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65화 (257/264)

#65

다시 사는 인생 - 65

PQ를 통과하고 입찰이 얼마 남지 않아서인지, 황태수와 직원들은 업무의 효율성을 위해 특별한 보고를 제외하고는 KBR에서 직접 출퇴근을 하고 있었다. 며칠째 황태수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있었지만, 경환은 나이지리아 입찰 후의 일을 계획하느라 황태수의 존재조차 잊어버릴 정도였다. 번뜩 시간을 확인한 경환은 하던 일을 손에서 놓고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양복 상의를 빠르게 걸쳤다.

“이디나, 약속이 있어 먼저 퇴근합니다. 특별한 스케줄은 없죠?”

“네, 사장님. 부사장님은 내일 오전 출근을 해서 경과보고를 드리겠다고 합니다.”

시원시원한 이목구비를 한 이다나의 밝은 미소는 쌓인 피로를 풀기에 충분했다. 이다나를 향해 가볍게 웃어준 경환은 사무실을 나와 건물 입구에서 수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휴스턴에 처음 도착해서 느낀 점은 뉴욕이나 L.A와 달리 다운타운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점이었다. 수많은 고층건물들이 즐비했지만 상대적으로 거리는 한산할 정도였는데, 무더운 휴스턴의 날씨로 인해 다운타운의 주거 거리를 지상이 아닌 지하로 조성을 했다는사실을 경환은 제법 시간이 흐른 뒤에야 알게 되었다. 마침 차 한대가 경환의 앞에서 급정거를 했다.

“자기야. 일찍 나와 있었네요. 어서 타요.”

“나도 방금 나왔어. 오늘은 자기가 운전을 하니 난 옆에서 기대만 하고 있을게.”

차장 밖으로 수정은 경환을 보며 ‘씩’ 웃어주고는 경환이 차에 올라타자마자 급히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수정의 표정을 보며 경환은 한 순간 불안함을 느끼기도 했지만, 큰 문제는 아닐 거란 생각을 하고 허리를 좌석 깊이 기대며 오랜만의 휴식에 빠져 들었다. 차는 다운타운을 지나 수정이 휴스턴에서 가장 사랑하는 허먼 파크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RICE 대학 옆에 위치한 허먼 파크는 미술관을 비롯해 박물관과 극장 등 문화시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휴스턴 주민들에게 가장 사랑 받는 공원이었다. 이미 수정과 함께 이곳을 수차례 왔었지만, 수정은 허먼 파크의 매력에 빠져 벗어나질 못하고 있을 정도였다.

“자기하고 이렇게 여길 걷고 있으면 기분이 참 좋아져요.”

학교생활에도 어느 정도 적응을 했고, 북경에서 맛보지 못한 문화생활을 충분히 즐기고 있었다. 수정은 학교생활을 핑계로 가사분담을 당당히 요구했었지만, 일 때문에 하루하루 녹초가 되어 들어오는 경환을 보며 더 이상 그런 요구를 할 수 없었다.

“저기 카페가 예뻐 보이는데, 우리 저기에서 커피한잔 마실까?”

경환은 수정의 어깨를 감싸 안고 카페로 들어가 커피를 주문했다. 맥거번 호수를 바라보며 일에서 벗어나 수정과 함께 여유로운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경환은 수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기 무슨 일 있어? 주말도 아니고 평일에 데이트 신청을 다하고.”

수정은 경환의 질문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밖의 경치를 감상하는데 집중을 하고 있었다. 경환도 더 이상 수정의 감상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되묻지는 않았다.

“자긴 내가 커피를 왜 안 마시는지 모르나 보네.”

순간 경환은 수정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 좋아하던 커피를 제치고 과일주스를 주문할 때만 해도 그러려니 했었지만, 지금은 전혀 다른 의미로 들리고 있었다.

“자기 혹시?”

“사실 나 그 동안 피임약 먹지 않았어요. 우리 결혼한 지 2년도 넘었고, 나도 자기 닮은 얼굴 네모난 아들 가지고 싶었어요.”

경환은 그 동안 전생의 딸만 생각하고 있었지 수정의 마음은 헤아려 주질 못했다는 자책감이 들었다. 경환은 자리에서 일어나 수정을 깊게 안아주고는 수정의 입술에 진한 키스를 해 주었다.

“미안해. 내 생각만 하느라 자기를 이해해 주지 못했어. 병원은 가 봤어?”

“아니…. 생리를 안 한지 두 달째에요. 겁도 조금 나고, 자기한테 먼저 말하고 병원에 가려고…”

경환은 수정의 등을 어루만져 주었다. 혼자 일을 저질러 놓고 맘고생을 했을 수정에게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경환은 수정을 향해 큰 웃음과 함께 들떠있는 모습을 보여 줄 수밖에 없었다.

“그래, 내가 산부인과는 예약을 해 놓을 테니까, 내일이라도 당장 병원에 가보자.”

“자기 싫지 않아요? 아기를 원하지 않는 거 같아 보여서….”

“자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좀 더 회사가 안정된 후에 아이를 갖고 싶었던 거지. 사실은 나도 아이 많이 기다리고 있었어. 그래서 지금 너무 기뻐.”

밝아지는 수정을 모습을 확인한 경환은 급히 이다나에게 전화를 걸어 산부인과를 예약했다. 자신의 계획과는 다르게 먼저 아이를 갖게 되었지만, 후회할 생각은 없었다. 경환은 탁자 위로 손을 뻗어 수정의 손을 지긋이 잡아 주었다.

“우리 예쁘게 잘 키워 보자. 나도 최선을 다 할게. 아이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 아니겠어? 하하하.”

수정은 그제야 안심이 되었는지 경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카페에서 들리는 조용한 음악에 빠져 들고 있었다.

대후건설 본사에서는 김준성 상무의 인상이 펴지질 않고 있었다. 이만수 부장이 김준성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 들었다.

“상무님, 아무래도 저희와 KBR의 이파전이 될 듯 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KBR이 우리의 입찰가를 따라 오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김준성은 입찰서류를 살펴보며 최종 입찰가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더 낮출 수는 없나? 아무래도 불안해서 말이야.”

“상무님, 이 입찰가로 낙찰을 받는다 해도 이익을 장담할 수 없는 금액입니다. KENTZ쪽에서도 이 입찰가로는 무리라고 판단을 하고 있는데, 더 이상 낮췄다가는 오히려 저희가 발목을 잡힐 수도 있습니다.”

이만수는 김준성의 지시에 난색을 표하고 있었다. 애당초 이익을 남기지 않는다는 전략으로 입찰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낮출 부분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이 싸움은 지면 안 되는 게임이야. 우리나 KBR이나 먼저 피하는 곳이 모든 걸 잃을 수밖에 없어. 우리가 노리는 건 나이지리아의 석유란 말이야. 회장님의 허락은 내가 받을 테니 최대한 입찰가를 낮추는 방법을 다시 찾아봐.”

대후건설은 이번 입찰을 통해 나이지리아의 원유를 수입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원유를 수입할 루트만 확보해 놓을 수 있다면 이번 플랜트입찰에서의 손해는 충분히 만회를 하고도 남는 장사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후건설의 발목을 잡는 건 KENTZ였다. 자신들의 마진까지 포기하며 낙찰을 받을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후에서는 KENTZ의 마진을 보전해준다는 각서를 써 준 후에야 입찰에 대한 전권을 받을 수 있었다.

“이 부장, SHJ에 대해서는 알아보고 있는 중인가?”

“네, 현재 KBR이 위치한 미국 휴스턴에 법인을 설립한 상태입니다. 홍콩과 북경에도 사업체를 가지고 있고, 현재 중국의 석탄을 우리와 제일그룹에 공급을 하고 있는 것까지 파악을 했습니다. 사장으로 있는 이경환에 대해서는 중국의 교통부와 경무부에 인맥을 가지고 있다는 거 외에는 특별한 내용을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군대를 입대하기 전의 행적은 지극히 평범한 인물이었습니다. 조사를 하면 할수록 이해 안 되는 부분이 너무 많았습니다.”

“흠~,”

김준성도 이만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컨설팅 업무는 풍부한 경험이 밑바탕으로 깔려 있어야 가능 한 업무였다. 더욱이 대형 플랜트 입찰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이 KBR의 컨설팅을 한다는 거 자체가 말이 되지 않았다.

“입찰이 끝난 후에 다시 조사를 하기로 하고 우선은 이번 입찰에 신경을 써 보자고. 이 부장은 출국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입찰가를 다시 조정해 봐. 우선은 지금 나온 입찰가로 가지고 가고 현지 분위기를 파악한 후에 조정을 해 보자고.”

김준성은 경환에게 받은 수모를 잊지 않고 있었다. 사돈의 팔촌까지라도 파헤쳐서 받은 수모를 갚을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그건 이번 입찰을 끝난 후에 천천히 진행해도 늦지 않았다.

‘이 놈, 입찰이 끝난 후에도 그 잘난 표정을 지을 수 있는지 지켜보마.’

“하하하, 사장님 축하드립니다. 이제야 아빠가 되시는 군요.”

보고를 위해 경환을 찾은 황태수는 수정의 임신소식을 어떻게 알았는지 경환에게 축하를 해 주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집안 어르신들이 안 계시다 보니 뭘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당분간 사모님께 부탁을 드릴 수밖에 없을 거 같습니다.”

“제 집사람도 자기 일처럼 기뻐하고 있습니다. 큰 걱정하지 마십시오.”

경험 많은 황태수의 부인이 옆에 있다는 사실에 경환은 감사를 하고 있었다. 다른 경험은 풍부하게 가지고 있다고 자부를 하고 있었던 경환도 수정의 임신에는 통 수를 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전생에서도 아내와 틀어진 상태에서의 임신이었고 회사업무에 매진을 하고 있었던 때라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던 부분이었다. 이런 사실로 인해 경환은 딸에게 항상 미안함을 가지고 살았었다. 더 이상 그런 삶을 살고 싶지 않았던 경환은 임신초기부터 최선을 다해 수정과 자신의 아이를 위해 헌신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KBR에서 입찰 예정가가 나왔나 보지요?”

“네, 그렇습니다.”

황태수는 경환 앞으로 봉투에 밀봉되어있는 서류를 꺼내 놓았다. 경환은 서류에 작성된 입찰가를 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제가 예상한 금액보다는 상당히 높게 나왔군요. 결론을 말씀 드리자면 이 가격으로는 대후를 이길 수 없다고 판단이 됩니다.”

경환은 이번 대후의 수주금액이 12억 5천만 불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자신이 대후와 접촉을 한 후부터 미묘하게 바뀌는 상황을 느낀 경환은 12억 5천만 불도 자신하고 있지 못하고 있었다. 대후에서는 이미 KBR과 SHJ의 견제를 느끼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KBR에서는 이 금액이 최선이라고 여기는 분위기입니다. 제가 보더라도 합리적인 금액이라고 판단이 됩니다. 이 이하로 입찰을 하게 된다면 마진은 고사하고 손해를 볼 가능성이 많습니다. 아직 나이지리아는 정부군과 반군의 내전이 끊이지 않는 나라이고 석유확학단지가 건설되는 지역도 반군이 장악하고 있는 지역과 그리 멀지가 않습니다. 잦은 반군의 습격이 발생하기라도 한다면 공사 지연에 따른 손해가 기하급수로 늘어날 수도 있습니다.

경험이 풍부한 황태수의 입에서도 KBR의 예정가가 합리적이란 소리가 나올 정도라면 윌리엄이나 잭을 설득해야 되는 경환으로서는 머리가 아플 수밖에 없었다. 경환은 노트를 숫자에 적어 황태수가 볼 수 있도록 펼쳐 들었다.

“제가 입수한 대후의 입찰 예정가입니다. 다른 정보로는 입찰 과정의 분위기를 통해 대후는 입찰가를 하향조정 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KBR과의 차이가 2천만 불입니다. 윌리엄을 설득하지 못한다면 이 게임은 이길 수 없습니다. 적어도 KBR이 12억 4천만 불까지 조정이 되어야만 대후와 싸움을 할 수 있을 겁니다. 어려우시겠지만 부사장님께서 최대한 설득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20억불이 넘는 FPSO가 3기가 있다는 사실을 부각시켜 보십시오.”

KBR이 제시한 12억 7천만 불도 KBR로서는 있을 수 없는 금액을 제시한 것이라는 걸 경환도 알고 있었다. 그 만큼 대후의 저가공세는 타 업체들이 따라 올 생각을 하지 못하게 만들 정도였다. 경환이 만약 처음부터 12억 4천만 불을 제시했다면 KBR은 진작에 포기하고 말았을 것이란 건 뻔 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예정가가 3천만 불 차이라면 KBR도 다시 심사숙고 할 정도의 금액차이는 될 수 있었다. 황태수는 어깨가 무거워지고 있다는 걸 느꼈다.

“KBR도 여러 가지 리스크를 생각해 봐야 되기 때문에 설득이 쉽지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

경환은 쉽게 확신을 못하고 있는 황태수를 보며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SHJ의 사업 확장과 이름을 각인시키기 위해선 이번 입찰을 반드시 성공을 해야만 하는 경환으로서는 어려운 결정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좋습니다. 현재 조정이 필요한 금액은 3천만 불입니다. SHJ의 컨설팅 비용이 2%, 2천4백8십만 불입니다. 여기서 천만 불을 SHJ가 부담해 줄 수 있다고 제안을 해 보십시오. 이 제안이라면 윌리엄도 다시 생각을 해 볼 수 있을 겁니다. 그 대신 플랜트 제작을 SHJ가 맡겠다는 옵션을 제시하시기 바랍니다.”

경환의 마지막 제안을 들은 황태수는 쉽게 인상을 풀 수 없었다. 그러나 KBR이 입찰을 포기라도 한다면 그나마 한 푼도 건질 수 없는 돈이란 걸 알고 있었다. 황태수는 경환의 마지막 제안에 반대를 할 수는 없었다.

“우선 최대한 설득을 해 가면서 사장님의 제안을 풀도록 하겠습니다. 처음부터 천만 불을 풀어 줄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황태수의 대답에 경환은 그제야 굳어있던 얼굴을 조금이나마 풀 수 있었다. 그러나 황태수가 KBR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경환은 알고 있었기에 황태수의 고민을 이해는 하지만 지금은 모른 척 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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