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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인생-48화 (47/264)

#48

다시 사는 인생 - 48

북경의 밤은 어두웠다. 그런 어두움과는 달리 천상인간이란 나이트클럽 안에는 화려한 사이키 조명 아래서 늘씬한 미녀들이 음악에 몸을 맡기며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비싼 입장료를 지불하고 들어온 나이트클럽에서 남자를 유혹하지 못한다면 손해가 이만저만 아니었기에 그녀들의 눈빛은 나이트클럽을 찾은 남자들에게 향하고 있었다. 무대를 반대편 가드들이 지키고 있는 뒤편에 룸들이 길게 뻗어 있었지만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그런 룸들은 아니었다.

“라오 장, 샤오 리에게 30만 톤을 밀어 주기로 했다는데 너무 서두른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글쎄. 그 친구 수단이 보통이 아니니 한국기업과의 계약은 어렵지 않게 성사를 시키지 않겠나.”

가장 구석진 룸 안에는 장성궈와 왕바오밍이 일반 노동자의 이 년 치에 해당하는 양주를 거리낌 없이 술잔에 따르고 있었다.

“제일그룹 오성그룹 등과 연결이 되어 있고 미국기업까지 샤오 리의 뒤를 봐 주고 있다면 성사야 시키겠지만, 우리가 그 친구를 믿어야 될 지에 대해서는 확실하지가 않아서 하는 말입니다.”

뭐가 불안했던지 왕바오밍은 연신 고개를 흔들며 장성궈의 결정에 의문을 나타내고 있었지만 장성궈는 걱정 말라는 듯 손을 들어 왕바오밍의 말을 막았다.

“자네는 사람 보는 눈을 더 키워야 돼. 그 친구를 나이로만 보지 말라고 몇 번을 말했나. 30만 톤은 사실 많은 양이 아니야. 이번 일을 성사시키면 난 크게 한번 밀어 줄 생각이네. 샤오 리나 나나 서로 이용을 한다는 건, 그 친구도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너무 걱정 말게. 그래도 혹시 모르니 안전부를 통해서 감시는 계속 하도록 하는 게 좋긴 하겠지.”

“비자금 일부를 그 친구에게 맡겨도 되는지 걱정이라서 그럽니다. 샹첸 형님도 걱정은 많이 하고 계십니다.”

“자네들은 정치가지 사업가가 아니지 않나.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상대방을 알 수 있다네. 그 친구 야망이 대단한 친구야. 이 유연탄사업 정도는 부수입으로 생각을 하는 친구야. 그 친구도 아마 우리에 대해서 알만큼은 알고 있을 테니까.”

장성궈와 왕바오밍의 불안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고 있었다. 자신이 보는 경환은 비자금 관리라는 역할을 충분히 수행해 줄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을 했기 때문이었다. 호형호제를 통해 의형제를 맺긴 했지만, 중국인의 외국인에 대한 배타심은 여느 나라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하진 않았다. 경환 또한 애당초 이런 장 사장의 의도를 충분히 알고 있었고, 서로의 이익을 위해선 언제든지 갈라질 수 있는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단지 신뢰를 지킬 뿐이었다.

“고민은 나중에 하고 오늘은 나도 회춘을 좀 해야겠어.”

장성궈는 룸에 설치된 인터폰을 눌렀고, 곧 이어 룸이 열리고 좀 전 무대에서 춤을 추던 미녀 두 사람이 환한 웃음을 띠며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북경으로 돌아가기 전에 잠시 홍콩에 들린 경환과 수정은 최석현과 케이티의 안내를 받아 사무실에 도착해 있었다. 케이티의 도움으로 임대한 사무실은 면적은 크지 않았지만 당분간 두 사람이 일을 하기에는 적당해 보였다.

“우선 축하드립니다. 결혼식은 언제로 잡았나요?”

“7월말로 잡았습니다. 팀장님도 참석을 해 주십시오.”

“당연하죠. 반드시 참석을 하겠습니다. 케이티도 축하합니다.”

최석현의 옆에 앉아 있던 케이티는 첫 번째 만남과는 다르게 한층 여유가 있는 모습으로 경환과 수정에게 미소를 보이고 있었고 최석현은 팔불출 마냥 벌린 입을 닫지 못하고 있었다.

“제가 홍콩에 들린 이유는 제일그룹과 30만 톤의 유연탄계약을 성사시켰기 때문입니다. L/C문제와 일부 중국의 비자금을 관리해야 되기 때문에 차장님이 신경을 많이 써야 될 겁니다.”

최석현은 경환이 건넨 MOU 서류를 복사한 후 복사본을 경환에게 돌려주었다. 그 동안 하는 일없이 지낸 것이 미안했던 최석현은 일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는 경환의 말에 큰 짐을 덜었다는 듯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경환의 다음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에릭과는 관계가 어떻습니까?”

“일주일에 한번 정도는 만남을 가지고 있습니다. 팀장님께서 말씀 하신 대로 우선 친분을 쌓기 위해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지금은 저희 집에서 같이 식사를 할 정도까지는 인간관계를 맺었습니다.”

생각한 거 이상으로 최석현이 에릭을 잘 관리했다는 말에 경환은 고개를 끄떡였다. 비자금 관리와 L/C문제를 처리하기 위해서는 에릭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고생하셨습니다. 한국에서 L/C를 받고 바로 중국에 L/C 보내줘야 됩니다. 이 문제를 에릭과 협의하셔서 막히지 않게 미리 조율을 해 두세요. 그리고 중국 측의 몫은 톤당 5불입니다. 금액이 커진다고 해서 욕심 낼 돈이 아니니 따로 지시가 없다면 관리만 하시고요. 에릭은 이 부분에 대해서 절대 몰라야 됩니다.”

“알겠습니다. 유연탄은 언제부터 시작을 하는 겁니까? 준비는 해 놓겠습니다.”

“조만간 제일그룹의 실사 팀이 북경으로 들어옵니다. 실사가 끝나는 대로 바로 시작이 될 것입니다. 한 달에서 두 달 후로 생각을 하고 계세요.”

경환은 여우같은 장성궈가 30만 톤을 가지고 자신을 간보고 있다는 것을 대충 알고 있었다. 확실한 비자금 루트를 제공해주고 정확하게 관리를 해 준다면 유연탄의 양은 앞으로 계속 늘어나게 될 것이라고 판단하는 중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항상 빠져나갈 구멍은 마련을 해 놓아야 했다.

“그리고 케이티 친 오빠가 변호사라고 하셨으니 정식으로 계약을 체결하셔서 앞으로 모든 법률적인 검토와 자문을 받도록 하세요. 비용은 일반적인 수수료보다 더 주도록 하세요. 주는 만큼 받는 겁니다.”

경환의 말에 최석현은 얼굴이 밝아졌다. 하나밖에 없는 동생과 동거를 하고 있는 것을 항상 탐탁지 않게 여긴 오빠였다. 최석현은 이참에 고문변호사 계약을 체결하고 면을 살려볼 생각이었다.

“그리고 어려운 부탁을 하나 더 드리겠습니다. 그게 참. 뭐라고 말을 해야 될지.”

경환은 최석현과 케이티를 보며 말을 더듬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팀장님. 말씀 하십시오.”

경환은 두 사람을 보며 계속 미안한 표정을 보이고 있을 뿐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계속된 최석현의 독촉에 경환은 어렵게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정말 죄송하지만, 결혼을 하시고 10월쯤에 차장님이 먼저 미국에 가 주셨으면 하는데…. 미국에 근거지도 마련해야 되고, 회사 설립도 준비를 해야 되다 보니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케이티는 내년 3월 저희와 같이 들어가겠습니다.”

경환의 말에 최석현과 케이티는 울상을 하고 있었다. 한참 신혼을 만끽하고 있는 터라 떨어져야 된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다른 직원이라도 있다면 모를까, 지금은 최석현 밖에는 미국에 먼저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말을 꺼내고 있는 경환도 염치없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아닙니다. 이 문제는 제가 좀 더 고민을 해 보겠습니다. 저도 제 아내와 5개월 넘게 떨어져 있으라고 하면 아마 돌아 버릴 겁니다.”

“아니에요. 석현 씨 먼저 미국에 가도록 준비를 해 놓을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테이블 밑으로 최석현의 손을 잡은 케이티가 경환의 제의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아직도 최 차장은 울상이었지만, 그런 최석현을 케이티는 다독이며 웃어 주었다. 수정은 경환을 향해 눈을 흘기고 있었지만, 경환은 케이티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케이티 고마워요. 지금 이 은혜는 나중에 두고두고 제가 갚아 줄게요. 딱 5개월만 참아주세요.”

회의를 마친 네 사람은 자리를 식당으로 옮겼지만, 그때까지도 최석현은 죽을상을 풀지 못하고 요리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독한 백주만 마셔댔다.

노동절 연휴가 끝나고 경환은 다시 학교생활에 전념을 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돌아와 장성궈에게 제일그룹과의 계약을 전화로 통보를 하였고 제일그룹의 실사에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협조를 요청해 두었다. TV에서는 한국과의 수교가 임박했다는 뉴스가 연일 나오고 있었지만, 8월 2일 정식수교가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경환은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경환의 관심은 유연탄 사업을 빨리 성사시키고 지긋지긋한 중국을 떠나는 일에만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자기야, 인준이 아빠 전화에요.”

길어야 일 년 짧으면 반년밖에 남지 않은 북경 생활 이후의 계획을 구상하고 있던 경환은 김창동의 전화를 받기 위해 거실로 나갔다.

“차장님, 퇴근 전이신데 무슨 일 있으신가요?”

‘소주한잔이 생각이 나서요. 일찍 퇴근을 하려고 하는데 나오시겠습니까?’

김창동과는 항상 집에서 술을 해 왔기에 경환은 김창동 신변에 이상이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리고 서둘러 약속된 식당으로 향했다. 이미 김창동은 미리 자리를 잡고 백주를 먼저 마시고 있는 것이 경환의 눈에 들어왔다.

“전화 받고 바로 달려왔는데, 이미 도착을 하셨네요. 저도 한잔 주십시오.”

“여기서 전화를 드린 겁니다. 한잔 받으세요.”

술을 받기 위해 잔을 든 경환은 김창동의 얼굴을 살피고 있었다. 이미 술을 많이 마셨는지 김창동의 얼굴은 붉어져 있었다. 퇴근시간 전에 회사를 빠져 나와 혼자 술을 마시고 있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회사에 무슨 일 있으신가요? 좋은 일은 아닌 거 같아 보여서 걱정이 됩니다.”

경환의 말에도 김창동은 미소만 보일 뿐 아무런 대꾸 없이 술 한 잔을 더 마시고는 깊은 한숨을 터트렸다.

“귀국 발령을 받았습니다. 인수인계를 마치고 다음 달 말까진 정리를 하라네요. 그런데 동해영업소로 발령이 났더군요. 아무런 연고도 없는 곳인데…. 집에 들어갈 용기가 안 나서 경환 씨를 불렀습니다. 미안합니다.”

김창동의 고민을 알게 된 경환은 김 차장의 기분을 십분 이해 할 수 있었다. 자신도 차장을 끝으로 명퇴를 당한 경험을 가지고 있어 김창동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느 정도는 알 수 있었다. 회사를 위해, 회사의 이익을 위해 청춘을 불살랐지만 돌아오는 건 용도폐기뿐이니 김창동이 느끼고 있는 배신감과 좌절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는 걸 경환은 느낄 수 있었다.

“잘 하셨습니다. 이런 날 술 한잔 안 하면 버티기 힘들죠. 동해영업소를 가신다 하더라도 아마 버티기 힘드실 텐데, 따로 준비하신 것은 있으신가요?”

회사 생활을 하던 사람이 사업을 시작하기란 쉽지 않았다. 특히 대기업을 다녔던 사람들이라면 더욱 더 힘들었다. 대기업이라는 백그라운드를 가진 상태에서 아부를 하던 인간들도 그 끈이 떨어지게 되면 안면을 몰수 하는 게 사회의 이치였기 때문이었다. 김창동이 사업을 하겠다고 한다면 경환은 뜯어 말릴 생각이었다.

“제일그룹 하나 밖에는 모릅니다. 제가 좀 바보스러워서요. 인준이도 아직 어리다 보니 뭘 해야 될지 막막할 따름입니다. 집 사람 얼굴보기도 미안하고.”

경환은 김창동의 이런 상황을 맘으로는 동정을 하고 있었지만, 자신에겐 큰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차장님. 제가 한국에서 제일그룹과 유연탄 계약을 한 사실은 알고 계실 겁니다. 지난번 드렸던 제안은 아직도 유효합니다. 저와 같이 일을 해 보시겠습니까? 차장님이라면 제가 중국 사업을 다 맡길 수 있을 거 같아서요.”

김창동은 말없이 술을 한잔 더 마시고는 고개를 탁자 위에 떨어트렸다.

“사람이란 게 참 간사하더군요. 오늘 발령을 받고 제일 먼저 생각난 게 지난번 경환 씨가 제게 했던 제안이더군요. 그래서 염치불구하고 연락을 드린 겁니다.”

중국어도 사업을 진행할 정도는 할 수 있고 중국을 바라보는 시각도 경환의 그것과 별 차이가 없는 김창동이라면 오히려 경환이 환영을 하고도 남았다.

“딱 10년만 북경에서 고생을 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 이후엔 중국 사업을 모두 철수하고 미국이나 한국으로 이전을 할 생각입니다. 그때는 미국이나 한국으로 모시겠습니다. 지금은 제일그룹과 같은 조건으로 차장님을 모실 수는 없습니다만 일 년 그 이상의 조건으로 대우를 해 드리겠습니다. 제가 부탁드립니다.”

경환은 김창동의 자존심을 다치지 않게 다시금 김창동에게 제안을 하고 있었다.

“저라도 괜찮겠습니까? 경환 씨의 계획에 도움이 될 지 자신이 없습니다.”

“도움이 됩니다. 아주 많이 됩니다. 차장님껜 죄송한 말씀이지만 오늘 제일그룹의 실수가 저에겐 기회가 되다 보니 사실 기쁩니다. 제일그룹에 감사라도 하고 싶은 마음 입니다. 이건 제 진심입니다. 사모님껜 제가 삼고초려로 차장님을 모시는 거로 말을 해 놓겠습니다. 오늘은 기쁜 날이네요, 술 한 잔 더 받으십시오.”

김창동의 밝은 모습을 확인한 경환은 밤이 늦도록 중국 사업에 대해 김창동과 얘기를 나누었다. 경환의 주위로 사람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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