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70화 (262/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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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인생 - 70

    93년 한 해를 마감하는 12월의 휴스턴은 크리스마스 시즌을 연상시키기엔 좀 무리가 있는 날씨였다. 크리스마스라면 춥고 눈발이 날리는 맛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경환은 한국의 늦가을 날씨를 연상시키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겨울 날씨가 영 맘에 들지는 않았다. 수정이의 배는 하루가 다르게 불러 오고 있었지만, 두 어머니들이 수정을 물심양면으로 돌봐 주고 있어, 경환의 수고는 단지 마켓에서 장을 봐 오는 정도에 그치고 있었다.

    “이다나, 좋은 아침입니다. 부사장님과 최 차장을 불러 주세요.”

    “알겠습니다. 사장님.”

    밝게 웃어 보이는 이다나를 뒤로 하고 경환은 커피를 머그잔에 따른 후 자신의 자리에 앉아 경제지를 펼쳐 들었다. 지역 경제지 일면을 차지하고 있는 윌리엄의 인터뷰 기사를 보며 경환은 슬쩍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이지리아 입찰을 성공으로 이끈 카우보이란 제목으로 쓰인 기사에는 SHJ의 이름은 단 한 줄도 찾을 수 없었지만, 경환은 크게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이미 SHJ의 이름은 동종업계로 퍼져나가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장님, 받으십시오.”

    최석현은 박스 2개를 경환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급히 박스를 뜯은 경환은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느라 아랫배까지 아파오고 있었다. 박스에는 노키아에서 제작한 벽돌만한 휴대폰 2대가 덩그러리 자리를 잡고 있었다. 스마트폰을 기억하는 경환은 이런 아날로그 1세대 휴대폰이 굉장히 낯설게만 느껴졌지만, 이 시대 최고의 기술이 집약된 고가의 사치품이란 걸 알고 있었다.

    “이제부터 족쇄가 채워지기 시작하는 거 같습니다.”

    “족쇄라니요?”

    경환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최석현은 눈만 크게 뜨고 이유를 묻고 있었지만, 경환은 그 뜻을 설명해 주지는 않았다. 휴대폰을 사용하다 보면 자연히 알 수 있었기에 굳이 설명해 줄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나는 사장님 쓰시고, 다른 하나는 사모님 드리십시오.”

    “차장님과 부사장님도 가지고 계시죠?”

    경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최석현은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을 무기 휘두르듯이 흔들어 보였다. 원활한 연락을 위해 법인 명의로 구입을 지시했을 때만 해도 비싼 휴대폰이 필요가 있겠냐는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던 모습과는 다르게 장난감 만지듯이 최석현은 항상 휴대를 하고 다니는 듯 했다.

    “부사장님도 오셨으니 잠시 회의를 하겠습니다.”

    황태수는 입찰 성공을 확인한 후 계약을 위해 몸을 뺄 수 없는 잭을 남겨둔 채 SHJ팀들을 이끌고 휴스턴으로 돌아와 있었다.

    “NNPC와 정식계약을 체결한 후에 컨설팅 커미션이 KBR에서 일시불로 지급이 될 것입니다. 저희는 수익구조가 매우 불안정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무리가 되긴 하지만, 화성산업의 인수와 함께 투자 쪽에도 진출을 할 생각입니다. 입찰을 성공한 지금이 전 적기라고 봅니다. 다른 의견이 있으시면 말씀을 해 주십시오.”

    황태수는 경환의 계획은 이미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화성산업의 인수는 그렇다 치더라도 투자 쪽에 진출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사장님, 아직 저희의 재무구조가 건실하지 못한 부분이 있습니다. 이런 와중에 투자에 집중을 하게 되면 그나마 갖춰지려는 자금부분에 악영향이 올 수도 있습니다. 또한 외국기업이란 인식이 있어 현지 금융권의 지원을 받기도 어려운 점이 있고요. 투자부분은 FPSO 입찰이 끝난 후로 미루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황태수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94년인 내년에 반드시 투자부분에 진출을 해야만 되는 사정을 그 동안 말해 주지 않고 있었다.

    “부사장님의 말씀도 이해를 합니다. 그러나 내년도 초기를 투자부분에 진출할 최적의 시기로 보고 있습니다. 이해를 해 주시고, 이 부분은 저에게 맡겨 주셨으면 합니다.”

    황태수는 더 이상 경환을 설득하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모든 일에서 자신의 상상을 뛰어넘고 있는 경환의 발목을 잡고 싶지 않았고, 어느 정도는 경환의 말에 믿음을 가지고도 있었다.

    “문제는 제가 투자에 대한 지식이나 경험이 떨어지다 보니, 제 아이디어를 실행시켜 줄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좋은 인물이 있으면 추천을 해 주셨으면 합니다.”

    황태수 또한 투자와 금융에는 경험이 전무하다 보니 마땅한 인물은 떠오르지 않고 있었다. 그때 최석현이 무엇인가 생각이 난 듯 급히 말을 꺼내 들었다.

    “사장님, 홍콩 H은행의 에릭 기억하시죠? 요새도 뻔질나게 전화가 오고 있는데, 저희의 주거래은행을 미국 H지사로 거래를 트게 만든 일로 승진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친구는 영국이나 미국으로 가고 싶어 하는데 오히려 홍콩에 발이 묶였다고 하소연을 하더군요. 사장님 생각에는 에릭은 어떠세요?”

    에릭 존슨을 생각을 해보긴 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무게감이 떨어진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어 망설이고 있었다. 마땅한 인물을 찾을 수 없다면 아쉽긴 하지만, 에릭과 일을 시작하려고 마음을 굳히려는 순간 황태수가 끼어들었다.

    “이번 입찰이 끝나고 잭과 술을 한잔 했습니다. 술을 마셔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린다가 SHJ에 합류하고 싶어 한다는 말을 잠깐 했었습니다. 자세한 얘기는 하지 않았지만, 린다가 혹시라도 SHJ에 맘을 두고 있다면 투자를 담당하기에 손색이 없을 거 같은데…”

    린다의 입을 통해서 직접 확인된 사항이 아니었기에 황태수는 확신을 가지고 말을 하지는 못했다. 자신이 알기로도 린다는 KBR의 재무와 원가분석 등의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기에, 작은 규모의 SHJ에 눈을 돌린다는 걸 쉽게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경환 또한 황태수의 말을 쉽게 믿을 수 없었다. 린다에게 합류를 해 달라는 요청을 하긴 했지만, 그건 린다가 KBR에서 정점을 찍은 이후의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한 귀로 흘릴 수는 없었다. 만약 린다가 합류를 해 준다면 투자부분을 모두 맡길 수 있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아직은 린다의 조건을 맞춰 줄 만큼 SHJ의 여력은 그리 크지 않다는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린다 문제는 제가 따로 확인을 해 보겠습니다. 최 차장님은 차선책으로 에릭과 접촉을 해 주십시오. 혹시라도 린다가 우리와 합류가 된다면 에릭은 그녀 밑에서 일을 해야 되니 큰 기대를 주지는 마시고요.”

    “알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경환의 투자에 대한 계획을 알고 있던 최석현은 넌지시 에릭에게 그 사실을 말해 주었었다. 그 말을 들은 에릭은 자신이 그 일을 해 보겠다며 거의 매일 최석현을 들들 볶아 대고 있었다. 최석현은 뭐가 좋은지 싱글거리고 있었다.

    “부사장님, 컨설팅업무에 대해 인원을 보강하는 한이 있더라도 컨설팅업무를 체계화 시켜야 될 거 같습니다. 제가 드리는 정보가 한계에 도달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이번 나이지리아 입찰에서 확인을 했습니다. 물론 당분간은 큰 변동은 없겠지만, 제 정보력의 의존도를 낮추는 방안에 대해서 부사장님이 연구를 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SHJ의 자체 정보력과 조직화된 컨설팅업무가 필요하다고 생각을 하고 준비 중이었습니다. 그리고 화성산업의 인수자금은 홍콩에서 투자하는 게 적당하다고 보는데 어떠십니까?”

    유연탄사업으로 홍콩구좌에는 팔백만 불에 가까운 돈이 축적되어 있었기에, 금융권과의 협상만 무리 없이 진행된다면 화성산업의 인수를 진행하기에는 충분해 보였다. 이번 컨설팅 자금을 투자부분에 집중시키기 위해서라도 경환은 황태수의 의견에 반대할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 진행을 해 주십시오. 다른 특별한 사항이 있나요?”

    회의를 정리하려는 순간 최석현이 급히 보고를 하기 시작했다.

    “박화수 부장이 지시를 내려 달라고 아우성입니다. 사장님께서 정리를 해 주셔야 될 거 같습니다.”

    최석현의 말에 경환은 박화수의 고생을 알겠다는 듯이 웃어 보였다. 대현중공업과 아동건설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박화수를 쪼아대고 있었다. 박화수의 요청에도 경환은 확실한 지시를 내리지 않고 있어 박화수를 포함해 대현과 아동의 애간장을 태우고 있었다. 휴대폰이 족쇄라는 사실을 박화수는 이미 경험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기다리게 하라고 하십시오. 아직 뜸을 더 들여야 된다고 봅니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지나고, 내년 1월말 경으로 준비를 하라고 박 부장님에게 전달을 해 주세요. 미팅장소는 휴스턴이라고 못을 박으라고도 하시고요.”

    급한 회의는 맞췄다는 생각에 회의를 마치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황태수가 다른 안건을 가지고 회의를 연장시켰다.

    “사장님, 이번 입찰이 끝나고 많은 곳에서 미팅제의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중 일본의 JSC와 KENTZ가 적극적입니다. 어떻게 생각을 하시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일본의 JSC로 인해 오성건설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황태수는 덤덤히 경환에게 보고를 하고 있었다. JSC는 시공보다는 플랜트설계에 강점을 가지고 있는 일본의 대표 플랜트업체였다. JSC의 안테나에 SHJ가 들어갔다는 것이 신기한 경환은 황태수의 보고를 듣고도 쉽게 생각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었다.

    “흠~, 우선 KENTZ와의 만남은 시기상조라고 봅니다. 내년도 FPSO 사업을 위해서라도 지금은 KBR과 틈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KENTZ와의 만남은 FPSO 이후로 가닥을 잡아 주십시오. 그리고 JSC가 문젠데…, 부사장님, 박 부장님도 일에 치여 있을 텐데 이참에 부사장님이 한국에 가셔서 대현중공업과 아동건설을 한번 만나 보시는 것도 좋지 않겠습니까? 그때 JSC와도 만나 보시고요.”

    “알겠습니다. 준비를 하겠습니다.”

    경환의 지시에 토를 달지 않고 수락을 하는 황태수를 경환은 고마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황태수 또한 컨설팅 부분에 자신의 힘을 실어 주려는 경환에게 무한의 신뢰감을 느끼고 있었다.

    일찍 서둘러 퇴근을 한 경환은 회사 앞의 작은 바의 문을 열고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바텐더에게 맥주를 한 병 주문하고는 서둘러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린다가 도착하려면 꽤 시간이 남아 있었지만, 음악을 들으며 쌓인 피로를 벗겨내고 싶었다.

    회귀를 한지도 3년을 넘어가고 있었다. 전생의 아쉬웠던 기억들을 생각하며 경환은 최선을 다해 하루하루를 보냈다고 자부했지만, 과연 제대로 길을 찾아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경환도 확신을 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단지 전생의 삶 보다는 지금의 삶에 충실하고 있다는 생각만 할 뿐이었다. 자신의 인생이 바뀜에 따라 주변 인물들의 인생 또한 달라지는 모습을 보면서 한동안 심한 자책감에 시달리기도 했었지만, 최대한 자신으로 인해 개인들이 피해를 당하는 일은 만들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고서야 그 자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린다의 문제는 경환으로 하여금 다시금 자책감에 빠지게 만들고 있었다. 자신의 회귀만 없었다면 린다는 그녀가 바라는 위치에 도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착잡한 심경을 맥주로 달래고 있을 무렵 문을 열고 들어오는 린다의 모습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제임스, 어쩐 일이에요? 난 제임스 책상엔 전화가 없는 줄 알고 있었는데.”

    린다의 농담을 받아 줄 기분이 아니었다. 경환은 바텐더를 불러 맥주 한 병을 더 주문하고는 린다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봤다.

    “린다에 대한 얘기를 들었습니다. KBR을 나와 SHJ에 합류를 한다는 얘기가 나오더군요. 물론 린다의 합류는 쌍수를 들고 환영을 해야 되겠지만, 제 기분이 그리 썩 좋지는 않아요. 솔직한 린다의 생각을 듣고 싶어서 오늘 만나자고 했습니다.”

    린다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 경환의 입에서 나오자 맥주병을 들어 한 모금 넘긴 후 한숨을 깊게 내 쉬었다.

    “후~, 제임스의 귀에 결국은 들어갔나 보네요. 이번 입찰이 시작되기 전에 잭에게 제 의사를 밝혔어요. 입찰이 끝나고 제임스의 제안을 받아들인다고. 입찰을 성공적으로 마쳤기에 홀가분하게 윌리엄에게도 말을 할 생각이었어요. 혹시 나한테 한 제안 취소하려는 건 아니죠? 나 그럼 완전 실업자 신세가 되는데. 호호호.”

    “난 SHJ가 좀 더 성장을 하고 린다가 KBR에서 목표를 이룬 다음을 얘기한 거예요. 지금 SHJ는 린다에게 해 줄 것이 전혀 없다는 건 나보다 더 잘 알잖아요.”

    경환의 말은 사실이었다. 지금 SHJ의 여력으로는 KBR에서 받는 린다의 급여의 반도 맞춰줄 수 없는 형편이었다.

    “제임스, 나도 욕심 많은 여자에요. SHJ가 성장한 후에 들어가는 건 의미가 없다고 봐요. SHJ의 원년멤버로서 성장을 시켜 보고 싶어요. 다른 이유는 없어요. 돈은 나중에 벌어도 되니까요. 정 제임스가 미안하다면 스톡옵션을 줘도 되고요. 호호호.”

    스톡옵션이란 말에 경환은 자신이 전혀 생각하지 못한 것을 끄집어내는 린다에게 다시 한 번 감탄을 하고 있었다. 말로만 SHJ를 같이 키워가자고 했지 실질적으로 그들에게 혜택을 주려는 생각은 전혀 못했었다. 경환은 SHJ를 자신의 것으로만 생각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린다의 지적에 급격히 얼굴이 밝아졌다.

    “린다, 스톡옵션이면 되겠어요? 린다를 포함해서 내가 믿는 사람은 5명입니다. 비상장회사의 경우 10%안에서 스톡옵션을 행사할 수 있다고 들었는데, 20%선으로 맞출 수 있는지 방법을 연구해 줄래요?”

    린다는 놀란 눈으로 경환을 바라보았다. 농담으로 말한 스톡옵션을 경환이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있어서였다.

    “진심인가요? 제임스.”

    “혼자 먹으면 체한다는 게 제 지론입니다. 그리고 스톡옵션을 주게 되면 죽어라 일을 할 거 아닙니까? 린다 덕분에 SHJ에 광명이 비치네요. 그리고 아직은 SHJ는 KBR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됩니다. 윌리엄이 반대를 한다면 저도 린다의 합류를 당분간 보류할 수밖에 없어요. 윌리엄을 잘 설득해 봐요.”

    린다의 합류로 경환은 퍼즐 한 조각을 더 맞출 수 있게 되었다. 두 사람은 서로 축하를 나누며 맥주병을 부딪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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