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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인생-69화 (261/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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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인생 - 69

    대후건설의 입찰실패 소식은 국내 건설업계에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었다. 대후건설이 나이지리아에 공을 들이고 있었던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이번 입찰실패의 파장은 만만치 않았다. 대현중공업 또한 이번 입찰 결과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대후건설의 입찰 성공을 기정사실화 하고 있었던 권철중 전무 또한 예상치 못한 결과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이 부장, 도대체 대후건설이 떨어져 나간 이유가 뭐라는 거야? 나이지리아는 대후건설의 텃밭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닌데 말이야. 이거 참.”

    권철중은 대현건설에서 제공되는 일일 정보보고서를 뚫어지게 쳐다보았지만, 쉽게 그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전무님, 저도 납득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대후는 나이지리아 석유를 수입하겠다고 공공연하게 떠들고 다녔습니다. 대후 입장에서는 이번 입찰이 상당히 중요했을 텐데, KBR로 넘어갈 줄은 저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이한주 부장 또한 이번 결과가 믿기지 않고 있었다. SHJ의 호언장담에도 불구하고 원가를 무시한 대후건설의 저가공세는 감당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지레짐작을 하고 있었다.

    “전무님, 지난번 SHJ의 제안을 다시 검토를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번 낙찰가 차이가 불과 이백만 불 밖에는 되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SHJ의 컨설팅 능력과 정보력을 마냥 무시할 수는 없다는 게 판명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한주의 말에 권철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있었다. 관심도 없던 나이지리아 입찰결과를 살핀 이유도 SHJ의 젊은 사장의 치기를 확인해 보겠다는 생각뿐이었지만, 그 치기가 사실로 판명된 지금, 권철중의 눈동자는 심하게 흔들렸다.

    “이경환이라는 젊은 친구의 말이 허언이 아니었군 그래.”

    독백하듯 탄식과 함께 쏟아내는 말에 이한주는 맘이 급해지고 있었다. SHJ의 다음 행보를 짐작하고도 남아서였다. 대현에 처음 제안을 하지만 나이지리아 입찰에 성공을 한다면 손을 잡는 건 대현이 아닐 수도 있다고 한 경환의 말이 무섭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전무님, 이렇게 넋 놓고 있을 수는 없을 거 같습니다. SHJ와 빨리 연결을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권철중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국내 최초로 LNG선을 진수시켰다는 자부심도 FPSO 건조엔 미치지 못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자칫 SHJ가 다른 조선업체와 손을 잡기라도 한다면 국내 제1의 조선업체란 타이틀을 내 줘야 될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급해져만 갔다.

    “이 부장은 박화수란 친구와 빨리 접촉해보고, 설계, 건조, 재무 쪽에서 베테랑들로 인원을 선출해서 FPSO T.F(TASK FORCE)팀을 구성해 놓고 지시를 기다려. 회장님에게 보고해서 최대한 빨리 미국으로 건너가야겠어.”

    대현중공업이 발 빠르게 대응하고 있을 때 아동그룹의 회장실도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정기명 사장을 급히 불러들인 최준석 회장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정보동향보고서를 살펴보고 있었다.

    “정 사장, 우리 예측이 빗나간 거 같습니다. 대후건설이 보기 좋게 물을 먹었군요.”

    정기명은 최준석의 말에도 인상을 구긴 채 부동자세로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판단이 보기 좋게 틀린 지금 회장을 똑바로 쳐다 볼 면목이 없어서였다.

    “죄송합니다. KBR이 대후를 이길 줄은 예상을 하지 못했습니다. SHJ란 업체가 저희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KBR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거 같습니다. 지난번 김환기 사장이 보고한 내용을 저희도 신중하게 검토를 해야 될 것 같습니다.”

    회장실은 침묵이 길어지고 있었다. 중원그룹과의 합작과 아동건설과 KBR과의 업무제휴를 제안한 SHJ에 대해 확실한 가부결정 없이 시간만 질질 끌게 만든 것이 지금으로서는 악수로 작용을 하고 있었다. 좀 더 현명한 판단을 내리지 못한 것에 후회를 하며 최준석은 그런 판단을 내리게 한 정기명을 못마땅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김환기 사장의 보고를 좀 더 신중하게 생각을 했어야 했는데….”

    정기명은 부동자세에 더욱 힘을 주며 어금니를 깨물었다. 호탕하기는 하지만, 자신의 눈 밖에 나는 사람을 단칼에 쳐내는 최준석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 위기를 최대한 피해 가야만 했다.

    “제가 SHJ와 직접 접촉을 시도해서 좋은 결과를 만들도록 하겠습니다.”

    정기명의 말에도 최준석은 인상을 풀지 않았다. 최준석은 정기명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있었다.

    “정 사장은 움직이지 말아요. SHJ와 연결은 김환기 사장을 통해 내가 따로 지시를 할 생각입니다.”

    최준석의 마음을 돌리기 어렵다는 것을 느낀 정기명의 인상은 점점 굳어졌지만, 지금은 달리 좋은 방법이 없었다. 최준석은 그런 정기명을 전혀 의식하지 않은 채 한국통운으로 전화연결을 하고 있었다.

    화성산업의 분위기는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곽기철의 전횡으로 인한 여파는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오고 있어 직원들의 사기는 하루가 다르게 곤두박질치고 있었지만, 곽기철이 도망치듯 화성산업을 떠난 이후 이 상황을 주도적으로 해결해 나갈 맨 파워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 KBR과 결별을 했다는 소문은 동종업계로 빠르게 퍼져 나가고 있었고 추가 물량이 확보되지 않아 24시간 돌아가던 마산공장도 손을 놓는 날이 늘어만 가고 있었다. 화성산업이심각한 경영위기에 직면해 갈수록 금융권의 자금회수 압박은 하루가 다르게 심해져 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박화수는 마치 가시방석에 앉은 듯 좌불안석이었지만, 상황을 지켜보기만 하라는 경환의 지시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KBR이 나이지리아 입찰에 성공을 했다는 소식이 퍼져서인지 오늘 박화수의 전화통은 불이 난 듯 종일 울려대고 있었다. SHJ의 제안을 받고도 의도적으로 평가절하를 했던 대현중공업을 시작으로 유연탄 거래를 하는 제일그룹과 대후, 심지어 자신과 황태수를 버린 오성건설에서도 접촉의사를 전달해오고 있었다. 당분간 접촉을 자제하라는 경환의 지시가 있어 정중히 거절을 하고 있었지만, 오늘 박화수는 SHJ에 합류한 이후로 최고의 보람을 만끽하고 있는 중이었다.

    “SHJ의 박화수 부장입니다.”

    ‘저…, 한국통운의 김환기 사장입니다.’

    김환기 사장의 목소리를 확인 한 박화수는 인상이 찡그려졌다. 자신의 제안에 대해 차일피일 확답을 피한 채 고자세로 자신을 아랫사람처럼 대하던 김환기의 얼굴이 떠올랐다. 무슨 이유로 자신을 찾고 있는지 뻔 한 상태에서 그 동안 김환기에게 당한 무시를 갚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김 사장님, 사업은 잘 되시죠? 그간 사장님을 힘들게 해서 죄송했습니다. 넓으신 아량으로 이해해 주십시오.”

    ‘어이구, 박 부장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우선 이번 입찰에 성공하신 게 축하드립니다. 다름이 아니라 SHJ에서 제안한 중원그룹과의 합작에 대해 회장님의 재가가 드디어 떨어졌습니다. 이에 대한 실무협상을 진행하기 위해 전화 드렸습니다.’

    속보이는 말이라는 걸 서로 알고 있었지만, 박화수는 별로 개의치 않는다는 듯 수화기에 대고 라이터를 켜 담배에 불붙이는 소리를 들려줄 뿐이었다.

    “아~, 그러셨군요. 이거 어쩌죠? 한국통운이 관심이 없다고 판단이 들어서 한진과 얘기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한국통운과는 다르게 한진에서는 적극적이더군요. 싫다는 기업보다는 적극적인 기업과 일을 추진하라는 저희 사장님 말씀도 있고 해서, 이번 제안은 한진과 진행을 하려고 합니다. 사장님께서 신경을 써 주셨는데 죄송하게 됐습니다.”

    그 동안 김환기에게 당했던 무시가 참기 힘들었는지, 말을 마친 박화수는 속이 뻥 뚫리는 시원함마저 느끼고 있었다. 수화기로는 당황하며 말을 더듬고 있는 김환기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박…, 박 부장님. 그 무슨 섭섭한 말씀입니까, 한진이라니요? 저희 답변이 좀 늦은 건 사실이지만, 그건 그룹 회장님이 해외 출타 중이어서 결재에 시간이 필요해서 그랬던 겁니다. 전화로는 안 되겠네요. 제가 지금 그쪽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시간을 좀 내어 주십시오.’

    “죄송합니다. 제가 스케줄이 만만치 않아 자리에 없을 수도 있습니다. 굳이 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딱히 드릴 말씀도 없고요.”

    김환기가 죽을 맛이란 걸 수화기를 통해 확인하고 있는 박화수는 쉽게 김환기의 요청을 받아들일 생각이 전혀 없었다. SHJ 입장에서도 중원그룹과의 합작제안은 전혀 남는 게 없는 비즈니스였다. 단지 중원그룹 궈청과 경환과의 개인적인 약속에 대한 신뢰차원에서 일을 추진하고 있었다. 몇 번이고 한진을 거론하기는 했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경환은 한국통운을 끝까지 밀고 있어 박화수는 답답하기만 했었다. 오늘 그 동안 받았던 설움을 한 번에 날려 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저, 한 시간 후면 도착을 합니다. 꼭 자리에 계셔 주십시오. 안 계시면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전화 끊습니다.’

    대답도 듣기도 전에 김환기는 서둘러 전화를 끊어 버렸다. 박화수는 십 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거 같았다. 혼자만 알 수 있는 미소를 지으며 수화기를 내려놓을 때 멀리서 최승화의 손짓을 보며 급히 사장실로 향했다.

    “이번에도 KBR이 입찰에 성공을 했다고 들었네. 나대신 이 사장에게 축하 한다고 전해주게.”

    “알겠습니다. 사장님. 저희 사장님께 전달을 해 드리겠습니다.”

    맘고생이 많았던지 최승화는 부쩍 늙어 있었다. 믿었던 곽기철이 오성엔지니어링의 하수인이었다는 사실도 충격적이었지만, 소희와의 약혼까지 파기해 버린 곽기철로 인해 사업에 대한 의지마저 사라져 버린 상태였다.

    “이번 입찰 성공에도 KBR은 우리에게 물량을 주지 않을 생각이겠지?”

    박화수는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지분인수에 대해 확실한 답을 듣기 전에는 화성산업과의 모든 거래를 중단한다는 경환의 방침이 있었기에, 자신이 최승화에게 줄 수 있는 도움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죄송합니다. 본사의 지시를 아직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사장이 의외로 결심을 굳혔나 보구먼. 내가 사람을 잘못 본 죄가 있긴 하지만, 화성산업에서 손을 턴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보지 못했네. 허~.”

    이미 경환과 자신의 동생인 최승호가 자신에게서 등을 돌렸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쉽게 화성산업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 만큼 화성산업에 대한 애정은 누구 보다고 깊었다.

    “사장님, 저희 사장님은 화성산업에 대한 애정이 각별합니다. 그렇다 보니 실망도 많았을 거라고 생각이 들고요. 이런 잘못이 되풀이 되는 걸 바라지 않고 있다 보니, 저희 사장님의 결심을 돌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미 입찰에 성공한 이상 시간은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사장님께서 결심을 하지 못하신다면, 저희는 다른 기업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습니다.”

    박화수의 말은 사실이었다. 경환은 최승화가 끝내 의사를 밝히지 않는다면 화성산업에 미련을 버리고 SHJ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기업으로 방향을 전환해도 좋다고 지시를 내린 상태였다. 인간적인 애정을 가지고 있는 화성산업이었지만, 경환은 그 보다 더 소중한 SHJ의 직원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박화수는 이런 사실을 기억하며 마지막으로 조언을 하고 있었다. 이 조언으로도 최승화의 결심을 받아 내지 못한다면, 박화수는 화성산업에 대한 미련을 깨끗이 털어버릴 각오를 하고 있었다.

    “사실을 말해줘서 고맙네. 박 부장. 내 혈육인 최 전무도 등을 돌린 마당에 무슨 미련을 가질 수 있겠나. 그래도 입에서 쉽게 말이 떨어지지 않는다네. 내가 미련을 버린다면 남아 있는 직원들은 어떻게 되는 건가?”

    최승화의 결심이 굳어져 가고 있다는 것을 느낀 박화수는 SHJ의 계획을 자세히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우선 사장님과 사모님 최 전무님의 지분을 모두 인수한다는 조건하에 금융권의 여신은 저희가 다 안을 생각입니다. 물론 금융권과 별도 협상을 선결해야 되겠지만, 일부 여신을 환급해주는 조건을 제시한다면 큰 무리는 없을 거로 보고 있습니다. 아시겠지만 오성엔지니어링은 이미 작업을 시작했기에 저희도 서둘러야 될 상황입니다. 현 직원들의 고용은 전부 승계를 받을 것입니다. 일부 정리를 해야 될 사람들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직원들은 큰 문제가 없을 거라고 봅니다. 금융권의 여신금액과 자산 가치 평가가 끝난다면, 지분인수가격을 사장님과 따로 협의를 할 생각입니다. 절대 섭섭하지 않게 해 드리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사장님께 약속드릴 수 있는 것은 화성이라는 이름을 남기겠다는 것입니다.”

    박화수의 설명은 들은 최승화는 고개를 들어 깊은 한숨을 내 쉬었다. 자신이 아는 경환이라면 합리적으로 인수절차를 진행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오성엔지니어링에 회사가 넘어가게 된다면 직원들은 물론이고 회사는 갈기갈기 찢겨 나갈 것을 알고 있었기에, 최승화는 경환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굳혔다.

    “저희 사장님께서는 SHJ-화성플랜트란 이름을 세계적인 특수플랜트제작업체로 키우려는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사장님의 결심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미 자신의 손에서 화성산업이 빠져 나간 것을 알고 있는 최승화는 떨리는 목소리로 마지막 말을 전했다.

    “이 사장에게 회사 인수를 절차를 진행하자고 보고 해 주게. 화성이란 이름을 없애지 않아줘서 고맙다는 말도 함께 전해 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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