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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인생-80화 (57/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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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인생 - 80

    5월로 접어든 휴스턴은 이미 한여름이라 해도 될 정도로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고 있었다. KBR의 요청에 의해 이루어진 전체회의에는 세 회사의 경영진과 실무책임자들이 모여 들었고, 먼저 기술개발을 맡고 있는 민인식의 브리핑으로 회의는 시작되었다. 설계와 기술개발은 일정을 단축시키며 순조롭게 진행이 되어, 다음 달이면 설계초안이 완성된다는 민인식의 보고는 세 회사의 경영진들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했다.

    “자, 우려했던 것과는 다르게 KBR과 대현의 기술합작은 성공적으로 진행이 되고 있는 거 같습니다. SHJ는 혹시 다른 정보를 입수하고 있나요? 세 회사가 한배를 탄 이상 정보를 공유해야 된다고 봅니다.”

    윌리엄은 기술개발이 원활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에 고무되었는지, 옆 자리에 앉아있던 경환과 정상길에게 악수를 청하고는, 경환에게 정보공유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사실 KBR과 대현중공업의 합작을 만든 거 이외에는 SHJ에서 받은 정보가 없다는 것을 윌리엄이 우회적으로 불만을 표시하는 것이기도 했다. 경환은 평소와 달리 자신에게 도전적인 윌리엄을 슬쩍 쳐다본 후 입을 열었다.

    “기술개발팀의 노력에 감사드립니다. 현재 저희의 가장 강력한 경쟁상대로는 영국의 페트로팍 J.V(JOINT VENTURE), 일본의 미쓰비시 J.V 두 곳으로 볼 수 있습니다. 기술력으로는 페트로팍, 가격으로는 미쓰비시가 강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페트로팍이라는 말에 윌리엄은 미간을 좁히고 있었다. KENTZ보다도 상대하기 까다로운 곳이 페트로팍이었기 때문이었다. 두 업체 모두 상대하기 벅찬 보였지만, 민인식의 성과보고를 한 후라 다들 크게 걱정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KBR J.V에서는 기술력으로 페트로팍에 근접시키고, 가격에서는 미쓰비시를 눌러야 되는 어려운 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기술력이 오늘 회의를 통해 확인된 만큼 입찰가격에 대해서는 저희 SHJ를 믿어 주시기 바랍니다.”

    원칙적인 답변만 하고 경환이 입을 다물자, 윌리엄은 재차 경환을 독촉하고 나섰다. 이 프로젝트는 윌리엄 자신의 목을 걸고 진행하는 것인 만큼 조급하다는 것을 이해는 하고 있지만, 오늘은 작정이라도 한 듯 경환을 몰아세우고 있었다.

    “입찰가격에 대한 정보를 미리 알려줄 수는 없는 건가요? SHJ의 정보력에 의심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매번 이러니 좀 답답합니다.”

    윌리엄은 경환을 다그쳤지만, 경환은 크게 개의치 않고 있었다. 단지 급한 성격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어딘가 달라진 윌리엄을 경환은 묵묵히 바라볼 뿐이었다. 분위기가 무겁게 흘러가는 것을 느낀 정상길이 급히 중간에 말을 이었다.

    “자, 자. 오늘같이 좋은 날, 분위기를 무겁게 가져갈 필요가 있겠습니까? 낙찰가에 대한 정보는 어렵다고 하더라도, 최소한의 정보는 SHJ에서도 공유를 해 주셨으면 합니다.”

    “흠, 흠.”

    윌리엄은 겸연쩍은 듯이 헛기침을 내 뱉었다. 경환은 잠시 숨을 고른 후에 입을 열었다.

    “입찰가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입찰 전에 알려드리겠습니다. 단지 제가 드릴 수 있는 정보는 입찰 조건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예정된 총 3기 중에서 이번 1차 입찰에 2기를 한 번에 입찰을 한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TOTAL의 입찰예정가는 1기 18억 불, 2기 20억 불, 총 38억 불 규모의 대형입찰입니다. 최대한 이 금액과 근접을 시키는 업체에게 낙찰이 될 것으로 봅니다.”

    경환의 정보로 인해 회의장은 침묵에 휩싸여갔다. 39억 불이라면 근래 들어 가장 규모가 큰 프로젝트였기 때문에 윌리엄과 정상길은 목으로 침을 삼켰다. 이 정보는 윌리엄으로도 처음 접하는 정보였다. 며칠 전 TOTAL의 뱅상과 전화통화를 하면서도 제공되지 않았던 정보를 경환은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에 윌리엄은 입술을 깨물었다. 여러 번 시도를 했지만, 경환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루트를 찾아낼 수는 없었다. 그 루트만 알아낸다면 억만 금을 지불해서라도 경환을 밀어내고 자신이 독점을 할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윌리엄의 아쉬움은 깊어만 갔다.

    “TOTAL에서는 아무런 말이 없는데, 확실한 정보입니까?”

    “아직은 보안을 유지하려고 할 겁니다. 나이지리아정부와 TOTAL에서는 낙찰가를 낮추기 위해 고육지책으로 2기를 한 번에 입찰하려고 계획 중입니다. 아마 7월경엔 공시를 하게 될 겁니다. 두 달의 시간을 잘 활용한다면 절대적으로 유리한 고지에 우리가 먼저 오를 수 있습니다. 이 정보는 절대 보안을 유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경환이 FPSO 입찰에 목을 맨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운영자금이 아쉬운 경환에게 1억불이 넘어가는 컨설팅비용은 퀄컴의 로열티가 들어오기 전까지 SHJ의 숨통을 트이게 해줄 오아시스였기 때문이었다.

    “하하하, 역시 SHJ의 정보력은 대단하네요. 입찰은 SHJ만 믿고 우리는 기술개발에 박차를 가하기만 하면 되겠습니다.”

    정상길의 말에 적막하던 회의장은 웃음바다가 되었지만, 윌리엄과 경환은 표정의 변화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뱅상 지라드가 입찰공시 전 미국을 방문할 예정이네. 자네와 함께 자리를 하자고 하니 준비하고 있게.”

    윌리엄은 조용히 경환에게 말을 전하고 있었지만, 얼굴은 여전히 굳어있었다. 윌리엄의 행동이 경환은 신경 쓰였지만, 특별한 의미는 부여하지는 않았다.

    “알겠습니다. 일정을 통보해 주시면 준비를 하겠습니다.”

    전체회의는 한참을 더 지속한 후에 마무리가 되었다. 경환은 황태수와 함께 연회의 참석을 뒤로 미루고 사무실로 돌아와 타케우치 코이치를 맞이해 주었다.

    “예정보다 많이 늦었는데 정리는 다 하셨나요?”

    예정보다 한 달이나 늦게 도착한 코이치는 경환의 질문에 연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일본에서 일이 좀 지체되었습니다.”

    더 이상 늦은 이유에 대해 묻지 않고 경환은 황태수와 린다를 자리로 불러 자리를 함께했다.

    “쿡 부사장님, 주택과 차량은 준비가 되었겠죠?”

    “주택은 사장님과 같은 아파트로 오늘부터 입주가 가능하도록 준비를 해 두었습니다. 차량은 곧 준비를 해 놓겠습니다.”

    코이치는 경환과 같은 아파트로 준비를 했다는 소리에 놀라고 있었다. 상식적으로도 회사의 대표와 같은 급의 주택을 준비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최대한 빨리 가족들을 불러 오세요. 가족과 함께 생활을 해야 일에도 능률이 생긴다는 게 저희 회사 방침입니다. 가족들이 여기 생활에 빨리 적응을 할 수 있도록 지원을 해 드리겠습니다.”

    “한국의 박화수 사장을 통해 전해 들었습니다. 식구들은 다음 주에 들어올 예정입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경환은 황태수의 표정을 살폈고 황태수는 JSC에 대한 묵은 감정을 털어냈다는 듯이 경환을 향해 고개를 끄떡여 보였다.

    “타케우치 코이치 씨는 차장직급으로 황태수 부사장님을 보좌해 주십시오. 시간적인 여유를 드리지 못해 죄송하지만, 현재 저희는 FPSO 사업에 전력투구를 하고 있습니다. FPSO 사업에 대해서는 황 부사장님에게 따로 설명을 받으시고 내일부터라도 프로젝트에 참여를 해 주세요.”

    코이치는 KBR의 린다까지 SHJ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에 묘한 흥분마저 느끼고 있었다. 일 년밖에 되지 않은 신생기업에 KBR의 차기 주자로 손꼽히던 린다까지 참여할 정도라면 분명 자신이 생각하지 못한 큰 비전이 SHJ에 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었다. 이미 자신의 결정으로 JSC를 떠났기에 더 이상 미련을 갖기 않기로 맹세를 하고 도미(渡美)를 결정했다. SHJ에 합류한 이상 자신의 모든 능력을 발휘해 하루라도 빨리 중추적인 자리를 확보할 생각이었다.

    “타케우치 차장님은 FPSO 사업이 끝나면 JSC가 중점적으로 관리하려고 하는 북아프리카 입찰을 수행하셔야 됩니다. 철저하게 JSC의 행보를 막아 보세요. 제 목표는 타케우치 차장님을 SHJ의 이름을 걸고 일본으로 금의환향시키는 겁니다.”

    코이치는 경환의 계획을 듣고는 몸이 떨려옴을 느꼈다. 경환의 목표가 명확히 들어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현재 SHJ의 능력으로는 거대한 공룡인 JSC를 집어 삼키는 것이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망상에 가까운 경환의 계획에도, 지금 자신과 자리를 함께하고 있는 세 사람은 전혀 JSC를 두려워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저는 이미 SHJ와 함께 하기로 했습니다. 최선을 다해 JSC의 행보를 막겠습니다. 그 이후는 사장님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코이치의 결심에 황태수는 그의 어깨를 ‘툭툭’쳐주며 웃어 보였다. 황태수 또한 코이치의 업무적 능력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경험만 쌓인다면 자신을 뛰어넘고도 남을 인재란 사실을 질투도 할 수 있었지만, 황태수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자네에게 기대를 많이 하겠네. 사장님이나 나나 한국인이지만, SHJ는 국적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중용할 거네. 그건 자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이 될 것이고. SHJ를 위해 자네의 능력을 발휘해 주게.”

    ‘띠리링~, 띠리링~’

    경환은 울리는 휴대폰이 신경이 쓰였지만, 번호를 확인하고는 회의 중임에도 불구하고 급히 휴대폰을 열었다.

    “네? 알겠습니다. 바로 출발을 하겠습니다.”

    경환은 자리에서 급히 일어나 양복 상의를 걸치지도 않고 급히 사무실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사장님! 도대체 무슨 일이십니까?”

    경환의 당황해 어쩔 줄 모르는 모습에 황태수는 걱정을 하며 경환을 불렀다. 혹시라도 큰 사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황태수는 바짝 긴장을 하고 있었다.

    “집 사람 진통이 시작됐다고 합니다. 급한 일은 부사장님이 처리를 해 주세요. 저 먼저 가 보겠습니다.”

    엘리베이터로 사라지는 경환을 보면서 황태수와 린다는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다들 이해한다는 듯이 환하게 웃기 시작했다.

    경찰단속을 당하지 않은 것이 다행일 정도로, 엑셀을 끝까지 밟으며 메디컬 센터에 도착한 경환은 제대로 주차를 하지도 못한 채 산부인과 병동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아침 출근할 때만 해도 가벼운 진통밖에 없어 안심을 하고 출근한 자신을 원망하고 있었다. 평소 거대한 규모의 메디컬 센터를 보며 부러워했었지만, 오늘은 죽어라 뛰어도 도착하지 못할 정도의 큰 규모가 원망스럽기만 했다. 와이셔츠가 땀으로 범벅이 될 정도로 죽을힘을 다해 뛰어 대기실에 도착한 경환은 어머니와 장모님을 본 후에야 안도할 수 있었다.

    “수정이는 어떻습니까?”

    “방금 출산실에 들어갔다. 의사가 너를 찾던데 빨리 가봐라.”

    경환은 급히 간호사를 찾았고 멀리서 걸어오는 담당 의사를 확인할 수 있었다.

    “닥터 베런, 좀 늦었습니다. 상황은 어떤가요?”

    “정상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환복과 세척을 하신 후에 출산실로 들어오세요.”

    출산일이 다가 오면서 경환은 출산실에같이 있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담당의사는 흔쾌히 동의를 해 주었다. 급히 세척과 환복을 한 후 들어간 출산실에는 불안해 떨고 있는 수정이 누워있었다. 진통의 고통과 불안함에도 제대로 소리를 지르지 못하는 수정을 보고 경환은 급히 달려가 손을 잡아 주었다.

    “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어. 옆에 있을 테니까 안심해. 다 잘 될 거야.”

    경환을 확인한 수정은 그제야 참았던 눈물을 터트리며 손에 힘을 주었다. 수정의 손톱이 경환의 손바닥을 파고들고 있어도 경환은 수정의 손을 놓지 않았다.

    “잘하고 있어요. 수정, 힘을 계속 줘요.”

    경환이 옆에 있다는 사실에 안도를 했는지, 비명을 지르면서도 용케 힘을 주고 있었다. 경환의 손은 피멍이 들어가고 있었지만, 전혀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자, 머리가 보이기 시작했어요. 얼마 안 남았으니, 힘을 내요.”

    담당의사는 계속 수정을 안심시키기 위해 말을 건네고 있었지만, 수정과 경환의 귀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한 시간 넘게 수정의 고통을 바라보며 경환은 가슴이 찢어져 가고 있었지만, 자신이 도와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에 낙담을 하고 있었다.

    “아아악~”

    마지막 비명과 함께 수정은 고개를 떨어뜨렸고 잡았던 경환의 손은 맥없이 풀려졌다.

    “응애~, 응애~”

    “축하합니다. 제임스2세와 인사를 나눠보시겠어요?”

    담당의사는 탯줄을 잘라 유리병에 넣은 후 아이를 들어 경환과 수정에게 확인을 시켜 주었다. 수정은 아이를 품에 안은 후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경환씨, 나 정말 죽을 거 같았어요. 그래도 정우를 안고 있으니 고통이 다 사라지는 거 같아요. 옆에 있어줘서 고마워요.”

    “수고했어. 정말 수고했어. 그리고 너무 고맙다.”

    정우를 안아 든 경환의 눈에서도 굵은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전생에서 만나보지 못한 새로운 자신의 핏줄이 바라보며 경환은 감격하고 있었다. 경환은 의사에게 정우를 맡기고 수정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자신의 또 다른 분신인 정우를 하염없이 바라보던 경환은 전생의 딸인 희수에 대한 애절함에 또 다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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