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56화 (248/264)

#56

다시 사는 인생 - 56

황태수는 묵묵히 경환의 말을 듣고 있었다. 젊지 않은 나이였지만, 경환의 말에 피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저라도 괜찮겠습니까? 나이 들어 고집밖에 남아 있지 않은 사람입니다.”

황태수의 말에 경환은 얼굴이 밝아지며 급히 황태수의 손을 맞잡았다. 황태수는 미래의 계획을 만들 때부터 경환의 머릿속에 1순위로 자리 잡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부장님, 감사합니다. 부장님께서 합류를 해 주신 덕분에 정말 저희가 계획한 미래에 한발 더 접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경환은 진심으로 황태수와 박화수의 합류를 반겼고 이런 경환의 진심은 그대로 두 사람에게 전달되었다. 두 사람의 합류로 경환은 이후의 계획을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

“부장님은 당분간 북경에서 저를 도와주시다 최 차장과 함께 미국을 먼저 가 주십시오. KBR의 잭무어에게 요청을 해 놓았으니 법인설립에는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제가 넘어가기 전까지는 당분간 미국법인을 맡아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우선 여기에서 사장님의 계획을 충분히 이해를 한 뒤에 건너가겠습니다.”

당분간은 홍콩자금을 이용해서 꾸려 나가야 되었기에 빡빡하게 자금을 운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경환은 초조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주위로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맨 파워가 쌓여가고 있는 사실에 크게 고무되어 있었다. 자신이 필요로 하고 있는 한 사람만 더 합류가 된다면 공격적으로 사업을 확장시켜 나갈 계획을 짜고 있는 경환이었다. 모두들 비워진 맥주잔을 채우고 있었기에, 멀리서 자신들을 지켜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못했다.

수정은 아침부터 기분이 들떠서 경환을 재촉하고 있었다. 황태수와 매일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 협의를 하느라 어제 저녁에도 12시가 다 되어서야 집에 들어올 수 있었다. 부족한 잠을 더 보충해야 했지만 새벽부터 깨워대는 수정에 의해 경환은 잠을 설칠 수밖에 없었다.

“자기야, 난 준비 끝났어요. 빨리 나오세요. 평소처럼 좀 서두르면 어디가 덧나요?”

“아직 시간 충분해. 부모님들 한 번 더 오셨다간 자기 등살에 내가 남아나질 않겠어. 그리고 어제 자기가 잠도 안 재웠잖아.”

말을 하고선 실수를 했다고 느낀 경환은 뒤에서 쏘아져 들어오는 수정의 날카로운 시선을 받아내기가 힘들었다. 침대에서 일어난 경환은 무서운 수정의 눈초리를 의식하며 욕실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일 때문에 그 동안 수정에게 소홀한 것이 못내 미안했던 경환은 북경을 떠나기 전 양가 부모님을 초청해 식구들과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다. 들떠있는 수정을 바라보며 경환은 무엇을 위해 지금까지 고생을 하고 있었는지 자책감마저 들었다.

“천진공항까지는 2시간이 넘게 걸리는데 좀 일찍 가는 게 좋잖아요.”

“네, 사모님 운전 열심히 하겠습니다.”

급하게 샤워를 마치고 나온 경환은 연신 웃고 있는 수정의 손을 잡고 천진공항으로 향했다.

대후그룹의 북경지사에선 김만철 지사장과 장용민 부장이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화동의 추가된 석탄을 전량 인수하라는 그룹회장의 지시를 받고 며칠째 골머리를 썩고 있는 중이었다.

“지사장님, 화동에서 추가된 50만 톤은 저희가 받아 내야 됩니다. 제일로 이 물량이 넘어가게 될까 석탄사업부에서 우려가 많습니다. 계속해서 SHJ와 접촉을 하고는 있지만 계속 미적거리고만 있습니다. 그리고 며칠 전 이경환사장을 여기서 봤습니다. 프런트를 통해서 확인해 보니 황태수란 사람과 박화수란 사람이 투숙해 있더군요.”

“잠시 만요. 뭐라고 하셨습니까? 황태수와 박화수라고 하셨습니까?”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건설의 이만수 부장이 급히 대화에 끼어들었다.

“네, 두 사람의 여권 카피 본까지 확인을 했습니다. 아시는 사람들이신가요?”

장용민은 이만수가 어떻게 두 사람을 알고 있는지가 더 궁금했다.

“만약 제가 아는 두 사람이라면 오성건설 출신들이 맞을 겁니다. 비록 안 좋은 일로 오성을 그만두긴 했지만, 해외 프로젝트 영업에선 우리도 한 수 접을 정도로 지독한 인간들이고요. 그 두 사람이 북경에 나타난 것도 이해가 안 되는데 KBR과 연결된 이경환사장을 만났다는 게 심상치 않아 보입니다. 저는 본사에 연락을 취해 봐야겠습니다.”

말을 마친 이만수는 급히 본사와 연락을 취하러 빠져 나갔다. 좋지 않은 느낌을 받은 김만철은 급히 장용민에게 지시를 내렸다.

“장 부장, 이 부장의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에겐 좋지 않은 일이 생길 수도 있겠어. SHJ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져서라도 유연탄을 확보하도록 해. 건설 쪽은 내가 따로 확인을 해 볼 테니까.”

“알겠습니다. 김창동 부장과는 평소에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니 인간적인 방법으로 접근을 다시 하겠습니다.”

장용민이 빠져 나간 후에도 김만철은 알 수 없는 찝찝함에 기분을 풀 수가 없었다.

수정의 독촉에 2시간이나 일찍 천진공항에 도착한 경환은 하염없이 입국장만 쳐다보고 있었다. 수정은 미안했던지 경환의 팔짱을 끼고는 경환을 바라보며 연신 웃고만 있었다.

“한국 갔다 온지 얼마 안 지났는데 그렇게 좋아?”

“내가 사는 곳을 보여주는 건 처음이잖아요. 그리고 부모님 만나는 거 자기는 안 좋아요?”

“어…, 저기 나오신다.”

수정과 말싸움을 해서 이겨본 적이 없었던 터라 수정이의 질문에 답을 못 찾고 있었던 경환을 열리는 입국장 문으로 보이는 부모님들이 살려 주고 있었다.

“어머님, 엄마.”

수정은 주위의 사람들은 아랑곳 하지 않고 두 어머니를 향해 입국장으로 달려 나갔고 경환은 그런 수정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버지, 아버님. 잘 오셨습니다. 수정이가 이렇게 좋아할 줄 몰랐습니다. 진작에 모셨어야 됐는데 죄송합니다.”

“아닐세. 지금이라도 이렇게 오지 않았나. 자네 일도 바쁠 텐데 괜히 우리들까지 신경 쓰게 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네.

“괜찮다. 나나 사돈이나 오고 싶어 왔겠냐? 여자들 등살에 못 견뎌서 온 거지. 공기가 너무 안 좋다. 어서 가자.”

수교 전에는 국제전화를 한다는 게 너무 어려웠기에 전화를 자주 드릴 수도 없었다. 항상 그게 마음에 걸렸던 경환과 수정은 이번 여행을 통해 갚을 생각이었다. 천진공항을 나온 경환은 준비된 다인승 승합차로 북경으로 향했고 당분간 출근을 하지 않고 부모님들과의 여행에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호텔에 묵으시겠다고 억지를 부린 부모님들을 모시고 경환은 집에 도착해 짐을 풀어 버렸다. 예상한 거 보다 큰 집에 양가 부모님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둘이 살기엔 너무 집이 큰 거 같은데.”

경환 어머니는 말은 들었지만 이 정도로 집이 넓을 줄은 몰랐었다. 걱정을 끼치지 않기 위해 일부러 과장되게 말을 하는 줄만 알고 있었다.

“어머니, 사실 경환 씨가 일 때문에 늦으면 저 혼자 있기가 무서워요. 요새는 거의 12시가 다 되어서야 들어오는데, 몸이 상할까 걱정도 많아요.”

수정의 고자질은 바로 시작되었고 경환 어머니는 경환의 등짝을 있는 힘껏 후려졌다.

“수정이가 너 하나 믿고 낯선 땅에 왔는데, 너는 어쩜 그럴 수 있는 거니? 한번만 더 수정이 고생시키면 내가 아주 여기에 눌러 앉을 테니까 알아서 해.”

경환은 멍한 얼굴로 수정을 봐라 봤지만, 수정은 혀를 날름 내 밀었다. 두 아버님은 경환의 도움요청을 외면한 채 아파트 경관을 구경하는 척 했다.

“김 부장님 저 좀 살려 주십시오. 추가된 50만 톤을 확보 못하면 저나 지사장님은 바로 잘립니다. 회장님이 직접 내린 오더라 제가 왜 이러는지는 부장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대후의 장용민은 김창동에게 사정을 하고 있었다. 50만 톤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그룹회장의 성격상 오래 붙어 있을 수는 없다는 건 사실이었지만 김창동은 쉽게 답을 주지 않고 있었다.

“장 부장님, 저도 난처합니다. 제일에서도 무조건 자기들이 인수를 하겠다고 하는 통에 중간에서 아주 죽을 맛입니다. 장 부장님과의 인연도 무시는 못하고. 허, 참.”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는 김창동을 장용민은 끈질기게 설득을 하고 있었다. 김창동은 이미 경환에게 추가된 50만 톤의 배분에 대한 계획을 보고했고 경환의 확답을 받았지만 장용민의 애를 태우고 있었다.

“김 부장님, 저 한번 살려주시면 꼭 보답을 하겠습니다. 막말로 제일은 부장님을 내 쳤던 곳 아닙니까? 그런 곳에 왜 미련을 두십니까?’

“좋습니다. 제가 사장님은 최대한 설득을 해 보겠으니, 추가된 50만 톤에서 30만 톤을 대후 쪽으로 밀겠습니다. 이 이상은 저도 능력이 안 됩니다.”

장용민은 만족스러운 결과는 아니었지만 전체 물량이 제일로 빠지는 것은 일단 막았기에 큰 불만은 가지지 않았다. 대후도 중국에서 독자적으로 탄을 수입하고는 있었지만 SHJ의 가격에는 한참 미치지 못하고 있어 고민이 많았었다. 일단 SHJ와 거래를 튼 이상 순차적으로 물량을 늘려 가면 된다고 판단을 내렸다.

“김 부장님, 정말 고맙습니다. 이제야 제가 두 다리 뻗고 잠을 잘 수 있겠네요. 그리고 이후에 추가되는 물량은 우선적으로 저에게 주셔야 됩니다. 참, 그리고 부탁이 하나 더 있습니다.”

장용민은 자신의 발등에 떨어진 급한 불을 끈 후, 김창동에게 다른 요청을 하고 있었다. 자신과는 별개의 업무였지만 지사장의 특별지시를 받고 나온 자리였기에 그 지시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오성건설의 황태수 부장이 SHJ에 합류한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저희 그룹 건설 쪽에서 SHJ와 업무 협의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사장님께 말씀 좀 전해 주십시오.”

김창동은 대후의 정보력에 새삼 놀라고 있었다. 황태수가 SHJ에 합류한 것은 채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경환과 수정은 양가 부모님들을 모시고 운전기사와 가이드 노릇을 하며 북경관광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중이었다. 한국에 머물 시간도 없이 바로 미국으로 떠나야 했기 때문에 부모님들에게 항상 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오늘은 홍콩의 케이티까지 북경으로 불러 직원들과 함께 북경 외곽의 자그마한 호텔까지 하루 임대를 해서 야유회를 와 있었다. 부모님들이 어렵게 북경에 오신 이유도 있었지만, 황태수와 박화수가 새롭게 합류해 어느 정도 회사의 틀을 잡힌 상태에서 직원들의 유대감 형성이 필요하다고 판단을 했기 때문이었다. 호텔 앞마당에서 양 한 마리가 불 위에서 구워지고 있었고 준비한 음식들이 먹기 좋게 펼쳐져 있었다.

“아버지, 아버님. 제가 술 한 잔 올리겠습니다. 여기 모인 사람들은 앞으로 저와 같이 일을 할 제 식구들입니다. 제가 한국에서 자식 노릇은 할 수 없지만, 자주 모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저와 수정이 걱정 끼치지 않고 지금처럼 잘 살겠습니다.”

경환의 술을 받은 두 사람은 기분 좋게 술을 마신 후 자리에 모인 직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술을 따라주고 있었다.

“제 자식 잘 좀 도와주십시오.”

“제 사위 잘 좀 부탁드립니다.”

두 사람의 잔을 받은 직원들은 어쩔 줄 몰라 하며 급히 잔을 비우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수정 엄마는 수정이를 껴안아 주고 있었다.

“이 서방을 처음 봤을 때만 해도 너한테 한참 모자란다고 생각해서 사실 나도 반대하고 싶었어.”

수정은 처음 듣는 엄마의 말에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았지만 수정 엄마는 미소를 지으며 수정의 머리카락을 매만져 주고 있었다.

“수정이 너와 파리에서 같이 지냈다는 말을 듣고 자포자기 하는 마음으로 허락을 한 거야.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수정이 네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엄마가 사과할게.”

“치, 내가 경환 씨를 얼마나 공 들였는데. 경환 씨 노린 여자가 한둘이 아니었어. 그래도 엄마가 허락해 줘서 항상 고맙게 생각해. 잘살게.”

수정은 자신의 엄마를 힘껏 안아주었고 멀찍이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경환은 좀 더 수정이를 위해서 노력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경환이 너 내년엔 무조건 아이를 갖도록 해라. 여기 사돈뿐만 아니라 나도 손주를 많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아야지. 알았냐?”

경환이 감상에 젖어 들고 있을 때 경환 아버지가 얼큰하게 취한 모습으로 경환의 앞에 나타났다.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경환은 말을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미국에 가면 수정이도 공부를 다시 해야 될 텐데 그 문제는 저와 수정이가 다시 상의를 해 보겠습니다.”

“생각은 무슨 생각을 하나. 미국은 임산부라도 걱정 없이 학업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진 곳 아닌가. 내년엔 좋은 소식을 들려주리라 믿겠네,”

장인까지 나서는 통에 경환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만 푹 숙일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3년을 이렇게 보낼 생각에 경환은 눈앞이 노래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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