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다시 사는 인생 - 81
정우가 태어난 다음날 병원에선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찬물로 샤워를 시키려는 간호사를 두 어머니들이 놀란 눈을 하며 막아서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네가 나서서 말 좀 해보게. 산후조리 잘못하면 평생을 고생하는 건데, 도대체 찬물로 샤워를 시키려는 이유를 내 도통 모르겠네.”
“그래 사돈 말이 틀린 게 하나도 없으니, 경환이 네가 뭐라고 좀 해봐. 이럴 바에는 집에 가서 우리가 돌보는 게 낫겠다. 안 그래요 사돈?”
두 어머니들의 성화에 경환은 담당 의사를 만나 한국의 산후조리에 대해 설명을 해 줄 수밖에 없었다. 찬물로 샤워를 하고 바로 퇴원하는 미국의 출산방식을 두 어머니들에게 설득시키는 거 보다는 의사의 양해를 구하는 게 빠르다고 판단해서였다. 담당의사는 고개를 갸우뚱 하긴 했지만, 문화적인 차이를 이해해 준다는 말로 수정의 퇴원을 허락해 주었다. 겨우 몸을 추스르는 수정을 조심스럽게 부축해 집으로 돌아온 경환은 또 다른 난관에 직면하고 말았다.
“당분간 몸을 뜨겁게 해야 되니, 전기장판 뜨겁게 올리고 전기스팀기도 방안에 틀어 놔라.”
한여름 날씨에도 불구하고 전기장판과 전기스팀기를 틀어 놓은 안방은 사우나 그 자체였다. 경환은 5분도 버티지 못하고 거실로 뛰쳐나올 수밖에 없었지만, 수정은 땀을 흘려가면서도 용케 버티고 있었다. 음식솜씨가 월등히 좋은 장모는 이미 주방을 점령하고 미역국과 함께 산모에 좋은 음식을 만들고 있었고, 연락을 받은 경환의 아버지와 장인은 기다렸다는 듯이 정우를 보기 위해 미국행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경환은 오 분에 한 번씩 안방을 들락거리며 수정과 정우의 살폈고 수정은 그런 경환으로 인해 제대로 잠을 청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좋아요? 그러면서 왜 아이는 나중에 갖자고 그랬는지 모르겠네요.”
수정의 핀잔에도 경환의 입가엔 웃음이 가득했다. 경환은 아직도 힘들어하는 수정이의 손을 가만히 잡아 주었다.
“자기하고 정우를 보고 있으니, 근심이 다 사라진다. 내가 생각이 짧아서 그랬어. 빨리 몸 회복하고 셋이서 재미있게 지내자. 조만간 넷이 되겠지만.”
경환의 말에 수정은 경기를 일으키며 고개를 좌우로 저어댔다.
“자기야. 나 죽을 거 같았어요. 지금 생각으로는 둘째는 못 낳을 거 같은데.”
수정의 손사래에도 경환은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인간의 망각의 동물로 출산의 고통은 시간이 지나면 잊혀진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였다. 진짜로 수정이 둘째를 갖지 않겠다고 한다면 문제가 심각해질 수도 있지만, 그건 그 때가서 고민을 해도 충분했다.
“자기 회사 안가도 돼요? 요새 프로젝트 때문에 바쁘잖아요.”
“오늘은 자기하고 정우 곁에 있을 거야. 내일 나가면 돼. 나 또 한계가 왔어.”
비 오듯 쏟아지는 땀을 주체하지 못하고 경환은 욕실로 급히 뛰어가 찬물을 틀어 머리를 들이밀었다.
최석현은 코이치와 함께 일식음식점을 찾았다. 갑작스런 경환의 출산으로 제대로 환영회도 해 주지 못한 것이 미안했던지 최석현은 머뭇거리는 코이치를 반 강제적으로 끌고 식당에 들어섰다. 뜨끈한 사케로 목을 축인 최석현은 먼저 입을 열었다. 넉살 좋은 최석현으로 인해 두 사람은 서로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석현, 사장님은 도대체 어떤 분이야? 신생기업인 SHJ에 쿡 부사장님까지 있을 줄은 전혀 예상을 못했어. 모든 게 위태위태해 보이는데도 직원들은 얼굴에는 자신감이 넘쳐나니 내 머리로는 이해가 잘 안 돼.”
최석현의 사케를 한 모금 넘기며 빙그레 웃어 보였다. 처음 경환과의 만남을 가졌을 때 자신의 모습이 코이치의 모습과 틀리지 않음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코이치, 머리로 사장님을 이해하려고 하지 마. 무일푼에서 4년 만에 SHJ를 미국에 세운 분이니까. 난 사장님이 지구를 정복하겠다고 해도 믿을 수 있어. 여기 있는 직원들은 인생의 쓴맛을 한 번씩 경험한 사람들이야. 그렇기 때문에 우릴 믿어주는 사장님을 앞세워 전진할 수밖에 없는 거고. 밑져야 본전 아니야?”
최석현의 말에도 코이치는 크게 맘에 와 닿지 않았다. 과연 경환이 자신을 믿어 주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아직은 확신이 들지 않아서였다. 단지 JSC와의 경쟁을 위해 자신의 합류를 받아들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코이치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코이치, 사장님께서 자네를 일본으로 금의환향시키겠다고 하셨다는데 그 말을 한번 믿어봐. 내 생각이지만, 자네를 위해 JSC와 경쟁을 하려는 거지, 자네를 이용해서 JSC와 경쟁을 하겠다는 건 아닐 거야. 내가 아는 사장님은 그런 분이야.”
“나를 위해 JSC와 경쟁을 한다.......”
코이치는 최석현의 말을 되풀이 해 봤다. 자신을 영입하지 않았다면, JSC와의 경쟁은 안중에도 없었다는 말로 들렸다. 이미 KBR을 손에 쥐고 있었고 많은 플랜트업체의 러브콜을 받고 있는 상태에서 JSC에 집중할 필요는 없다고 코이치는 생각이 들었다.
“코이치 난 네가 부럽다. 사장님은 너의 능력을 이미 간파하고 있고, 너를 전문경영인으로 키워 보려고 하는 거잖아. 난 죽었다 깨어나도 그런 대접 못 받는다고. 그러니 그냥 죽었다 생각하고 열심히 해. 한번만 더 쓸데없는 고민하면 너 자르라고 사장님한테 충언을 할 테니까.”
최석현의 농담에 코이치는 웃어 보이며 젓가락을 들어 맛있게 보이는 스시를 하나 집었다. 코이치는 다시 한 번 마음을 가다듬었다. SHJ가 전 세계를 아우르는 기업으로 성장했을 때 자신도 경환의 옆에 서있기를 바랐다.
“사장님, 혹시 SHJ라는 기업에 대해 아십니까?”
오성전자 사장실을 급히 찾은 한재웅 상무가 결재 판을 놓으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이세일 사장은 한재웅을 올려보았다.
“그룹 경영회의 때 들어 본 회사군요. 건설과 엔지니어링에서 SHJ 때문에 곤욕을 치른 거로 알고 있습니다. 아마 건설의 부장출신이 부사장으로 있다고 하던데요.”
“그 SHJ에서 퀄컴의 지분 6%를 인수하고 한국과의 로열티 지분도 40%를 흡수했다고 합니다. 아울러 단말기 제조에 대해서도 일부 권리를 가졌다는 말도 들립니다.”
한재웅의 말에 이세일은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켜 세웠다. 얼마 전 대현중공업을 KBR이란 플랜트업체와 합작을 성공시킨 업체라고 알고 있었는데, 플랜트와는 전혀 무관한 이동통신사업에 투자를 했다는 소식은 이세일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이동통신 사업보다는 단말기 제조로 방향을 바꾼 오성전자는 퀄컴의 기술제휴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기였고 느닷없이 튀어나온 SHJ에 이세일은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플랜트 컨설팅업체라고 알고 있었는데, 퀄컴에 투자를 했다는 사실이 놀랍군요. 단말기 제조에 SHJ의 입김이 작용하게 된다면 우리 오성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을 조사해 보세요.”
“저도 그게 좀 염려스럽습니다. 퀄컴과의 기술제휴가 절박한 시기에, 자칫 타 업체에 밀릴 수도 있다고 봅니다. 문제는 SHJ가 저희 오성과 쌓인 감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세일도 들어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그 당시에는 전자와는 상관이 없어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지만, 지금은 당장 자신의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격이었다. 퀄컴이 설계하고 라이선스를 가지고 있는 단말기 칩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그간의 기술개발은 물거품이 될 수도 있었다. 또한 SHJ가 쌓인 감정으로 인해 현재 경쟁업체인 금성전자나 대현전자와 협력을 시도한다면, 오성전자를 나락으로 떨어트릴 수도 있었다.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하고 SHJ에 장난을 심하게 친 오성엔지니어링에 쳐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지만, 지금은 해결방안을 먼저 모색해야만 했다.
“한 상무는 미국지사에 당장 퀄컴, SHJ와 접촉을 시도하라고 지시하세요. 단말기 사업은 회장님의 차기 미래 사업으로 대대적인 투자를 하고 있다는 걸 잘 아시리라 봅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SHJ를 설득시키라고 하세요.”
한세웅에게 지시를 내린 이세일은 급히 회장실을 향해 문을 박차고 나갔다.
수정의 출산으로 인해 오랜만에 출근한 경환은 직원들의 축하를 받느라 정신이 없었다. 경환을 축하해주는 직원들 사이로 코이치의 모습도 보이고 있었다.
“타케우치 차장님, 제대로 환영회도 못해줘서 미안합니다. 가족들이 입국을 하면 자리를 한번 만들어 보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사장님. 부사장님과 최석현 차장에게 매일 환영회를 받고 있습니다.”
경환은 최석현에게 술 좀 그만 마시라고 핀잔을 줬지만, 최석현은 먼 산만 바라보며 경환의 말을 한 귀로 흘려버리고 있었다. 직원들의 축하를 기쁘게 받고 있을 때 황태수와 린다가 할 말이 있는 듯 조용히 눈짓을 보냈다.
“사모님 몸이 풀리시면 찾아뵙겠습니다. 저희 집사람 말로는 사장님을 빼 닮았다고 하던데 저도 많이 궁금합니다.”
“타케우치 차장 가족들이 들어오면 겸사겸사 자리를 한번 마련하겠습니다. 제가 요새 거실에서 잠을 자고 있어서 몰골이 말이 아닙니다. 하하하.”
린다는 경환이 왜 거실에서 자는지 이해를 못하는 눈치였다. 경환은 한국의 산후조리를 자세히 설명을 해주었지만, 린다를 이해시키기엔 역부족이었다.
“급한 일이 있으신 거 같은데, 일부터 처리를 하죠.”
“어제 오성전자 미국지사에서 퀄컴사의 지분인수 건으로 인해 방문을 하고 싶다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제 개인적인 친분을 이용해서 연락을 해 왔습니다. 쿡 부사장과 이 문제에 대해 논의는 했지만, 오성전자에서 서두르는 이유가 정확히 파악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경환은 발 빠르게 움직이는 오성그룹에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정보력만큼은 안기부에서도 한 수 접어줄 정도였으니, 어찌 보면 SHJ의 퀄컴 지분인수 소식이 오성그룹에 들어간 것은 당연할 수도 있었다.
“제가 보기엔 오성전자에서는 어느 정도 단말기 제조기술을 습득한 상태라고 생각이 듭니다. 단말기의 핵심부품이 퀄컴의 라이선스로 묶여 있는 상태다 보니, 한국의 단말기 제조업체의 선정에 일정지분을 가지고 있는 우리가 목에 걸린 가시라고 생각을 하고 있는 거 같네요.”
경환의 말에 린다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불확실해 보이던 한국의 CDMA 상용화가 경환의 말대로라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장님, 그렇다면 퀄컴에서도 이 사실을 알았을 텐데 저희의 투자를 받아들인 이유가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퀄컴이 알았다면 당연히 받아들이지 않았겠죠. 오성전자에서는 철저하게 퀄컴의 눈을 속였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좋은 조건으로 퀄컴과 협상을 진행할 수 있었을 테니까요.”
“그럼 사장님은 이런 사실까지 예상을 하고 투자를 결정하신 건가요?”
린다의 질문에 경환은 그저 웃어만 보였다. 린다와 황태수는 도대체 경환의 정보력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알 수가 없어 벌린 입을 닫지 못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반대로 무릅쓰고 투자를 강행했을 때도 손해만 안 보면 다행이라고 생각을 했었다.
“이제 칼자루는 우리 손에 쥐어져 있습니다. 황 부사장님은 오성전자와 협상에 참여하지 마십시오. 이런 협상은 쿡 부사장님이 적격이니, 쿡 부사장님이 전권을 가지고 오성전자와 협상을 진행해 주세요. 불확실하다는 생각을 버리시고, 오성전자를 그로기상태로 몰아넣으시는 한이 있더라도 양보를 해 주지 마세요.”
황태수는 경환의 결정에 토를 달지 않았다. 투자부분은 엄연히 린다의 몫이었고 오성출신인 자신이 협상테이블에 앉는다는 것도 모양새가 좋지 못했다.
“제가 협상을 진행하도록 할게요. 사장님이 생각하는 가이드라인을 주세요.”
린다는 자신을 믿고 전권을 맡기는 경환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SHJ에 합류한 후에도 퀄컴과의 투자밖에는 성과를 보이지 못하고 있었지만, 경환은 린다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권을 드린다고 했잖아요. 쿡 부사장님이 잘 하시리라 믿습니다. 한 가지 팁을 드리자면 단말기 제조와 관련해서 오성전자의 가장 강력한 경쟁업체는 금성전자입니다. 이 정도면 충분하죠?”
경환의 정보를 받은 린다는 조용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신의 손으로 오성전자나 금성전자를 철저히 몰아세울 생각을 하니 그 동안 쌓였던 스트레스가 한 번에 사라져 갔다. 경환은 전투욕구를 몸 밖으로 발산하고 있는 린다를 바라보며 린다를 상대할 오성전자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올해는 제가 아빠도 되고, SHJ에 좋은 일이 많이 생길 거 같은 예감이 듭니다. 오늘 같은 날 술 한잔을 해야 되는데 제가 애처가다 보니 집에 일찍 들어가 봐야 됩니다. 두 분께서 이해를 해 주십시오. 하하하.”
“사장님 때문에 제가 집사람한테 시달려서 못 살겠습니다. 제발 적당히 좀 하십시오. 쿡 부사장은 아직 시집도 못간 처녀입니다. 처녀.”
“못간 게 아니라 안 간 거예요. 성희롱으로 고소를 할 수도 있어요. 황 부사장님!”
경환의 농담을 시작으로 세 사람은 크게 웃기 시작했다. 경환은 자신의 바람이 이뤄지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