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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인생-72화 (264/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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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인생 - 72

    94년을 시작하는 SHJ는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었다. KBR의 컨설팅업무에만 치중을 한다면 KBR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판단을 하고 있어서였다. 그렇다 보니 경환은 린다의 합류를 진심으로 반기고 있었다.

    “나름대로 린다의 사무실을 꾸며 봤는데, 맘에 들었으면 좋겠네요. 필요한 것이 있다면 이다나에게 부탁을 하세요.”

    “맘에 들어요. 제임스.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

    당분간은 이다나를 세 사람의 비서역할을 수행시킬 생각이었다. 따로 린다의 비서를 구해주지 못한 것이 경환은 미안했지만, 회사의 재무구조가 본 궤도에 오르기 전까지는 어쩔 수없이 최소한의 인원으로 회사를 꾸려 나갈 수밖에 없었다.

    “이해해 줘서 고마워요, 린다. 커피한잔 줄래요?”

    경환의 부탁에 린다는 책상 옆에 놓여진 커피메이커에서 커피를 따라 경환에게 건네주고는 자신도 커피를 한잔 들고 의자에 앉았다. KBR을 박차고 나와 새롭게 시작을 하는 린다도 만감이 교차를 하고 있었지만, 후회할 생각은 없었다. 경환은 그런 린다를 바라보며 린다의 책상 앞에 놓여진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린다, 저는 린다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어요. 조만간 홍콩에서 린다의 일을 수행할 직원이 올 겁니다. 그 친구와 함께 팀을 구성해 보세요. 따로 생각한 인물들이 있다면 채용을 하시고요. 팀의 구성은 전적으로 린다에게 맡기겠습니다.”

    “고마워요. 우선 투자의 방향에 대한 제임스의 계획을 알고 싶어요.”

    린다는 성장해 가는 SHJ에서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서라도 빠른 성과물을 내어 놓고 싶었다. 그런 린다의 이해하긴 했지만, 투자로 바로 성과를 본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었기에 경환은 린다의 마음을 진정시켜 주고 싶었다.

    “저는 기존의 컨설팅업무로는 SHJ의 한계가 있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점차적으로 투자부분을 확대할 생각입니다. 아직은 자금적인 부분이 힘들겠지만, 홍콩의 자금과 컨설팅에서 발생되는 이익의 대부분을 린다의 투자 부분에 집중을 시킬 생각이에요. 이번 KBR과의 거래에서 받은 비용부터 시작을 할 겁니다. 장기적인 안목으로 투자대상을 선정해 주세요. 너무 조급해 하지 마시고요.”

    경환에게 자신의 생각이 읽힌 것이 린다는 부끄러웠다. 황태수와 더불어 자신을 부사장으로 채용한 경환에게 자신의 가치를 하루라도 빨리 보여주고 싶었지만, 투자의 성과가 하루아침에 나오지 않는 다는 건 자신도 알고 있었다.

    “나중의 투자패턴은 린다에게 맡겨 보고 싶지만, 처음은 제가 계획한 투자를 진행해 줬으면 합니다.”

    “어떤 계획이죠?”

    린다는 경환의 계획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다른 건 몰라도 금융과 투자부분은 자신을 따라 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작년에 TIA(통신산업협회)에서 캘리포니아 퀄컴의 CDMA를 표준안으로 선정을 했습니다. 이에 따라 한국의 체신부가 작년 6월에 이 CDMA방식을 한국의 이동통신 표준안으로 채택을 하고 연구를 하고 있는 중이기도 하고요. 린다가 퀄컴과의 투자협상을 진행해 주었으면 합니다.”

    린다도 이에 대한 소식은 알고 있었지만, 경환의 계획은 무모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제임스, 한국이 CDMA를 선정한 것에 대해 무모하다고 보는 입장이 대세입니다. 미국도 CDMA의 상용화는 부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퀄컴이란 회사에 대해 조사는 해 보겠지만, 제임스의 의견에 쉽게 동의는 하지 못할 거 같네요.”

    한국은 이동통신 방식을 가지고 TDMA와 CDMA를 놓고 고민을 하다 CDMA방식으로 채택을 하게 되었다. 이 이면에는 독자적인 디지털 이동통신기술을 확보하겠다는 한국정부의 의지가 있었지만, 실상은 유럽형 GSM방식의 변형인 TDMA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기술이전에 제한적이고 과도한 로열티를 요구하는 등 비경제적인 부분으로 인해 각국의 비웃음을 받아가며 세계최초로 CDMA방식을 선정할 수밖에 없었다.

    “린다, 한국인의 끈질김을 과소평가 하지 마세요. 제 판단은 삼 년 내로 한국은 CDMA 상용화에 성공할 겁니다. 그 이후론 GSM의 아성이 무너져 갈 거고요. 그래서 지금이 투자의 최적시기로 봅니다. 현재의 퀄컴은 재무사정이 그리 좋지 못할 겁니다. 퀄컴 또한 한국과 로열티 계약은 했지만, 한국시장에서의 성공은 비관적으로 보고 있을 수도 있고요. 이번 KBR에서 들어온 자금을 다 써도 좋습니다. 퀄컴의 지분참여가 힘들다면 한국과의 계약부분만이라도 SHJ가 참여할 수 있도록 협상을 해 주십시오.”

    린다는 경환의 말에도 쉽게 동의를 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그 당시 한국을 제외한 대다수의 국가들은 한국이 무모한 도전을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한국이 독자적인 기술을 확보하고 상용화에 성공하리라곤 예상을 못하고 있었다. 퀄컴사로 매년 로열티가 2억불 이상 지불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경환이지만, 지금 당장은 린다를 설득하기엔 무리였다.

    “이번만 제 의견에 따라주세요. 퀄컴사에 투자가 마무리 된다면 한국의 이동통신사업에도 눈을 돌려주시고요. 이동통신사업자와 단말기 제조업체 두 부분으로 나눠 투자를 할 수 있게 미리 검토를 해 주시면 됩니다.”

    린다는 고개를 좌우로 저어가면서 경환의 투자계획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경환의 확신에 찬 모습에 이내 손을 들고 말았다.

    “휴~, 제임스의 지시가 따르기는 하겠지만, 제 의견은 부정적이란 것은 알아주었으면 해요. 홍콩에서 에릭이 도착하면 바로 캘리포니아로 출장을 가도록 할게요.”

    순순히 자신의 계획에 따라주는 린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긴 했지만, 이번 투자에 대한 세세한 이유는 설명해 줄 수 없었다. 이번 투자의 결과는 96년이 되어야 나타나기에 그동안 린다에게 시달릴 생각에 경환은 머리부터 아파오기 시작했다. FPSO 입찰이 성공적으로 끝나게 된다면 한국통신을 인수하는 제일그룹과 단말기로 노키아와 모토롤라를 제치는 오성전자에 과감하게 투자를 할 생각이었다.

    아동그룹 회장실에는 그룹회장인 최준석과 황태수가 만남을 가지고 있었다. 오성건설 부장의 직함으로는 쳐다볼 수도 없는 그룹회장과 자리를 함께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황태수는 격세지감을 느끼고 있었다.

    “황 부사장님, 이렇게 아동을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하하.”

    “저도 회장님을 만나게 돼서 영광입니다. SHJ의 제안을 거절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회장님께서 찾으실 줄은 생각을 못했습니다.”

    최준석은 시선을 황태수에 고정하고 표정을 읽어보려고 노력했지만, 황태수의 표정은 전혀 변화가 없었다. 덤덤하게 입을 열고 있는 황태수와는 다르게 최준석은 최대한 밝게 웃어 보이고 있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SHJ의 제안은 저희도 긍정적으로 검토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시겠지만 그룹경영이라는 게 검토하는 과정이 복잡하지 않습니까? 시간이 좀 필요했습니다.”

    대후건설이 나이지리아를 자신의 텃밭으로 생각하고 있듯이 아동건설은 리비아를 자신의 텃밭으로 가꾸고 있었다. 아동건설은 사막에서 지하수를 대형 특수관으로 이동시켜 도시에 공급하는 엄청난 대수로 공사를 통해 중동 토목공사의 굵은 획을 긋고 있었다.

    “그러셨군요. 저희가 좀 성급하게 결론을 내렸나 봅니다. 리비아 대수로 공사를 통해 아동건설의 토목공사의 기술력이 입증된 만큼 저희 SHJ가 아동건설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황태수가 오성건설 출신이란 사실을 알고 있던 최준석은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오성건설로 이 제안이 들어갈까 전전긍긍하고 있었지만, 최대한 이런 표정을 읽히지 않기 위해 애써 웃음을 짓고 있었다,

    “하하하, 검토가 좀 늦기는 했지만, 오너인 제가 결정한 만큼 타 기업보다는 빠르게 일이 진행될 것입니다. 제가 알기론 나이지리아 토목공사에 아동건설의 참여를 원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대수로 공사로 아동의 기술력이 입증된 만큼 이번 석유화학단지의 공사에는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또한 KBR은 공사비용을 절감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최준석은 KBR과 SHJ의 약점을 정확히 지적하고 있었다. 무리한 저가로 입찰에 성공을 했기에 공사비의 절감은 KBR의 최대 이슈였다. 황태수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물론 아동건설의 능력은 잘 압니다. 또한 비용을 절감해야 되는 부분도 시급하게 해결해야 될 문제인 것도 사실입니다. 저희 사장님은 삼희건설도 안중에 넣고 계십니다.”

    삼희건설은 리비아 대수로 공사만큼 큰 규모의 토목공사를 진행하고 있지는 않지만, 많은 해외공사 경험으로 탄탄한 실력을 가지고 있는 업체였다. 삼희건설을 거론하며 만만치 않게 받아 치는 황태수를 허탈하게 바라봤다.

    “황 부사장님을 못 당하겠습니다. 중원그룹과 한국통운의 합작은 최대한 빨리 진행을 시키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아동건설과 KBR의 협력체계를 성사시켜 주십시오. SHJ엔 대가를 톡톡히 지불을 할 용의가 있습니다.”

    최준석의 말에도 황태수는 긴장을 놓지 않았다. 경환의 지시가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알겠습니다. 저희도 긍정적으로 아동의 참여를 검토 하겠습니다. 아시다시피 저희 SHJ는 KBR에 제안을 할 뿐이지 최종 결정은 KBR이 가지고 있습니다. KBR은 한국건설업체의 참여를 그리 탐탁하지 않게 여기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회장님이 실무 팀을 이끌고 조만간 휴스턴을 방문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미 컨설팅비용을 오백만 불 절감해 주면서 한국 건설업체의 참여를 KBR로부터 확답을 받아 놓은 상태였지만, 이런 사실을 최준석에서 알려 줄 필요는 없었다. 최준석은 황태수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이번 제안을 성공시킬 수 있다면 오성그룹에서도 실패한 KBR과의 업무제휴를 자신의 손으로 이룰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최준석과의 미팅을 마치고 서둘러 화성산업으로 돌아왔지만, 대현중공업의 권철중 전무와 이한주 부장은 이미 회의실에 도착을 한 상태였다.

    “죄송합니다. 외부의 일로 늦었습니다. SHJ 부사장 황태수라고 합니다.”

    “저희가 약속시간보다 좀 서둘렀습니다. 권철중 전무입니다.”

    서로 인사를 나눈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회의에 집중을 하기 시작했다. 황태수가 오성그룹 출신이란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었기 때문에 권철중 입장에서도 오성중공업과 협상을 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오늘 황태수의 확답을 받아 놓을 생각이었고 황태수 또한 린다의 참여로 SHJ의 투자부분으로의 진출이 시작된 만큼 서둘러 미국으로 돌아가야만 했기에 둘의 회의는 군더더기 없이 빠르게 진행되어 갔다.

    “대현중공업이나 KBR도 FPSO은 첫 시도입니다. 그렇다 보니 이 일을 컨설팅하고 있는 SHJ의 고민은 상당합니다. 그러나 저희 SHJ는 대현중공업의 선박건조 능력과 KBR의 특수플랜트 설계와 시공능력이 합쳐지게 된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프로젝트라고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황태수의 단도직입적인 말에 권철중 또한 이에 호응이라도 하듯 솔직한 심정을 말하고 있었다.

    “흠~, 저희도 FPSO 사업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니 꼭 진출을 할 생각입니다. 부사장님의 말씀대로 저희와 KBR의 능력이 합쳐진다면 시행착오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고 봅니다.”

    권철중은 이미 적극적으로 이 사업에 참여를 하라는 그룹 회장의 지시를 받아서 그런지 탐색전도 없이 자신의 속마음을 풀어 놓고 있었고 황태수 또한 이런 권철중에 호응을 하고 있었다.

    “저도 전무님과 의견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두 회사가 공동으로 설계를 해 나가고 이에 대해 부수적으로 따르는 특허를 공동으로 관리한다면 향후 30년 동안은 FPSO 사업을 두 회사가 주도할 수 있다고 봅니다.”

    “충분히 검토가 가능한 제안이라고 봅니다. 저희는 이미 FPSO T.F팀의 구성을 마친 상태입니다. SHJ의 요청이 있다면 내일이라도 휴스턴을 방문할 수 있습니다.”

    아직 KBR과의 중요한 협상이 남아 있긴 했지만, 황태수는 큰 걱정을 하지는 않고 있었다. 경환은 이미 윌리엄과 한국의 조선업체와 FPSO의 공동연구 및 공동입찰을 한다는 기본방침에 합의를 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대현중공업은 FPSO 사업에 진출하여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려 하였고, KBR은 기술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제작비용이 저렴한 한국 조선업체와의 기술제휴로 더 큰 이익을 취하려고 했기에 두 업체의 합작은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알겠습니다. 우선 대현중공업과 SHJ와의 계약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 후에 세 회사의 제휴를 진행하도록 하시죠.”

    황태수의 시원스러운 답변에 권철중은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그 동안 답을 주지 않고 차일피일 미루던 박화수 때문에 속앓이를 했던 권철중에게 오늘 황태수와의 만남은 한줄기 빛으로 다가오는 느낌을 받았다.

    “당연히 부사장님의 말씀대로 진행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번 미국방문에는 회장님이 직접 T.F팀을 이끌고 SHJ를 방문 하시게 될 겁니다.”

    황태수는 대현중공이 매우 적극적으로 이 사업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워하며 이 사업이 원활하게 진행될 거란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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