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다시 사는 인생 - 64
“사장님, 곽 팀장님. 오랜만에 뵙네요.”
“이…, 이 사장.”
예상하지 못했던 경환의 등장은 최승화를 당황시키기에 충분했다. 예전 같았으면 경환을 통해 윌리엄을 설득할 수도 있었겠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굳은 경환의 모습은 최승화를 긴장시키고 있었다.
“사장님께서 억지로 떠안기기는 했지만, 저도 화성산업의 주주입장에서 이 자리에 나온 것임을 이해 부탁드립니다.”
경환은 최승화를 안타깝게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여러 번의 기회를 스스로 포기한 화성산업을 경환도 더 이상은 어쩔 수 없었다.
“우리 KBR 또한 화성산업의 지분 23%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먼저 말씀 드립니다. 물론 경영에 참여를 할 수는 없지만, 근래 화성산업에서 시행되는 여러 가지 조치들을 우려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서 KBR은 SHJ와 뜻을 같이 하기로 했습니다.”
윌리엄은 경환의 제안을 받기 전부터 이미 화성산업을 포기했다. 저가부품으로 교체를 하고 기술이 오성으로 유출되기 시작한다는 보고가 들어온 후부터 기술이전을 급히 중단시키고 화성산업에서 발을 빼고 있었다. 화성산업의 지분 23%를 인수한 금액은 KBR에 있어서 큰 손해도 아니었고 이미 경환을 통해 그 이상의 이득은 취했기 때문에 아쉬울 것이 전혀 없었다.
“미스터 유트, 화성산업은 성실하게 KBR과의 협력에 임해 왔습니다. 저희가 진행하고 있는 경영혁신은 화성산업의 경영체질을 개선하는 일련의 조치들입니다. 오히려 제작원가를 낮춰 KBR의 이익에도 부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곽기철의 유창한 영어에도 윌리엄은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있었다. 경환은 핀트를 잘못 잡고 있는 곽기철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윌리엄이 할 말을 대신했다.
“곽 팀장님, 화성산업 내적으로 경영체질을 개선하는 것에 대해서 반대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가부품으로 교체를 하고 인건비를 절감하기 위해 기술력이 떨어지는 중국에서 제작을 한다는 것에 대해 우려를 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숙련된 기술자들이 외부로 빠져나가 기술이 유출되고 있는 현 상황이 도대체 곽 팀장님이 말하는 경영혁신인가요?”
경환의 날카로운 지적에 곽기철은 잠시 할 말을 잇지 못했다. 화성산업에 들어온 이후 회사에 짙게 드리워진 경환의 그림자를 제거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었다. 최승화를 소희와의 약혼으로 자신의 편으로 만들기까지 힘겹게 이 자리까지 왔는데, 지금 자신의 발목을 다시 잡아채고 있는 경환이 맘에 들지 않았다.
“일부 공장인원들의 이탈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기술이 유출되었다는 말에는 인정을 할 수 없습니다. KBR의 기술이전이 다시 재개가 된다면 보안에 더욱 신경을 쓸 생각입니다. 저가부품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안전검사를 모두 통과한 부품들입니다. KBR의 추가물량을 주신다면 이전보다 낮은 원가로 제작을 해 드릴 수 있습니다.”
경환은 기껏 원가를 낮춰 플랜트를 제작하겠다는 곽기철을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화성산업의 체질을 개선해서 고부가가치 플랜트를 제작하게 하려던 경환의 생각을 곽기철은 전혀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최승화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눈을 감아 버렸다. 그런 최승화를 경환은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봤다.
“SHJ는 KBR의 컨설팅업체로서 화성산업에 더 이상의 기술이전과 물량배정을 하지 말 것을 제안한 상태입니다. 그 이유는 곽 팀장님도 잘 아시리라 봅니다.”
최승화는 감았던 눈을 떠 경환을 바라보았지만, 경환의 표정은 전혀 변화가 없이 차분했다. 경환의 마음이 이미 화성산업에서 떠나 있음을 확인한 최승화는 허탈했다.
“이. 이 사장님. 우리 화성산업을 죽일 생각이십니까?”
곽기철은 차오르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친 후 경환을 향해 소리쳤지만, 곽기철의 철없는 행동을 받아 줄 경환이 아니었다. 화성산업은 KBR의 물량이 추가로 배정되지 않는다면 심각한 위기에 봉착할 수도 있었다. 오성엔지니어링을 포함한 국내기업의 물량을 제작하고는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 KBR이란 배경이 작용을 했기에 만들 수 있었던 물량이었다. KBR이 화성산업에서 손을 떼게 된다면 국내기업들 또한 화성산업에 더 이상 물량을 줄 이유가 없었다. 중국에 제 2공장을 건설하기 위해 은행의 여신을 일으킨 상태에서 화성산업은 자금압박을 이겨낼 힘이 없었다.
“화성산업을 죽이려는 것은 곽 팀장님의 계획의 일부였다고 생각을 하는데, 오히려 저에게 화를 내시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곽기철은 순간 얼어붙었다. 그런 곽기철의 모습에서 최승화는 이해 할 수 없다는 듯이 쳐다 볼 수밖에 없었다.
“지…, 지.금, 무슨 말을 하시는 겁니까?”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느낀 곽기철은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지만, 경환은 그런 곽기철을 용서해 줄 맘이 전혀 없었다.
“오성엔지니어링의 고승철 이사와는 어떤 관계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경환의 한마디에 곽기철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고승철과의 관계를 묻고 있는 경환에게 곽기철은 입을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곽 팀장, 이 사장의 말이 무슨 말인가? 자네가 고승철 이사와 무슨 관계인데 아무 말을 못하는 건가?”
최승화는 곽기철을 다그치고 있었지만, 곽기철은 이 자리를 모면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제가 말씀 드리죠. 고승철 이사가 곽 팀장의 이모부 입니다. 고 이사는 곽 팀장을 의도적으로 화성산업에 접근을 시켜 KBR의 특수플랜트 기술을 확보하고 화성산업을 합병내지는 해체시키려 했습니다. 곽 팀장님 제 말이 틀렸나요? 그런데 곽 팀장님, 너무 서두르셨습니다. KBR이 이렇게 빨리 기술이전을 중단할지는 모르셨겠죠. 천천히 2년 정도 기다렸으면 아마 원하는 걸 다 얻을 수 있었을 겁니다.”
경환의 말을 들은 최승화는 힘이 빠졌는지 상체가 무너지며 의자에 몸을 떨어뜨리어 버렸다. 경환과 최승호의 반대를 무릅쓰고 곽기철을 믿었던 자신의 생각을 후회해 봤지만 이미 차는 떠난 상태였다.
경환은 곽기철의 급격한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아 박화수를 통해 곽기철을 주시하도록 지시했었다. 박화수 또한 화성산업의 인력이 대거 오성엔지니어링으로 빠져 나가는 것을 의심하던 와중에 오성건설의 인맥들을 통해 오성엔지니어링이 KBR의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화성산업을 합병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우연치 않은 기회를 통해 알 수 있게 되었다. 이 사실을 보고 받은 경환은 치졸한 오성의 행동에 이를 갈았지만, 그 치졸한 행동을파악하지 못하고 넘어간 최승화도 결국은 오성과 다르지 않았다.
곽기철을 회의실에 남겨 놓은 채 경환과 윌리엄은 최승화와 함께 자리를 옮겼다. 더 이상 곽기철에 대한 배려는 해줄 수 없었다.
“사장님, 인간적으로는 사장님을 존경하고 좋아하지만, 사업은 사업입니다. 사장님께서는 지금 실패를 하셨고요. SHJ와 KBR의 제안을 수락하시던 수락하지 않으시던 화성산업의 침몰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말해 보게.”
최승화는 경환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반박하고 싶었지만, KBR의 지원이 끊기고 은행의 자금압박이 들어오게 된다면 견뎌내지 못한다는 건 최승화도 알고 있었다.
“마산공장부지와 사장님의 지분을 담보로 주거래은행의 여신을 받은 걸 알고 있습니다. KBR의 물량이 끊겼다는 것을 주거래은행이 알게 된다면 자금회수 압박을 가해 올 것입니다. 아마 이때 오성은 주거래은행과 협상을 하게 될 것입니다. 저희 SHJ가 화성산업을 인수하고 싶습니다. 오성이 손을 뻗기 전에요.”
최승화는 쉽게 결정을 할 수 없었다. 자신의 피땀으로 이룩한 화성산업을 한 순간의 실수로 인해 넘기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경환의 말이 사실이란 것을 알기에 최승화의 고민은 깊어만 갔다.
“자네가 인수를 한다면 우리 화성을 어떻게 할 계획인가?”
힘없이 말하는 최승화가 안타까웠지만 경영에 실패한 사업주를 끌어안고 갈 수는 없었다.
“마산공장은 최 전무님 체제로 운영을 하게 되겠지만, 사장님은 물러나셔야 될 겁니다. 은행의 여신을 SHJ가 끌어안게 되겠지만, 제가 가지고 있는 지분 10%에 대한 부분은 자산 가치를 확인한 다음 사장님께 현금으로 지불하도록 하겠습니다. 빠른 결정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귀국해서 생각을 해 보겠네. 자네에게 면목이 없구먼.”
예전의 당당하던 모습이 다 사라지고 어깨가 축 처져서 회의실을 빠져 나가는 최승화를 경환은 잡을 수가 없었다. 경환 또한 착잡한 기분을 떨어뜨릴 수가 없었지만, 여러 번의 기회를 놓친 건 화성산업이었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을 수밖에 없었다.
“제임스, 자네 의외로 독한 면이 있어. 그래서 하는 말인데, 자네가 화성을 인수하게 된다면 지분 23%를 양도 할 생각이 없네. 가만히 놔둬도 가치가 무지하게 뛸 거란 예감이 들거든. 그리고 핵심 플랜트에 대한 기술이전도 긍정적으로 검토를 하겠네. 하하하.”
윌리엄은 뭐가 좋은지 연신 웃음을 보이며 경환의 어깨를 두들겨 주고 있었다. 지난번 뱅상과의 자리에서 서로 이름을 부르기로 한 후부터 윌리엄은 더 친근하게 경환을 대하고 있었다.
경환은 박화수를 통해 이미 최승호와 교감을 나눈 상태였기 때문에 화성산업의 인수는 별 어려움이 없을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인수자금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이번 입찰을 성공해야만 했다. 혹시라도 실패를 한다면 홍콩의 자금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고 이것은 곧 SHJ의 자금압박으로 올 수밖에 없었기에 최대한 피해야만 했다.
최석현의 독촉에 김창동과 박화수는 급히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을 수밖에 없었다. 급히 도착한 미국본사는 자신들이 생각한 거 이상으로 잘 꾸며져 있었다. 경환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을 반갑게 맞아 주고 있었다.
“두 분 잘 오셨습니다. 본사에 오신 소감이 어떠십니까?”
“사장님, 감개무량입니다. 저희도 여기서 일하고 싶어집니다. 혼자 떨어져 있으니 영 외롭습니다.”
김창동만 해도 여러 직원과 함께 일하고 있었지만, 박화수는 혼자서 화성산업의 견제를 받느라 맘고생이 심했는지 경환을 보자마자 투정부터 부리고 있었다. 그런 박화수를 경환은 웃으며 반겨 주었다.
“오늘은 전 직원이 모인 만큼 앞으로 SHJ의 앞날에 대해 여러분들과 협의를 하고 싶었습니다.”
“하하하,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최 차장이 하도 쪼아대는 통에 아주 죽을 맛이었습니다.”
“부장님, 제가 언제 쪼았다고 그러세요?”
김창동의 농담에 최석현은 눈을 크게 뜨고 억울하다는 듯이 경환을 바라 봤지만, 경환은 그런 모습조차도 반갑게 느끼고 있었다.
“두 분께는 항상 감사드립니다. 아직은 SHJ가 취약한 부분이 많기 때문에 더 많은 지원은 해 드릴 수가 없어 안타깝습니다. 조금만 더 참아 주십시오.”
“아이고, 아닙니다. 사장님. 농담해본 건데 이러시면 저희가 더 미안해집니다.”
경환이 고개를 숙여 진심을 말하자 김창동과 박화수는 정색을 하며 손사래를 치고 있었다. 경환이 아니었으면 끈 떨어진 자신들을 받아 줄 곳은 아무도 없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본사는 현재 KBR과 나이지리아 입찰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시리라 봅니다. 입찰이 성공한 후에 사업 확장을 추진할 계획입니다. 우선 북경사무소는 현행대로 진행을 해 주십시오. 그리고 경무부에서 독촉중인 ONE-STOP SERVICE는 직원 교육이 끝났습니까?”
“네, 경무부의 협조를 받아 각 기관으로 파견을 보내 교육을 마친 상태입니다. 일부 기관들의 비협조가 있긴 하지만 경무부에서 최대한 이를 막아 주고 있습니다. 요새는 거의 매일 시행 일자를 확정하라고 독촉을 하고 있습니다.”
급히 말하는 김창동을 보며 경무부의 시달림에 지쳐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우선 저희 SHJ의 이익을 먼저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렇다고 중국투자를 원하는 한국기업에 손을 벌릴 생각도 없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투자를 유치하면 경무부로 떨어지는 장려금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김 부장님은 그 장려금을 SHJ와 나누는 방안을 경무부에 제시를 하십시오. 그게 협의가 되지 않는다면 ONE-STOP SERVICE는 무기한 연기하세요.”
해외 투자를 유치하면 그 투자금액의 일정부분이 경무부로 장려금이란 명목으로 떨어졌다. 경환은 왕샹첸에게 SHJ와 나누는 것을 제안했지만 아직까지 왕샹첸은 확답을 주지 않고 있었다.
“박 부장님은 화성산업을 인수하는 것에 대해 조심스럽게 물밑작업을 하십시오.”
“네? 화성을 인수하실 생각이십니까?”
박화수는 놀란 눈을 하고 경환에게 되물었다.
“사장님께서 이미 결정을 하신 사항이니 박 부장은 주거래은행과 최승호 전무를 최대한 설득해 보도록 해. 그리고 오성엔지니어링의 동태도 계속 확인을 하고.”
황태수가 경환을 대신해 박화수에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화성산업 인수를 황태수에 일임을 한 상태였다. 기업의 인수에 대해서는 경환도 황태수의 경험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화성산업의 인수가 끝나면 박 부장님을 전문경영인으로 임명할 생각입니다. 그러니 인수에 실수가 없도록 최선을 다해 주십시오.”
이미 박화수를 사장에 임명하기로 황태수와 얘기를 끝낸 상태였지만, 박화수는 처음 듣는 말이다 보니 입만 벌린 채 경환과 황태수를 번갈아 쳐다봤다.
“축하합니다. 나는 아직 사무소장인데 사장명함을 다시다니 부럽습니다.”
김창동의 시샘 섞긴 농담에도 박화수는 실감이 나지 않는 듯 두 손으로 자신의 볼을 어루만질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