 내 쉬며, 고개를 한번 크게 흔든 후 옷을 챙겨 입기 시작했다. 마사지 가게 밖으로는 어둠이 깔리고 있었고, 사내는 그 어둠 속으로 조용히 사라져갔다.

    “도착하시면 전화 주시고요. 제대로 같이 여행도 못 하고 정말 죄송합니다.”

    오늘 귀국하시는 양가 어른들을 배웅하기 위해 경환과 수정은 서둘러 공항에 도착해 있었다. 경환의 어머니와 장모는 더 있고 싶은 눈치였지만, 경환의 아버지와 장인의 성화에 백기를 들고 말았다.

    “어머니, 엄마. 저 때문에 너무 고생하셔서 죄송하고 또 감사 드려요.”

    “정우 좀 이리 줘봐라. 내가 이 녀석이 눈에 밟혀서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구나.”

    경환의 어머니는 수정의 품에 있는 정우를 받아 들고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자신의 뺨을 정우의 뺨에 비비고 있었다. 그 동안 정이 많이 들었는지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는 듯했다.

    “수정아. 이 서방 회사 일로 신경을 많이 쓰고 있는 거 같아 보이니, 집에서만큼은 편하게 쉴 수 있게 네가 잘 해야 된다.”

    “알았어요. 엄마”

    요즘 들어앉기만 하면 잠이 드는 경환의 모습을 본 장모는 경환의 건강이 걱정이 되었는지 조용하게 수정을 나무라고 있었고 경환은 그런 장모의 마음을 느꼈는지 미소를 지으며 장모에게 고개를 숙였다.

    “백일은 참석을 못하지만, 돌잔치만큼은 서울에 들어와서 하거라.”

    “그래. 정우 돌잔치는 꼭 서울에 들어와서 하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특별한 일이 없다면, 돌잔치는 서울에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내년부터 시작되는 한국의 이동통신 단말기 사업과 여러 가지 일들을 처리하기 위해 한국행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와 장인의 말에 경환은 흔쾌히 동의를 할 수 있었다. 양가 부모님들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듯 몇 번을 뒤로 돌아 정우를 확인한 후에야 출국장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오랫동안 같이 지냈던 부모님들이 출국장으로 사라지자 수정과 정우는 참았던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우는 정우를 안고 경환은 수정의 어깨를 감싸주었다.

    “많이 섭섭하지? 좀만 더 고생해서 자리를 잡으면 부모님들 모두 모시고 오자.”

    수정은 흘리는 눈물로 말을 잇지 못한 채 고개만 끄떡이고 있었다. 그 동안은 두 어머니들 덕분에 편하게 지내왔지만, 이제부터는 다시 초보 부모가 되어야 할 형편이었다. 집에 돌아간다 하더라도 오늘은 텅 빈 집안으로 인해 종일 허전할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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