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49화 (48/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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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인생 - 49

김창동은 일주일 후 제일그룹에 사직서를 제출하였지만, 북경을 떠나지는 않았다. 단지 현 거주하던 집을 나와 옆 동으로 이사를 한 게 전부였다. 경환은 김창동의 직분을 부장으로 하고 홍콩과의 업무협조를 위해 출장을 보낸 상태였다. 김창동이 합류한 상태에서 경환은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그 동안 봐왔던 김창동은 오로지 한길 밖에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기업은 그런 중견간부를 용도폐기 하는데 주저함이 없다는 것도 현실이었다.

“인준이 엄마가 날 대하는 게 예전하고 달라서 좀 거북해요. 어떡하면 좋아요?”

수정은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경환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정에게 그 동안의 일을 자세히 설명해 주고 전과 같이 김창동 부인을 대하라고 부탁을 했지만, 김창동 부인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경환도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없어 보였다.

“자기야, 그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 그래도 명색이 내가 김 부장님 보단 직급이 높은 게 사실이니까. 그렇지만 인준이 엄마가 자기를 어려워한다 해도 자기가 변하지 않는 모습을 계속 보여주면 자기의 진심을 알아주지 않을까?”

경환의 말이 이해가 되었는지 수정은 고개를 끄떡이며 무언의 대답을 해 주었다. 김창동이 내일 홍콩에서 돌아오면 식사라도 같이 하면서 다시 얘기를 해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 김창동의 합류로 홍콩과 북경을 연결하는 무역라인이 형성되었고 김창동의 오랜 경험이 녹아들면서 중국 사업은 탄력을 받을 수 있었다. 홍콩의 최석현은 김창동의 교육을 물 빨아들이듯이 배우고 있는 중이었다.

“최 차장, 제일그룹 실사 팀이 도착하면 난 그들과 북경으로 돌아갈 테니, 우리 당분간 잘해 보자고. 하다 어려운 부분이 생기면 시간에 구애 받지 말고 언제든지 연락하고. 최 차장이나 나나 다시 사는 인생들이지 않나.”

“부장님, 걱정 마십시오. 팀장님이 미국 들어가시기 전까지는, 홍콩은 제가 꽉 잡고 있겠습니다. 부장님도 앞으로 저 좀 많이 가르쳐 주세요. 하하하.”

최석현은 경환의 우려와는 달리 김창동의 합류를 쌍수로 환영을 하고 있었다. 공부는 계속 하고 있었지만, 무역실무가 현장경험 없이 하루아침에 습득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최석현은 경환에게 말도 못하고 혼자 끙끙 앓고 있던 중이었다. 이런 갈증을 김창동의 합류로 한방에 해결을 할 수 있었으니, 최석현으로서는 천군만마를 얻었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했다.

“실사 팀이 체크인을 했다는 소식을 받았으니 우리도 나가 보자고. 사업 전에 서로 안면을 터놓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테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김창동은 착잡한 심정이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같은 조직에 몸을 담그고 있던 사이였지만, 지금은 갑과 을로 입장이 분명하게 나뉘어져 있었다. 실사 팀 방문을 맞이해 김창동은 저녁접대를 준비하고 있었고 실사 팀이 도착하기 전에 약속된 식당에 미리 도착을 했다.

“여, 김 차장 오랜만이야. 회사를 그만 둘 줄은 몰랐는데, 이렇게 홍콩에서 다시 만나다니 의외야. 뭐, 자네만 잘 하면 나도 밀어 줄 용의가 있으니까 열심히 해봐.”

석탄사업부 황규동 차장이 김창동을 향해 아는 척을 해왔다. 입사 동기였지만, 황규동은 승승장구를 하고 있었고 올해 말 부장승진을 언질 받은 상태였다. 비아냥거리는 황규동을 보며 속이 끓어 올랐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갑과 을의 관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황 차장. 오랜만일세. 앞으로 많은 도움을 부탁하네.”

김창동의 저자세가 맘에 들지 않은 최석현이었지만, 김창동의 눈짓에 화를 삭이고 있었다. 실사 팀에게 절대 꿀리지 말라고 경환의 특별한 지시가 있었지만, 지금 자신의 상관은 김창동이었기 때문이었다.

“뭐 특별한 일이야 있겠어? 오늘 우리 애들 입맛에 맞게 잘 좀 해줘. 홍콩음식이 아주 맛있는 게 많다고 하던데 말이야.”

김창동이 홍콩에 출장을 가기 전 경환은 절대 제일그룹 실사 팀에게 꿀리지 말라는 지시를 받긴 했지만,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일을 망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특별히 고가의 음식들로 주문한 요리들이 테이블 위에 차려지고 김창동은 술잔을 들어 술을 따르려 했지만, 최석현이 급히 술병을 뺐어 자심이 직접 실사 팀들에게 술을 따라 주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홍콩법인을 담당하고 있는 최석현 차장입니다.”

“뭐 그럽시다. 여기 사장님이 아직 대학생이라면서요? 석탄 장사가 그리 만만치 않은 데 젊은 사장님 모시고 고생들이 많습니다.”

최석현은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한 눈빛으로 황규동을 쏘아 보고 있었지만, 이번에도 김창동은 최석현의 손을 잡아끌고 있었다.

“글쎄 이게 고생이라고는 말 못하겠지만 최소한 우리보단 한 수 위에 있는 사람이라고 말해 줄 수는 있다고 봐.”

황규동은 그런 김창동을 향해 비웃음을 보였다. 황규동은 자신의 상관인 김세동을 통해 신중하게 일을 처리하라는 지시를 받긴 했지만, 자신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아부를 떨고 비위를 맞추기 위해 노력하는 하청업체로 밖에는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자신의 말 한마디면 이 작은 업체는 언제든지 보내버릴 수 있다는 착각을 하고 있었다.

“어이, 김 차장. 밥도 대충 다 먹은 거 같은데 2차는 준비를 해 두고 있지? 어디 가서 예쁜 홍콩아가씨들이나 한번 보자고. 여기 여직원 정도면 되겠는데 말이지.”

황규동의 말에 최석현의 눈은 이미 돌아버리고 말았다. 자신의 약혼녀를 단지 술집 여자 취급을 한 황규동을 도저히 참아줄 수 없었다.

“이봐. 너나 나나 같은 차장이거든. 아무리 작은 회사라지만 우리 부장님한테 아랫사람 대하는 것도 눈꼴사나운데, 내 마누라를 술집 작부 취급을 해? 야 이 새끼야! 너 한번 오늘 죽어볼래?”

최석현은 흥분을 참지 못하고 테이블 위에 놓인 빈 접시를 엎어 버리고는 황규동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김창동이 중간에서 말리려 했지만, 최석현의 완력을 감당해 낼 수는 없었다. 황규동은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두 사람을 향해 소리를 버럭 질렀다.

“이게 뭐야? 김 차장 자네 불쌍해서 특별히 생각을 해 주고 있었는데 이 회사는 깡패만 있는 거야 뭐야? 자네 이 사업 때려치우고 싶어!”

룸 안의 상황이 심각하게 변하고 있을 때 케이티는 경환의 지시로 구매한 핸드폰을 들고 급히 밖으로 나가 경환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팀장님 이런 상황으로 지금 상황이 많이 안 좋습니다.”

케이티로부터 상황을 설명 받은 경환은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기업이 하청업체를 대하는 모습을 익히 알고 있었던 경환은 김창동에게 미리 언질을 해 놓았었기에 더 맘이 좋질 못했다.

‘케이티, 김 부장님을 바꿔줘요.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하지 말고요.’

급히 김창동을 찾은 케이티는 전화를 전해 주었고 방안의 분위기는 아직도 일촉즉발의 분위기가 지속되고 있었다. 최석현은 여전히 씩씩거리고 있는 중이었다.

“팀장님, 김 부장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여드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왜 참으셨습니까? 제가 꿀리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드렸는데요. 이 사업 접어도 됩니다. 아쉬운 건 제일그룹이지 저희가 아닙니다. 이 전화를 실사 팀장을 바꿔 주시고 전화가 끝나면 바로 철수 하세요. 제 식구들이 욕먹는 건 제가 참을 수가 없습니다.’

김창동은 어쩔 수 없이 방으로 들어가 전화를 황규동에게 넘겨주었다. 황규동은 마침 잘 되었다는 표정으로 이참에 하청업체를 단단히 교육시킬 생각으로 김창동이 건네주는 전화기를 받아 들었다.

‘이 업체 대표를 맡고 있는 이경환이라고 합니다. 누구신가요?’

경환은 화를 누르며 최대한 정중하게 말을 꺼냈다.

“실사팀장을 맡고 있는 황규동 차장이라고 합니다. 직원들 교육을 이 따위로 시키면 어쩌자는 겁니까? 제일그룹이 물로 보입니까? 이런 분위기에서 우린 실사 못합니다.”

황규동의 격앙된 소리에도 전화기에선 아무런 답변이 없었고 황규동은 순간 당황스러웠다. 이 정도로 했으면 자신에게 사정을 하는 게 정상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신이 물어보니 답을 드리죠. 제일그룹 물로 보입니다. 황규동 차장이시라고요. 이번 석탄사업 건은 당신 때문에 실패했다는 것을 아셔야 될 겁니다. 여기 들어올 필요 없으시니 당신 마음대로 하십시오. 아, 내가 잊었는데 이영수 비서실장님과 김세동 부장님에게는 오늘 제가 받은 수모에 대해서 정식으로 항의를 할 것입니다. 제일그룹에서 이 사업을 다시 하려면 당신부터 짤라 내야 할 것입니다. 안녕히 돌아들 가십시오.’

전화기를 돌려받은 김창동은 황당해하는 황규동을 놔둔 채 최석현과 케이티를 데리고 급히 식당을 빠져 나갔다. 단순한 하청업체라고 생각한 황규동은 경환이 말한 내용을 곱씹어 보고 있었다. 절대 만만히 대하지 말라는 김세동의 말이 마음에 걸리긴 하였지만, 크게 개의치 않고 있었다. 오늘 일을 빌미로 이 업체와의 거래를 중단 시키면 간단하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늦은 저녁시간 잠을 청하려고 누워있던 김세동은 한 통의 전화를 받고 급히 회사로 달려 올 수밖에 없었다. 경환이 제일그룹 북경지사에 정식으로 항의를 함과 동시에 체결한 석탄에 대한 MOU를 무효화 시켜 버렸기 때문이었다. 일이 틀어져 버린 이유를 확인하기 위해 급히 황규동에게 연락을 취하고 있었지만, 아직 호텔로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한참을 망설인 김세동은 북경지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신보다 상급자이긴 했지만, 그걸 감안해 줄 시간이 없었다.

“상무님, 석탄사업부장 김세동입니다. 어떤 내용인지 자세히 설명을 해 주십시오.”

‘이경환이란 친구가 전화를 해서 자네 부하직원이 안하무인으로 자신의 직원들을 대했다고 하더군. 자신들의 직원을 하청업체 직원처럼 다루고, 특히 현지 여직원을 술집작부 취급을 했다고 화를 내는 통에 내 창피해서 들어 줄 수가 없었네. 아주 나한테 대 놓고 대후와 거래를 하겠다고 공언을 하더군. 아마 대후에 연락을 했을지도 모르겠네. 자네 도대체 부하직원 관리를 어떻게 한 건가? 회장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자네도 좋은 꼴 못 볼 걸세. 이만 끊겠네.’

그렇게 주의를 주고 신신당부를 했지만,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평소에 하청업체를 종 부리듯 하던 황규동을 보낸 자신의 실수였다. 그러나 이미 상황은 벌어졌고 수습을 해야 했지만, 방법이 없어 보였다. 황규동을 갈아 마시고 싶을 뿐이었다. 북경지사장의 말대로 회장의 귀에 이 사실이 들어가게 된다면 자신의 연줄인 이영수라도 막아 줄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문제였다.

수십 번의 전화 끝에 황규동과 통화 연결을 할 수 있었다. 아직까지도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고 있던 황규동은 실사 팀을 이끌고 술 한 잔을 더 하고 들어온 상태였다.

‘야! 이 새끼야, 너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닌 거야.’

그렇지 않아도 내일 아침 보고를 할 생각이었던 황규동은 김세동의 호통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부…. 부장님, 제가 아주 더러운 꼴을 당해서 그렇지 않아도 보고를 드리려고 했습니다만….”

황규동의 말을 들어 줄 필요도 없었든지 김세동은 황규동의 말을 끊어 버렸다.

‘잘 들어, 이 새끼야! 이 사업 중단되면 너나 나나 옷 벗어야 돼. 지금 이경환이를 통해서 네가 한 짓이 북경지사장 귀에 다 들어갔어. 너 이 물량이 대후 쪽으로 빠지면 인천 입찰 성공할 수 있어?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내일 내가 홍콩 들어가기 전까지 원상복귀 시켜 놔! 그래야 정상참작이라도 바랄 수 있으니까. 무릎을 꿇던 할복을 하던 그건 네가 알아서 해! 알았어? 이 새끼야!’

김세동은 수화기를 내 던지고 있었고 그런 소리는 고스란히 황규동의 귀에 들려 왔다.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린 황규동은 어찌할 바를 몰라 방안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아까 마신 술의 취기는 이미 사라져 버린 지 오래였다.

“최 차장, 좀 참지 그랬어. 팀장님 얼굴을 내가 어떻게 보겠나.”

식당을 빠져 나온 세 사람은 야시장 길거리 좌판에 앉아 화를 억누르며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저는 참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팀장님하고 부장님한테 그러는 건 정말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팀장님이 미리 전화를 주셨습니다. 꼴사나우면 때려 치워도 된다고.”

김창동도 최석현의 행동에 속 시원함을 느끼고는 있었지만 자신이 경환과 합류해서 처음 작업을 하는 사업이 잘못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맘이 편치를 못했다. 그때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최석현입니다.”

‘저…. 제일그룹의 황 차장입니다. 아까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잠시 만나 뵈었으면 합니다. 위치를 알려 주시면 제가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최석현은 활짝 웃으며 수화기에다 대고 큰 소리로 대꾸를 했다.

“저희 대표님 얘기 못 들으셨습니까? 뵙고 싶은 생각 없으니, 알아서 잘들 돌아가세요. 배웅은 못해 드립니다.”

전화를 급히 끊어 버린 최석현은 계속 울려대는 핸드폰의 배터리를 뽑아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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