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73화 (50/264)

#73

다시 사는 인생 - 73

경환은 이다나의 안내에 따라 휴스턴 시청에 들어서고 있었다. 오늘 휴스턴 시청의 방문은 린다의 조언에 따라 SHJ의 명의로 청소년센터에 50만 불을 기부하기 위해서였지만, 휴스턴시 시장은 이 기부를 자신의 정치적 이벤트로 만들기 위해 경환 부분의 시청 방문을 강력히 요청을 해왔다. 경환은 많은 고민을 했지만, SHJ가 휴스턴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시 정부에 협조적인 모습을 보일 필요가 있다는 말에 동의를 하고 오늘 이다나와 함께 시청을 방문하게 되었다.

경환이 50만 불이라는 거금을 기부 하려는 이유는 세금을 감면 받기 위한 것 보다는 휴스턴이라는 지역사회에 SHJ가 융화되고 있다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함이 더 컸다. 텍사스 주는 다른 주와는 다르게 석유에서 나오는 풍족한 세수로 인해 개인소득세를 징수하지 않고 있었으며 기업들에게도 30%가량의 연방 세를 제외하고는 거의 세금이 없다시피 했다. 그러나 미국사회의 기부문화는 기업이던 개인이던지 간에 보편화 되어 있었기 때문에 기부에 인색한 기업이나 개인은 미국사회에 뿌리내리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경환은 린다의 조언을 흔쾌히 받아들여 이번 기부를 결정하게 된 것이었다. 사실 SHJ는 3년간의 세금을 면제받았기 때문에 이번 기부는 큰 부담이 되지는 않았다.

“이번 청소년센터의 기부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시장으로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SHJ는 기부에 적극적으로 참여를 할 계획입니다. 매년 청소년센터에 35만 불 이상으로 기부를 할 계획입니다.”

경환과 시장은 밝은 웃음을 보이며 악수를 나누었고, 지역신문기자들의 카메라가 여기저기에서 번쩍이고 있었다. 간단한 기자들과의 인터뷰가 끝나고 경환은 시장의 집무실로 향했다.

“미스터 리, SHJ의 빠른 성장에 개인적으로 큰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기업 활동에 불편한 점은 없습니까?”

“기업 활동을 하기에는 가장 이상적인 도시라고 생각합니다. 단지 더운 날씨만 제외한다면 말이죠.”

경환의 농담에 집무실에 있던 시장의 참모들은 한바탕 크게 웃을 수 있었다. 경환은 시장과의 개인적인 만남이 많이 부담이 되고 있었지만, SHJ의 성장을 위해서는 시 정부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에 시장의 요청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윌리엄에게 많은 말을 들었습니다. 윌리엄은 휴스턴에서 발전 가능성이 가장 높은 기업으로 SHJ를 주저 없이 꼽더군요.”

시장의 입에서 윌리엄의 말이 나올 줄은 전혀 몰랐던 경환은 윌리엄의 넓은 오지랖에 감탄을 하고 있었다.

“시장님께서 저희 SHJ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실 줄은 몰랐습니다. SHJ는 이번 기부를 시작으로 지역사회발전에 이바지하는 기업으로 성장해 나갈 것입니다.”

다소 원론적인 대답을 하고 있는 경환이었지만, 시장은 이를 큰 의미로 받아들인다는 듯 크게 기뻐하고 있었다.

“하하하, 그래 주시기를 저 또한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휴스턴 한인회와 저희 시 정부 간의 연결고리를 SHJ가 맡아 주시면 어떨까 제안을 하고 싶어서 오늘 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시장의 말에 경환은 당황했다. 경환은 한인회 활동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으며 교류 또한 전혀 없었다. 휴스턴의 한인들은 다른 지역과는 달리 석유 및 우주관련 공학자들이 많았고 경제적인 지위 또한 높았다. 시장은 경환을 통해 휴스턴 한인회와의 정치적인 교류를 통해 자신의 지지를 이끌어 내고 싶어 한다는 것을 은연중에 비치고 있었다.

“지금은 회사의 자립도를 높이기 위해 매진을 할 시기이기 때문에 한인회 활동에는 적극적으로 참여를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시장님의 조언을 항상 염두에 두겠습니다.”

시장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게 된 경환이었지만, 당장 한인회 활동에 참여를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시장의 요청을 무턱대고 거절할 수는 없었던 경환은 이 정도 선에서 만남을 마무리 하고 싶었다.

“하하하, 그래야지요. 언제 윌리엄과 식사라도 같이 합시다. SHJ에 대한 지원을 우리 시 정부에서도 아끼지 않겠습니다.”

시장으로부터 생각하지도 못한 숙제를 떠안은 경환이었지만, 당분간은 한인회와의 교류는 할 생각이 없었다. 우선은 시장과의 개인적인 친분을 갖고 법이 정해진 한도 내에서 후원을 하는 것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아동건설과의 만남을 위해 급히 시 청사를 빠져 나왔다.

“SHJ의 제안을 저희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퀄컴과의 협상을 벌이고 있던 린다는 어윈 제이콥스의 단호한 거절에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미스터 제이콥스, 로열티 계약이 체결되었다 하더라도 한국이 CDMA 상용화에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혹시라도 성공을 한다 하더라도 하루아침에 되는 일은 아니고요. 그때까지 과연 퀄컴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보십니까?”

퀄컴의 창업자인 어윈 또한 린다의 도발에 마땅한 대답을 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한국과의 로열티 계약으로 금융권의 투자를 받아 내기는 했지만, 퀄컴 내부의 자금사정은 그리 원활하게 돌아가고 있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또한 한국이 CDMA 상용화에 성공에는 확신을 하지는 못하고 있었지만, 지분 참여와 한국과의 로열티계약에 참여하기를 원하는 SHJ의 제안에는 쉽게 동의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국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CDMA 상용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저희 또한 대대적으로 기술지원을 하고 있고요.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고 저희는 확신을 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물이 언제 나오리라고 보십니까? 우선은 퀄컴이 살아남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한국이 상용화에 성공을 한다 하더라도 한국의 이동통신 시장은 크지 않습니다. GSM의 아성이 쉽게 무너진다고 보시나요?”

린다는 제이콥스의 아픈 곳을 쑤시고 들어왔다. 린다의 말대로 GSM을 파고들기에는 한국은 시장이 너무 작았다. 금융권의 투자와 대출로 버티고는 있지만, 이삼 년 내로 투자 금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퀄컴이란 간판은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이 제이콥스를 흔들리게 만들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SHJ가 제안한 금액은 수용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천오백만 불에 우리의 지분과 한국과의 계약에 참여하겠다는 것은 칼만 안 들었지 강도와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린다는 천오백만 불 투자로 퀄컴의 지분 3%와 한국과의 로열티계약에 50%의 참여를 제안했었다. 제이콥스의 수그러진 모습을 확인한 린다는 급히 제안을 수정하여 제시하였다.

“휴~, 미스터 제이콥스의 끈질김에 제가 졌습니다. 저희의 제안을 수정해서 제안을 하겠습니다. 앞으로 3년간 총 오천만 불을 투자하도록 하겠습니다. 계약과 동시에 천오백만 불을 투자하고 내년에 이천만 불, 후년에 천오백만 불을 투자하는 조건입니다. 투자 금이 높아진 만큼 저희는 6%의 지분과 한국과의 로열티부분에 40%참여, 이후 한국의 단말기 제조업체의 선정에 퀄컴과 공동참여를 하는 조건입니다. 이 제안마저 거절한다면 저희는 퀄컴의 투자를 포기하겠습니다.”

린다는 이런 제안을 하면서도 자신 스스로도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퀄컴과의 협상이 지지부진하자 경환은 제안의 내용을 바꾸라는 지시를 내렸었다. 올해 있을 FPSO 입찰에 실패라도 한다면, 계약 불이행으로 인해 앉아서 천오백만 불을 날리게 되는 조건이었기 때문이었기에 제안을 하고 있는 린다는 마음이 불편했다. 너무 무모한 도박이라고 생각되었지만, 이번 한번만 자신을 믿어 달라는 경환의 사정에 린다도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제이콥스는 SHJ의 제안을 다시 한 번 머리로 계산을 하고 있었다. 나쁘지도 그렇다고 좋다고 볼 수도 없는 제안이었지만, 한국의 상용화가 언제 이뤄질지 모르는 상태에서 쉽게 거절을 할 수도 없는 제안이었다.

“좋습니다. 긍정적으로 검토를 하겠습니다. 고문 변호사와 협의를 한 후에 좋은 소식을 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좋은 소식을 휴스턴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다음 달 안으로는 결과를 주시기 바랍니다. 저희도 퀄컴이 안 된다면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려야 하거든요.”

어윈은 새로운 투자자를 구했다는 안도감이 들어서인지 한결 밝아진 얼굴로 악수를 나눌 수 있었다. 그러나 퀄컴을 빠져 나오는 린다와 에릭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린다, 이번 투자를 사장님이 너무 낙관적으로 보고 있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요.”

SHJ에 합류하자마자 퀄컴에 대한 조사를 진행했던 에릭도 경환의 이번 투자에 대해 극구 말리는 입장이었다. 미국으로 건너오기 전 의욕에 불타던 에릭은 H은행의 정보망을 최대한 이용하여 최고의 투자 지와 투자패턴에 대해 연구를 해 왔다. 그러나 경환의 지시에 의해 이뤄진 이번 퀄컴과의 투자협상은 자신도 쉽게 납득을 할 수 없었다.

“나도 에릭과 같은 심정이야. 그러나 지금까지 제임스, 아니 사장님이 이뤄왔던 결과는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고. 머리로는 실패한 투자라고 생각하지만, 그런 결과물을 알고 있기 때문에 쉽게 반대할 수 없었던 거야, 투자가 결정된 이상 에릭은 퀄컴의 관리에 신경을 써 줘.”

일종의 도박 같은 이번 투자의 결과를 린다는 지켜볼 생각이었다. 경환의 투자에 대한 운이 따라주기만을 바라면서.

나이지이라 토목공사 협상을 위해 아동건설의 정기명 사장은 실무 팀을 이끌고 급히 SHJ를 방문하고 있었다. 황태수는 최준석 회장의 방문을 요청했지만, 정기명이 실무 팀을 인솔하고 방문을 하자 못내 불편한 표정을 지어 보이고 있었다.

“회장님께서는 갑자기 리비아 정부의 요청을 받고 리비아로 출국을 하셨습니다. 이점 양해를 바란다는 말씀을 전하셨고요. 제가 전권을 가지고 온 만큼 좋은 결과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정기명은 황태수의 표정이 좋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고 미리 선수를 치고 들어왔다.

“흠~, 알겠습니다. SHJ 대표를 맡고 있는 이경환입니다.”

경환은 황태수를 대신해 직접 자신의 소개를 했고 두 사람은 가벼운 눈인사와 악수를 나눈 후 자리를 잡았다.

“저희 아동그룹은 중원그룹과의 합작사업과 더불어 KBR과의 업무제휴에 큰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리비아 대수로 공사에서 아동건설의 기술력은 충분히 입증이 되었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KBR이 원하는 비용적인 측면에서도 전향적인 자세로 검토를 할 생각입니다. 아무쪼록 SHJ의 원활한 중재를 원하고 있습니다.”

황태수는 아동건설에 토목과 일부 시공을 발주하는 것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물론 리비아 공사로 인해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다는 것은 부인하지 않고 있었지만, SHJ이 한국의 대형그룹을 상대하는 거 보다는 삼희건설처럼 그룹화 되지 않은 건설업체를 컨트롤하기가 쉽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이유는 설명하지 않고 있지만 경환은 끝까지 아동건설을 고집하고 있었다.

“정 사장님의 말씀 잘 들었습니다. 기업이야 이익을 위해 움직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희 SHJ 또한 아동건설과 KBR을 연결하면서 이익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판단된다면 이 비즈니스는 쉽게 성사되기 어렵다는 것을 미리 말씀 드립니다. 현재 KBR은 아동건설에 토목과 시공을 발주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의사를 저희에게 전달해 온 상태입니다. 이점 기억해 주십시오.”

이미 윌리엄과의 협의를 통해 아동건설로의 발주는 합의를 한 상태인 것을 알고 있는 황태수는 경환의 노림수가 무엇인지 궁금해져 갔다.

“공사비용에 대해서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는 KBR이 원하는 수준까지 공사비를 절감할 것입니다. 또한 SHJ의 컨설팅비용도 만족하실 것입니다.”

이미 비용에 연연하지 말고 KBR과의 거래를 성사시키라는 최준석의 지시를 받아 놓은 상태였기에 정기명은 자신 있게 답변을 하고 있었다.

“KBR에서는 물론 공사비 절감이 간절하긴 하지만, 그보다 부실공사에 대한 염려를 더 크게 보고 있습니다. 자칫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무리한 공사를 진행했다는 오명을 쓰지는 않겠다는 것이 KBR의 생각입니다. 그래서 아동건설을 추천한 저희들의 입장이 난처한 상태입니다.”

경환은 정기명 앞에서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이고 있었다. 분위기가 부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느낀 정기명은 마음이 다급해져만 갔다. 자칫 이번 일이 성사되지 못한다면 최준석의 눈 밖에 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사장님도 잘 아시겠지만, 아동건설의 능력은 대현건설을 제외하고는 따라 올 업체가 없습니다. 대현건설의 경우는 KBR이 원하는 공사비절감을 만족시킬 수 없는 상태에서 KBR의 최고의 파트너는 아동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정기명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경환에게 매달리고 있었지만, 경환의 심각한 표정은 풀리지 않고 있었다.

“하~, 어렵네요. 이렇게 하시면 어떻겠습니까? 제가 마침 3월초 KBR 사장과 함께 한국을 방문할 생각입니다. 조그맣긴 하지만 회사를 인수한 곳이 있어서요. 그때 아동건설의 기술력을 검증 할 수 있는 방법을 KBR에 제시해 보시는 게 어떠시겠습니까? 저는 그 동안 최대한 KBR을 설득해 보겠습니다.”

경환의 말을 들은 정기명은 어둠 속에서 한줄기 빛을 만난 것처럼 고개를 끄떡였다.

“이 사장님, 감사합니다. 꼭 KBR을 설득해 주십시오. 서울에서 철저히 준비를 하고 있겠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는 황태수는 왜 경환이 어려운 길로 가려는지 이해를 하지 못하며, 아동건설의 실무 팀들과 함께 나이지리아 석유화학단지에 대한 설명을 해 주기 위해 따로 마련된 자리로 옮겨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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