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52화 (244/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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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인생 - 52

중국방송에선 특집방송을 편성하여 이번 한국과의 외교관계에 수립에 대해 온갖 미사여구를 활용하여 장황하게 늘어놓고 있었다. 이미 대만에서는 한국거주자와 유학생에 대한 테러가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었지만, 이런 보도는 찾아 볼 수조차 없었다. 한국과 중국의 외교수립으로 중소기업 위주로 물밀듯이 중국에 진출을 하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경환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들 중 극히 일부만이 성공의 기쁨을 맞볼 수밖에 없다는 걸 경환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경환은 자신이 아직은 그들을 도와 줄 여력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우선은 지켜 볼 생각이었다. 정식등기를 마친 북경사무소는 북경호구를 가진 현지인을 채용하여 회사다운 구색을 갖추어 가고 있었다. 유연탄은 2항차 물량이 이미 빠져 나갔고 3항차 물량을 준비하고 있었고, 시간적 여유가 생긴 경환은 김창동 식구들과 함께 홍콩에서 있을 최석현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일정을 조정하고 있었다. 그때 사무실 문이 열리고 반가운 인물이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잭? 오랜만에 뵈니 반갑네요. 연락을 받긴 했지만 북경까지 올 줄을 몰랐습니다.”

“제임스, 사무실이 근사하군요. 축하합니다. 사업을 시작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좀이 쑤셔서 휴스턴에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반가운 악수를 나눈 두 사람은 회의실로 향했다. 경환은 잭이 윌리엄의 지시를 받고 방문했다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잭 앞에서 내색을 하지는 않았다. 김창동에게 안젤라를 맡기고 회의실로 들어온 두 사람은 여직원이 가져다 준 커피를 한잔 마시고 있었다.

“미스터 유트가 맘이 조급한가 보네요. 바쁜 잭을 중국까지 보낸 걸 보면.”

잭은 경환에게 자신의 목적이 들켰다는 생각에 허탈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양 어깨를 들썩거렸다.

“하하하, 속일 수가 없군요. 맞습니다. 윌리엄이 절 여기에 보낼 정도로 제임스의 다음 행보를 궁금해 하고 있습니다. 궁금증을 좀 풀어 주겠습니까?”

“나이지리아 입찰 때문인가요? 그건 이미 KBR을 우선적으로 컨설팅 해 주겠다고 계약을 체결한 거로 알고 있는데요. 제가 미스터 유트에게 신뢰를 주지 못하고 있나 봅니다. 이런…, 이거 아쉬운데요.”

경환은 농담을 섞어가며 잭에게 말을 하고 있었지만, 잭은 굳은 표정으로 경환을 바라볼 뿐이었다. 경환은 그런 잭의 표정을 읽고 있었다.

“제임스, 내년 유학은 차질 없이 진행이 되는 데 문제가 없는 건가요?”

갑자기 미국유학 얘기를 꺼내는 잭을 경환은 이상한 듯 쳐다보았다. 그러다 경환은 혼자 피식 웃음을 지어 보였다. 잭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제가 공부하고는 영 맞지를 않는 거 같아, 유학은 사실 포기할까 생각 중입니다. 미국에 가려던 목적이 공부가 아니었던 것은 잭도 아실 거라 봅니다.”

경환의 말에 잭은 급히 표정이 어두워졌다. 유학을 포기한다는 것은 미국에서 사업을 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이해를 할 수밖에 없어서였다.

“제임스,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 어려운 편입까지 저희들이 도와주었고 2년 연기까지 힘들 게 했는데 이제 와서 유학을 포기하겠다고 하면 우리 입장도 난처해진다는 걸 모르십니까? 이거 제임스에게 실망했습니다!”

잭의 갑작스런 큰 소리에 경환은 놀라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고, 회의실 밖에서는 직원들이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경환은 잭의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급히 말을 꺼냈다.

“잭, 흥분하지 마시고 제 말을 끝까지 들어 주세요. 제가 공부를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는 거지 미국에 가지 않는 다는 말은 아닙니다. 단지 공부를 하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그 기회를 주고 싶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겁니다.”

경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잭은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은 듯 경환을 무섭게 쏘아 보고 있었다. 더 이상 잭을 놀렸다가는 좋은 관계가 틀어질 것을 염려한 경환은 차근히 잭에게 자신의 계획을 털어 놓기 시작했다.

“홍콩법인 제 직원 중에 인재가 한 명 있습니다. 홍콩대학에서 국제경제를 공부한 직원인데 영국유학을 가려던 걸 제가 눌러 앉혔습니다. 그 친구에게 저 대신 기회를 주고 싶은 겁니다. 또 하나 이유가 있다면 제 아내가 미술을 전공을 했습니다. 제 아내도 이참에 전공을 다시 살릴 기회를 주고 싶은데, RICE 대학에는 미술대학이 없더군요. 그래서 고민입니다. 뉴욕으로 가야 될지 아니면 계획대로 휴스턴으로 가야 될지.”

경환은 KBR의 소재지에 자신을 묶어 두려는 윌리엄의 뜻을 읽고 있었다. 더 좋은 조건을 받아 내기 위해 경환은 행선지를 휴스턴으로 못을 박지는 않았다.

“휴스턴에 대학이 RICE만 있는 건 아니에요. 제 아내가 휴스턴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했습니다. 제임스가 행선지를 바꾸게 된다면 제 입장이 난처해집니다. 미시즈 리의 유학을 우리가 편의를 제공할 테니 제임스는 예정대로 진행을 해야 됩니다. 아시겠습니까?”

잭의 강압에 경환은 일부러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고민하는 모습을 잭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경환과 달리 잭은 긴장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뉴욕이나 다른 지역에서 사업을 시작한다면 KBR이 경환의 정보를 얻는 최우선 대우에서 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사실 고민이 많이 됩니다. 제 아내는 미술대학으로 유명한 뉴욕주립대학을 원하고 있다 보니 어떻게 설득을 해야 될지 모르겠네요.”

사실 수정은 미국에서 유학을 할 생각이 전혀 없었고 또한 경환은 이 문제에 대해 수정과 얘기를 나눠 본 적도 없었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잭은 마음이 급해졌다.

“휴스턴대학도 뉴욕주립대 못지않습니다. 제임스도 인맥이 없는 뉴욕보다는 휴스턴이 사업지로 적격일 겁니다. 휴스턴으로 내년에 오는 거로 알고 있겠습니다.”

못을 박아 버리는 잭에게 경환은 죽을상을 해 보이고 있었다.

“휴우…, 어렵네요. 최대한 설득을 해 봐야죠, 별수 없겠네요. 아, 그리고 예전 화성산업의 미스터 최를 아실 겁니다. 지금 저와 같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10월 달에 미국에 먼저 보낼 예정입니다. 만약 휴스턴에 법인을 설립한다면, 법률적인 자문 등 회사설립에 필요한 모든 사항에 대해 도움을 주실 수 있으신가요?”

잭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경환의 부탁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오르고 있었지만, 혹시라도 경환이 뉴욕으로 가 버리는 것 보다는 화를 참는 게 손해를 줄이는 최상의 방법이었다.

“우리와 거래중인 로펌을 소개시켜 주겠습니다. 회사설립 및 세무에 대한 법률적 자문을 해 줄 것입니다. 우리의 부탁이니 로펌에서도 무시할 수 없을 겁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모두 얻은 경환은 이제야 안심이 된다는 표정으로 잭에게 고마움을 표했고, 최대한 자신의 아내를 설득하겠다는 답을 잭에게 주었다. 잭과의 회의를 마친 경환은 사무실 직원들을 모두 대동하고 잭에게 중국식 요리를 대접했지만, 잭은 식사가 끝날 때까지 굳은 얼굴을 풀지 못했다.

“언니, 홍콩은 처음이라고 했죠? 여기 쇼핑이 아주 좋은데 애들은 남자들한테 맡겨버리고 오늘은 저하고 같이 쇼핑하러 다녀요.”

“응, 그럴까? 호호, 홍콩은 스톱오버만 해서 공항 안에서만 있었거든. 둘이 나가도 될까?”

남편의 눈치를 보는 인준 엄마를 수정이 손을 끌어 버렸다. 수정의 날카로운 눈빛을 의식해서 인지 경환은 김창동에게 도움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여보, 알았어. 애들은 내가 볼 테니까, 저녁식사에 늦지 않게만 호텔로 돌아와.”

남편의 허락을 받은 인준 엄마는 거칠게 없다는 듯이 수정과 함께 호텔 문을 나섰다. 미국유학 얘기를 꺼내는 바람에 아기를 갖기 싫어 공부를 시키느냐는 수정의 잔소리를 듣고 있는 경환이었다. 사실 수정이의 잔소리가 틀리지는 않았다. 공부를 시작하게 되면 적어도 임신은 뒤로 미룰 수 있다는 경환의 얄팍한 속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경환은 수정이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최석현의 결혼식을 핑계로 그 동안 맘고생이 많았던 식구들에게 휴가 식으로 같이 온 홍콩이었다.

“부장님, 어쩌겠습니까? 당분간 여자들 비위를 맞춰줘야죠. 그래야 앞으로의 일 년이 편안한 거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억지웃음을 짓는 경환을 김창동은 불쌍하게 쳐다보았다. 사업적인 판단과 추진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마누라한테 꽉 잡혀 사는 모습이 어딘가 모르게 안쓰럽게 느껴지고 있어서였다. 두 사람은 아내들이 쇼핑에서 돌아올 때까지 아이들과 같이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처지로 전락했다.

다음 달 특급 호텔에서 거행된 결혼식은 화려하게 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12명이 앉을 수 있는 원탁 테이블에는 광동식 요리가 화려하게 차려져 있었고, 식사를 즐기는 와중에 턱시도와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랑신부가 양가 부모님에게 꽃다발을 전해 주는 것으로 결혼식이 시작되었다. 한국의 결혼식과는 달리 변호사의 입회하에 두 사람의 결혼선서와 결혼서약서에 두 사람이 사인을 함으로서 간단히 결혼식을 마쳤다. 그 이후로 신랑신부가 각 테이블을돌아다니며 하객들과 술을 나눠 마시거나 사진을 찍는 등 밤늦게까지 연회가 끝나지 않았다.

마침내 경환의 테이블로 온 두 사람은 경환에게 신랑을 대표해서 한마디 해 달라는 요청을 했지만, 경환은 극구 거절을 하고 있었다. 나이도 어린 사람이 두 사람을 위해 연설을 한다는 게 부담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계속된 간곡한 부탁에 경환은 어쩔 수 없이 일어나 앞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저는 신랑신부와 한 직장에서 일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 두 사람의 결혼식에 참석할 수 있어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국과 홍콩 말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지만 사랑으로 두 사람이 행복한 미래를 건설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두 사람은 조만간 미국으로 먼 길을 떠나야만 합니다. 이 두 사람의 앞날을 위해 하객 분들의 지지와 성원을 부탁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짧은 연설을 끝내고 경환은 부끄러운 듯 재빨리 테이블로 돌아와 앉았다. 경환은 진심으로 두 사람의 행복을 바라고 있었다. 자신의 식구들이기도 한 두 사람의 행복이 오래도록 지속 될 수 있도록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 생각이었다.

북경 티엔먼에 위치한 췐치더는 북경오리로 유명한 식당으로 늦은 저녁시간이었지만,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손님으로 꽉 차있었다. 식당의 구석진 방으로 왕샹첸 조리가 들어가고 있었다.

“샹첸이 왔나? 오늘은 오리가 먹고 싶어서 이리로 불렀네. 어서 자리에 앉아”

“부장이 찾기 때문에 오래 있을 시간이 없네. 용건만 말하고 다시 가야 되네.”

바삭하게 구워진 오리껍질을 전병에 올려놓는 장성궈는 왕샹첸을 의식하지 않고 입을 벌려 전병을 구겨 넣고 있었다.

“샤오 리는 어떤가? 제대로 일은 하고 있나?”

게걸스럽게 북경오리를 먹고 있던 장성궈는 급히 입에 있던 전병을 삼키고는 테이블 위에 있던 찻잔을 들어 입을 게우고 있었다.

“너무 잘해서 걱정이야. 추가해준 50만 톤도 별 어려움 없이 소화를 할 거 같아 보이네. 갑자기 샤오 리에 대해서는 왜 묻는 건가?”

장성궈는 갑자기 경환에 대해 묻는 왕샹첸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지만, 무슨 이유인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었다.

“경무부 부장이 샤오 리에 대해 관심을 많이 보이네. 지난번 샤오 리가 제안한 투자유치 활성화 방안을 샤오 리를 통해서 한국에 적용을 시켜 보려고 하고 있어. 문제는 샤오 리가 내년에 중국을 떠난다는 건데 부장이 샤오 리를 설득해 보라는 지시를 내렸네. 무슨 방법이 없겠나?”

집었던 오리껍질을 접시에 다시 내려놓은 장성궈는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후 왕샹첸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샤오 리의 성격을 아직도 모르겠나? 오고 싶어서 온 중국이 아닌데 붙잡는 다고 남아있을 샤오 리가 아니지. 어떤 당근을 제공한다 하더라도 쉽지 않을 걸세.”

테이블 위에 맥주가 가득 따라진 잔을 든 왕샹첸은 단숨에 맥주를 마셔버렸다. 부장의 특별히 지시한 사항을 수행하지 못한다면 눈 밖으로 밀려 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야망이 이런 하찮은 일로 중단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방법이 없겠나? 샤오 리가 자네 말이라면 어느 정도 들어 줄 거라고 보는데.”

“샤오 리 그 친구 아주 영악한 거 모르겠나. 중국에 투자를 하라는 내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홍콩법인의 연락사무소로 등기를 마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언제든지 중국에서 발을 빼겠다는 뜻이라고 나는 생각하네. 보면 볼수록 샤오 리의 속을 모르겠더라고. 붙잡기 쉽지는 않을 걸세.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장성궈의 말에 왕샹첸은 귀가 솔깃해졌다. 지금은 찬물 더운물 가릴 처지가 못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방법이란 게 뭔가? 신상에 해가 가지 않는 선이라면 나도 문제 삼지 않겠네.”

“좀 치사하긴 하지만 자네가 필요하다고 하니, 이런 건 어떻겠나?”

경환은 이런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 채 두 사람의 밀담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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