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다시 사는 인생 - 60
휴스턴 공항에는 황태수와 최석현이 경환과 수정을 맞이하고 있었다. 아직 겨울이 완전히 지나가진 않았는지 날씨는 제법 서늘하긴 했지만, 서울의 맹추위에는 비할 것이 못 되었다.
“휴스턴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사장님, 사모님.”
“번거롭게 나오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이후에는 이러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길을 모르면 택시를 잡아타고 가면 간단한 일을, 한창 일할 시간에 직원들이 공항에 몰려나오는 것은 비효율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경환의 주의에 황태수는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떡였다. 아직 사모님 소리가 어색해서인지 수정은 불편한 얼굴로 황태수와 경환을 바라보고 있었다.
“부사장님 식구들은 도착했나요?”
“네, 사장님. 지난달에 도착했습니다. 우선 댁으로 모시겠습니다. 실내장식은 사모님의 취향에 맞추려고 노력은 했지만, 맘에 드실지 모르겠습니다.”
차는 휴스턴 서쪽 외곽에 위치한 포스트 오크 공원으로 향했다. 도심의 고층 빌딩 숲과는 달리 나무가 우거진 어쩌면 한적해 도로를 지나 한눈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아파트 입구에 도착하자 경환은 눈을 크게 뜨고 황태수를 바라봤다.
“부사장님, 상당히 고급스러워 보이는데요. 부사장님과 최 차장은 혹시 다른 곳으로 임대했나요? 저는 분명 같은 곳으로 임대하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경환은 황태수가 자신만 배려해 이런 고급아파트를 임대한 것이 아닌지 인상을 구기며 황태수를 추궁하고 있었다. 만약 자기 생각이 맞는다면 보증금을 포기하더라도 계약을 취소할 생각이었다.
“아닙니다. 사장님. 저나 최 차장 다 이곳에 터를 잡았습니다. 사실은 더 외곽으로 알아보고 있었습니다만, KBR에서 30% 저렴하게 임대를 할 수 있게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 아파트 경영 회사의 지분을 가지고 있더군요. 염치불구하고 못 이기는 척 계약을 했습니다.”
그제야 맘을 푼 경환은 인상을 풀고 최 차장을 앞세워 아파트 입구에 들어섰다. 고급 아파트답게 철저한 보안시설을 확인하고 나서야 경환은 안심을 할 수 있었다. 아파트 로비에는 황태수의 식구들과 케이티가 나와 두 사람을 맞이해 주고 있었다.
“부사장님 사모님이시죠? 처음 뵙겠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아울러 제 집사람도 부탁을 하겠습니다.”
“사장님,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제가 오히려 부탁을 하겠습니다. 사모님과는 천천히 인사를 나누겠습니다. 먼저 방을 구경하셔야죠.”
경환의 인사에 황태수의 부인은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자신보다 한참 어린 나이긴 하지만, 회사의 사장이란 부담감이 컸었다. 반갑게 자신을 대해주는 경환을 보고서야 안심을 할 수 있었다. 황태수는 급히 매니저를 앞세워 들어간 아파트는 가전과 가구가 잘 갖추어져 있었고 널찍한 거실과 주방이 둘이 살기에는 다소 커 보이기까지 했다. 수정은 황태수 아내와 케이티의 도움을 받으며 이곳저곳을 확인하고 있었다.
“사장님, KBR에서 오늘 잠시 뵙자고 하는데 시간이 되시겠습니까?”
황태수는 방금 도착한 경환에게 말을 건네기가 어려웠던지 나지막이 경환의 의사를 물어 왔다.
“그러시죠,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 먼저 인사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습니다. 그 후에 회사를 가도록 하시죠.”
수정의 밝은 얼굴을 확인한 경환은 황태수 아내와 케이티에 수정을 부탁한 후, 서둘러 KBR로 향했다.
“잭, 윌리엄이나 제임스에게 아무 말 말아줘요. 지금은 나이지리아 입찰에 집중하고 싶으니까요. 입찰이 끝나면 제가 직접 말을 하도록 해 줘요.”
린다의 말에도 잭은 굳어있는 표정을 풀 수가 없었다. 린다를 설득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는 있지만, 린다의 결심을 쉽게 바꿀 수가 없었기에 잭은 답답하기만 했다. 로비에서 경환을 기다리고 있는 두 사람은 이렇게 각자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
“제임스, 웰컴 투 휴스턴. 하하. 북경보다는 모든 여건이 훨씬 좋을 겁니다.”
“잭,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비즈니스를 KBR과 SHJ가 이뤄 가기를 희망합니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잭은 굳어있던 인상을 풀고 경환을 반겨 맞았다. 린다의 고민을 알지 못하는 경환은 린다와 가볍게 악수를 나누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도착하자마자 이런 요청을 해서 미안하긴 하지만 우리도 급한 사정이 있어 그러니 이해를 부탁합니다. 윌리엄이 기다리고 있으니 올라갑시다.”
회의실에 도착한 일행은 이미 도착해 있던 윌리엄의 환대를 받을 수 있었다. 윌리엄은 누구보다도 경환의 미국도착을 반기고 있었다. 경환으로 인해 자신의 입지가 굳어졌고 앞으로도 경환의 정보를 발판으로 해서 자신이 야망을 펼칠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미스터 리의 입국이 늦어져 내가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습니다. 중국에서 미스터 리를 붙잡았다는 소리를 듣고 직접 북경으로 가려고 했습니다. 하하하.”
윌리엄의 너스레에 경환은 가볍게 웃어주며 윌리엄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윌리엄이 자신을 반기는 이유는 나이지리아 입찰 말고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시간을 끌 이유가 경환에게는 없었다.
“뉴욕에서 사업을 시작할까 생각도 했지만, 잭이 무서워 휴스턴으로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법인을 설립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흐뭇한 미소를 짓는 윌리엄을 확인한 경환은 빠르게 다음 말을 이어갔다.
“나이지리아 석유화학단지 EPC(설계, 조달, 시공, 일괄입찰방식)입찰서가 8월이고 PQ(입찰자격심사)가 10월로 알고 있습니다. 준비는 어떻습니까?”
정확한 날짜까지 집어내는 경환을 바라보며 윌리엄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하하, 역시 미스터 리의 정보력은 대단합니다. 맞습니다. 나이지리아 정부에서 나온 공고를 저희도 방금 확인했습니다. 아시겠지만 나이지리아는 KBR의 입김이 상대적으로 약할 수밖에 없다 보니 경영진들은 이번 SHJ와의 업무제휴에 큰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경환은 이해를 한다는 듯 윌리엄의 말에 고개를 끄떡이며 동의를 표시했다.
“제가 걱정하는 건 과연 KBR이 PQ에 통과를 할 수 있느냐는 점입니다. 아시다시피 한국의 대후건설과 나이지리아 정부와는 이미 커넥션이 형성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 점 때문에 KENTZ가 대후와 기술제휴를 미끼로 컨소시엄을 맺은 이유란 것은 미스터 유트도 아시리라 봅니다. 그쪽에서는 KBR을 적대시할 것이 분명한데 PQ에 통과할 계획을 세워 놓으셨습니까?”
경환의 질문에 말문이 막힌 윌리엄이었다. 윌리엄은 이미 그룹 회장에게 나이지리아 입찰 성공을 공언해 버렸다. 아무리 경환의 정보력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KBR이 PQ를 통과하지 못한다면 입찰에 참가할 기회조차 없어져 버리기 때문에 경환의 우려에 윌리엄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제임스, KBR이 PQ를 통과하지 못한다는 것은 쉽게 이해가 안 됩니다. KBR의 해외입찰 실적이나 기술력, 자금력을 따라올 기업은 없습니다. 그렇게 보는 이유라도 있나요?”
윌리엄의 표정을 읽은 잭이 윌리엄을 거들며 나섰다.
“잭, 나이지리아는 미국기업에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상식이 통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거기에 대후건설이 커넥션을 움직인다면 KBR의 트집을 잡는 건 일도 아니라고 봅니다.”
경환의 말을 이해한 두 사람은 꿀 먹은 벙어리마냥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SHJ는 KBR이 PQ를 통과한 이후에나 입찰에 대한 정보를 드릴 수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PQ통과가 그리 만만치 않아서 걱정입니다. 흠…, 한 가지 방안이 있기는 하지만…. 어렵긴 마찬가지겠네요.”
경환의 말에 윌리엄과 잭은 물에 빠진 사람의 심정으로 경환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물론 PQ의 통과는 KBR이 해야 되지만, SHJ가 컨설팅을 맡고 있는 이상 좋은 방안이 있다면 당연히 제시를 해 줘야 되지 않겠습니까?”
“좋습니다. 미스터 유트, 이번 석유화학단지 입찰에 큰 이득을 보지 않겠다고 하신다면 방안을 제시하겠습니다. 제가 드리는 가이드라인은 손해를 보지 않을 정도의 금액으로 입찰을 하실 자신이 있으시냐는 겁니다.”
경환은 대후건설이 거의 실비에 가까운 금액으로 이 건을 수주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KBR이 이익을 쫓는다면 애당초 이 입찰은 KBR과는 인연이 없는 프로젝트였다.
“쉽지 않네요. 이익이 없는 입찰에 응한다는 것은 제 보스를 설득하기 어렵습니다. 저가 입찰은 KBR의 브랜드에 상처를 주는 일입니다. 불가능합니다.”
경환도 윌리엄이 걱정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KBR의 명성은 하루아침에 이뤄진 게 아니었다. 만약 KBR이 저가입찰로 수주를 했다는 소문이라도 난다면 회사의 명성에 큰 오점이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윌리엄을 경환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미스터 유트, 나이지리아는 앞으로 FPSO 프로젝트에 중점을 두게 될 것입니다.
KBR이 이번 입찰을 포기한다면 FPSO 입찰은 참여 자체를 하지 못할 것입니다. 한대의 가격이 20억불에 달하는 FPSO 사업을 포기할 생각입니까? 물론 선박 건조에 문제가 있는 건 알지만, 그건 컨소시엄으로 충분히 풀 수 있는 문제입니다. 판단은 미스터 유트가 하십시오.”
경환의 말에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은 말을 잇지 못했다. 단지 경환의 정보력만 필요로 했던 윌리엄이나 잭은 경환이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자세히 좀 설명을 해 주세요. 미스터 리의 계획이 신빙성이 있다면 내가 그룹 회장을 설득해 볼 수도 있습니다.”
윌리엄은 KBR이 아직까지 도전을 하지 못하고 있는 FPSO 사업에 진출을 하게 된다면, 그룹 회장으로 승진하는 건 일도 아니란 사실에 크게 고무되어 있었다. 윌리엄은 다급히 경환을 재촉하고 있었다.
“대후만큼 나이지리아와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업체가 있습니다. 프랑스의 TOTAL입니다. 우선은 TOTAL을 무슨 수를 써서든 관계를 만드십시오. TOTAL을 움직일 수만 있다면 PQ 통과는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 이후는 SHJ가 맡아 입찰정보를 제공해 드리겠습니다. 보너스로 정보를 하나 더 드리겠습니다. FPSO 사업은 나이지리아 정부의 의뢰를 받아 TOTAL에서 TURN KEY방식으로 발주를 하게 될 것입니다. 미스터 유트, 제 말을 이해 하셨나요?”
윌리엄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고개만 연신 끄떡이고 있었다. 경환의 말대로라면 TOTAL만 잡게 되면 PQ통과와 FPSO 입찰 참여는 손을 뒤집는 것처럼 쉬운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황태수 또한 경환을 놀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자신이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분야까지 꿰뚫고 있는 경환을, 자신의 머리로는 도저히 따라갈 자신이 없어서였다. 그건 잭이나 린다도 마찬가지였다.
“좋습니다. 회장은 내가 무슨 수를 쓰든 결재를 받아 낼 테니 FPSO 사업을 우리와 같이하겠다는 약속을 먼저 해 주셔야 합니다.”
“미스터 유트, FPSO 사업엔 풀어야 될 복잡한 문제가 많습니다. SHJ의 의견을 우선적으로 받아들인다는 보장을 하신다면 저희도 KBR과 같이 움직이겠습니다.”
윌리엄은 얕은 수를 경환도 똑 같은 수로 대응을 했다. FPSO 입찰을 성공시킨다면 SHJ의 이름은 플랜트 업계에 알려질 수밖에 없었다. 그 다음의 행보까지 KBR과 같이 할지는 아직은 모르는 상황이었다.
“좋습니다. 어차피 SHJ의 컨설팅이 없다면 우리에게도 FPSO는 무리인 만큼 미스터 리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윌리엄은 마음이 급했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경환은 악수를 나눈 뒤 급히 회장을 찾아가기 위해 회의실 문을 열고 뛰어 나갔다.
“제임스, 난 지금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당신을 적으로 돌리기에는 참으로 무섭다는 생각이 듭니다.”
린다의 일로 경환에게 좋은 감정이 사라진 잭은 한숨을 쉬며 경환에게 하소연을 하기 시작했지만 경환은 그런 잭을 묵묵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잭을 SHJ에 합류시키려 경환은 많은 고민을 했었지만 이미 KBR에서 중추를 맡고 있는 잭이 자신의 밑으로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잭, 앞으로도 KBR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을 뿐입니다. 두 회사의 협력관계가 오래도록 지속되기를 바랍니다.”
묘한 여운이 남는 말을 한 경환은 회의시작부터 굳은 표정을 하고 있던 린다를 바라봤지만 경환의 시선을 린다는 무시해 버렸다.
“잭, 앞으로 KBR과의 업무 협의는 황 부사장님이 진행을 할 것입니다. 최종 결정을 제외하고는 황 부사장과 나이지리아 입찰을 진행해 주셨으면 합니다.”
KBR과의 미팅을 마친 경환은 자신의 꿈을 이뤄줄 회사가 궁금해 늦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회사부터 찾았다. KBR과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사무실은 황태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잘 꾸며져 있었다. 경환은 자신의 책상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