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다시 사는 인생 - 75
“반갑습니다. SHJ대표 이경환이라고 합니다.”
“하하하, 정말 만나고 싶었습니다. 아동그룹 회장 최준석입니다.”
악수를 나눈 후 정기명과 박화수가 두 사람을 보좌하며 회의용 탁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최준석은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주눅 들지 않는 표정을 보이는 경환을 호기심 섞인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경환은 최준석의 시선을 묵묵히 받아 넘기고 있었다. 좋아서 선택한 아동건설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대현중공업과의 비즈니스를 성사 시켰다고 들었습니다. 대현과 같은 시기에 저희에게도 제안을 해 주셨는데 저희와의 거래가 지연되는 것이 못내 아쉽습니다. 이 사장님이 먼 걸음을 해 주셨으니 좋은 결과가 있으리라 봅니다. 하하하.”
최준석은 호방하게 웃고 있었지만, 경환은 가벼운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저도 회장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그러나 KBR의 시각이 워낙 좋지 못하다 보니 제가 어려움을 많이 겪고 있습니다. 아시겠지만, 이번 나이지리아 공사를 시작으로 해서 앞으로 KBR의 시공사로 한국건설업체를 선정되도록 하기 위해 저희 SHJ는 많은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신중하게 첫 단추를 맞춰 가려다 보니 시간이 지체되고 있었습니다. 이 점 회장님께서 이해를 해 주십시오.”
젊은 나이답지 않게 쉽게 속을 보이지 않는 경환을 보며 성격 급한 최준석은 속이 터질 것만 같았다. 성질대로라면 KBR이던 SHJ건 때려치우고 싶었지만, 좋지 않은 건설경기가 최준석의 발목을 잡아끌어 당기고 있었다.
“물론 그러져야겠지요. 우리 아동건설은 SHJ의 조건에 합당하게 맞춰 나갈 수 있습니다. 서로의 생각에 차이가 있다면 맞춰 나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아동건설의 기술력을 검증 자체가 필요 없다고 자부합니다.”
최준석의 말이 끝나자 경환은 기다렸다는 듯이 최준석의 말을 받았다.
“회장님께서 그렇게 말씀을 해 주시니 제가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KBR에서 요구하는 사항이 어떤 면에서는 아동건설의 자존심에 상처를 줄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저는 이 비즈니스를 포기하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진지한 표정으로 비즈니스를 포기 할 수도 있다고 말하자 최준석은 속으로 침을 삼키고 있었다. 경환은 급하지 않았다. 최준석이 자신의 제안을 거절한다면 아동건설에 대한 미련을 버릴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하하, 비즈니스에 자존심이 뭐가 필요하겠습니까? 전 그렇게 옹졸한 사람이 아닙니다. KBR의 조건을 말해 보십시오.”
최준석의 성격을 알고 있는 정기명은 혹시라도 최준석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폭발하지 않을까 걱정을 하고 있었지만, 호탕하게 웃으며 경환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최준석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러나 최준석은 분명 자존심에 금이 가고 있었다.
“KBR이 아동건설의 기술력을 검증하고 싶다는 말씀은 이미 정기명 사장을 통해 들으셨을 거라고 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 드리자면 KBR의 안전 관리팀이 아동건설이 건설한 토목건축물의 안전 상태를 점검하고 기술력에 따른 부실시공 여부를 판단하겠다는 조건입니다.”
경환의 말에 최준석은 급격히 표정이 굳어져 갔다.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아무리 그래도 그건 정도가 심한 조건 아닙니까?”
떨리는 목소리로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지로 참고 있는 것을 표현하고 있는 최준석을 경환은 이해 한다는 듯 바라보았다. 경환 또한 이 조건을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제가 고민만 하고 있었습니다. 회장님의 말씀은 당연하다고 봅니다. 저도 여기까지가 한계입니다. 아무리 KBR의 컨설팅을 하고는 있지만, 이 부분만큼은 설득시키지 못했습니다. 다음 달 시공사를 선정해야 되기 때문에 이 조건에 합당한 건설업체를 다시 수배해 볼 수밖에 없는 입장입니다. 회장님께 불편을 드렸다면 죄송합니다. 저희 SHJ의 역량이 아직 이정도 밖에는 안 되네요.”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경환은 한숨을 내쉬며 아쉬운 표정을 지어 보이고 있었지만, 최준석은 분을 참지 못하는 듯 굳게 쥔 주먹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이 모습을 확인한 정기명이 급히 말을 받았다.
“만약 시공능력과 안전검사에 문제가 없다고 판명이 난다면 어찌 되는 것입니까?”
“다음날 내로 토목공사와 일부 플랜트 시공에 대한 계약을 맺게 될 것입니다. 또한 아동그룹의 계열사인 한국통운을 물류업체로 선정, 각 나라에서 들어가는 자재와 플랜트의 물류계약을 체결하게 될 것입니다.”
경환은 쉽게 포기를 하지 못할 정도의 미끼를 던지고 있었다. 시공과 더불어 물류까지 협력업체로 선정이 된다면 아동그룹의 입지는 상한가를 칠 수 있다는 생각에 정기명은 최준석을 애타게 바라보고 있었다.
“휴~, 제가 감정을 절제하지 못한 모습을 보여 미안합니다. 아동건설의 손에서 탄생한 건축물은 많습니다. 저희가 선정을 해도 되겠습니까?”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려는 듯 최준석은 아직도 떨리는 음성으로 자신의 감정을 죽이고 있었다. 그러나 경환은 이런 최준석의 자존심을 지켜줄 생각은 없었다.
“이렇게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동에서 보여주시고 싶으신 것을 하나 보여주시고 KBR이 하나 선정을 해서 두 건축물로 진행을 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회장님께서 결단을 내려 주신다면 최선을 다해 KBR과 협의를 해 보겠습니다.”
경환의 제안에 최준석은 쉽게 답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 정기명은 마음이 급해서 인지 실례를 무릅쓰고 최준석에게 귓속말을 전하기 시작했다. 최준석은 얼굴이 급히 밝아지며 경환의 제안에 답을 주었다.
“좋습니다. 그 대신 한 달의 시간적 여유를 주셔야겠습니다. 건축물이 선정되고 한 달 후에 공동으로 점검을 하는 거로 KBR과 협의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제가 내일 오전 중국으로 출국을 해야 됩니다. 오늘 저녁에라도 KBR과 협의를 해서 빠른 시간 내에 통보를 드리겠습니다. 여러모로 회장님을 불편하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회장님의 결단에 누가 되지 않도록 저희 SHJ도 최대한 노력을 하겠습니다.”
최준석과의 미팅을 마치고 경환은 급격히 찾아오는 피로감에 박화수에 부탁해 서둘러 본가로 향했다.
“박 사장님, 제가 출국을 하게 되면 아동건설에 KBR에서 성수대교를 선정했다고 통보를 해 주세요.”
운전을 하던 박화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으로 경환을 바라 봤지만, 경환은 쏟아지는 피로감에 눈을 감고 깊은 잠에 빠져들고 있었다.
“네 엄마도 그렇지 중간에 일주일 정도 나와 있더니 다시 미국으로 들어가 버리면 도대체 살림은 어떻게 하라는 거야?”
집에 도착한 경환은 아버지의 잔소리를 온몸으로 받아 낼 수밖에 없었다. 변명거리가 제대로 생각이 나지 않아 경환은 우물쭈물할 수밖에 없었다.
“정아도 있고…, 아버지 첫 손자가 태어나는 건데 앞으로 두 달만 더 참아 주시면 안 되시겠어요?”
경환의 아버지는 손자라는 소리에 화만 낼 수는 없었다. 자신부터 손자에 대한 기대감이 컸기 때문이었다. 경환은 종친회 일을 그만 두시고 새롭게 인수한 회사의 고문으로 출근을 하라고 종용을 하고 있었지만, 경환의 아버지는 이를 극구 거부하고 있어 경환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있었다.
“정아가 요새 연애를 하나 보더라. 조만간 그 놈을 데리고 올 생각인 거 같은데 네가 소개를 시켰다고 하니 믿어 볼 생각이다. 너도 신경을 좀 써라.”
“알겠습니다. 믿을 수 있는 친구니 큰 걱정은 하지 마세요. 그리고 아버지 퇴직도 얼마 남지 않으셨으니 퇴직하고 집에 계시는 것 보다는 저를 도와주신다는 생각으로 제 회사에 오시는 것도 생각을 해 주세요.”
“그렇게 하마. 수정이 타지에서 외롭지 않게 네가 잘 보살펴 줘야 된다.”
정아의 늦은 귀가로 인해 경환은 손수 저녁을 차릴 수밖에 없었고 오랜만에 두 부자는 반주를 곁들여 저녁을 함께 했다. 자신으로 인해 일찍 돌아가셨던 부모님에 대한 죄송함이 남아 있던 경환은 다시 시작하는 인생인 만큼 자신의 가족에게 최선의 노력을 하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하루라도 빨리 미국으로 모셔오려고 계획하고 있지만, 아직은 시간이 필요했다. 경환은 아버지가 화장실에 간 사이 돈 봉투를 양복 안주머니에 슬그머니 집어넣었다.
오전비행기를 타고 천진공항에 도착한 경환은 택시를 잡아타기 위해 바쁘게 입국장을 빠져 나가고 있었다.
“사장님, 그렇게 빨리 가시면 어떡하십니까?”
경환은 갑자기 들리는 한국어에 뒤를 돌아다보았다. 자신에게 달려오는 김창동을 바라보고는 경환은 인상을 찌푸렸다.
“출장자에 대해 마중을 하지 말라고 했는데 왜 나오셨습니까?”
경환의 질책에도 김창동은 당황한 기색 없이 서둘러 경환의 짐을 받아 들고는 앞장서 걸어 나갔다.
“북경공항이라면 제가 나오지도 않습니다. 천진에서는 택시도 위험하다 보니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아서 그냥 무작정 왔습니다. 차 안에서 업무보고를 드리면 시간도 단축되고 오히려 사장님께서 말씀 하셨던 업무적인 효율성을 보이는 일 아니겠습니까?”
나름 논리 정연하게 말을 하는 김창동을 보며 경환은 말로는 상대를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래도 다음부턴 이러지 마시기 바랍니다. 한국통운은 이미 도착을 해 있겠죠?”
“네, 이틀 전에 이미 도착을 했습니다. 기본적인 계약내용은 서로 합의를 마친 상태여서 내일 조인식만 남았습니다. 경무부 왕 조리가 오늘 저녁 사장님을 개인적으로 뵙자는 요청을 해 왔습니다.”
자신을 중국에 잡아 놓기 위해 갖은 수를 부렸던 왕샹첸의 집요함을 알고 있던 경환은 그와의 독대가 영 내키지 않았지만, 거절할 명문이 경환에겐 없었다. 호형호제를 하고는 있다지만, 엄연히 왕샹첸은 고위관료였고 아직은 중국 고위관료의 눈 밖에 나고서는 제대로 사업을 할 수 없는 나라였다.
“경무부의 정확한 의견은 뭐라고 보십니까?”
운전을 하는 김창동에 방해를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시간적인 여유가 없는 경환은 어쩔 수 없이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다.
“보고를 드렸다시피 ONE-STOP SERVICE에 대한 한국기업의 반응이 상당히 좋았습니다. 일본정부에서 정식으로 경무부에 한국기업뿐만 아니라 일본기업에게도 확대적용 시켜 달라는 요청이 계속해서 들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저희에게 일본기업까지 업무를 늘려 달라는 요청을 하는 통에 매번 거절하기도 입장이 난처해지고 있습니다. 아마 왕샹첸은 사장님과 이 문제를 다시 제안을 해 보려는 거 같습니다. 한국영사관 쪽에서도 압력이 들어오고 있는 실정입니다.”
왕샹첸의 얼굴을 살려주기 위해 큰 이득도 없는 사업을 경무부를 대신해 진행해 주고 있었지만, 경무부는 둘째로 치더라도 한국영사관에서까지 압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사실에 경환은 울화가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이번만큼은 절대 양보를 해 줄 생각이 없었다.
“한국영사관의 압력은 무시하십시오. 저희는 한국기업이 아닙니다. 만약 일본기업까지 확대적용을 한다면 무리가 따르겠지요?”
“그렇습니다. 이 사업은 전혀 남는 게 없습니다. 겨우 현상유지를 할 정도인데 일본기업까지 확대를 한다면 배보다 배꼽이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경환은 고개를 끄떡였다. 일본어 서비스까지 하게 된다면 새로운 직원들과 일본기업의 특성에 맞게 조직을 새로 구성해야 되기 때문에 가뜩이나 바쁜 북경사무소는 돈 벌이도 안 되는 일에 기본 업무까지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왕샹첸이 아무리 감언이설로 자신을 설득시킨다 해도 이번만큼은 절대 들어줄지 않겠다는 생각을 굳히고 있었다.
“그리고 화동에서 재밌는 얘기가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자세한 것은 장 사장을 만나봐야 알 수 있겠지만, 지금 거래하고 있는 100만 톤가량을 금년 말까지 300만 톤으로 증가시키자는 제안을 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저희와 거래를 하지 않는 기업에서는 불만을 표시하고 있지만, 제일그룹과 대후는 쌍수를 들고 환영하는 분위기 입니다.”
경환은 감기던 눈이 번쩍 떠졌다. 300만 톤으로 추가하자는 얘기는 화동이 단독으로 맺고 있던 한국기업들의 물량을 전부 SHJ로 넘기겠다는 뜻이었기 때문이었다. 경환으로서는 반대할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급하게 먹는 떡은 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기에 신중해 질 수밖에 없었다.
“화동의 장 사장의 의도를 먼저 파악을 해봐야 될 거 같습니다. 무턱대고 받아먹기에는 증가되는 폭이 너무 빨라 보입니다.”
경환은 장 사장의 제안이 SHJ에 득일지 독일지에 대해 아직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강행군을 했더니 몸이 피곤하네요. 북경사무소에 잠깐 들른 후 왕 조리와의 만남 전까지 호텔에서 휴식을 취하겠습니다.”
이틀 사이로 미국과 한국 중국으로 오가는 빡빡한 일정에서 경환은 또 다시 김창동이 운전을 하는 차 안에서 깊은 숙면에 빠져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