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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인생-63화 (255/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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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인생 - 63

    서울역에 자리 잡고 있는 대후건설 본사에는 홍콩에서 날라 온 KENTZ의 아시아 담당사장인 피터 하링턴이 일행들과 급히 들어가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이번 나이지리아 입찰에 KBR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보고가 들려오고 있습니다. 저희는 이 문제를 심각하게 지켜보고 있는 중입니다. 대후는 대응책을 가지고 있습니까?”

    피터는 자신의 급한 성격을 대변하듯 자리에 앉자마자 이번 한국방문의 이유를 꺼내고 있었다. 김준성 상무는 이런 피터가 맘에 들지 않았지만, 나이지리아 정부를 움직여 KBR의 PQ통과를 저지하려던 계획은 이미 물 건너 간 상태였기에 피터의 질문에 마땅한 답변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미스터 하링턴의 걱정은 이해합니다만, TOTAL에서 나이지리아 정부를 움직일 줄은 저희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KBR이 TOTAL을 움직인다 해도 입찰에 성공할 수는 없을 겁니다. 저희도 다각적으로 대응책을 찾고 있으니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김준성의 확신에 찬 답변에도 피터의 불안감을 해소시켜 주지는 못하고 있었다. 나이지리아 진출을 위해 관심도 없었던 대후건설에 기술이전까지 해 주며 맺은 계약이었다. 이번 입찰에 성공하지 못한다면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질 수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혹시 SHJ라는 컨설팅업체를 아십니까? 오너가 한국인이라고 하던데, KBR에 입찰 컨설팅을 해주는 업체라고 합니다.”

    피터의 입에서 SHJ란 말이 튀어나오자 김준성은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북경에서 경환과 만남을 가진 것은 오성건설의 황태수와 박화수를 스카우트한 SHJ에 흥미를 가진 것뿐이었다.

    “한번 만난 적이 있습니다. 신생기업이기 때문에 컨설팅을 하기에는 무리라고 생각이 드는데, KENTZ에서 관심을 보이고 있을 줄을 몰랐습니다.”

    “저희는 그 동안 KBR에 계속 뒤통수를 맞아 왔습니다. 원인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SHJ의 컨설팅이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번 나이지리아 입찰도 SHJ에서 KBR을 움직이고 있다는 정황을 포착할 수 있었습니다.”

    작년에 실패한 사우디 입찰이 있은 후 KENTZ에서는 대대적으로 원인분석을 진행해 왔었다. 거의 완벽하게 짜 놓았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이유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SHJ라는 컨설팅업체가 KENTZ 분석 팀에 그 실체를 드러내게 되었다. 다방면으로 대응책을 구상하고는 있었지만 아직은 KBR의 벽에 가로막혀 SHJ와의 직접적인 만남을 이뤄지지 못하고 있었다.

    “미스터 김도 아시겠지만 이번 나이지리아 입찰은 반드시 성공을 해야 됩니다. 나나 미스터 김을 위해서라도.”

    피터의 말에 김준성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 동안 대후는 토목건설로 나이지리아 정부와 밀착된 관계를 쌓고 있었다. 일부 고위층의 비자금까지 처리를 해 주고 있었기에 KBR의 PQ 저지는 어렵지 않다고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대후나 KENTZ가 예상하지 못했던 TOTAL의 개입에 SHJ가 관여하고 있다면 문제가 복잡해질 수도 있었다. 경환과의 만남에서 이번 성공을 자신하는 경환의 모습을 떠올리던 김준성은 갑자기 고개를 심하게 흔들었다.

    “미스터 하링턴, 이번 입찰은 반드시 우리가 성공을 할 겁니다. 최악의 경우 우리의 마진을 포기를 한다 해도 이 입찰은 놓치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PQ를 통과 했다 해서 입찰에 성공한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지금은 피터를 안심시켜 줄 수밖에 없었다. 자칫 KENTZ와의 공동수주 전략에 차질이 발생한다면 그 동안의 노력이 물거품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준성은 자신의 발목을 잡아가는 경환의 모습을 떠올리며 미간을 찡그렸다.

    뱅상의 지원에 힘을 입은 KBR은 어렵지 않게 PQ를 통과하고 입찰준비에 만전을 기하고 있었다. 경환은 황태수를 주축으로 KBR을 측면에서 보조를 하고 있었다. KBR의 예정가가 나오려면 아직 시작이 필요했기에 경환은 아직 정확한 낙찰금액을 윌리엄에게 제공을 하지 않고 있었다. 윌리엄의 독촉에도 경환은 꿈적하지 않고 기다리라는 말로 윌리엄을 압박을 비껴갔다.

    수정은 어학원 과정을 마치고 휴스턴대학에 입학해 졸업 후 손을 놓았던 미술을 다시 공부를 하고 있었지만, 아직은 서툰 영어로 인해 쉽게 적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수정은 학교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온전히 경환에게 풀 수밖에 없었고, 경환은 싫다는 수정을 억지로 대학에 보낸 미안함에 수정의 잔소리를 대꾸 한번 못하고 받아들이고 있었다.

    “자기야, 저녁 먹어야지. 저녁부터 먼저 해.”

    저녁을 차리고 기다리고 있었지만, 수정은 아무런 대답도 없이 학교에서 내준 리포트를 정리하느라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런 수정이 걱정된 경환은 수정의 어깨를 가볍게 마사지해 주고 있었다.

    “입맛이 없어요. 자기 먼저 먹어요. 남편 복이 많아서 이 나이에 영어로 리포트나 쓰고 있어야 되거든요! 커피나 한잔 가져다주세요.”

    경환을 째려보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수정이를 경환은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신의 한 짓이 미안했던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경환은 커피를 급히 한잔 가져다 줄 수밖에 없었다. 요새는 피곤하다는 말로 부부관계도 거절하고 있는 수정이를 보며 괜한 짓을 한 건 아닌지 후회가 몰려오고 있었다.

    “나도 차한대 사 줘요. 자기도 차 필요하잖아요.”

    수정의 등하교를 위해 경환은 자신의 차를 수정에게 주고 황태수와 같이 출퇴근을 하고 있었다. 돈이라면 끔찍이 아끼는 수정의 입에서 차를 사달라는 말이 나올 줄은 몰랐던지 경환은 놀란 눈으로 수정을 바라 봤다.

    “어…, 어, 그래 알았어. 주말에 같이 나가서 차를 골라보자. 내가 약속할 테니 오늘은 같이 저녁도 먹고 또. 음…, 우리 그 동안 너무 오래되었잖아.”

    수정은 고개를 들어 눈을 한번 흘기고는 못 이기는 척 경환의 손에 이끌려 식탁으로 향했다.

    코앞으로 닥친 입찰을 준비하기 위해 SHJ의 사무실은 어느 때보다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경환의 사무실엔 황태수와 최석현이 모여 있었다.

    “부사장님, KBR의 입찰 예정가는 언제쯤 가능하다고 하나요?”

    “잭의 말로는 늦어도 다음 주엔 결정을 하겠다고 합니다. 제가 보기엔 사장님께서 원하시는 수준의 금액은 아니지 않나 봅니다. 그 부분은 제가 따로 잭과 협의를 해 본 후에 따로 사장님께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윌리엄의 급한 성격과는 달리 잭은 황태수와 함께 차분하게 입찰을 준비하고 있었다. KENTZ와 대후건설이 나이지리아 정부와 더욱 밀착해 간다는 정보를 KBR에 의해 확인한 이상 경환도 안전장치를 마련해 놓을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해 주세요. 최종 금액은 그 후에 제가 따로 지시를 드리겠습니다. 이번 입찰은 마진을 남기면 안 됩니다. 이 점을 부사장님이 잭을 설득해야 됩니다. 최종 입찰금액은 나중에 제가 따로 알려드리겠습니다. 저희는 한번만 실패하게 되면 무너질 수밖에 없을 정도로 아직은 취약합니다. 다음기회가 있다는 생각을 하지 마시고 당분간 긴장을 해야 된다고 봅니다.”

    황태수는 경환을 말을 이해하고 있었다. SHJ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서는 당분간 단 한 번의 실패도 용납해선 안 된다는 것을 황태수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이 넘볼 수 없는 정보력을 가지고 있는 경환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최 차장님, 북경과 서울은 어떻습니까?”

    미국에 진출한 이후 북경과 서울에 대해 많은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다행히 김창동과 박화수는 자신들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고 있었기 때문에 경환의 특별한 지시가 없더라도 무리 없이 이끌어 가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보고 드리려고 했습니다. 중국 경무부에서 ONE-STOP SERVICE 실행과 관련해서 북경사무소에 독촉이 심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화동에서 유연탄 물량을 획기적으로 늘리자는 제안을 했다고 합니다. 박 부장님의 보고로는 화성산업이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상황이라고 하는데 추가 지시를 해 달라고 합니다.”

    경환은 최석현의 보고를 듣고 묵묵히 생각에 잠겼다. 북경사무소는 한국의 대중투자를 담당할 인원을 선발해 교육을 마무리한 상태였지만 경환의 지시가 떨어지지 않아 경무부의 독촉에도 불구하고 관망을 하고 있었다. 장성궈의 비자금은 순차적으로 원하는 국가의 비밀계좌로 송금을 마무리 한 후부터 화동은 유연탄의 양을 늘려가고 있었다. 중국은 안정적으로 사업을 진행하고 있었지만, 중국의 정치는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불안감이 내제되어 있기 때문에 항상 조심을 해야만 했다. 그래서 경환은 김창동의 요청에도 북경사무소를 법인화 하는 것에 대해 반대를 하고 있었다.

    “조만간 SHJ에도 변화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 시점이 이번 나이지리아 입찰이 될 것이고요. 준비를 해야 되겠습니다. 최 차장님은 김창동 부장과 박화수 부장을 빠른 시간 내 미국으로 오라고 하십시오. 한번은 정리를 하고 넘어가야 될 시기가 된 거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내일이라도 당장 비행기를 타라고 하겠습니다.”

    한국이 늦은 저녁시간임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최석현은 경환의 지시를 전달하기 위해 급히 사무실 밖으로 빠져 나갔다.

    “사업을 본격적으로 확장을 하시려고 하십니까?”

    자리에 남아 있던 황태수가 경환의 굳은 얼굴을 보며 입을 열었다.

    “네, 그렇습니다. 언제까지 KBR의 컨설팅에만 머물러 있을 수는 없을 거 같습니다. 지난번에도 말씀 드렸듯이 컨설팅과는 별개로 투자부분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이참에 화성산업도 정리를 할 생각입니다.”

    황태수는 SHJ를 설립하면서 투자도 경환이 염두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화성산업을 정리하겠다는 경환의 말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사장님, 화성산업을 아끼시는 것은 알고 있지만, 저희하고는 상관이 없는 업체라고 보는데 개입을 하실 생각이십니까?”

    황태수도 화성산업의 현 상황은 박화수로부터 들어 알고는 있었다. 화성산업은 최승호의 반대에도 경영혁신이라는 논리를 앞세운 곽기철의 전횡에 서서히 침몰하고 있었다. 가장 심각한 것이 숙달된 기술자의 이탈을 막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KBR은 이런 문제로 인해 곽기철의 요청에도 기술이전을 미루어 가며 경환과 보조를 맞추어 가고 있었다.

    “화성산업과의 인연은 곽 팀장을 만난 후 진작에 끊었습니다. 이제는 비즈니스 차원에서 화성산업을 바라보고 있는 중입니다. 이미 윌리엄의 양해는 얻어 놓은 상태입니다. 오늘 최승화 사장과 곽기철 팀장이 KBR을 방문 하긴 했지만 쉽게 원하는 답을 얻지는 못할 것입니다. 저희는 그때부터 작업을 할 생각입니다.”

    아직까지도 정확한 경환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황태수는 괜한 진흙탕에 발을 들여 놓는 것이 아닌지 우려 섞인 눈으로 경환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곽기철에게 넘어가 있는 화성산업에 SHJ가 개입하는 것은 황태수는 반대를 하고 싶었다.

    “사장님, 침몰하는 배를 구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잘못하다간 SHJ의 명성에 누가 될 수도 있습니다.”

    황태수의 말도 일리가 있다는 것을 경환은 모르지 않았지만, 경환은 결심을 굳힌 듯이 황태수를 향해 자신의 생각을 말해줄 필요를 느꼈다.

    “부사장님의 걱정은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저는 화성산업을 단지 컨설팅해주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SHJ의 사업 확장과 이익구조의 다변화를 위해서는 화성산업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저는 화성산업을 SHJ가 인수해 플랜트 제조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 생각입니다. SHJ의 컨설팅과 맞물려 기술력을 확보시켜 준다면 큰 시너지효과를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선 화성산업이 더 망가지게 놔둘 생각입니다.”

    경환의 뜻을 이해한 황태수는 경환을 따라 미소를 지어 보였다. 화성산업의 끈질긴 요청에도 불구하고 KBR에서는 더 이상 수출물량을 주지 않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경환과 윌리엄의 작품임을 알게 된 황태수는 최승화가 불쌍해지기 시작했다.

    최승화는 KBR의 추가 물량을 확보하기 위해 곽기철을 앞세워 미국을 방문했다. 예전과는 다른 KBR의 태도에 자못 놀라고 있었지만, 지금 아쉬운 사람은 자신이었다. 30분 이상을 접견실에서 기다린 후에야 윌리엄도 아닌 잭을 만날 수 있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했습니다. 윌리엄은 다른 스케줄이 있는 관계로 오늘 회의는 저와 하시게 될 겁니다.”

    잭의 예전과 달리 사무적으로 자신을 대하고 있는 모습에 최승화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최승화의 눈치를 살핀 곽기철은 자신이 나서 입을 열었다.

    “KBR의 기술이전이 계획대로 진행이 되지 않고 있어 저희 화성산업의 손해가 가중되고 있습니다. 시정을 부탁합니다. 아울러 사우디의 추가 물량이 약속과 다르게 저희 화성산업이 배제되어 있다 보니, 경영상 심각한 문제가 발생되고 있습니다. 미스터 무어가 저희에게 사우디 물량이 배정될 수 있도록 힘을 써 주십시오.”

    곽기철은 잭에게 사정을 하고 있었지만 잭의 표정은 전혀 바뀌지 않고 있었다.

    “기술이전을 해 드려도 지금처럼 기술자들을 타 업체로 뺏긴다면 기술이전을 해 드린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우리의 기술이 오성으로 무상으로 들어가고 있는데 무턱대고 화성산업에 기술이전을 해 드릴 수는 없습니다. 또한 사우디 물량이 배정되지 않은 이유는, 저가 부품으로 교체를 한 이유와 맞물려 있습니다. 우리 KBR이 싸구려 부품으로 제작을 하는 업체에게 물량을 배정해 주겠다고 한 적은 없습니다.”

    잭의 말에 최승화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동생과 경환의 우려에도 자신의 사위가 될 곽기철의 손을 들어 주었었다. 후회를 해 봤자 지금 이 상황을 헤쳐 나갈 길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때 회의실로 윌리엄과 경환이 들어오는 모습이 최승화의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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