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53화 (245/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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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인생 - 53

    최석현의 결혼을 무사히 치르고 경환은 다시 북경으로 돌아와 북경에서의 마지막 학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중국은 가을학기 시작이었지만, 경환은 학점을 인정해 주기로 약속을 받은 상태였기 때문에 이번 학기를 마치고 한국에서 졸업을 할 생각이었다. 이제 어느 정도 중국의 사업도 김창동에게 맡겨 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더 이상 중국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장성궈와의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일 년에 한두 차례 중국을 방문하는 거 외에는 중국 사업은 당분간 손을 대지 않을 생각이었다.

    경환은 경무부 왕샹첸의 호출을 받고 오랜만에 경무부로 향하고 있었다. 부른 이유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큰일이야 있겠냐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경환의 차를 기억하고 있던 경비실에선 검문도 없이 경환을 통과 시켜 주었다.

    “왕 조리님, 오랜만에 찾아뵈었습니다. 바쁘실 텐데 무슨 일로 저를 부르셨는지요?”

    “성궈와 바오밍에겐 형님이라고 부르면서 나에겐 아직까지도 왕 조리라고 부르나? 이거 섭섭한데.”

    왕샹첸의 농담에 경환은 썩은 미소만 짓고 있었다. 왕샹첸과는 공식적인 자리 외에 사적인 자리를 가져 보지 못했기 때문에 경환은 왕샹첸과의 만남이 부담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자네도 바쁠 테니 용건만 말하겠네. 우리 부장이 자네가 제안한 ONE-STOP SERVICE를 제한적이긴 하지만 한국의 투자유치에 적용을 하려고 준비 중에 있네. 만약 소기의 성과를 보여 준다면 이를 광범위하게 적용을 시킬 예정이네.”

    경환의 똥 씹은 얼굴로 왕샹첸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도 제안자인 자신을 이용하기 위해 부른 거라는 사실은 삼척동자도 알 수 있었다. 경환은 이 자리에서 선을 긋지 않는 다면 코가 꿰일 수도 있다는 것을 감지하고 급히 손사래를 쳤다.

    “왕 조리님, 저는 단지 자문위원의 자격으로 제안을 드린 겁니다. 제 능력으로는 도저히 성과를 낼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요번 학기만 마치면 한국에 돌아가 졸업을 할 예정입니다.”

    경환의 단호한 거절에도 왕샹첸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자네 말은 충분히 알아듣겠네. 내가 보기엔 이삼 년만 이 일을 맡아 주면 좋겠는데 다시 한 번 생각을 해 보게.”

    이삼 년이라는 말에 경환은 경기가 온 몸에 돌아다니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하루라도 빨리 중국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던 경환에겐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왕 조리님, 사업가의 기본은 신용과 신뢰라고 생각을 합니다. 제가 미국과 한 번의 신뢰를 깬 경력이 있습니다. 이번에도 그 신뢰를 깨게 된다면 제 개인적으로 상당한 타격을 받게 됩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부탁드리겠습니다.”

    왕샹첸은 평소의 습관대로 펜으로 결재 판을 톡톡 쳐가며 경환을 말없이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게 더 불안한 경환이었다.

    “뭐, 자네가 이렇게까지 어려워 할 줄은 몰랐네. 내 부장에겐 잘 말을 해 볼 테니 자네는 자네의 일을 차질 없이 진행하게나.”

    경환은 고개를 숙여 인사를 마치고 쫓기는 듯 경무부 청사를 빠져 나왔지만,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던 왕샹첸의 모습이 생각나 불안하기만 하였다. 지금 경환의 심정은 하루라도 빨리 중국을 벗어나고 싶은 심정뿐이었다.

    경환이 왕샹첸의 제안에 불안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을 때 오성건설에서는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박 차장 도대체 일이 왜 이 지경까지 되도록 모르고 있었던 건가?”

    박화수는 황태수 앞에서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부장님, 죄송합니다. 제가 관리를 잘 못한 탓에 이런 손해가 발생했습니다. 책임은 제가 지겠습니다.”

    박화수는 손에 들고 있던 사직서를 황태수의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았다. 황태수는 사직서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큰 소리로 박화수를 나무라고 있었다.

    “야, 인마. 너 나를 뭐로 보는 거야? 책임을 져도 내가 져. 우선은 사태파악부터 해보고 정 안되면 그때 다시 얘기를 해 보자고. 딴 생각하지 말고.”

    말은 이렇게 하고 있었지만 황태수는 일이 쉽게 풀리지 않을 것이란 걸 감으로 느끼고 있었다. KBR과의 기술제휴에 실패한 오성으로서는 KBR의 대안으로 브로커를 통해 일본의 플랜트 전문업체인 JSC와의 기술제휴에 공을 들이고 있었다. 커미션 선 지급을 요청한 브로커의 제안을 황태수의 반대에도 위 경영진들은 승인을 했고 커미션을 챙긴 브로커는 차일피일 세월만 죽이고 있었다. 사태가 심각해짐에 따라 선 지급비용이 문제화 되었고 희생양이필요했던 오성에서는 기안자인 박화수를 그 희생양으로 지목해서 관리부실에 대한 책임을 묻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구태의연한 경영진의 작태에 황태수는 분노를 느꼈지만, 자신이 박화수를 도와 줄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어 보였다. 단지 자신이 박화수에게로 향한 총대를 대신 지는 방법밖에는 딱히 보이지 않았다. 경환의 회귀로 인해 황태수의 인생은 경환과는 달리 자꾸만 꼬여가고 있었다. 박화수의 사직서를 찢어버린 황태수는 눈을 감고 한숨을 크게 쉰 뒤 자신의 사직서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팀장님, 어째 느낌이 싸합니다.”

    갑자기 경환을 찾은 김창동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가며 인상을 피지 못하고 있었다. 김창동은 자신의 경험에서 쌓여진 감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 3항차 물량도 이미 진황도에 빠져 나와 있는데 특별히 문제 될 것이 있나요? 사소한 거라도 일단 말을 해 주십시오. 저도 요새 뭔가가 터질 거 같아 불안한 마음은 항상 있습니다.”

    왕샹첸의 그 알 수 없던 미소가 계속 경환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었다.

    “더블 해운에서 요새 NOON REPORT(하루에 한번 선박의 위치를 통보)를 제대로 주지 않고 있어서요. 계약된 LAYCAN에는 이상 없이 선박이 도착한다는 소리만 하는데, 제 감이 좀 안 좋습니다. 물론 제가 틀렸을 수도 있지만요.”

    경환은 하던 일을 중단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경환 자신도 느끼고 있던 불안감이 현실화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부장님, 부장님의 감이 맞는 거 같습니다. 우리가 제대로 엿을 먹게 생겼네요. 아직 열흘이란 시간이 있으니 대안을 찾아 봐야겠습니다. 우선은 더블해운에게 나갈 정식 공문을 작성해 주십시오. LAYCAN안에 선박이 도착하지 못할 시 경제적인 모든 손실을 법적으로 묻겠다고 하십시오. 내일 오전까지 정확한 답변이 없을 시 계약은 자동 해지 시킨다는 내용도 집어넣으시고요.”

    경환은 이제야 왕샹첸의 미소의 의미를 알 수 있을 거 같았다. 자신을 곤경에 빠트려 놓고 도움을 주는 척하며 제안을 받아들이도록 강요를 하려는 것이란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중국선사에 법적인 책임을 묻겠다는 공문을 보내봤자 씨알도 먹히지 않을 걸 뻔했다. 선임에서 마진을 챙기려고 했던 경환의 욕심이 부른 어이없는 사고였다. 경환은 자책을 하고는 있었지만 지금 이 상황을 해결해 줄 수는 없었다.

    한 가닥 희망을 갖고 장성궈에게 전화를 돌려 봤지만 외부 출타 중이라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소리만 되풀이 하고 있었다.

    ‘썩을 새끼들. 날 길들여 보겠다 이거지. 함 해 보자고.’

    “팀장님, 더블해운에서 똑 같은 말만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저희들이 제대로 당한 거 같습니다. 정식문서는 이미 보냈습니다.”

    김창동의 급한 목소리에도 경환은 쉽게 대안을 찾을 수 없었다. 혹시라도 선박으로 인해 작업이 지연된다거나 L/C AMEND를 해야 될 사항이 벌어진다면 제일그룹과의 관계에서 쥐고 있던 칼자루를 뺏길 수도 있는 문제였다. 이런 사태는 무조건 막아야만 했다.

    “부장님 우선 최 차장을 급히 한국에 보내 국내 선사들과 협의를 하라고 하십시오. 선임은 달라는 대로 다 주라고 하시고요. 돈이 문제가 아니라 신용이 문제입니다. 그리고 통화가 끝나시면 저와 중원그룹에 들어가시고요.”

    경환은 장성궈에 계속 전화를 돌려 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똑 같았다. 이런 사태를 미리 알고 의도적으로 전화를 피하고 있단 것을 경환은 재확인 할 수 있었다. 급히 한국으로 최석현을 보낸 경환은 중원그룹의 총경리실을 방문하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제가 총경리인 궈청입니다.”

    “초면에 실례가 많습니다. 이경환이라고 합니다.”

    50대 중반을 넘겨 보이는 궈청은 사전 약속도 없이 찾아 온 경환을 흥미 있게 바라보고 있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열흘 후 DWT 3만 톤급 선박을 진황도로 보내 주실 수 있으십니까? 하역항은 한국의 인천입니다.”

    느닷없는 경환의 요청에 궈청은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고 있었다. 궈청은 더블해운에서 장난을 치고 있다는 것을 듣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도 3만 톤급 대형선박을 대뜸 내어 줄 수는 없었다.

    “어려운 부탁을 하시는 군요. 이번 일의 뒤에 누가 있는지는 알고 계시나요?”

    “대충 짐작은 하고 있습니다. 현재 한국으로 제 직원이 향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선사들과도 협의를 할 생각입니다. 가급적이면 중국에서 하는 사업에 중국기업과 협조를 하고 싶은 생각이지만 여의치 않으면 한국으로 돌릴 수밖에 없습니다.”

    궈청은 경환이 애당초 자신들과 계약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부하직원을 통해 보고를 받았었다. 그러나 화동의 입김이 작용하여 더블해운으로 계약이 넘어간 사실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기에 화동의 뒤를 봐주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제가 도움을 드려서 얻는 이득이 뭐가 있을까요? 자칫 잘못하다가는 내 목도 남아있지 않을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일말의 가능성을 확인한 경환은 궈청을 향해 자신의 생각을 전달해 나갔다.

    “열흘 뒤 선적이 급한 상황입니다. 우선 현재 계약된 선임에서 9만 불을 더 지불하겠습니다. 그리고 제 이름을 걸고 다음 항차부터 최소한 반 이상의 물량은 중원그룹과 계약을 체결하겠습니다. 화동의 입김에서 제가 자유로울 수 없다는 건 잘 아시리라 봅니다. 그래서 더블해운을 버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해 주십시오. 이 정도 조건이면 한국의 선사들도 움직일 수 있는 조건입니다.”

    자신의 이름을 걸겠다는 말과 솔직하게 더블해운을 버릴 수 없다는 것을 사실대로 밝힌 경환을 향해 궈청은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설득이 어렵다고 판단한 경환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죄송했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무리한 부탁을 드린 거 같습니다. 다른 방도를 찾아보겠습니다. 제가 급해서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지 못한 점 사과드립니다.”

    경환이 급히 인사를 하고 자리에서 뜰 무렵 궈청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난번 교통부에서 SOC관련 브리핑을 감명 깊게 들었습니다. 저도 교통부 자문위원으로 있다 보니 우연찮게 그 자리에 참석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 더블해운의 작태는 같은 업종에 있는 사람으로서 부끄럽기도 하고요.”

    경환은 일어나려던 엉덩이를 다시 소파에 붙이고 앉았다. 아직까진 궈청의 진의에 대해 알지 못하였기에 궈청의 다음 말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좋습니다.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하죠. 자신의 이름을 건다고 공언을 하셨으니 믿어 보겠습니다. 저도 제안을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일단 급한 불을 끌 수 있다는 안도감이 경환에게 몰려왔다. 궈청의 제안이 무엇일지 궁금하긴 했지만 지금 경환으로서는 최대한 들어 줄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우선 감사드립니다. 무슨 제안일지는 모르겠지만 제 능력의 범위 안에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말씀 하십시오.”

    “해상운송과 국내운송을 포함한 전반적인 물류 합작파트너를 한국에서 선정을 해 주셨으면 합니다. 아직은 물류부분이 한국에 비해 많이 뒤쳐져 있습니다. 정부에서는 우리 중원그룹이 나서서 한국의 선진 물류체계를 도입하려고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가능하시겠나요?”

    일본의 대형물류업체인 일본통운이 끊임없이 중원그룹과의 합작을 모색하고 있었지만 일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중원그룹은 한국으로 눈을 돌리려고 하고 있었다. 경환 자신이 아니더라도 90년대 후반부터 중원그룹은 한국의 물류업체들과 많은 합작을 이뤄나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궈청의 제안은 경환에게는 어렵지 않은 제안이었다. 오히려 한국의 물류업체들이 쌍수를 들고 줄을 서야만 하는 제안이었는데 왜 자신에게 의뢰를 하는 알 수가 없었다.

    “좋습니다. 궈 총경리님의 제안을 받아 드리겠습니다. 이중계약의 문제가 있을 수 있으니 FIXTURE NOTE(용선계약서)는 내일 오후에 체결하겠습니다. 그때까지는 비밀을 유지해 주셨으면 합니다. 중원그룹 스스로도 파트너를 구하는 데 어려운 점이 없을 텐데 왜 저에게 의뢰를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하하하, 교통부에서 있었던 브리핑에서 미래의 물류변화를 정확히 예측하는 것이 상당히 놀라웠습니다. 그런 지식을 제가 활용을 해 보고 싶을 뿐입니다.”

    궈청의 답변에 경환은 장차 아시아 최대 물류회사로 성장하는 중원그룹에 대해 다시 한 번 무서움을 느꼈지만 지금은 자신이 먼저 살아나야만 했다. 경환은 속으로 왕샹첸과 장성궈를 씹고 있었다.

    ‘거지같은 새끼들, 9만 불 다 뱉어 놔봐. 니들 다 죽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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