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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인생-61화 (253/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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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인생 - 61

    서둘러 집으로 돌아온 경환은 수정을 도와 짐 정리를 시작했지만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될지 몰라 헤매고 있는 중이었다. 다행히 황태수 아내가 저녁 초대를 하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굶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집 안은 난장판이었다.

    “하하, 사모님 염치불구하고 저희 두 사람 숟가락 좀 올리겠습니다.”

    “사장님 무슨 말씀이세요. 어서 들어오세요. 사모님도 들어오시고요.”

    수정은 황태수 아내의 만류에도 굴하지 않고 손을 거들기 위해 주방으로 향했다. 황태수의 집은 이미 깔끔하게 정리를 마친 상태여서 그런지 훈훈한 느낌이 들기에 충분했다. 황태수가 가지고 온 맥주를 받아 든 경환은 힘들게 여기까지 온 과정이 주마등처럼 자신의 눈앞으로 스쳐 지나가는 것을 느끼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사장님, 무슨 생각을 그리 심각하게 하십니까?”

    황태수의 질문에 경환은 감았던 눈을 뜨며 겸연쩍이 웃어 보였다.

    “아닙니다. 여기까지 온 과정을 한번 생각해 보고 있었습니다. 힘들었지만 보람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제 주위에도 사람이 모여 있다는 게 신기하네요.”

    “사장님이나 저희 직원들이나 뒤를 돌아볼 때는 아직 아닙니다. 저희들을 잘 이끌어 주십시오. 그러나 아직도 이해가 되질 않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저희 직원들은 다들 한 번씩 좌절을 맛 본 사람들인데, 그런 저희들을 포기하지 않으시니…,”

    목이 먹먹해지는 것을 느낀 황태수는 말을 잇지 못하고 급히 맥주병을 들어 맥주를 마셨다. 경환도 황태수를 따라 맥주를 시원하게 들이켰다.

    “전쟁이 나면 장교나 사병보다는 하사관이 필요한 법입니다. 경험 많은 하사관을 내치고서 전쟁에 승리를 하겠다는 발상이 저는 오히려 이해가 안 되네요. 부사장님 같은 야전사령관이 계시고 경험 많은 하사관이 수두룩한데 뭐가 무섭겠습니까? 저를 많이 도와 주셔야 됩니다. 아직 갈 길이 험하고 멀다고 봅니다.”

    경환의 진심에 황태수는 나이 어린 경환에게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또한 자신에게 온 마지막 기회를 절대 포기하거나 놓치고 싶지 않았다.

    “사장님께서 오셨으니 현지인 채용을 서두를 필요가 있겠습니다. 필요한 인원에 대한 이력서는 받아 놓았습니다.”

    현지인 채용과 관련해서는 이미 황태수에 일임을 해 두었지만 황태수는 경환이 도착한 후로 미뤄 놓고 있었다. 경환은 아직도 황태수가 자신을 어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쓴 웃음을 지어 보였다.

    “부사장님, 현지인 채용은 부사장님이 최 차장과 같이 전적으로 선발을 하십시오. 나이지리아 입찰 전까지는 최소화 해 주시고 입찰을 성공한 후에 사업 확장을 할 생각이니 그때 다시 인원을 채용하는 거로 준비를 해 주십시오. 부사장님과 일을 해야 될 스태프이니 저는 부사장님의 보고만 받겠습니다. 사소한 근로계약이라도 변호사 입회하에 진행을 해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경환은 아직까지는 구체적인 사업 확장에 대해 말을 아끼는 중이었다. 나이지리아 입찰은 원래 대후건설에 낙찰 되는 것이었기에 아직은 경환도 백프로 확신을 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침 식사가 준비 된 것을 확인한 두 사람은 자리를 식탁으로 옮겨갔다.

    식사를 마치고 돌아온 후에도 경환은 수정을 도와 집안을 정리하느라 싸늘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아무리 정리를 해도 짐 정리는 끝이 보이질 않고 있어 경환은 슬슬 지쳐가고 있었다.

    “자기야. 우리 오늘 도착했는데 첫날부터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이쯤하고 나머지는 사람을 사던지 하자.”

    경환의 하소연에도 수정은 꿈쩍도 하지 않고 짐 정리에 정신을 쏟고 있었다.

    “집안이 이런 꼴이면 아무것도 못해서 그래요. 피곤하면 자기는 쉬던지 해요.”

    경환은 수정의 말을 듣고 쉬기라도 한다면, 앞으로 두고두고 잔소리를 듣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한숨을 내 쉬고는 수정의 지시에 따라 다시 짐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저녁 12시가 넘어서야 얼추 정리를 마친 경환은 급히 욕조에 더운 물을 받기 시작했다.

    “자기야. 욕조에 몸 좀 담그자. 시차적응도 필요하고 자기 그러다 쓰러진다.”

    말할 힘도 없다는 듯이 고개를 소파에 떨어뜨리고 있는 수정을 경환은 가볍게 안고 욕실로 들어갔다. 두 사람이 충분히 들어가고도 남을 정도로 큰 욕조로 들어간 경환은 수정을 가볍게 안아 주었다.

    “여기까지 올 수 있게 내 옆에 있어줘서 고마워. 자기가 없었다면 절대 올 수 없었을 거야.”

    “피, 자긴 말은 참 잘하는 거 같아요. 그래도 자기라서 나도 행복해요.”

    몸이 나른해 지는지 수정은 자신의 등을 경환의 가슴에 깊게 기대고는 눈을 서서히 감고 있었다. 수정의 젖은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있던 경환은 잠든 수정을 조심스럽게 안고는 침대에 누여 놓은 후 수건을 들어 천천히 수정의 몸에 남아있던 물기를 닦아 내렸다.

    직원 채용을 황태수에 일임한 경환은 본격적으로 자신이 구상한 사업을 실행시키기 위해 정신을 집중시키고 있었지만, 지금은 나이지리아 입찰을 반드시 성공시켜야만 했다. 대후에게 떨어져야 될 떡을 뺏어먹는 기분이 들기는 했지만, 대후도 결국엔 KENTZ의 농간에 큰 손해를 보게 되는 프로젝트였기에, 결과적으로는 대후에게도 좋은 일을 하는 거라 스스로 위로를 했다.

    “사장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앞으로 있을 대형 플랜트 입찰을 혼자만 알 수 있도록 컴퓨터에 정리를 하고 있던 경환은 황태수의 방문에 서둘러 하던 일을 멈추고 황태수와 최석현을 맞이했다. 황태수는 결재 판을 경환을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보고를 시작했다.

    “KBR에서 석유화학단지 입찰건과 사장님께서 말씀하신 FPSO 건을 연계한 컨설팅계약서를 보내 왔습니다. KBR과 저희가 같은 로펌을 이용하다 보니 KBR과의 계약이 문제가 될 수도 있다고 보는데 다른 로펌을 알아 봐야 될는지요?”

    경환은 결재 판을 들어 KBR이 보내온 계약내용을 보았지만 특별히 문제 될 내용은 발견하지 못했다. 아마 이상한 조항이 있었다면 황태수가 사전에 처리를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특별히 문제가 될 계약서는 아닌 거 같네요. 바로 사인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로펌은 가급적 바꾸지 않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저희가 사업을 확장하는 시기가 되면 다각적으로 다시 검토를 해 보죠. 참, 그리고 나이지리아 건은 KBR에서 어떻게 진행을 한다고 하나요?”

    “다음 주에 윌리엄이 프랑스로 간다고 합니다. 직접 TOTAL과 협의를 하는 모양입니다.”

    수완이 좋은 윌리엄이 TOTAL과 협의를 진행한다면 별 어려움 없이 PQ는 통과할 수 있을 거라고 경환은 판단하고 있었다. 경환은 KBR이 딴 생각을 하지 못하게 못을 박아둬야 될 시기란 걸 황태수에게 전달을 해 주었다.

    “잭은 부사장님만큼이나 다루기 어려운 사람입니다. 틈을 보이시지 말고 항상 우리의 페이스로 끌어 들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드리는 정보를 가급적 나눠서 전달해 주십시오.”

    황태수는 경환의 지시를 받고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사장님께서 대후건설을 배제한 이유가 무엇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황태수의 질문이 무슨 뜻인지 알아차린 경환은 황태수와 최석현을 이끌고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 제가 미국에 오기 전 대후건설과 대현중공업을 도발한 이유도 때를 기다리기 위해서 입니다. 이번 나이지리아 입찰에 성공을 하게 된다면 한국기업들이 저희 SHJ를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질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 이후에 한국기업들과의 제휴를 검토할 생각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국인이라고 해서 한국기업들의 이익을 위해 뛰어 줄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SHJ에 이득이 되는 한국 기업이 없다면 굳이 한국 기업과 업무협조를 할 생각이 없습니다. 부사장님은 한국에만 국한하지 마시고 저희의 컨설팅업무를 확대 할 수 있는 방안을 검토해 주십시오.”

    이미 경환의 눈이 한국을 벗어나 있다는 것을 알아들은 황태수는 경환의 목표가 과연 어디에서 멈출지 가늠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저희 업무 시작은 윌리엄이 프랑스에서 결과를 가지고 돌아온 이후부터 입니다. 그때까지 제가 드리는 정보를 잘 정리해 주십시오. 그리고 당분간 최 차장님은 북경과 서울의 박 부장님과의 업무연락에 만전을 기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사장님. 아직은 특별한 문제없이 잘 진행이 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특이 사항이 발생을 하면 따로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북경은 김창동의 진두지휘아래 유연탄 수출을 무리 없이 진행하고 있었다. 당분간 유연탄 수출로 발생하는 수입 외에는 일절 다른 수입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직원들이었지만, 걱정하는 사람 한 명 없이 이상하리만큼 차분한 모습들이었다.

    화성산업 사장실에서는 최승호 전무와 곽기철 팀장 간 언성이 높아지고 있었다. 며칠 전 곽기철에 의해 진행된 부품 조달업체의 변경이 최승호의 반발에 막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KBR의 사우디 납품이 끝나가고 있는 시점에서 국내기업의 납품 물량을 제외하고는 더 이상의 해외물량을 확보해 가지 못하고 있었다. KBR의 기술이전으로 특수플랜트를 제작하기에는 아직도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곽 팀장! 십 년을 넘게 화성과 거래를 해온 업체를 하루아침에 바꾼다는 게 말이 된다고 보는 건가? 값싼 부품을 사용하게 된다면 그만큼 완성된 제품의 질이 떨어진다는 것은 분명한데 신용 하나도 먹고 살아온 우리 화성이 하루아침에 망가질 수도 있는 문제라는 것을 왜 모르냔 말이야.”

    최승호는 곽기철을 향해 분노를 표출하고 있었지만 곽기철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최승호의 말에 반박을 하고 나섰다.

    “무턱대고 퍼 줄 수만은 없지 않습니까? 부품의 대체가 충분히 가능한 상황이라면 비용절감이 우선적으로 고려가 되어야 된다고 봅니다. 부품업체들 살리자고 우리 화성이 죽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곽기철이 부르짖고 있는 경영혁신의 실체가 들어나는 순간이었다. 두 사람의 언쟁에도 최승 화는 입을 다문 채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다음 달에 있을 소희의 약혼을 결정한 상태에서 곽기철에게 경영의 일부를 넘기고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중국에 제2공장을 설립한다는 게 무슨 말이야? 결국은 마산공장을 축소하고 이전을 하겠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자네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공장 직원들을 자신의 식구처럼 생각하는 최승호에게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도 많은 업체가 중국으로 진출을 서두르고 있기는 하지만 최승호는 직원들을 정리하면서까지 중국에 이전하는 것을 반대하고 있었다.

    “마산 공장은 KBR에서 이전된 기술을 바탕으로 특수플랜트 제작에 중점을 두고 일반 철골제작은 중국의 제2공장에서 생산을 하는 방안입니다. 전무님도 아시겠지만 철골제작에서 인건비가 차지하는 부분이 큽니다. 지금 서두르지 않으면 기회를 놓칠 수도 있습니다.”

    최승호는 피가 거꾸로 솟았지만 곽기철과는 말이 통하지 않고 있었다. 자칫 곽기철의 제안을 최승화가 받아들이기라도 한다면 그 동안 쌓아온 일들이 일순간에 허물어 질 수도 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곽기철의 영입을 끝내 반대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기에는 이미 늦어버렸다.

    “형님 뭐라고 말씀 좀 해 보십시오. 이경환 사장이 지겹도록 형님께 말하지 않았습니까? 특수플랜트 제작을 완전히 우리 화성 것으로 만들기 전까지는 참고 버텨야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앞으로 길어야 2년입니다. 2년 정도는 충분히 버틸 능력이 된다는 건 형님도 잘 아실 겁니다. 직원을 정리하고 거래처를 바꾸고 무턱대고 해외이전을 하게 된다면 화성의 미래는 장담을 못합니다.”

    “전무님,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다릅니다. 그리고 이경환 사장은 화성과는 별개의 사람입니다. 무상으로 양도해준 지분 10%도 회수를 할 방법을 찾아봐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경환 사장이 아니더라도 KBR은 충분히 컨트롤을 할 수 있습니다.”

    곽기철의 말에 최승호는 탁자 위에 놓인 재떨이를 잡아들었다. 최승호는 경환의 도움을 잊지 않고 있었다. 현장의 모진 일을 직접 체험하며 직원들과 함께하려는 경환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최승호는 책상에 앉아 전화로 일을 진행하는 곽기철이 애당초 못마땅했다. 최승호의 손을 급히 잡으며 최승 화는 무거운 입을 열었다.

    “아직 결정된 건 하나도 없어. 그러니 승호 너도 너무 앞서 나가지 않도록 해. 그리고 곽 팀장은 직원들 모두가 이해할 수 있게 자네가 생각하는 경영혁신 방안을 다시 만들어 보도록 하고. 오늘은 두 사람 다 그만하도록 해.”

    최승화의 말에 최승호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고, 곽기철은 비릿한 미소를 슬쩍 흘려 보였다. 이미 최승화의 마음이 곽기철에 기울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최승호는 터질 듯 한 가슴을 주체하지 못하고 사장실을 급히 빠져 나왔다. 사장실 밖에서 두 사람의 언성을 듣고 있던 박화수가 재빨리 최승호를 쫓아 사무실 밖을 빠져 나가고 있었지만 아무도 박화수를 주시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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