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79화 (56/264)

#79

다시 사는 인생 - 79

4년이란 시간 동안 쉼 없이 앞만 바라보고 달려온 경환은 이번 무리한 출장일정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며칠 출근을 하지 못하고 집에서 쉬어야만 했다. 그러나 세 여자의 건강을 챙기라는 끊임없는 잔소리로 인해 서둘러 몸을 추스르고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수정의 지극한 간호덕분인지 한결 가벼워진 몸을 느낄 수 있었다. 오랜만에 찾은 사무실에선 이다나가 반갑게 경환을 맞아 주었다.

“사장님, 몸은 괜찮으신가요? 급한 결재서류들은 책상 위에 올려놨습니다.”

“고마워요. 두 부사장님들을 불러 주세요.”

오랜만에 만나서 그런지 이다나는 손수 커피를 내려 경환의 손에 건네주며 밝은 미소를 보였다. 일주일을 넘게 자리를 비워서인지 제법 많은 서류들이 책상 위에 놓여서 있었고 경환은 퀄컴의 자금집행서류를 시작으로 꼼꼼히 서류를 살펴보며 결재를 해 나가고 있을 때 황태수와 린다가 경환의 방으로 들어왔다.

“잠시 자리에 앉아 계십시오. 급한 서류부터 결재를 해야 되겠습니다.”

경환은 빠르게 서류를 검토해 나가며, 좀 더 확인을 해야 될 필요가 있는 몇 건의 서류를 제외하고 결재를 모두 마무리 했다. 이다나에게 결재된 서류를 건넨 경환은 머그잔을 들고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퀄컴의 투자를 잘 마무리를 했더군요. 자금집행엔 문제가 없겠죠?”

“법적인 검토가 완결됐고 투자승인이 마무리 되는 4월말쯤으로 계획을 잡고 있습니다. 천오백만 불은 확보를 했기에 집행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단지 내년도 2천만 불이 걱정이 되긴 합니다.”

SHJ는 금융권의 투자를 받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대형 프로젝트를 성공시키지 못한다면 퀄컴의 투자뿐만 아니라 심각한 경영위기를 겪을 수도 있었다. 린다의 불안한 얼굴을 경환은 이해한다는 듯 바라보았다.

“황 부사장님께서 FPSO를 반드시 성공을 시키면 되는 거 아닌가요? 하하하.”

경환의 농담에도 두 사람의 표정은 굳어있었다. 뻘쭘해진 경환은 급히 웃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두 분이 긴장을 하시니 심각하긴 하나 보네요. 우선 FPSO 프로젝트에 매진을 하겠습니다. 이번 중국출장으로 금년부터 유연탄수출량을 300만 톤 이상으로 증가하기로 화동과 합의를 했습니다. 이에 따라 매년 천만 불 이상의 자금을 확보할 수 있으니 급하다면 홍콩자금을 대안으로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번 퀄컴의 투자는 반드시 SHJ에게 엄청난 이익을 안겨 줄 것을 확신합니다. 지금은 이해가 안 되더라도 3년만 저를 믿고 기다려 주십시오.”

린다는 말라가는 SHJ의 자금을 매일 확인하며 탄식을 하고 있었지만, 불안해하지는 않았다. 경환을 통한 SHJ의 미래를 린다는 확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쿡 부사장님은 퀄컴 투자가 완결되면, 차후 투자패턴에 대해 보고를 해 주세요. 단기투자이익 보다는 장기투자로 방향을 잡아주시고, 선물거래부분도 연구를 해 주십시오.”

경환이 노리는 JSC의 인수를 위해서는 천문학적인 자금이 필요했다. 단순하게 컨설팅의 수익으로는 언감생심이었기에 린다에 거는 기대는 그만큼 클 수밖에 없었다. 부족한 자금으로 하루하루 줄타기를 하는 심정이었지만, 맨주먹으로 이 자리까지 왔기에 충분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지금은 자신의 주위로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들이 있어 경환은 불안해하지 않았다.

“FPSO T.F팀에서는 특별한 소식이 없나요?”

“순조롭게 진행이 되고 있습니다. KBR에서는 T.F팀장을 이끌고 있는 민인식 팀장에게 놀라는 분위기입니다. 처음엔 잡음이 있긴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민 팀장의 능력에 KBR의 연구원들이 빠져들고 있습니다. 예정된 시간에 결과물이 나올 거 같습니다.”

민인식의 실력을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인정을 받고 있을 줄은 몰랐다. 경환은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에 황태수를 향해 큰 미소를 보여 주었다.

“민 팀장님은 대단하신 분입니다. SHJ로 꼭 모시고 싶긴 한데 그 분이 의외로 강직한 성격이라 포기를 했습니다. 기술개발은 그럼 한시름 놓고 본격적으로 입찰 준비를 해야 될 거 같습니다. 황 부사장님께서는 잭과 정보공유에 신경을 써 주세요.”

“알겠습니다. KBR에서는 전체회의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기술개발에 자신감이 들어서인지 입찰에 큰 의욕을 보이는 거 같습니다.”

경환은 고개를 끄떡이며 전체회의에 대한 일정을 통보하라는 지시를 황태수에 내리고는 코이치에 대한 얘기를 꺼내려 했다.

“이번 JSC와의 미팅에서 타케우치 코이치가 SHJ에 합류의사를 밝혔습니다. 저는 허락을 했습니다. 쿡 부사장님은 휴스턴 정착에 어려움이 생기지 않도록 지원을 아끼지 말아 주세요. 코이치를 통해 저는 큰 그림을 그리고 싶어졌습니다.”

린다는 그의 합류에 대해 특별한 반응을 보이고 있지 않았지만, 황태수는 달랐다. 코이치가 개입이 된 건 아니었지만, JSC로 인해 오점이 생긴 황태수는 그의 합류가 달갑지는 않았다. 경환은 이해는 하지만, 황태수의 심정까지 헤아려 줄 수는 없었다.

“당분간 황 부사장님 밑에서 빡세게 굴려 보십시오. 그리고 FPSO 프로젝트가 끝나면 기존의 KBR컨설팅에서 벗어나 업무영역을 확대하시되, 주 타깃을 JSC로 삼아 JSC의 입찰을 철저히 공략하는 전략으로 계획을 수립해 주십시오. 그 전면에 타케우치 코이치를 내세울 생각입니다.”

경환의 말에 두 사람은 의미를 헤아리느라 서로의 얼굴을 마주봤다. 경환이 JSC를 타깃으로 공략을 하겠다는 의미를 깨닫고 눈이 커져만 갔다.

“사장님, 혹시 JSC를 맘에 두고 계십니까?”

황태수는 급히 소파에서 급히 등을 세우며 경환의 대답을 기다렸다.

“2000년이 넘어가면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 전에 한번 도전을 해 보고 싶네요. JSC를 인수하게 된다면 SHJ는 컨설팅에서 벗어나 플랜트시장에 당당히 얼굴을 내밀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지금 저희의 자금사정으로는 어불성설이란 거 잘 압니다. 그래도 꿈은 크게 꿔야 되는 거 아닙니까?”

린다와 황태수는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JSC를 인수하기 위해서는 10억 불 이상의 자금이 필요한 상황에서 현재 천만 불도 안 되는 자금으로 하루살이마냥 버티고 있는 SHJ로서는 감히 인수의 ‘인’자도 꺼낼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무턱대고 반대 할 수도 없었다. 모두들 불가능하다고 생각해 왔던 일들을 경환의 추진력 하나로 이 자리까지 왔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었다.

“2000년을 시점으로 그룹경영체제로 운영을 해 볼 생각입니다. 그때까지 두 분께서는 저를 많이 도와 주셔야겠습니다. 그리고 쿡 부사장님은 빠른 시간 내로 스톡옵션에 대한 보고를 해 주십시오.”

연이어 터지는 경환의 계획에 린다와 황태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경환의 계획에 반대를 할 생각은 없었다. 우선은 FPSO 사업에 전력을 기울여 자금을 확보하는 것이 시급했다. 회의는 의외로 길어졌고 경환은 두 사람에게 좀 더 깊은 얘기까지 꺼내며 두 사람의 신뢰를 얻어가고 있었다.

‘꽝’

최준석은 두 주먹을 들어 책상을 내리쳤다. 책상 위에 놓여진 극비라고 써진 성수대교 점검보고서가 어지럽게 흩어지고 있었다. 정기명은 눈을 감은 채 최준석의 분노를 고스란히 당할 뿐이었다.

“이게 말이 됩니까! 그래서 결론이 뭡니까? 다리가 무너지기라도 한다는 겁니까!”

정기명은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외부 전문가들의 보고서와 회사 안전 팀의 보고서가 상이한 결과를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평소대로라면 전문가들의 보고서를 무시할 수 있었겠지만, 곧 KBR의 안전점검 팀의 방한이 예정된 상태에서 무턱대고 폄하할 수도 없었다.

“관리 소홀로 인해 강철판의 피로균열이 발생되었고 일부 접합된 볼트가 유실되고 있다고 합니다. 특히 다리 중앙 상부트러스는 심각한 수준이기에 안전을 장담 할 수 없다는 보고입니다.”

정기명은 차마 부실시공이 원인이란 말을 꺼내진 못했다. 단지 관리 소홀이란 표현으로 상황을 무마하려고 했다. 트러스트 교량의 경우 철저한 사후 관리가 되어야 했지만, 성수대교는 완공 이후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관리를 하지 못했다.

“회사 점검 팀의 보고는 일부 수리와 보강만 하면 된다고 나와 있지 않습니까? 도대체 보고서의 결과가 다른 이유가 뭡니까?”

아직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최준석은 허리춤에 양손을 대고 정기명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성수대교 공사에 참여한 전력이 있는 정기명의 이마로는 굵은 식은땀을 흘러 내렸다.

“문제는 KBR이 곧 점검을 한다는 거라고 봅니다. KBR의 점검만 없다면 전문가들의 보고서는 무시하고 일부 보강을 하는 선에서 종결을 지으면 되겠지만, KBR의 점검은 국내 전문가들의 수준을 뛰어 넘고 있다는 게 문제라고 봅니다.”

‘꽝, 꽝.’

최준석은 정기명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책상을 내리치며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있었다.

“말 돌리지 말고, 결론만 말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정 사장 당신 옷 벗고 싶어!”

“KBR과 거래를 하느냐 마느냐에 따라 대응방법이 달라진다고 봅니다. 저희가 거래를 포기한다면 일부 보강하는 선에서 마무리를 하면 되겠지만, KBR과의 거래를 지속해야 된다면 성수대교의 대대적인 수리 혹은 상부 트러스를 전체 교체하는 수준까지 검토를 해야 됩니다.”

정기명은 성수대교가 뜨거운 감자가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30년을 넘게 아동건설에서 보낸 세월이 빠르게 눈앞으로 스쳐지나 가고 있었다. 마음을 비우니 마음이 편해지는 걸 느낀 정기명은 그제야 최준석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었다.

“문제는 하나 더 있습니다. 전문가들의 보고서가 서울시에도 올라간 상태입니다. 시 공무원들이야 저희들 입맛대로 구슬릴 수 있지만, 혹시라도 정치권 실세들이 냄새를 맡게 된다면 엄청난 대가를 요구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런 비용을 주느니 회사의 인지도를 높이는 방책으로 전면교체를 해도 좋다고 판단됩니다.”

최준석의 머리에는 진퇴양난이라는 사자성어가 떠오르고 있었다. 자신도 성수대교의 부실시공에 대해선 감을 잡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심각하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대대적인 수리를 해 봐야 KBR의 눈을 피해갈 수 없었기에 큰 의미가 없었다. KBR을 포기하느냐, 상부 트러스를 교체하느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최준석은 장고를 하고 있었다. 정기명이 말한 정치권의 대가요구도 최준석을 신경 쓰이게 했다.

“문제가 된 중앙의 상부 트러스를 교체했을 때의 비용과 소요기간을 산출해서 보고하도록 하세요. 그리고 정 사장이 SHJ와 이 문제에 대해 협의하고 계약에 문제가 되지 않도록 설득을 하시고요. KBR이 딴죽을 걸지 않고 계약을 진행하겠다고 한다면 교체하는 방향으로 검토를 하세요.”

KBR을 포기하기에는 덩어리가 너무 컸다. 상부 트러스를 교체하려면 상당한 자금이 소요되긴 하지만, 홍보를 통해 안전을 중요시 하는 기업으로 이미지 쇄신작업을 한다면 수지타산이 맞는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다. 그 전에 KBR과의 계약이 우선되어야 하겠지만, 그건 정기명이 해야 될 몫이었다.

FPSO 전체회의를 준비하고 있던 황태수는 서울에서 들어온 팩스를 집어 들고 급히 경환의 사무실을 찾았다.

“사장님, 아동건설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공문을 보냈습니다. 한번 보시죠.”

경환은 하던 일을 중단한 채 황태수가 내민 팩스를 읽고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성수대교의 시공상의 문제가 아닌 관리상의 문제로 인해 중앙 상부 트러스를 전면 교체작업을 계획하고 있다는 말과 함께 KBR과의 계약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최대한 SHJ의 협조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문제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수리가 아닌 교체를 한다는 게 납득이 안 되네요. 사장님 보시기에는 어떻습니까?”

경환이 기뻐하는 표정을 본 황태수는 의중을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경환은 황태수를 보면 한시름 놓았다는 듯이 크게 한숨을 내 쉬었다.

“문제가 있으니 교체를 한다는 거겠죠. 부사장님께서 아동건설의 결단을 지지한다는 내용과 KBR과의 계약은 문제없이 이뤄질 거라는 내용의 공문을 보내십시오.”

KBR에서는 경환의 부탁들 받고 안전점검 팀을 파견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이렇듯 아동건설이 스스로 상부 트러스 교체라는 카드를 꺼내 놓을지는 경환도 예상을 하지 못했었다. 약속은 약속이니 이젠 경환이 아동건설에 선물을 줄 차례였다.

“KBR에서 토목업체 시공사 선정과 관련해 독촉을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부사장님 주관으로 아동건설과 계약을 진행시키세요. 늦어도 5월초부터는 공사를 시작해야 되니 서두르면 시간은 맞출 수 있다고 봅니다.”

“알겠습니다. 비용적인 면에서는 아동건설이 적격인데 이렇게 먼 길을 돌아오시는지 전 잘 이해가 안 됩니다.”

경환은 단지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경환은 마음속의 큰 짐을 덜어 놓은 홀가분함을 느꼈다. 어떤 이도 이해해 주지 못할 그런 시원한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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