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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인생-68화 (260/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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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인생 - 68

    나이지리아 석유공사(NNPC) 로비에는 이번 석유화학단지 입찰에 참여하기 위해 전 세계에서 몰려온 플랜트업체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그들 사이로 황태수와 잭의 모습도 쉽게 눈에 들어왔다.

    “T.S의 의견을 무시할 생각은 없으나, 너무 대후건설을 의식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마지막 입찰금액을 조정하면서 황태수는 잭과 대후건설에 대해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누었지만, 잭은 아직도 황태수의 의견에는 쉽게 공감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여기 같이 따라온 것이, 우리의 패착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대후건설에서는 SHJ 소속인 내가 이 자리에 있다는 것에 큰 의문을 가지고 입찰금액을 조정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흠~.”

    황태수는 김준성과의 만남에서 그의 말을 되새겨 보았었다. 자신도 마찬가지지만 김준성 또한 해외입찰에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황태수의 등장에 의미를 부여했을 것이고, 이 의미부여는 곧 입찰가 조정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황태수는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여기까지 왔으니, 결과가 어떻게 되던 최선을 다해 봅시다.”

    황태수의 어깨를 힘껏 잡았던 손을 내려놓은 잭은 입찰금액이 적혀있는 봉투를 확인 한 후 입찰서를 제출하기 위해 서서히 발걸음을 옮겨가고 있었다.

    한국통운의 김환기 사장은 근무복 상의에 붙은 명찰을 정리한 후 비서를 따라 회장실에 들어섰다. 자신보다 나이가 어리긴 하지만, 회장 앞에 서기가 힘들 정도로 회장의 권위는 막강했다. 여자관계가 복잡하다는 세간의 소문이 나돌고 있기는 하지만, 회장은 전혀 개의치 않고 자신의 사생활을 충분히 즐기고 있다는 게 김환기로서는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어~, 김 사장이 느닷없이 면담을 요청하다니 놀랍습니다. 한국통운은 별 문제없이 운영이 되고 있다고 들었는데요.”

    한국통운은 아동그룹의 현금조달 창구 역할을 수행하는 중요한 계열사이긴 했지만, 그룹 내에서 받는 대우는 그리 높지 못했다. 낮은 급여로 직원들의 이탈이 심한 한국통운은 물류사관학교라는 오명을 쓸 정도였지만, 경영진들은 이를 개선시킬 생각조차도 하지 않고 있었기에 한국통운 직원들의 만족도는 그룹 내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었다.

    “전화로 잠시 말씀 드렸듯이 중국의 중원그룹과의 합작건과 SHJ에서 아동건설에 제안한 내용을 보고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정 사장, SHJ가 어떤 회사입니까?”

    김환기의 말을 들은 최준석 회장은 건설 사장인 정기명을 바라보며 자신은 들어 보지도 못한 SHJ란 곳에 대해 설명을 요구했다.

    “SHJ란 업체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대형 플랜트업체인 KBR의 입찰 컨설팅을 하는 업체입니다. SHJ홍콩법인은 제일그룹과 대후와 유연탄거래를 하고 있다고도 합니다.”

    짤막하게 보고하는 정기명을 김환기는 불만 섞인 표정을 쳐다 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생색을 내야 될 보고를 정기명이 끼어든 게 맘이 들지 않아서였다.

    “김 사장, SHJ가 우리 아동을 끌어 들이려는 이유가 뭡니까? 중원그룹과 합작하는 게 한국통운에 이득이 있는 건가요?”

    김환기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헛기침을 한번 한 뒤 준비해온 보고 자료를 최준석에게 가지런히 전달하고는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중원그룹은 저희 한국통운의 물류통합시스템을 중국에 적용하고 싶어 합니다.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중원그룹의 국내 컨테이너 하역 권을 저희 한국통운에게 일임해줄 의사를 표명했습니다. 또한 KBR의 플랜트 공사에 아동건설의 참여를 주선하겠다는 제안입니다. 중원그룹의 컨테이너 하역권도 놓칠 수 없지만, 우리 그룹의 주력기업인 아동건설에도 좋은 기회가 될 것으로 봅니다.”

    최준석은 김환기의 보고를 들으며 생각에 잠겼다. 자신도 KBR의 실력은 잘 알고 있었기에 KBR의 공사에 아동건설이 참여한다면 대현건설과 대후건설을 추격할 수 있는 기틀을 만들 수도 있는 문제였다. 아동건설은 현재 리비아를 제외하고는 중동 토목공사에서 대현과 대후에 뒤쳐져 가고 있었다.

    “정 사장, SHJ란 곳에서 왜 우리 아동건설에게 이런 기회를 제공하려고 하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조사는 해 봤습니까?”

    김환기는 최준석이 자신을 무시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자신의 기분을 최준석 앞에서 표현할 수는 없었다. 정기명은 그런 김환기를 보며 슬쩍 입 꼬리를 올려 쳐다볼 뿐이었다.

    “아직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만,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들었습니다. 현재 대후건설이 추진하는 나이지리아 석유화학단지 입찰에 KBR이 참여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대후건설을 이길 수는 없다고 판단하고는 있지만, 혹시라도 KBR이 입찰에 성공한다는 가정을 해 본다면 이번 한국통운에 내민 제안이 어느 정도 이해는 됩니다.”

    “그래요? 설명을 해봐요.”

    최준석은 SHJ이 무슨 이유로 아동건설과 KBR과의 합작을 추진하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중원그룹과 한국통운의 합작을 성사시키기 위한 제안이라고 보기엔 어딘가 말이 되지 않는 구석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최준석은 정기명의 설명을 재촉하고 나섰다.

    “대후의 저가공세를 누르고 KBR이 입찰에 성공을 했다면, 비용에 대한 압박이 심할 것으로 봅니다. 따라서 해외 건설 경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비용이 저렴한 한국 건설업체로 눈을 돌리는 건 당연하다고 봅니다. 그렇게 본다면 KBR 입장에서 대현건설 보다는 저희 아동건설이 입맛에 맞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정 사장 말은 이번 나이지리아 입찰에 한해서 우리 아동이 필요하다는 말로 들리는데, 맞나요?”

    정기명은 최준석을 향해 공손히 고개를 끄떡이며 다음 말을 이어갔다.

    “KBR이나 우리 아동이나 나쁜 거래는 아니라고 봅니다. 잘만하면 저희가 KBR의 협력업체로 계속 참여할 기회를 만들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KBR이 대후건설을 이길 확률은 10%미만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정기명의 말에 김환기는 급격히 안색이 변하고 있었다. 확률이 거의 없는 제안을 당당히 회장에게 보고를 했으니 자신의 입지는 더욱 떨어질 게 분명했다.

    “김 사장, 정 사장의 말을 잘 들었지요? 중국과의 합작은 당분간 홀딩을 해요. 괜히 나서지 말란 말입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SHJ와의 관계는 유지를 하시고요.”

    얼굴이 붉어진 김환기는 아무런 말도 못하고 최준석을 향해 고개를 조아리고는 도망치듯 회장실을 빠져 나가고 있었다. 그런 김환기의 뒷모습에 정기명은 알 수 없는 묘한 웃음을 보이고 있었다.

    NNPC의 입찰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황태수를 향해 김준성이 다가왔다.

    “SHJ도 많은 노력을 했겠지만, 우리를 이기기는 어려울 겁니다.”

    황태수는 김준성의 도발에도 일절 반응하지 않고 있었다. 입찰준비에 KBR과 함께 최선을 다했고 막찬 입찰가까지 조정을 한 상태에서도 대후의 벽을 넘지 못한다면 깨끗이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으로선 경환의 정보력을 믿어 보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나이지리아에서 대후를 이긴다는 게 쉽지 않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항상 변수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저희는 그 변수에 기대를 해 볼 생각입니다. 혹시라도 이번 입찰에 대후가 실패를 한다면, 저희 SHJ에 컨설팅을 의뢰 하시는 것도 검토를 해 주십시오.”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자신의 면전에서 대후의 실패가능성을 언급하는 황태수를 김준성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이 입찰을 성사시키기 위해 나이지리아 고급관료들에게 이미 억대의 뇌물까지 뿌려대며 내부의 정보와 지원을 받아 놓은 상태였기에 질 수 없는 게임이었다.

    “그러겠습니다. 이 나이지리아에선 변수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언제든지 대후로 오십시오. 항상 자리를 비워두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김준성의 연이은 도발에도 황태수는 웃음으로 넘기고 있었다. 옆에 있던 잭이 급하게 황태수의 옷을 잡아끌었다. 입찰 결과를 발표하기 위해 단상위로 심사위원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 인물들 사이로 TOTAL의 뱅상이 눈에 띄었다.

    “뱅상이 심사위원에 있었다니, 의외입니다.”

    황태수의 의문 섞인 말에 잭은 미소를 보였다.

    “워낙 비리가 많은 곳이다 보니 TOTAL에서 대후의 반대 라인들과 접촉을 했었다고 합니다. 입찰은 공정하게 진행하자고 설득이 먹힌 모양입니다.”

    황태수는 뱅상을 계속 바라보고 있었지만, 뱅상은 황태수를 힐끔 쳐다보고는 빠르게 고개를 반대 방향으로 돌려 버렸다. 심사위원장이 강단에 올라 마이크를 점검을 하기 시작했다. 발표장은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였고 위원장은 천천히 봉투를 열었다.

    “이번 석유화학단지 입찰결과를 발표하겠습니다. 이번 입찰의 최종 낙찰금액은 12억 4천 3백만 불입니다.”

    낙찰 금액을 듣던 황태수는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잭을 급하게 바라보았다. 잭은 황태수가 이해하기 어려운 표정을 지으며 황태수의 시선을 고스란히 받고 있었다.

    입찰 결과가 궁금했던 경환은 새벽녘부터 사무실에 나와 있었다. 통신상황이 원활하지 못한 나이지리아였기에 확인 할 수 있는 방법은 현지에서 걸려오는 전화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초조한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었던 경환은 사무실 주위를 서성거리고 있었지만 쉽게 진정을 가라앉힐 수는 없었다.

    “제임스, 내 사무실에서 혼자 결과를 기다리는 게 답답해서 자네 사무실로 출근을 했네. 아침도 못하고 나왔는데 커피라도 한잔 주게.”

    “잘 오셨습니다. 저도 긴장이 좀 되네요. 윌리엄이 와 주시니 저도 든든합니다.”

    경환은 커피메이커에서 커피 두 잔을 따라 한잔을 윌리엄에게 건네주며, 출근 후 처음으로 소파에 앉았다.

    “이미 결과가 나왔을 시간인데 뭣들을 하는데 아직 연락을 주지 않고 있으니, 내 답답해서 속이 썩어가네.”

    윌리엄은 회장의 반대에도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켰다. 이번 입찰뿐만 아니라 내년에 있을 FPSO 입찰을 성공시키지 못한다면 모든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나야 될 입장이었다. 그건 경환도 마찬가지로 한 번의 실패는 곧 SHJ의 몰락과 직결될 수밖에 없는 경환의 입장에서는 외줄을 타고 있는 심정이었다.

    “현지 통신사정이 원만하지 않아서 그럴 겁니다. 잠시 기다려 주시죠.”

    “그리고 제임스, 이번 입찰이 성공한다면 손해를 최소화 하는 방안이 있다고 했는데 그거라도 미리 설명을 해 주게.”

    성격 급한 윌리엄의 질문에 경환은 두 손을 들어 항복한다는 제스처를 보였다.

    “3천만 불에 대한 비용은 우선 SHJ가 오백만 불을 부담하기로 했습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제안은 중동 건설의 경험이 풍부하고 기술력도 보유하면서도 상대적으로 비용이 낮은 한국건설업체에 토목공사와 일부 플랜트 시공업무를 위탁시킨다는 겁니다. 감리를 철저히 한다면 부실시공에 리스크는 줄여 갈 수 있다고 판단됩니다. 이럴 경우 최소한 천만 불 이상의 비용은 절감을 할 수 있다고 봅니다. 나머지 천오백만 불은 공기단축과 물류개선 등으로 상황에 따라 적절히 조치를 취한다면 최소한 손해는 발생하지 않게 할 수도 있습니다. 이 제안은 입찰결과가 나오면 정리를 해서 제안서를 보내 드리겠습니다.”

    “흠~, 이 부분은 따로 얘기를 해 보세. 단순 토목공사야 괜찮겠지만 플랜트 시공까지는 좀 생각을 깊게 해 봐야 될 거야. KBR의 명성에 흠이 가면 안 되니까.”

    경환은 이해를 한다는 듯이 윌리엄의 향해 고개를 끄떡이며 수긍의 표시를 했지만, 시선은 책상 위에 놓인 전화기에서 떼지 못하고 있었다. 커피를 한 잔 더 따라 마신 후에도 전화기는 울리지 않고 있었다. 이미 결과가 발표된 시간이 지났음에도 보고가 들어오지 않고 있어 경환은 불안감에 빠져들고 있었다.

    ‘띠리리~~, 띠리리~~,’

    전화기에서 벨이 울리자마자 경환은 급히 몸을 일으켜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부사장님이신가요?”

    상대방을 확인하기도 전에 경환의 입에선 한국어가 튀어나오고 있었다. 한국어를 알아들을 수 없는 윌리엄은 경환의 곁으로 다가와 수화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지만 반대편에서 들리는 한국어에 윌리엄은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네~, 네~, 알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한참을 한국어로 통화를 한 경환은 수화기를 내려놓았고 윌리엄은 경환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뭔가? 실패라도 한 건가? 답답해 죽겠으니 빨리 말을 해보게.”

    윌리엄의 재촉에도 경환은 멍한 표정으로 전화기만 쳐다보고 있었다. 경환은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후 윌리엄을 향해 크게 웃어 주었다.

    “하하하, 성공했습니다. 우리가 12억 4천 3백만 불, 대후가 12억 4천 5백만 불, 2백만 불 차이였다고 합니다. 막판에 잭이 3백만 불을 추가해서 입찰을 했다고 하더군요. 아슬아슬했지만 결국은 성공을 했습니다.”

    윌리엄은 두 주먹을 쥐어 하늘을 향하며 기쁨을 표한 후에 경환과 굳은 악수를 나누었다. 그러나 경환은 마음 한편이 개운치 않았다. 자신이 알고 있던 대후의 낙찰가가 오백만 불이나 차이를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자신이 알고 있던 정보가 앞으로 쓸모가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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