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55화 (247/264)

#55

다시 사는 인생 - 55

크게 번질 뻔했던 문제를 김창동의 사전 감지로 비교적 가볍게 넘길 수 있었던 경환은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중국과의 거래를 할 때는 세 번째를 조심하라는 말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이번 일을 사전에 감지하지 못했다면 자신이 모아둔 사업자금을 포기하거나 왕샹첸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부장님, 작업상황은 어떻습니까? 배는 도착을 했나요?”

“선박은 도착해서 외항에 대기 중입니다. 다른 선박의 작업이 끝나는 내일 오후에 접안을 할 예정입니다. 제가 직원을 데리고 내려가 작업을 확인하겠습니다.”

북경사무소는 네 명의 현지인을 채용한 상태로 서툴기는 하지만 다들 한 몫을 하고 있었기에 경환과 김창동은 업무적으로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더블해운에서 매일 찾아오고 있지만 팀장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일절 응대를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다음단계로 넘어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다음 항차의 용선계약까지 중원그룹으로 넘겨주자, 다급해진 더블해운에서는 담당자를 SHJ에 상주를 하다시피 하며 사정을 하고 있었다. 더 이상 자존심 강한 장성궈의 신경을 건드려 봤자 서로에게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경환은 김창동에게 지시를 내렸다.

“중원그룹에 일괄적으로 용선계약을 넘기는 것도 우리에겐 좋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쯤 했으면 더블해운에서도 더 이상 장난칠 생각을 하지 않을 테니 중원그룹과 더블해운 두 곳으로 적절히 배분을 해 주십시오. 더블해운에게는 경고를 확실하게 다시 주시고요. 추가된 50만 톤은 상황이 어떻습니까?”

“용선계약은 그렇게 진행을 하겠습니다. 슬슬 소문이 돌기 시작했으니 입질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굳이 저희가 나설 필요가 있겠습니까?”

김창동의 웃음을 이해한 경환은 묘한 웃음으로 답을 대신하고 있었다. 김창동의 말대로 이미 30만 톤이 원활하게 수출이 되고 있는 상태에서 추가된 50만 톤을 스스로 떠들고 다니지 않더라고 알아서 찾아 정보를 듣고 찾아오도록 만드는 게 협상에 절대적으로 유리할 수 있었다. 그때 경환의 탁자 위에 놓인 전화기의 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SHJ북경사무소의 이경환입니다.”

‘영사관입니다. 총영사님께서 이경환 씨를 뵙고 싶어 하십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지금 영사관을 방문해 주셨으면 합니다.’

간단히 전화를 마친 경환은 총영사가 자신을 찾는 이유가 무엇인지 고민해 봤지만 영 떠오르질 않고 있었다. 외교관들하고 어울려서 득 될 것이 없다는 것을 경환은 알고 있었지만 아직은 총영사의 제의를 거절할 만큼의 힘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외국의 대사관과 영사관이 밀집되어 있는 산리툰은 군인들이 삼엄하게 경비를 서고 있었다. 영사관 건물 앞에 주차를 한 경환은 여권을 제시한 후에야 영사관 건물로 들어 설 수 있었다. 여직원의 안내에 따라 접견실에 도착한 경환은 이미 자리에 나와 있는 총영사를 만날 수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SHJ의 대표로 있는 이경환입니다.”

경환은 유학생의 신분이 아닌 법인의 대표로 이 자리에 찾은 것을 총영사에게 알려 주기 위해 SHJ의 이름을 먼저 꺼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총영사 황민호입니다.”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황민호는 벗겨진 머리로 인해 나이보다 더 들어 보였지만 눈빛만큼은 날카로웠다. 여는 외교관처럼 경환의 마음에 드는 인상은 아니었다. 영사관의 주재목적은 현지에 주재중인 국민들의 편의를 제공하고 안전을 책임지는 것이었지만, 그걸 지키는 외교관들은 그 당시 눈 씻고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이런 이유로 오늘 총영사와의 만남이 영 찝찝하고 탐탁지 않게 경환은 생각하고 있었다.

“급하게 절 찾으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정부의 입김에 한번 좌절을 맞본 경환은 사무적이고 딱딱한 표현으로 총영사에게 질문을 하고 있었다.

“이경환 씨에 대해선 여러 방면으로 소문을 듣고 있었습니다. 수교 전에 북경대학의 초청을 받고 유학을 왔고, 공부를 하는 과정에서도 교통부와 대외경제무역부와의 의뢰를 받아 자문위원으로 위촉된 사실도요. 정말 한국 사람으로 대단한 활약을 펼치신 걸 듣고 저 또한 이경환 씨가 자랑스러웠습니다. 하하하.”

공치사를 남발하는 황민호가 영 못마땅했지만 대 놓고 인상을 찡그릴 수는 없었기에 경환은 썩은 미소만 보이고 있었다. 이렇게 쓸데없는 말을 꺼내는 총영사의 과장이 한편으론 불안하기만 했다.

“제가 능력이 있어서는 아니고 그냥 운이 좋았습니다. 요번 학기를 마치는 대로 북경을 떠날 예정입니다. 얼마 남지 않은 북경생활을 조용히 정리를 하려고 준비 중입니다.”

황민호의 제안을 사전에 차단을 하기 위해 경환은 북경을 곧 떠날 것이라는 말을 먼저 꺼내 들었다. 영사관과는 절대 업무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연결을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제 생각에는 이경환 씨 같은 중국전문가가 한국에 돌아가는 것은 국가적인 차원에서도 손해고 낭비라고 생각합니다.”

황민호의 말에 경환은 속에서 열불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국민을 위해 무엇을 해주려는 생각은 전혀 없고 단지 국익을 위해 개인을 희생하라는 말만 되풀이 하고 있는 정부 관료들의 행태에 분노가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총영사님의 말씀은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미 정부의 뜻에 따라 제 계획을 한번 접었습니다. 이 정도면 저도 국가를 위해 봉사를 했다고 자부합니다.”

경환의 말에 황민호는 인상을 찡그리며 안경을 손으로 올리고 있었다. 자신의 말이면 머리를 조아리고 굽실거릴 것으로 생각한 황민호의 예상과는 달리 눈을 똑바로 치켜들고 자신을 바라보는 경환이 못마땅했다.

“그건 개인의 발전을 위해서도 좋은 결정이었다고 봅니다. 정부에서는 이경환 씨가 현지에 남아서 대중교역의 중간자 역할을 수행해 주기를 바라고 있어요. 이경환 씨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많은 기업들이 중국으로 진출을 하게 될 것입니다. 제가 듣기로는 대외경제무역부에서 이경환 씨에게 대중국 투자유치의 창구역할을 의뢰했다고 하던데 그 제안을 받아들이세요.”

경환은 오늘의 만남이 어떻게 이뤄지게 되었는지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장성궈를 움직여 실패를 한 왕샹첸이 직접 황민호에게 제안을 했다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실적을 쌓으려고 혈안이 되어있는 황민호는 왕샹첸의 감언이설에 앞뒤 재보지 않고 그 제안을 받아 들였을 것이었다. 경환은 왕샹첸의 집요함은 어느 정도 이해를 하고 있었지만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타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황민호는 도저히 용서를 할 수 없었다.

“총영사님, 분명히 말씀 드리겠습니다. 경무부의 제안은 이미 거절을 한 상태고 총영사님의 제안 또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저는 제 계획대로 이번 학기를 끝으로 북경을 떠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리겠지만 한번만 더 애국심을 들먹여 국가를 위해 개인을 희생하란 소리는 하지 마십시오. 저도 참을 만큼 참았습니다. 총영사님이 다른 생각을 하실 거 같아서 드리는 말씀인데, 제가 미국대사관을 움직일 수는 없지만 도움을 받을 정도의 연줄은 가지고 있습니다. 저를 극한으로 몰지 마시길 바랍니다.”

경환은 말을 마치고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영사관을 빠져 나갔다. 황민호의 행태에 분노를 느껴서 인지 핸들을 잡은 경환의 손이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아직은 정부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가 한스러웠다. 죽기보다 싫은 일이긴 하지만 황민호가 다른 수를 쓴다면 KBR을 통해 미국대사관과의 연결을 시도할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황민호는 경환이 빠져 나간 뒤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조치를 취하기엔 너무 위험부담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신상조사를 통해 경환이 미국대사관과 연결이 가능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무실에 돌아온 경환은 도통 일이 손에 잡히질 않고 있었다. 아직은 정부와 척을 질 정도로 자신의 세력이 미약하다는 것이 경환을 더 우울하게 만들었다. 한국에 법인을 만들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지만 경환 자신도 엄연히 대한민국 여권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부에서 경환을 압박할 수단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팀장님, 총영사와의 만남이 좋지는 않았나 봅니다.”

김창동은 경환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는 걸 느끼고 경환에 다가와 걱정스럽게 말을 건넸다. 경환은 영사관에서 있었던 얘기를 김창동에게 전해주었고 김창동도 심각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정부 관료와 척을 지는 건 피해야 되지만, 이건 정도가 심하네요. 정부 관료가 제일 무서워하는 사람들이 기자들입니다. 제가 기자들과는 조용히 만남을 가져 보겠습니다. 혹시라도 총영사가 장난을 치면 기사들 쪽에서 압력이 가도록 해 보겠습니다.”

“우선은 관망만 해 주십시오. 중국보다는 미국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을 테니 총영사도 쉽게 움직이지는 못할 겁니다.”

“참, 최 차장에게서 연락이 왔었습니다. 호텔에 도착을 했다고 하니 같이 나가보시죠.”

최석현이 도착했다는 말을 전해들은 경환은 더러운 기분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기다리던 사람이 도착을 했기 때문이었다. 김창동과 서둘러 사무실을 빠져 나온 경환은 새로 오픈한 켐핀스키호텔로 급히 차를 몰았다.

켐핀스티호텔은 복합단지를 조성해 호텔과 쇼핑몰 오피스텔을 동시에 개장을 하였다. 독일계 자본을 주축으로 조성된 이 호텔은 한국의 대후그룹이 일정 부분의 지분을 확보하고 있었다. 수교 초반 대 중국투자는 대후그룹이 끌고 나갈 정도로 대후그룹의 중국투자는 공격적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경환은 일부러 숙소를 켐핀스키호텔로 정했지만 그 이유를 아는 사람들은 없었다.

“황 부장님, 박 차장님 북경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이 호텔 흑맥주가 아주 죽입니다. 낮 시간이긴 하지만 저도 기분 좀 풀어야 될 일이 있어서 그러니 맥주 좀 마시죠.”

경환은 말을 마치자마자 흑맥주와 안주거리를 주문을 하고 모인 사람들을 소개를 시켜 주었다. 각자 소개를 마치고 주문한 맥주잔을 들어 건배를 제의했다.

“여기 계신 분들은 다들 시작은 달랐지만 끝은 저와 같이 하실 분들입니다. 두 분께 부담을 드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많이 둘러보시고 천천히 결정을 해 주십시오.”

황태수는 그런 경환의 마음이 고마웠지만 쉽게 자신의 행보를 결정할 수는 없었다. 박화수가 오성건설을 떠나지 않았다면 자신도 북경까지는 오지 않았을 테지만 자신보다는 자신을 믿고 따르는 박화수가 걱정인 황태수였다. 이미 건설 쪽으로는 박화수의 사직이유가 공공연히 퍼져 있었기 때문에 자신과 달리 박화수의 이직은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환대를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염치불구하고 며칠 신세를 지겠습니다. 저희 두 사람의 끈이 떨어진 것은 알고 계시리라 봅니다. 저희가 아직도 SHJ에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황태수의 급작스런 질문에 경환은 마시던 맥주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황태수의 고민을 이해하고 있는 경환은 황태수를 향해 말을 꺼냈다.

“부장님의 고민을 십분 이해합니다. 저는 오성건설에 계시는 황 부장님이 필요한 건 아니었습니다. 제가 앞으로 계획하는 사업에 제일 적격이시기 때문에 황 부장님을 모시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깟 오성건설은 제 눈에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황태수는 오성건설을 하찮게 여기는 경환의 말에 황당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국내의 1,2위를 다투는 재벌기업을 ‘그깟’으로 표현하는 경환의 계획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그럼 사장님의 계획이 무엇인지 제가 들을 수 있겠습니까?”

황태수의 요청에 경환은 미소를 지으면 SHJ의 비전에 대해 설명을 시작했다.

“지난번에도 말씀 드렸지만 조만간 저는 중국 사업을 여기 계시는 김창동 부장님에게 일임을 하고 미국으로 건너갈 생각입니다. 부장님께서 저희에게 합류를 하신다면 플랜트컨설팅에 대한 업무를 맡아 주셨으면 합니다. 시작은 KBR에 대한 컨설팅이 되겠지만 KBR에 국한 시키지는 않겠습니다. KBR 이외의 업체를 개발해 주시고 더 나아가 저희 SHJ가 직접 국제입찰에 참여할 정도로 키워달라는 게 제 계획의 일부입니다. 아직은 구멍가게 수준이지만부장님이 참여해 주신다면 구멍가게를 대형 쇼핑몰로 키울 자신이 있습니다.”

“흠…., 말씀을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크고 거대한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에 황태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의 말이라면 웃고 말았겠지만, 그 동안 경환이 보여준 능력이라면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저는 들어갈 자리가 없나 보네요.”

의기소침해진 박화수는 죽어가는 소리로 경환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하하하,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하시나요? 차장님은 당분간 한국에서 일을 해 주셨으면 합니다. 화성산업에 자리를 마련해 드리겠으니 당분간 그곳에서 미국과 중국의 일을 연결해 주셨으면 합니다. 당분간은 한국에 법인을 만들지 않을 생각입니다.”

밝아지는 박화수의 표정을 확인한 경환은 궈청의 요청을 박화수를 통해 진행을 시킬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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