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54화 (246/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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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인생 - 54

    중원그룹 궈청과의 합의로 일단 한숨을 돌리기는 했지만, 아직 안심할 상황은 아니었다. 장성궈가 혹시라도 선적되는 탄에 장난이라도 쳤다면 경환으로서도 어찌해볼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은 경환은 지금의 이 상황을 역전시키기 위해 김창동과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팀장님, 최 차장에게는 영태상선과 대현상선 두 곳과 미팅만 하라고 지시를 했습니다. 내일 중원그룹과 용선계약을 체결하기 전까지는 안심할 단계는 아닌 거 같습니다. 최 차장이 말씀을 드려야 될 사항이 있다고 합니다. 한번 받아 보시죠.”

    그나마 김창동이 경환의 손을 거들고 있어 빠르게 대책을 만들어 갈 수 있었다.

    “차장님, 접니다. 김 부장님 지시대로 움직여 주십시오. 급한 내용이라는 게 뭐죠?”

    ‘팀장님, 화성산업을 통해 선사를 소개받는 과정에서 오성건설의 황 부장이 사표를 냈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팀장님이 궁금해 하실 거 같아서요.’

    경환은 최석현의 말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황태수는 몇 년 후 본부장으로 승진을 해야 될 사람인데 사표를 냈다는 말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차장님, 황 부장이 사표를 냈다는 게 이해가 잘 안되니, 좀 더 알아 봐 주세요. 황 부장과 연결이 되지 않는다면 박화수 차장을 먼저 찾아보시고요.”

    ‘알겠습니다. 선사들과 미팅을 한 후 연락을 해 보겠습니다.’

    황태수의 사표에서 알 수 있듯이 자신의 기억과는 미묘하게 틀어져 가는 현실에 경환은 약간의 불안감을 들었지만, 지금은 닥친 위기를 먼저 피해야만 했다.

    “SHJ에서 공문을 보내 왔습니다. 내일 오전까지 공문 내용에 대한 답을 주지 않는다면 계약을 자동 해지 하겠다는 내용입니다.”

    더블해운의 총경리인 리닝은 공문을 한번 훑어보고는 다시 직원에게 건네주었다. 애송이가 별 짓을 다한다고 생각한 리닝은, 며칠 후면 자신의 앞에 찾아와 사정을 할 경환의 모습을 상상하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화동의 장성궈의 지시로 움직이고 있는 자신을 경환이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이란 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경환의 애를 태운 후 선적일에 닥쳐 배를 재투입해 주기만 하면 자신의 할 일은 끝나는 상황이었다.

    “일절 대응하지 말고 선박은 문제없다고 원론적인 얘기만 해 주도록 해.”

    “만약 내일 계약을 해지한다면 저희도 손해가 많을 텐데요. 배는 현재 상해인근에 이미 도착을 해 있는 상태입니다.”

    직원의 염려스러운 보고에도 리닝은 전혀 긴장하거나 걱정하지 않았다. 3만 톤급의 선박을 열흘 안으로 수배를 한다는 게 그리 쉽지 않았고, 선임 또한 상승을 하기 때문에 자신에게 다시 돌아 올 수밖에 없다고 판단을 하고 있었다.

    “괜찮아. 그 애송이들이 뭘 알겠어? 그리고 우리 뒤엔 화동이 버티고 있는데, 그냥 우리는 장 총경리의 지시에 따르기만 하면 돼. 계약 해지 하라고 통보해줘.”

    “알겠습니다. 그렇게 조치를 하겠습니다. 배는 상해에서 하역이 끝나면 바로 진황도로 출발하도록 선장에게 지시를 내리겠습니다.”

    리닝은 직원이 자신의 방을 빠져나가자 전화기를 들어 장성궈에 보고를 하기 시작했다.

    “지시하신 대로 조치를 해 놓았습니다. SHJ에서 계약을 해지 하겠다고 강경하게 나오는데 문제는 없을까요?”

    ‘나한테도 전화가 계속 들어오고 있으니, 며칠만 더 고생을 해 주게. 그 친구도 딱히 대안은 없을 거라고 봐. 내일쯤 해서 내가 연락을 한번 해 볼 생각이니까 대응하지 말고 애를 좀 먹여 줘. 이 일이 끝나고 나서 술 한 잔 하자고.’

    장성궈와의 통화를 마친 리닝은 천상인간에서 늘씬한 미녀들과 술을 마실 생각을 하자 아랫도리가 묵직해 옴을 느꼈다.

    한국선사들과의 미팅을 마친 최석현은 박화수를 통해 황태수와 자리를 같이 하고 있었다. 몰라보게 야윈 황태수를 보며 최석현의 마음은 동정심으로 가득했다.

    “부장님, 오래간만에 뵙네요. 좋지 않은 소식에 저희 사장님도 걱정이 많으십니다.”

    “허허, 전 무직입니다. 부장이란 호칭은 듣기가 거북합니다. 본격적으로 중국 사업을 시작하셨다고 귀동냥으로 듣고 알고는 있었습니다.”

    황태수는 자신의 부하직원을 희생양을 삼으려는 경영진에 반발하며 자신이 총대를 메고 사직서를 제출했다. 평소에도 소신발언이 잦았던 황태수를 좋지 않게 생각한 몇몇 경영진들에 의해 사표는 즉시 수리가 된 상태였다. 여러 중소기업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와 있긴 하지만 황태수는 응하지 않고 있었다.

    “네, 지금 문제가 좀 있기는 하지만, 곧 해결을 할 겁니다. 다름이 아니라 저희 사장님이 부장님을 한번 뵙고 싶어 하십니다. 특별한 일이 없으시면 북경을 한번 방문해 주십사 해서 오늘 찾아뵈었습니다.”

    황태수는 경환의 제의를 심각하게 고민은 했지만, 그건 자신이 현업에 종사하고 있을 때였고 지금과는 처지가 많이 틀렸다. 그때 박화수가 급히 뛰어 오는 모습이 보였다.

    “근무시간에 자네가 여기 웬일인가?”

    박화수는 급히 황태수에 인사를 한 뒤 자리에 앉았다.

    “부장님, 저도 오늘 사표 던졌습니다. 부장님 떠나시고 일도 손에 잡히질 않고, 더러워서 자리에 붙어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부장님.”

    박화수의 사표를 예상하지 못했던 황태수는 멍한 얼굴로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황태수의 모습을 확인한 최석현은 다시 한 번 두 사람에게 제안을 했다.

    “머리도 아프신데 두 분이 북경에서 머리 좀 식히고 오시죠? 비자만 준비해 놓으시면 항공권은 제가 준비를 해 놓겠습니다.”

    박화수까지 사표를 던지고 나온 이상 황태수도 별 대안이 없었다. 그런 두 사람을 최석현은 끈질기게 설득을 해 가고 있었다.

    다음날 못을 박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더블해운에서의 답을 얻지 못한 경환은 결심을 굳힌 표정으로 김창동을 불러들였다. 밤새 고민을 해 봤지만 결론은 하나였다. ‘되면 좋고, 안되면 말고’ 중국 사업을 계획 했을 때부터 경환은 이 하나의 신조만 머릿속에 주입을 하고 있었다. 너무 큰 것을 바라다가 중국이라는 거대한 늪에 빠지는 거 보다는 적게 손해를 보고 발을 빼겠다는 생각을 항상 갖고 있었다. 지금이 그 결심을 행동으로 보일 때라는 걸 경환은 알고 있었다.

    “중원그룹에 FIXTURE NOTE를 보내라고 하시고 바로 사인을 하세요. 그리고 변호사와 대동해서 더블해운에 정식으로 계약해지 통보를 하십시오. 부장님은 최악의 경우 중국 사업을 접는다는 생각을 하시고 움직여 주세요. 화동의 장 총경리는 제가 상대를 하겠으니 부장님은 더블해운을 상대해 주십시오.”

    한 시간 후 계약해지를 통보했다는 김창동의 연락을 받은 경환은 중원에서 보내온 FIXTURE NOTE에 사인을 해 버렸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고 판단한 경환은 장성궈와 담판을 짓기 위해 화동으로 향했다.

    “총경리님을 뵈러 왔습니다. 자리에 계신 거 아니까 서로 피곤하게 하지 맙시다.”

    “그게…. 저…, 지금 회의를 주재하고 계셔서….”

    말을 더듬고 있는 비서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경환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성질대로라면 의자를 집어 던지고 싶었지만 그건 장성궈와의 담판 후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경환의 이런 행동에 비서는 급히 어디론가 인터폰을 눌렀다. 잠시 후 총경리의 방문이 열리고 장성궈가 환한 웃음으로 경환 앞에 나타났다.

    “하하, 샤오 리, 내가 요새 정신없이 바쁘다 보니 자네와 연락을 할 수가 없었네. 뭐 급한 일이라도 있는 건가?”

    실실 웃으며 경환의 속을 뒤집고 있었지만 이미 결심이 선 듯 경환의 표정은 무덤덤하기만 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급한 일 때문에 형님을 많이 찾았습니다. 형님께서 워낙 바쁘시니 이해를 해 드려야죠. 오늘은 형님께 해결된 일에 대해 보고를 드릴 겸 해서 찾아 왔습니다.”

    덤덤히 말을 하는 경환의 모습을 본 장성궈는 표정이 굳어져 갔다. 지금쯤이면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을 해야 정상인데 경환은 해결된 일을 보고를 하겠다고 하니 장성궈로서도 머리가 복잡해져 가고 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해 주고 탄의 양을 늘려주는 조건으로 왕샹첸의 제안을 받아들이라고 하려던 참이었기 때문이었다.

    “허허, 무슨 문제가 생겼는지 말을 해 보게. 내가 풀 수 있는 일이라면 풀어 줘야 되지 않겠나. 남도 아니고 동생 일인데.”

    경환은 욕지거리가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걸 간신히 막으며 아무 일 없다는 듯 장성궈를 향해 웃어 보였다.

    “형님이 소개시켜 준 더블해운이 장난을 좀 치더군요. 저를 애를 먹여서 선임을 올려 받으려고 한 게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좀 전에 더블해운에 계약해지 통보를 해 버렸습니다. 형님이 저를 위해 소개를 시켜 준 선사인데 이놈들이 형님의 얼굴을 깎는 짓을 해서 제가 형님 대신 본보기를 보여 줬습니다.”

    장성궈는 경환의 말에 손으로 입 주위를 어루만졌다. 자신의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행동하는 경환에 적잖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허.참, 그런 일이 있었나? 내가 미리 알았다면 단단히 버릇을 고쳐 놨을 텐데, 이거 참…, 자네도 무턱대고 계약을 해지해 버리면 선적일이 코앞인데 어쩌려고 그랬나. 서로간의 사정을 들었어야지, 선적을 못하게 되면 그 많은 손해를 누가 감당하려고 그래.”

    아직도 사태 파악을 하지 못하는 장성궈는 다시 한 번 경환을 압박해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 내려고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비상상황이라 중원그룹의 궈청 총경리에게 부탁을 해서 방금 선박계약을 체결했습니다. 선적은 예정대로 진행을 하게 되니, 형님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더블해운을 믿고 이 사업을 진행 할 수는 없을 거 같습니다. 중원그룹과 장기용선 계약을 할 생각입니다. 제가 할 수 없으니, 더블해운은 형님께서 버릇을 좀 고쳐 주십시오.”

    “샤…, 샤오…리, 중원그룹과 이미 계약을 체결했다고 말했나?”

    경환이 중원그룹과 용선계약을 체결하리라곤 전혀 예상을 하지 못했던 장성궈는 머리를 한대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중원그룹의 궈청은 자신도 만만하게 대할 수 없는 배경을 가진 인물이었다.

    “네, 형님. 궈청 총경리가 제 부탁을 흔쾌히 받아 줬습니다. 단지 요번 항차의 경우 기존 선임에서 9만 불을 더 주기로 했습니다. 형님과는 연락이 안 되고 급히 선박을 수배해야 되었기에 제가 결정을 했습니다. 더블해운 때문에 형님 얼굴이 깎이는 걸 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번 손실이 생긴 9만 불은 제가 떠안고 가겠습니다. 아우인 제가 책임을 지지 않으면 누가 지겠습니까.”

    장성궈는 미치고 환장하기 일보직접이었다. 아는지 모르는지 경환은 철저하게 자신과 더블해운을 분리해서 모든 책임을 더블해운으로 돌리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자신이 더블해운을 두둔하게 된다면 자신의 입장만 난처해 꼴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장성궈는 허탈한 표정으로 경환을 바라보았다.

    “샤오 리, 그 무슨 말이야. 더블해운은 내가 단단히 주의를 주겠네. 그리고 자네가 손해를 본 9만 불도 응당 형님인 내가 책임을 져야지. 9만 불은 홍콩구좌에서 처리를 하도록 하게. 더블해운 리닝은 내가 버릇을 고쳐서 자네에게 다시 보낼 테니 오해가 있으면 풀어보도록 하고.”

    경환의 예상대로 자존심이 강한 장성궈는 9만 불까지 떠안긴 경환은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속이 후련했지만 최대한 죽을상을 지어 보였다.

    “형님께 미리 허락을 받았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더블해운 리닝은 형님 말씀대로 다시 만나 보겠습니다. 제가 좀 더 신경을 써서 더블해운을 관리했어야 했는데, 형님께서 버릇을 고쳐 주신다면 제가 중원그룹의 궈청을 다시 만나 선박 배분 조정을 해 보겠습니다. 어제는 급해서 전체 물량을 다 주겠다고 호언장담을 했는데 저도 걱정이 좀 되긴 하네요. 신경 쓰게 해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형님.”

    경환이 이런 수를 만들 줄은 예상하지 못한 장성궈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경환을 곤경에 빠트려 왕샹첸의 제안을 받아들이게 만들려던 함정에 자신이 빠진 꼴이었다. 그래도 기분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이 정도의 수완이라면 자신이 생각하는 규모의 비자금을 충분히 관리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어서였다. 왕샹첸에게는 미안했지만 경환을 잡을 수는 없다는 판단을 내린 장성궈는 더 이상 경환과의 인간적인 관계까지 망치고 싶지 않았다.

    장성궈의 청천벽력과도 같은 전화를 받은 리닝은 정신이 나간 상태였다. 준비한 선박에 대한 페널티도 문제지만 중원그룹으로 물량이 넘어 갈 수도 있다는 소리에 하던 일을 모두 중단하고 담당자들과 함께 경환을 만나기 위해 사무실을 떠나고 있었다.

    “이 사장님. 뭔가 오해를 하신 듯 한데, 선박은 이미 상해에서 출항 대기 중에 있습니다. 원 계약대로 진행을 해 주셨으면 합니다.”

    리닝의 사정에도 경환은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있었다.

    “지금 그런 얘기를 해 봐야 소용없습니다. 이미 중원그룹과 계약을 체결을 한 상태입니다. 그리고 저희의 계약해지는 정당하게 이뤄졌으니 법으로 해결 하셔도 됩니다.”

    김창동이 고소하다는 표정으로 리닝의 속을 뒤집고 있었다. 중원그룹이 개입이 되었다면 리닝도 어쩔 수 없었다.

    “좋습니다. 이번은 저희 담당자의 실수가 명백하니 저희가 감수를 하겠습니다. 다음 항차부턴 원 계약대로 진행이 되게 해 주십시오.”

    아직도 반성을 하지 않고 있는 리닝이 괘씸하게 생각한 경환이 리닝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한국인이라고 만만히 보이던가요? 당신의 무책임한 행동에 우리 회사 또한 9만 불이라는 거금을 손해 봤습니다. 당신과는 거래할 생각이 전혀 없지만, 만약 당신이 제 형님인 장성궈 총경리에게 사죄하고 용서를 받는다면, 내가 당신과의 거래를 다시 생각을 해 보겠습니다. 지금은 당신과 할 얘기가 없으니 돌아가십시오.”

    경환의 축객령에 리닝은 쫓기듯 사무실을 빠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게 장성궈가 꾸민 일이라고 말할 수 없는 리닝은 속이 까맣게 썩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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