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51화 (243/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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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인생 - 51

김세동은 귀국 후 경환과의 유연탄 계약을 서둘러 진행을 시켰다. 총 30만 톤으로 물량을 확정하고, 신용장은 당분간 매 건마다 오픈을 하겠다는 제안을 했고 경환은 이 조건에 합의해 주는 조건으로 TRANSFERABLE L/C 조항을 계약서에 명시해 달라는 요구를 관철시켰다. 장 사장과 제일그룹이 모두 노출된 상태에서 제일그룹의 L/C를 받아 홍콩에서 화동에 TRANSFER L/C로 오픈해 주는 건 큰 문제는 아니었다. 비자금이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은 제일그룹에서도 모르는 사항이었기 때문이었다.

아직 홍콩사무소의 등기절차는 마무리 되진 않았지만 경환과 김창동은 인테리어가 마무리된 사무실로 출근을 하고 있었다. 아직 현지직원을 채용한 상태는 아니었지만 두 사람이 일을 처리하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홍콩에선 언제 TRANSFER L/C가 오픈이 된다고 하나요?”

“보험증서가 나오면 오늘 오후나 늦어도 내일 중엔 화동에 오픈이 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현재 최 차장이 에릭과 같이 작업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오후에 다시 한 번 확인을 해 보겠습니다.”

제일그룹의 신용장은 이미 도착을 한 상태였다. 중국에서 시작하는 첫 사업인 관계로 경환 또한 적지 않은 긴장을 하고 있었다. 첫 단추를 잘 꿰어야만 앞으로의 일이 수월하게 풀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박 준비는 이상이 없지요?”

“네, 선박회사와 오전에 통화를 마쳤습니다. 계약된 LAYCAN(선적예정일)에 문제없다는 통보입니다.”

경환은 제일그룹과 CIF계약을 화동과는 FOB로 계약을 체결해 선박을 경환이 투입함으로서 선임에서도 마진을 남기려 했다. 중국의 최대 선사인 중원그룹과 장기계약을 추진할 생각이었으나, 장성궈의 요청과 무언의 압력으로 화동과 거래중인 선사와 계약을 할 수밖에 없었다. 불안감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장성궈의 요구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

“부장님, 첫 항차이니 만큼 제일그룹에 꼬투리를 잡히지 않도록 신경을 써 주세요. 당분간은 저희 둘이 일을 진행하고 이번 작업이 끝나는 대로 직원을 채용하시죠.”

“알겠습니다. 준비를 해 놓겠습니다. L/C가 오픈이 되면 저는 바로 황규동 차장과 진황도로 내려가서 준비사항을 확인하겠습니다.”

황규동과 같이 내려가겠다는 말에 경환은 희미한 미소를 보였다. 김세동은 귀국을 하자마자 이번 사건을 일으킨 황규동을 주재원 신분이 아닌 장기 파견으로 북경으로 발령을 내 버렸다. 주재원과 파견자의 대우는 하늘과 땅 차이였지만, 황규동은 아쉬운 소리를 할 처지는 아니었다.

“황 차장 요새 어떻습니까?”

김창동은 이빨을 보이며 웃어주는 거로 대답을 대신했다. 본사의 끈이 다 떨어진 상태에서 경환의 눈 밖에라도 난다면 자신이 돌아갈 자리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황규동은 필사적으로 김창동과 경환에게 빌붙으려 노력을 하고 있는 중이란 걸 경환도 알고 있었다.

휴스턴의 살인적인 여름 날씨는 지독하다는 표현밖에는 쓸 수 없을 정도였다. 에어컨이 없었다면 견디기 힘들 정도로 사람의 진을 쪽 빼버리기에 충분했다. 에어컨이 쉴 새 없이 돌아가는 회의실에는 잭이 윌리엄과 자리를 하고 있었다.

“잭, 사우디가 마무리 되고 있으니 본사로 돌아오게. 가스화복합발전소는 스티브를 책임자로 보낼 생각이야.”

잭은 윌리엄의 호출로 급히 본사로 돌아온 상태였다. 자신이 입찰에 성공한 가스화복합발전소를 스티브에게 주는 것이 아쉽기는 했지만 자신도 이제는 본사에서의 입지를 다져야 될 시기였기에 윌리엄의 제의를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스티브라면 충분하고도 남을 겁니다. 화성산업과의 일은 잘 진행이 되어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한국인들이 요새 날 자주 놀라게 하더군. 기술을 빨아들이는 속도와 그걸 받아들이는 자세가 무서울 정도라는 보고를 받았네. 파견 보낸 엔지니어들의 의견은 핵심설비를 제외하고는 일 년 후면 우리가 원하는 수준에는 도달할 수 있다는 판단들이야. 지분을 더 확보하지 못한 게 좀 아쉬울 정도더군.”

기술이전계약을 체결한 화성산업은 죽기 살기로 KBR의 비위를 맞춰가며 기술습득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경환의 제안을 받아들여 미래의 이득을 위해 당장의 손해는 전부 감수하고 있었다. 오히려 KBR에서 파견 나온 엔지니어들이 쉴 시간을 달라고 항의를 할 정도로 전 직원이 기술습득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제임스뿐만 아니라 난 요새 한국이란 나라가 우리의 턱까지 치고 들어오고 있다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어. 내년이면 제임스도 미국으로 오겠다고는 했지만, 무조건 휴스턴으로 불러들여야 되네. 내가 자네를 본사로 급히 부른 이유 중의 하나도 제임스 문제 때문이야.”

“휴스턴으로 유학을 오기로 이미 결정을 한 상태 아닙니까? 다른 변수가 있나요?”

윌리엄의 말에 잭은 자신이 제임스에 대해 놓치고 있는 문제가 있는 거 같아 되물었다.

“안젤라의 보고로는 중국정부와 밀착이 된 상태라고 하네. 중국정부의 묵인 하에 한국으로 유연탄 수입권을 받았다고 하던데. 중국정부에서 제임스를 잡을 수도 있다는 안젤라의 판단을 내렸네.”

잭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중국에 간지 일 년밖에 되지 않은 상태에서 중국정부와 밀착이 될 정도로 인맥을 쌓은 경환이 도대체 어떤 인간인지 이해 할 수가 없었다.

“제임스와 이미 컨설팅 업무제휴 계약을 맺지 않았습니까? 중간에 화성산업도 끼여 있고요. 북경에서 제임스와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제임스는 중국을 큰 비즈니스를 할 나라로 보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윌리엄이 너무 큰 걱정을 하는 거 같습니다.”

잭은 이렇게 말은 하고 있었지만 솔직히 제임스의 다음 행동을 유추하는 거에는 자신이 없었다. 항상 자신의 생각을 뛰어 넘게 행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긴 하지만 중국정부에서 큰 미끼를 주지 않을까 싶어 걱정은 되네. 또 제임스가 미국에 온다 하더라도 휴스턴으로 온다는 보장도 지금으로서는 불확실하니까. 가장 염려가 되는 문제는 내년에 있을 나이지리아 석유화학단지 플랜트 입찰일세.

이번 아람코 입찰에서 보여준 경환의 무서운 정보력을 확인한 윌리엄과 잭은 나이지리아 입찰에 대해 신경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내가 걱정하는 건 제임스가 한국인이라는 걸세. 나이지리아는 자네도 알겠지만, 한국의 대후건설이 우리보단 유리한 게 사실 아닌가. KENTZ가 이런 점 때문에 대후건설과 기술이전을 미끼로 공동수주를 하기로 한 거고. 만약 제임스의 정보력이 대후로 흘러 들어간다면 우린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어.”

“흠….”

윌리엄의 상황판단에 잭은 신음을 흘렸다. 이번 나이지리아 입찰은 원유가 하락으로 각종 플랜트 건설이 취소되고 있는 상황에서 놓칠 수 없는 입찰이었다. 민족주의가 강한 한국인인 경환이 한국기업인 대후건설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윌리엄의 우려를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았다. 나이지리아에 70년대부터 진출을 시작한 대후건설은 KBR에게도 벅찬 상대인 것은 분명했다. 거기에 경환의 정보력까지 더해진다면 KBR은 애당초 게임을 시작하지도 못하는 상황이 될 수도 있었다.

“잭, 자네가 한 번 더 제임스를 만나봐야겠어. 모든 권한을 자네에게 줄 테니 무슨 수를 쓰더라도 제임스를 휴스턴에 정착을 하게 만들어 보게. 이번 건은 아람코 발주 건 이상으로 우리에게 중요한 입찰이라는 건 자네도 알지 않나.”

잭은 다른 이의를 달지 않고 윌리엄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잭은 순간 이 자리에 있어야 될 린다가 보이지 않는 사실에 의문이 들었다.

“윌리엄, 린다가 보이지 않는군요.”

잭의 질문에 윌리엄은 가볍게 웃어 주었다.

“린다가 요새 많이 감성적으로 변하는 거 같아, 여자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일부러 이 자리에 부르지 않았네. 준비가 되면 바로 북경으로 건너가도록 해”

윌리엄은 중요하지 않다는 듯이 린다에 대해 가볍게 얘기를 했지만, 잭은 인상이 굳어졌다. 린다에 대해 윌리엄이 너무 과소평가를 하고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잭과 윌리엄이 회의실에서 장시간 얘기를 나누고 있는 사이 회의실에서 점점 멀어지는 린다의 뒷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언니, 남편들도 출장 가서 없는데, 우리 집에서 저녁 같이 먹지 않을래요?”

수정은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혼자 밥 먹기가 싫었던지 인준 엄마에게 부탁을 하고 있었다. 김창동 부장이 경환과 일을 같이 하게 된 이후로 인준 엄마는 수정을 알게 모르게 피하고 있었다.

“저…, 제가 오늘은 약속이 있어서 힘들지도 몰라요. 다음에 하면 안 될까요?”

인준 엄마의 계속되는 존대에 마음이 불편한 수정은 인준 엄마의 곁으로 다가가 앉았다.

“언니, 부장님이 일을 도와주신다고 했을 때 경환 씨가 정말 아이처럼 좋아했어요. 전 그리고 경환 씨가 하는 일은 잘 몰라요. 그냥 언니가 옆에 있어 주는 게 얼마나 좋고 든든하지…, 그런데 언니가 절 피하는 게 맘이 너무 아파요. 그냥 예전처럼 절 동생처럼 대해 주세요. 남자들이야 조직이란 데서 움직이지만 나나 언니는 그냥 평범한 가정주부인데, 회사와 연결시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수정은 눈물까지 보이며 인준 엄마에게 자신의 진심을 보여 주었다. 인준 엄마는 깊은 한숨을 내 쉬며 수정의 손을 잡았다.

“남편이 회사에서 밀려나고 정말 눈앞이 캄캄해지더라. 그때 그 사람 손을 잡아 준 게 사장님이고, 난 너무 고맙고 미안해서 자기와 마주칠 수가 없었다. 미안해. 앞으로 나도 예전과 같이 자길 대하도록 노력할게.”

두 여자들이 두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는 지도 모른 채 경환과 김창동은 진황도에서 첫 선적되는 유연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자리에는 황규동은 물론이고 본사의 김세동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사장님, 우려는 했지만, 정상적으로 탄이 선적이 되고 있어 다행입니다. 제가 봤을 때 전혀 문제점을 찾을 수가 없네요. 하하하.”

황규동 차장이 부리나케 경환에게 달려와 과장된 몸짓을 해대며 아부 섞인 말을 늘어놓고 있었지만 경환은 굳은 얼굴을 풀지는 않았다.

“황 차장님, 북경생활이 힘드시면 저희 김 대표님에게 도움을 요청하십시오. 그리고 드리고 싶은 말이 하나 더 있습니다. 저희 김 대표님 눈 밖에 나지 마세요. 옷을 벗어야 될 차장님을 그나마 여기에서 일할 수 있게 부른 사람이 저희 김 대표님입니다. 두 번의 기회는 없다는 걸 아셔야 될 겁니다. 앞으로 원만하게 탄 수입이 되도록 협조를 바랍니다.”

경환은 할 말만 마치고 황규동의 인사를 받지도 않은 채 멀찌감치 사라져 갔다. 그런 황규동의 행동을 바라보고 있던 김세동은 모른 척 할 수밖에 없었다. 이영수 실장의 질책을 받은 김세동은 부하직원의 안위보다는 자신의 자리를 걱정해야 될 형편이었다.

선적작업은 삼 일에 걸쳐 진행이 되었고 큰 사고나 문제점 없이 작업을 완료하고 삼만 톤을 선적한 선박은 진황도를 떠나 한국으로 향했다. 첫 선적작업이어서 그런지 작업이 끝난 후 경환은 피로감이 몰려오고 있었고 한시라도 빨리 북경으로 돌아가길 원했지만, 장성궈의 요청으로 술자리를 같이 할 수밖에 없었다. 진황도의 고급식당에 준비된 산더미 같이 쌓인 요리를 보고 다들 벌린 입이 다물어 지지 않았다.

“제일그룹과의 첫 거래가 원활하게 진행된 것에 만족스럽습니다. 앞으로도 삼사의 지속된 거래가 이뤄지기를 희망합니다. 조촐하지만 이 자리를 즐겨 주십시오.”

장성궈는 자리에서 일어나 건배 제의를 했고 다들 삼일 간의 피로를 술로 씻어내고 있었다. 장성궈는 옆자리에 앉아 있던 경환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샤오 리, 수고했어. 이번 30만 톤 외에 50만 톤을 더 주려고 하는데 성사시킬 수 있겠지? 제일그룹이 힘들다면 우리와 접촉을 하려는 대후와 연결을 해 봐도 되고.”

이번 선적된 탄이 한국에 공급이 된다면 오성이나 대후 카롱에서도 경환의 제안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은 사실이었다. 추가된 50만 톤의 판로는 별 어려움이 없어 보였지만, 경환은 장성궈의 복심이 무엇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감사합니다. 조만간 좋은 소식을 드리겠습니다. 조건은 이번과 동일하겠죠?”

경환의 질문에 장성궈는 고개를 끄떡이며 경환의 빈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이 물량을 제일그룹에 줄지 다른 판로를 구할지는 고민을 해 볼 생각이었다. 중국을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의 발목을 잡으려는 느낌을 받고 있던 경환은 마음을 다시 잡을 수밖에 없었다. 술자리가 끝나고 경환은 김창동을 조용히 불러내었다.

“장 사장이 50만 톤을 더 계약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번 판로는 부장님이 전적으로 맡아서 일을 진행해 주셨으면 합니다. 어디가 되었건 부장님이 결정한 곳으로 50만 톤을 넘기겠습니다.”

김창동은 자신을 믿고 큰 결정을 위임해준 경환을 바라보며 굳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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