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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인생-62화 (254/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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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인생 - 62

    6월로 접어들고 있었지만, 한국의 초여름 날씨와는 다르게 이글거리는 태양으로 인해 뜨거워진 공기는 경환을 지치게 만들기 충분했다. 현지 채용을 마무리한 SHJ는 아직 충족할 만한 인원은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회사의 구색은 갖출 수 있게 되었다. 나이지리아 입찰이 성공하기 전에는 홍콩에서 들어온 자본금으로 최대한 버틸 수밖에 없었지만, 경환은 초조해하지 않았다. 나이지리아 입찰을 성공으로 이끌게 된다면 투자부분에 본격적으로 나설 계획을 가지고 있었고 컨설팅의 업무범위 또한 KBR을 넘어 다국적으로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중이었다. 신생기업인 SHJ는 날개를 펴기 위해 큰 기지개를 하고 있었다.

    “사장님, 윌리엄이 도착할 시간입니다.”

    “알았어요.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군요. 고마워요 이다나.”

    경환과 황태수의 비서업무를 위해 새롭게 채용된 이다나 벤슨이 환한 미소를 보이며 회의시간을 알려주었다. 사장실 밖에는 황태수가 경환을 기다리고 있었다.

    “TOTAL과의 전체미팅을 앞두고 윌리엄이 따로 시간을 갖자는 이유가 KBR의 기득권을 확보하려는 의미인 거 같습니다.”

    윌리엄은 경환의 제안을 받아들여 프랑스의 TOTAL과의 업무 협력관계를 성공리에 이끌어 낼 수 있었다. 그러나 TOTAL에서는 KBR의 컨설팅을 수행하고 있는 SHJ와의 전체회의를 요구했고 경환은 이를 받아들였다.

    “이번 나이지리아 입찰은 KBR이나 우리 SHJ에게도 중요한 프로젝트입니다. 윌리엄은 단지 우리를 발판으로 삼아 개인의 야망을 쌓고 있지만,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KBR의 후광을 최대한 이용해 SHJ의 가치를 올려야 됩니다.”

    경환과 황태수가 둘만의 대화를 나누는 사이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윌리엄이 양손을 벌려 경환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과한 윌리엄의 제스처를 부담 없이 받아들이고는 윌리엄을 이끌고 회의실로 들어갔다.

    “미스터 유트가 아니었다면 이번 TOTAL의 업무협조를 이끌어 낼 수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미스터 유트의 협상력은 저도 배우고 싶을 정도입니다.”

    “하하하, 미스터 리의 칭찬을 받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내가 할 일은 다 했으니 오늘 이후로는 SHJ의 능력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윌리엄은 경환을 향해 뼈있는 말을 할 정도로 이번 나이지리아 입찰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있었다. 그룹 회장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회장의 반대를 자신의 사장직을 걸고 관철을 했을 정도로 나이지리아 입찰과 FPSO 수주는 윌리엄 일생일대의 도박이었다.

    “TOTAL에서도 PQ통과는 최대한 협조를 하겠다는 입장이지만, 낙찰까지는 무리라고 보고 있는 거 같습니다. 그래서 SHJ를 포함한 전체회의를 요청을 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윌리엄은 근심어린 표정으로 경환의 답변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해는 합니다만, TOTAL이 걱정하는 것은 이번 입찰이 아니라 FPSO 프로젝트라고 생각합니다. KBR이 FPSO를 거론했을 때부터 관심을 보였겠지만 FPSO에 경험이 전무한 KBR을 믿기에는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겠지요.”

    “흠.”

    경환의 말에 윌리엄은 깊은 신음을 흘렸다. 선박에 대한 설계기술을 보유하고 있지 못한 KBR로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서는 TOTAL에 신뢰를 줄 수 없었다. 윌리엄이 전체회의를 앞두고 경환을 먼저 찾은 이유도 이 문제에 대한 확신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경환은 이 문제해결에 대해 사전에 윌리엄에게 정보를 줄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미스터 유트, TOTAL과의 전체회의 때 SHJ의 컨설팅 방향에 대해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단지 먼저 말씀 드릴 수 있는 것은 TOTAL의 입장에서도 FPSO 프로젝트에 KBR이 참여하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입니다. 서로의 이해타산이 맞아 떨어진다는 것이지요.”

    윌리엄은 경환의 말에도 궁금증을 해결 할 수 없었지만 경환은 더 이상 이 문제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다. 경환은 TOTAL을 SHJ의 디딤돌로 삼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미스터 유트, PQ심사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TOTAL의 입김이 작용한다고 하더라도 철저히 준비를 해 주십시오.”

    “그 문제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SHJ의 미스터 황과 잭이 준비에 만전을 하고 있다고 보고를 받았습니다. 미스터 리는 PQ 통과 후의 일을 준비를 해 주세요.”

    경환은 윌리엄과의 사전 미팅을 마치고 TOTAL사의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프랑스의 전문 석유업체인 TOTAL은 나이지리아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세계 8위의 세계생산량을 자랑하는 나이지리아는 석유를 차지하려는 정부군과 반군과의 끊임없는 내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TOTAL은 정부군과 밀착되어 원유생산과 수출에 대한 거래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던 경환은 윌리엄을 이용해 나이지리아 프로젝트에 TOTAL을 이용하려 한 것이었다.

    “그리고 골치 아픈 소식이 한국에서 들려오고 있는데 미스터 리는 이에 대한 복안을 가지고 있나요?”

    윌리엄이 경환의 아픈 곳을 찌르고 들어왔다. 이때 화성산업은 오성엔지니어링의 무자비한 스카우트로 숙달된 기술자들이 빠져 나가고, 부품 납품업체의 변경과 공장의 중국이전 등이 맞물려 상황이 악화되고 있었다는 것을 박화수의 보고로 알고 있었다. 그나마 KBR의 특수플랜트에 대한 기술이전은 제 3국에서의 생산을 불허한다는 계약조건으로 인해 중국으로 빠져나가는 것은 방지를 할 수 있었지만 기술자들을 스카우트하고 있는 오성엔지니어링에 기술이 넘어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보고를 들어 알고 있습니다. 우선은 기술이전 속도를 조절할 필요가 있을 거 같습니다. 문제는 오성으로 빠져 나가고 있는 기술 인력인데, 이 문제에 대해서는 따로 계획을 가지고 있으니 나중에 다시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윌리엄은 별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화성산업의 지분인수는 경환과의 끈을 연결시키기 위한 방편이었고 화성산업에 넘겨주는 기술은 핵심기술이 아니었기에 화성산업이 망한다 하더라고 KBR로서는 크게 손해 보는 일은 아니었다.

    “사장님, TOTAL사의 일행이 도착을 했습니다.”

    이디나의 보고에 경환과 윌리엄은 그들을 맞이하게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윌리엄은 안면이 있어서인지 경환보다 앞서 일행들과 악수를 나누고 있었다.

    “미스터 지라드 SHJ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오늘 회의가 세 회사에 좋은 결과가 있기를 희망합니다.”

    경환은 TOTAL의 담당사장인 뱅상 지라드와 악수를 나누며 그의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170정도밖에 되지 않는 작은 키에 부담스러울 정도로 튀어나온 거대한 배를 내밀며 뱅상 지라드는 경환의 인도에 따라 회의실로 들어섰다.

    “SHJ는 미스터 유트를 통해 들어 알고 있습니다. 사우디에서 있었던 두건의 입찰을 KBR에 성공적으로 컨설팅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저도 오늘 SHJ에 기대를 많이 해 볼까 합니다.”

    경환은 뱅상의 말에 가볍게 미소로 응대하고 이번 나이지리아 입찰에 대해 윌리엄과 더불어 회의를 진행해 가고 있었다. 뱅상은 PQ를 통과한 이후에 낙찰 가능성에 대해 집중적으로 질문을 쏟아 내고 있었다. KBR이 PQ 통과 이후에도 낙찰을 받지 못한다면 TOTAL의 입장도 난처해진다며 뱅상은 자신에게 확신을 달라며 경환과 윌리엄을 압박하고 있었다.

    “미스터 지라드, 확신은 이미 가지고 있으시라 봅니다. 확신이 없었다면 미국까지는 오시지 않으셨겠죠. PQ이후의 문제는 미스터 유트가 이미 설명을 드린 걸로 알고 있습니다. KBR에서는 대후건설의 저가입찰에 맞설 수 있는 정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밝힐 수 없다는 것을 미리 말씀 드립니다. 좀 더 솔직하게 이 회의를 진행하고 싶습니다.”

    지루한 질문에 지친 경환은 뱅상을 향해 다른 제안을 했고 뱅상의 경환의 말을 이해 한 듯 입 꼬리를 살짝 말아 올렸다.

    “솔직한 대화를 나누자는 의미에 대해 설명을 해 주겠습니까?”

    경환은 빈정거리는 뱅상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윌리엄만 중간에서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미스터 지라드가 궁금하신 것은, KBR이 FPSO 입찰에 참여를 할 수 있는지 여부가 아니겠습니까? KBR이 가능하다면, TOTAL 입장에서도 대형 조선업체에 끌려 다니지 않아도 되고 말입니다. 서로 윈-윈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뱅상은 경환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봤다. 처음 들어본 SHJ란 회사가 KBR의 컨설팅을 담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여러 방면으로 SHJ에 대해 조사를 했지만, 실체에 대해서 제대로 파악을 할 수 없는 신생기업이란 사실을 알고 큰 기대는 하지 않고 있었다. 자신의 미국 방문이 나이지리아 입찰에 국한 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경환의 입을 통해 나올 줄은 뱅상으로도 예상을 하지 못했다.

    “하하하, 미스터 유트가 SHJ에 대해서 확신을 하는 모습을 오늘 미스터 리를 만나보니 이해할 수 있네요. 좋습니다. 뭐 다 아신다니 묻겠습니다. FPSO사업과 관련해서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까?”

    경환은 뱅상이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사실에 안도를 하긴 했지만 아직 설득을 한 상태는 아니었기에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으시니 저도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TOTAL은 FPSO 3기를 순차적으로 발주를 할 계획입니다. 선박의 사이즈가 틀리기는 하지만 1기의 경우 대략 20억불 선에서 발주를 계획하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FPSO를 제작할 수 있는 대형조선사는 한정이 되어있다 보니 예상 입찰가는 23억불에서 25억불로 형성이 되어 있습니다. KBR이 참여를 하게 된다면 최대한 입찰 예정가에 맞추는 전략으로 컨설팅 작업을 할 생각입니다.”

    아직 FPSO가 3기 제작된다는 것은 TOTAL 내부에서도 극히 소수만이 알고 있는 계획이었다. 뱅상은 좀 전의 빈정거리던 모습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그…, 그게, 미스터 리는 이런 정보를 도대체 어디에서 입수를 했습니까?”

    혹시라도 TOTAL 내부에서 정보가 새나갔다면 큰일이었기 때문에 뱅상은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미스터 지라드, 제가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까? SHJ의 정보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TOTAL 내부에서 빠진 정보가 아니란 것은 KBR이 보증을 하겠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하하하.”

    그 동안 뱅상의 빈정거림에 맘이 언짢았던 윌리엄은 복수라도 한 듯 식은땀을 흘리는 뱅상의 면전에 대고 큰 소리로 웃어 보였다.

    “미스터 지라드, SHJ의 정보력은 믿으셔도 좋습니다. 아울러 TOTAL이 염려하는 부분은 KBR과 한국의 조선업체를 컨소시엄으로 해서 준비를 할 생각입니다. 설계와 석유플랜트 제작은 KBR이 맡고 선박건조를 조선업체가 맡는 다면 충분히 FPSO건조에 문제가 없을 것으로 봅니다. 이 부분은 컨소시엄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TOTAL에 입증을 시켜 드리면 된다고 봅니다.”

    뱅상은 경환의 말이 끝났지만 눈을 감고 있었다. 경환의 말대로만 된다면 TOTAL 입장에서 가장 바라는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 제안이었지만, 한국의 조선업체가 아직 FPSO를 건조할 만한 능력이 있느냐에 대한 의문은 남아 있는 상태였기에 쉽게 답을 내릴 수는 없었다. 윌리엄 또한 오늘 처음 경환의 제안을 들어서인지 제대로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경환은 마지막 말로 두 사람의 의문점을 해소 시키려 했다. 뱅상을 설득시키지 못한다면 FPSO사업은 접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경환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한국 조선업계는 이미 LNG선을 진수할 정도의 기술력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또한 포항제철에서는 특수합금강판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KBR의 플랜트 설계가 합쳐진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는 게임입니다. 물론 처음 도전한다는 리스크는 있다고 하지만 TOTAL 입장에서는 부수적으로 따르는 더 큰 이익을 놓치시겠습니까?”

    경환의 마지막 말에 뱅상은 감았던 눈을 뜨고 경환을 바라보았다. 경환의 말대로 리스크가 클수록 이익은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컨소시엄이 형성되는 과정에 TOTAL이 리스크를 제어할 수만 있다면 충분히 검토를 할 수 있는 제안이라고 생각을 굳혔다.

    “좋습니다. SHJ의 제안을 긍정적으로 연구를 해 보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번 석유화학단지를 꼭 성공하시기 바랍니다. 저희 TOTAL에서도 후방에서 KBR을 최대한 지원을 해 드리겠습니다. 오늘 만남은 세 회사에 좋은 기회를 주었다는 점에 만족을 합니다. 하하하.”

    뱅상의 말을 들은 후에야 경환은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윌리엄 또한 들뜬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과장된 행동을 해 가며 기쁨을 표시했다.

    “하하하, 미스터 지라드, 미스터 리. KBR에서 조촐한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장소를 옮겨서 편한 분위기에서 식사라도 합시다.”

    회의에 참여했던 세 회사의 직원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서로 악수를 하며 길었던 회의를 마무리 하고 있었고, 윌리엄은 경환과 뱅상을 이끌고 자신이 따로 준비한 곳으로 자리를 옮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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