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76화 (53/264)

#76

다시 사는 인생 - 76

일 년 만에 찾은 북경은 서서히 변화의 조짐이 보이고 있었다. 도로주변에는 새롭게 들어서는 건물들이 눈에 보였고, 도로는 정비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중국이 경제대국으로 들어서기 위해선 아직 시간이 필요했기에, 경환은 그 시간이 오기 전까지 최대한 빼먹고 중국에서 손을 털 준비를 하고 있었다.

호텔에서 충분히 휴식을 취한 경환은 왕샹첸과의 만남을 위해 택시를 잡아타고 약속된 장소로 향했다. 장안가의 새롭게 들어선 건물에는 고급스러워 보이는 중식당이 화려한 네온사인을 휘날리고 있었다. 종업원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방안에는 이미 왕샹첸이 경환을 기다리고 있었다.

“샤오 리, 오랜만이군. 자네 소식은 김 부장을 통해 듣고는 있었네. 미국에서 크게 사업을 일으켰다고 들었어.”

“형님, 더 건강해 보이시는군요. 바쁘실 텐데 자리를 마련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권의 실세로 한걸음 다가선 왕샹첸은 표정에서 여유로움이 풍겨지고 있었다.

“오랜만에 봤으니 술 한 잔 하자고 불렀어.

왕샹첸은 50도가 넘어가는 백주를 잔에 따라 건네주었다. 잔을 받아 든 경환은 탁자 위에 차려진 산해진미들을 쳐다보지도 않고 빠르게 잔을 비웠다. 왕샹첸의 집요함을 사전에 봉쇄하지 않으면 힘들 수도 있다는 생각에 경환은 잔을 내려놓자마자 말을 꺼냈다.

“형님, 김 부장의 보고를 들어 알고는 있지만, 경무부에서 요청하는 일본기업으로의 확대는 불가능합니다. 죄송합니다. 이말 먼저 드리고 싶었습니다.”

경환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왕샹첸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비워진 잔에 술을 한잔 따라 주었다.

“자네가 그렇게 말할 줄 알고 있었네. SHJ에 일본기업까지 서비스를 하라는 것은 내가 생각해 봐도 말이 안 되지.”

왕샹첸이 만나자는 이유가 서비스 확대라고 생각했던 경환은 순간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침착하지 못하고 먼저 자신의 패를 뒤집은 것을 경환은 후회를 하고 있었지만, 이미 말은 뱉은 상태였다.

“이해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사실 형님의 입장을 생각해서 시작한 서비스입니다. 형님만 아니었으면 진작 접었을 겁니다.”

경환은 사업이 아닌 서비스라는 것을 강조, 왕샹첸이 부탁을 해 오지 못하도록 한 번 방어막을 쳤지만, 왕샹첸은 권모술수에 능한 정치가답게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일본기업 문제는 내 선에서 정리를 하겠네. 사실 내가 자네를 보잔 이유는 다른 거야.”

“감사합니다. 무슨 일인가요?”

왕샹첸과의 만남은 유쾌했던 기억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경환은 살짝 불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미국에서 자네가 몇 사람의 뒤를 좀 봐줬으면 해. 누구라고는 자세히 말을 해줄 수 없지만, 그들이 미국에서 생활하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자금 적으로 지원을 해 주면 되는 일이야.”

그제야 경환은 왕샹첸의 부탁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었다. 그 당시 중국 고위관료들의 자식들은 미국이나 서방국가로 유학을 보내는 것이 일종의 유행처럼 번지고 있었다. 왕샹첸은 자신의 뒤를 밀어주는 인물들의 자식내지는 가족 혹은 숨기고 싶은 사람들의 생활비를 지원해 달라는 부탁을 하고 있었다. 경환은 보모 노릇까지 해야 되는 자신의 모습이 한탄스러웠지만, 아직 중국에서 빼 먹어야 될 것이 남아있었기에 왕샹첸의 부탁을 모른척할 수는 없었다.

“많은 인원만 아니라면 가능합니다. 자금추적을 받을 수 있으니 구좌를 정해 주시면 홍콩에서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형님께서 부탁하시니 그 정도는 제가 해드려야겠죠.”

“하하하, 그리 많은 인원은 아니니 지레 겁먹지 않아도 돼. 아마 장 사장이 자네에게 선물도 준비하고 있을 테니까 만나보도록 하고.”

경환은 화동에서 유연탄의 양을 늘리자는 이야기를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일종의 보상차원에서 물량을 늘려준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눈치 챌 수 있었다. 김창동의 업무가 하나 더 늘어나겠지만, 그리 나쁜 조건은 아니었다. 경환은 가벼운 마음으로 식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

한국통운과 중원그룹과의 합작조인식은 무리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한국통운은 중원그룹과 합작회사를 설립, 물류관리시스템을 제공하며 중국의 물류단지 건설과 내륙운송 분야에 참여하는 길이 열렸고, 중원그룹은 이를 통해 열악한 중국의 물류 선진화에 한발 가까이 갈 수 있는 길을 열었다는 점에서 두 회사 모두 결과에 만족을 하고 있었다. 또한 한국에서 이뤄지는 중원그룹 선박의 모든 하역권이 자연스럽게 한국통운으로 넘어가게 되었기 때문에 한국통운은 실질적인 이득을 상당히 챙길 수 있었다.

조인식이 끝난 후 중원그룹이 주관한 연회에는 양국의 교통부 관계자들과 영사관 경제지 기자들까지 많은 인원들이 모여 있었지만, 경환은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이번 합작 추진으로 SHJ 손에는 아무것도 쥐어진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국통운과 중원그룹 관계자들의 인사를 건성으로 받아 넘긴 후 자리를 빠져 나가나 할 때 궈청이 급히 경환을 붙잡았다.

“제대로 인사도 하지 못했는데, 먼저 가시면 섭섭합니다.”

궈청은 사람 좋은 웃음을 보이며 경환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궈청은 약속을 지켜준 경환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었다.

“조인식도 잘 끝났고 더 이상 제가 있을 자리는 아닌 거 같습니다. 강행군을 하다 보니 몸이 견디질 못하네요. 그리고 개인적인 약속이 있어 오래 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장 사장과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경환의 말이 틀리진 않았지만, 사실은 쓸데없이 이 자리에 머물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더 강하게 작용을 하고 있었다.

“미국에서 사업을 시작했다고 들었는데 역시 바쁘시군요. 소개시켜 줄 사람이 있는데 잠시 시간을 내 주시겠습니까?”

몸은 피곤했지만, 부탁을 거절할 수는 없었던 경환은 궈청의 집무실로 자리를 이동했다. 궈청의 집무실에는 중국인이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고급스러운 슈트를 걸친 동양인이 서 있었다.

“이 분은 홍콩의 피닉스투자개발의 리챠드 첸 사장입니다. 그리고 이 분은 미국 SHJ투자컨설팅의 이경환 사장이고요.”

궈청의 소개에 두 사람은 각자의 명함을 교환하며 가볍게 인사를 나누었다. 부동산개발업자인 리챠드는 40대라는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관리가 잘 된 몸매를 하고 있었고 북경어를 못하는 듯 영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미국에서 플랜트컨설팅을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젊으신 분께서 대단하시네요.”

“과찬이십니다. 조그만 구멍가게 수준입니다. 대량의 자금이 투입되는 부동산개발과는 상대로 할 수 없죠.”

중국의 개방초기 부동산 개발투자는 홍콩의 자금으로 시작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중국의 부동산개발에 투자를 계획하고 있던 경환은 리챠드과 인연을 맺을 생각도 순간 들긴 했지만, 아직은 기다려야만 했다. 중국은 2000년을 시점으로 부동산과 주식에 불이 붙기 시작하기 때문에 지금은 시기적으로 너무 빨라 큰 재미를 볼 수는 없었다.

“대단하신 분을 알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도 중국의 부동산 개발에 관심은 가지고 있지만, 자금적인 여력이 미약하다 보니 때를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경환의 말에 리챠드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궈청의 말을 듣고 SHJ에 대한 조사를 했고 신생기업이긴 하지만, 미국과 한국 홍콩에 법인을 두고 자금력 또한 탄탄하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하하, 그러십니까? 마침 저희가 북경의 옌사에 대형 오피스빌딩을 신축하려 준비 중에 있습니다. 관심이 있으시면 투자에 대한 조언을 해 드리겠습니다.”

옌사지역이 노른자인건 사실이지만, 투자의 시기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리챠드의 행보를 지켜볼 생각인 경환은 지금의 제안은 거절을 할 수밖에 없었다.

“미스터 첸, 자금적인 여력이 아직은 안 됩니다. 그러나 미스터 첸을 통해 부동산투자는 한번 해 보고 싶어지긴 합니다. 자금 여유가 생긴다면 제가 따로 연락을 한번 드리겠습니다. 제가 다른 약속이 있어 나가봐야겠습니다.”

입맛을 다시며 아쉬워하는 리챠드를 뒤로 하고 경환은 중원그룹을 나섰다.

“샤오 리, 이게 얼마만이야? 이제는 제법 사업자처럼 보이는데. 하하하.”

경환을 격하게 끌어안고 자리에 앉힌 장성궈는 맥주잔에 백주를 한 가득 따라 붓고는 경환에게 건네주었다. 피곤한 몸에 이 한잔만 마셔도 나가떨어질 거 같았지만, 차마 잔을 거절하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잔을 들고만 있었다.

“어제 왕샹첸 형님을 만났습니다. 대충 이해는 하겠지만, 형님이 자세히 설명을 해 주십시오.”

술에 떨어지기 전에 일은 마무리를 하고 싶었던 경환은 조용히 장성궈의 대답을 기다렸다. 경환의 질문을 이해하고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 후 장성궈는 서류봉투를 경환에게 건네주었다.

“홍콩에서 250만 불을 적혀있는 구좌로 송금을 해 주게. 필요할 때마다 따로 자네에게 부탁을 하겠네.”

급히 서류봉투를 열어 인적 사항과 구좌를 확인한 경환은 조용히 가방에 서류를 갈무리했다. 250만 불을 한 번에 송금을 한다면 자금추적을 받을 수도 있었기에 머리가 아팠지만, 그건 에릭과 김창동을 통해 방법을 찾아 볼 생각이었다. SHJ가 자리를 잡아감에 따라 장성궈의 비자금 처리가 경환에게는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을 하고 있었지만, 아직은 손을 털 입장은 되지 못했다.

“알겠습니다. 방법은 제가 찾아보겠습니다. 김 부장이 유연탄 수출량을 늘리자는 소리를 들었다고 하던데 형님의 생각이신가요?”

장성궈는 대답대신에 오른손을 까딱거리며 술잔을 비우라는 표시를 했고 경환은 어쩔 수 없이 큰 호흡을 한번 내 쉰 후 백주를 단숨에 목에 부어버렸다.

“자네와 일 년을 넘게 거래를 하면서 여러 방면으로 자네를 시험한 것은 내 사과를 하겠네. 이젠 본격적으로 자네와 일을 크게 해 보고 싶어서 내가 제안을 한 거야. 올해부터 300만 톤씩 처리를 해 주게. 한국이던 일본이던 상관을 하지 않을 테니 화동의 진정한 파트너가 되어 달란 소리야. 물량은 계속 늘릴 생각이고 유연탄 이외의 거래도 진행을 해 보자고.”

“감사합니다. 형님. 화동과 SHJ는 형제라는 생각으로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장성궈의 장황하게 떠드는 침 발린 말에 경환은 감격했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숙여 보였다. 그러나 죽었다 깨어나도 자신과 장성궈가 형제관계가 될 수는 없었다. 단지 돈에 엮여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주고받을 뿐이라는 것을 경환은 잘 알고 있었다. 화무십일홍이란 말처럼 정권이 교체된다면 장성궈나 왕샹첸은 끈 떨어진 강아지가 될 것이고 그 전에 충분히 비자금을 확보해 두기 위해 유연탄의 양을 최대한 늘리는 것이란 걸 알고는 있었지만, 경환은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SHJ의 특혜를 못마땅하게 보는 집단도 있을 거라고 봅니다. 그들의 손에 SHJ가 떨어지게 된다면 자칫 홍콩의 자금에 대한 조사도 이뤄질 수 있는데 안전부의 눈을 피하게 해 주셔야겠습니다. 자칫 SHJ가 그들의 집중견제를 받게 된다면 저희는 버틸 힘이 없다는 건 형님이 잘 아시잖습니까.”

차기 정권을 노리는 집단에서는 분명 이전 정권의 비리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을 할 것이고 자연스럽게 SHJ는 그들의 눈에 띌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경환은 장성궈에게 인지시키고 있었다.

“안전부는 우리사람이 장악을 하고 있어서 아직은 괜찮아.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면 최우선적으로 자네에게 통보를 해 주겠네.”

자신의 막대한 비자금이 걸려 있는 문제였기 때문에 장성궈도 쉽게 홍콩자금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경환은 단지 자신만 죽지는 않을 것이라는 말을 돌려서 얘기를 해 주고 있었다. 장성궈는 자신을 하고 있었지만, 도마뱀이 꼬리를 끊고 도망가듯이 SHJ가 희생양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쳐 지나갔다. 이런 경환의 모습을 느꼈는지 장성궈는 슬쩍 웃음을 흘렸다.

“이번에 우리가 뒤를 봐주기로 한 사람 중 한 명이 차기를 노리는 사람의 자식이네. 왜 우리가 무리를 해가며 이런 일까지 하는지 자네라면 이해를 하리라 보네. 그리고 홍콩자금의 반 이상은 나하고는 상관이 없는 자금이라는 것만 알아두게.”

경환은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장성궈의 철두철미한 준비에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비자금이 상당한 액수였기에 일부 상납이 있을 거라는 건 예상을 하고 있었지만, 반 이상을 상납을 해야 될 인물은 한 사람밖에는 없었다. 그렇다면 이미 SHJ나 자신은 중국정부나 사회 안전부에 노출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답이었고 혹시라도 그 비자금에 손을 댔다면 아마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을 거란 사실에 경환의 등허리로는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제가 괜한 짓을 한 게 아닌지 모르겠네요.”

“천하의 샤오 리도 무서워할 줄 아는구먼. 하하하. 지금처럼만 하면 자네는 특별한 문제없어. 그건 내가 보증을 하지. 일 얘긴 그만하고 술이나 본격적으로 마셔보자고.”

후회해봤자 소용없는 짓이었고 그 당시의 경환에겐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갑자기 목이 말랐던 경환은 장성궈가 따라준 독한 백주를 단번에 털어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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