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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인생-82화 (59/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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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인생 - 82

    정우가 태어남으로 경환과 수정의 일상은 많은 변화를 가져오고 있었다. 새벽에 일어나 우는 정우를 달래며 우유를 먹이거나 기저귀를 갈아 주는 것은 경환의 몫이었다. 수정은 피곤한 경환을 위해 슬그머니 침대에서 일어났지만, 경환은 수정의 움직임을 귀신같이 알아채고 수정을 만류하고 나섰다.

    “더 자, 종일 정우 보려면 힘들 텐데, 새벽에 일어나는 건 내가 할게.”

    “자기 출근해야 되잖아요. 더 자요.”

    경환은 수정을 억지로 침대에 누이고는 준비해 놓은 보온병을 열고 우유를 타기 시작했다.

    “응애~, 응애~”

    정우는 밥시간이 왔는데 왜 아직 소식이 없는 거냐며 울기 시작했고, 경환은 서둘러 젖병의 온도를 확인한 후 정우의 입에 물렸다. 수정은 그런 경환을 고마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자기야, 이 자식이 나하고 눈을 맞추면서 웃는데?”

    “자기 너무 오버하는 거 아니에요? 뭔 정우가 눈을 맞췄다고 그래요?”

    젖병을 빨고 있는 정우를 안고 수정이가 볼 수 있도록 침대로 향했지만, 정우는 초점을 잡지 못하는 눈으로 열심히 젖병만 빨아대고 있었다. 졸지에 팔불출이 된 경환은 정우의 등을 두드려 트림까지 시키고 나서야 다시 침대에 누울 수 있었지만,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경환은 자신의 품으로 파고드는 수정을 위해 팔베개를 해주고는 수정의 가슴에 한 손을 가져다 대었다. 출산으로 인해 커진 수정의 가슴은 한 손으로는 다 움켜쥘 수 없었다.

    “애처럼 가슴 만지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자기밖에 없을 거예요.”

    “정우 태어났다고 나 등한시하면 안 돼. 나도 자기의 관심이 필요하다고.”

    가만히 웃고만 있는 수정을 끌어당기며 경환은 급히 수정의 입술을 찾아 자신의 입술을 덮어갔다. 수정과 부부생활을 한지 3년이 되었지만, 경환은 수정 이외의 여자에겐 관심이 없었고, 수정과의 잠자리는 아직도 경환을 매번 흥분시켰다.

    “수정이 몸도 회복되고 있으니 너무 집에만 계시지 마세요. 제가 모시고 다녀야 되는데 회사에 중요한 프로젝트가 있어서 몸을 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가이드를 고용했으니 오늘부터 주변 관광을 하세요.”

    정우 때문에 양가 부모님들이 모두 와 있었지만, 경환은 통 시간을 낼 수가 없었다. 부모님들도 정우 보는 재미로 집 밖으로 외출은 하지 않고 있었지만, 경환은 죄송함에 항상 신경이 쓰이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부모님들의 허락도 받지 않고 한국유학생을 고용, 관광을 시켜 드릴 생각이었다.

    “너무 집에만 있으니 몸이 뻣뻣하기도 한 거 같으니, 네 말대로 오늘은 사돈과 관광이라도 해야겠다.”

    말은 안 했지만, 부모님들도 집에만 있어 답답했던지 경환의 제안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경환은 급히 준비한 봉투를 아버지와 장인어른에게 건네고는 출근을 서둘렀다.

    동경의 최대 번화가인 긴자는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번쩍이는 네온사인들의 불빛이 밤을 밝히고 있었다. 미쓰코시백화점 뒤편으로 하키라라고 써져 있는 간판 앞에는 최고급 승용차들이 늘어서 있었다. 적게는 50만 엔 많게는 100만 엔을 훌쩍 넘는 술값 때문에 일반인들의 출입은 불가능한 곳이기도 했다. 기모노를 차려 입고 시중을 드는 여 종업원들은 TV에서 봤을 법한 미녀들뿐이었다. 그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범상치 않아 보이는 세 남자가 술잔을 부딪치고 있었다.

    “나리타 사장님,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 미쓰비시와의 합작에 우리 미쓰이그룹도 큰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하하하.”

    “우에하라 사장님,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이번 합작을 계기로 우리 미쓰비시중공업과 미쓰이조선은 해양플랜트 부분을 선도해 갈 것입니다. 하하하.”

    미쓰비시중공업 사장인 나리타 치히로는 이번 나이지리아 FPSO 입찰에 미쓰이조선과 J.V를 이끌어 낸 장본인으로, 미쓰이조선 사장인 우에하라 다카시로와 막후협상을 위해 오늘 자리를 마련했다. J.V 협상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치히로는 국익이 우선이라는 명분으로 일본정부의 실세를 움직여 미쓰이조선을 압박해 갔고 결국 미쓰이조선을 설득할 수 있었다.

    “대의를 위해 소를 희생해 주신 우에하라 사장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래서 오늘 조촐하게 사장님을 위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일본 안에서야 서로 경쟁을 하는 건 당연하지만, 나라 밖에서의 싸움은 일본기업끼리 힘을 합쳐야지요.”

    두 사람의 자화자찬이 한동안 이어지고 있었다. 여 종업원들은 조용히 미소를 머금은 채 비워진 술잔에 조심스럽게 술을 따르고 있을 뿐이었다. 나리타 치이로는 자신의 옆에서 무릎을 꿇은 채 조용히 앉아 있는 사내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우에하라 사장님, 이번 일을 막후에서 진행하고 있는 모모이 아키라 상무입니다. 능력이 대단한 친구입니다. 아키라, 사장님께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게.”

    “하! 모모이 아키라입니다.”

    아키라는 두 손을 허리춤에 대고 머리를 크게 숙였다. 그런 아키라를 우에하라 다카시로는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바라봤다.

    “모모이 상무 덕에 이번 프로젝트를 미쓰비시중공업 주관으로 넘겨준 것이니 실수가 있으면 안 됩니다.”

    다카시로의 언중유골에 치히로는 미간을 좁히는 듯하다 이내 크게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이 친구가 잘 해 낼 겁니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겉모습과는 다르게 두 사람의 앙금은 아직 남아 있는 듯했다. 미쓰이조선은 JSC와의 J.V를 추진하였다. 만약 미쓰비시가 정치권을 등에 업고 중간에 끼어들지 않았다면 자신의 입맛대로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미쓰비시가 던져주는 떡고물만 받아먹어야 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번 입찰에 신경 쓰이는 곳은 페드로팍 보다는 KBR이라고 보는데 이에 대한 준비는 하고 있습니까? 한국의 대현중공업이 참여 하는 게 영 기분이 개운치 못해서 그럽니다.”

    다카시로는 여 종업원이 건네주는 회 한 점을 입에 넣고 있었다. 비용적인 면에서 영국의 페드로팍은 충분히 넘길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빠른 기술력을 확보하고 조선업계에서 수주물량 1위를 하고 있는 대현중공업은 은근히 신경이 쓰였다. 대현의 선박건조 기술과 KBR의 플랜트 기술이 합쳐짐으로 발생되는 시너지효과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하하, 이제 걸음마를 시작한 한국의 대현중공업이 뭐가 대수겠습니까?”

    치히로의 말에 다카시로는 인상을 구겼다.

    “호랑이는 토끼를 잡을 때도 최선을 다하는 법입니다. 자만은 곧 실패의 지름길이라고 생각합니다. 험, 험.”

    치히로는 다카시로의 격앙된 목소리에 급히 손을 흔들며 고개를 숙여 사과를 한 뒤 웃던 얼굴을 거둬들였다.

    “제 농담에 기분이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저 또한 대현중공업과 KBR를 과소평가 하지 않고 대비를 해 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두 회사보다도 SHJ라는 컨설팅업체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SHJ라뇨?”

    다카시로는 들어본 적이 없는 생소한 SHJ란 회사를 주목하고 있다는 치히로의 말이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근래 들어 대형 프로젝트를 KBR이 성공을 시키고 있습니다. 조사를 해 보니 그 뒤에 SHJ의 컨설팅이 있었다는 게 확인이 되었습니다. SHJ의 정보력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정확하다고 합니다. 이번 대현중공업과 KBR의 합작을 이끌어 낸 것도 다름이 아니라 SHJ라고 하더군요.”

    치히로는 술잔을 들어 입에 털어 넣고는 음흉한 웃음을 보이며 여 종업원의 기모노 안으로 깊게 손을 넣었다. 다카시로는 민망한 듯 고개를 돌렸지만, 한없이 태평스러운 치히로의 모습에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흠, 흠. SHJ란 곳이 그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큰일 아닙니까? 대비책은 준비가 되어있다고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치히로는 아쉽다는 듯 여 종업원의 깊은 곳을 공략하던 손을 뺐고, 여 종업원은 급히 물수건을 집어 들어 치히로의 손을 닦아 주었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사장님을 이 자리에 모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결론을 말씀 드리자면 KBR의 입찰가는 저희 손에 들어올 겁니다. 그러나 그 정보를 가지고도 우리가 써먹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미쓰이조선에서 입찰가에 대한 것을 우리에게 일임을 해 주십시오.”

    다카시로는 급히 술을 단번에 마시고는 급히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경쟁업체의 내부정보를 빼내는 것만큼 입찰에 쉽게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은 없기 때문이었다.

    “그 정보가 확실하다면 일임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 확신하십니까?”

    치히로는 옆에서 시중드는 여 종업원의 봉긋한 가슴을 쳐다보며 입맛을 다시며 아키라를 향해 고개를 끄떡였다.

    “저희는 SHJ의 정보를 입수하기 위해 내부거래자와 꾸준히 접촉을 해 왔습니다. 며칠 전 거래를 하겠다는 답변과 함께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겠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거래금액은 총 2천만 불로 선불로 천만 불 최종 입찰가를 받은 후 나머지 잔금을 지불하는 조건입니다. 제가 조만간 미국으로 건너가 정보를 받을 예정입니다.”

    이카라의 말이 끝나자 치히로는 자신만만하게 두 손으로 탁자를 잡으며 다카시로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카시로는 치히로의 미소에 부담을 느끼며 급히 시선을 술잔으로 향했다.

    “우에하라 사장님, 고민이 풀리셨는지요? 그깟 2천만 불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이번 입찰은 실패하고 싶어도 실패할 수가 없을 겁니다. 일 얘기는 그만하고 오늘은 술이나 마십니다. 하하하.”

    치히로의 손은 다시 여 종업원의 몸을 위 아래로 더듬기 시작했다. 다카시로는 치히로의 치밀함에 고개를 저으며 술잔을 들어 목을 축이고 있었다.

    오늘 가족들의 입국을 맞이하기 위해 코이치는 서둘러 공항에 도착해 있었다. 아내와 아이들이 미국생활에 빠르게 적응을 해 주기만을 바라고 있었지만, 내성적인 아내가 은근히 걱정이 되고 있었다. 동경 발 비행기가 도착했다는 전광판의 알림을 보고 코이치는 입국장으로 향했다.

    “코이치, 같아 가자니까 왜 혼자 간 거야? 사장님도 같이 오셨어.”

    느닷없는 최석현의 등장에 놀란 코이치은 몸을 뒤로 돌렸고, 최석현과 함께 있는 경환을 발견하고는 급히 뛰어가 고개를 숙였다.

    “사장님께서 여긴 왜 나오셨습니까? 회사 규정에도 마중과 배웅은 없다고 들었던 거 같은데…….”

    “오시는 가족들은 출장자들이 아니지 않습니까? 고국을 떠나 타향으로 오시는데 좋은 인상을 드리기 위해 나왔습니다. 그래야 타케우치 차장을 부려먹더라도 제 원망을 하지 않지 않으실 거 같아서요.”

    경환의 마음 써줌에 고마움을 느낀 코이치는 다시 한 번 머리를 숙였고 경환은 개의치의 말라며 어깨를 가볍게 쳐 주었다. 마침내 입국장의 문이 열리고 자신의 가족을 확인한 코이치는 급히 뛰어가 아이를 들쳐 안았다. 경환은 그들의 재회에 시간을 주며 천천히 걸어 나갔다.

    “휴스턴에 오신 걸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저는 SHJ 대표 이경환이라고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타케우치 나츠미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계속 고개를 조아리는 나츠미 덕에 경환도 따라서 고개를 연신 숙일 수밖에 없었다. 일본인들의 인사성은 때로는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기도 했다. 나츠미는 일본인의 발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영어가 상당하시네요. 재미교포라고 해도 믿을 수 있겠습니다.”

    경환의 칭찬에도 나츠미는 얼굴만 붉어질 뿐 아무런 말도 못한 채 고개만 조아리고 있었다. 그런 자신의 아내를 대변하듯 코이치가 나섰다.

    “동경대학에서 영어를 전공했습니다. 미국에도 교환학생으로 잠시 와 있었습니다.”

    코이치의 말에 경환은 고개를 끄떡이며 나츠미의 영어실력이 이유가 있는 것을 알았지만, 의외로 수줍음을 많이 타는 나츠미의 모습이 신경이 쓰였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빨리 집으로 출발을 합시다. 타케우치 부인께서 집이 맘에 드셨으면 좋겠네요.”

    경환의 농담에도 나츠미는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었다. 더 이상 말 걸기를 포기한 경환은 재빨리 짐을 각자의 차에 옮긴 뒤 빠르게 차를 몰았다.

    아파트 입구엔 수정을 비롯해 케이티와 황태수의 부인이 코이치 가족들을 반갑게 맞아 주고 있었다. 다행히 여자들끼리라서 그런지 나츠미는 얼굴을 붉히기는 하지만, 서로 대화를 주고받았고 그런 모습을 확인한 코이치와 경환은 겨우 안도를 할 수 있었다.

    “타케우치 차장님, 식구들도 다 오셨으니, 주말쯤 해서 바비큐파티라도 하며 서로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도록 합시다. 오늘은 오랜만에 가족들과 편하게 하루를 보내세요.”

    경환은 자신의 주위로 모이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을 짐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든든한 아군이 늘어나 자신의 주위로 인의장막을 쳐 준다는 생각뿐이었다. 경환은 가족들과의 재회에 즐거워하는 코이치를 보며 본격적으로 코이치를 밀어 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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