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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인생-47화 (46/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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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인생 - 47

    수정과의 데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경환은 한 시간에 한 번씩 울리는 전화기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있었다. 어차피 누구의 전화인지 뻔히 아는 상태에서 급히 서두를 필요가 경환에게는 전혀 없기 때문이었다. 이미 대후에서 경환과 KBR과의 관계와 경무부의 자문위원이란 사실을 뒷조사를 통해 확인한 후 그룹회장의 지시로 30만 톤 전량을 계약하고 싶다는 의향을 경환에게 전달 한 상태였다. 오성물산은 경환이 가지고 있는 화성산업의 지분 10%를 넘겨받는 조건으로 유연탄 거래를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겠다는 의사를 보였지만, 경환은 단칼에 오성의 제안을 거절해 버렸다. 지금 급한 건 제일그룹이지 경환은 이미 칼자루를 쥐고 있었다.

    “자기야, 내가 입장이 좀 난처해요. 이제는 북경으로 돌아갈 때 생필품을 준비해 놨다고 가져가라고 하는데 자기가 전화 좀 해봐요.”

    난처한 표정을 하고 있는 수정의 얼굴을 보며 경환은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 만큼 김 부장의 애를 태웠으면 성과가 있다고 판단한 경환은 전화기를 들었다.

    “부장님, 오래간만에 연락을 드립니다. 집에 전화를 많이 주셨더군요. 무슨 필요한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바쁘실 거 같아 그냥 출국을 하려고 했습니다.”

    ‘오셨다는 얘기는 이미 들었습니다. 한번 연락을 주실 줄 알았는데 섭섭한데요? 모레 출국하시는 거 알고 있습니다. 지금 시간이 되시면 만났으면 좋겠는데요.’

    김세동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간신히 삼키고 있었다. 전세는 역전이 돼서 급한 건 김세동 본인이었기에 최대한 자신의 감정을 죽이고 있었다. 혹시라도 경환이 오성이나 대후와 계약이라도 한다면 피해는 고스란히 자신의 몫이었기 때문이었다.

    “부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제가 실수를 한 거 같습니다. 제가 제일그룹에는 갈 시간이 없으니 팔레스 호텔에서 삼 십분 후에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부장님께서 시간이 안 되시면 다음에 뵐 수밖에 없을 거 같습니다.”

    ‘아….아닙니다. 삼 십분 후에 뵈도록 하죠.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똥개도 자기 집에서는 50% 먹고 간다는 말이 있듯이 제일그룹에서 협상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이든 사람을 오라 가라 한 게 미안해서인지 경환은 미리 호텔에 도착해서 김세동을 기다리고 있었다. 호텔 커피숍은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손님들로 빈자리를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겨우 자리를 찾은 경환은 커피를 한잔 시키고는 느긋하게 김세동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가 늦지는 않았는데 먼저 와 계셨군요.”

    김세동은 경환을 확인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고 김세동의 뒤로는 이영수가 보이고 있었다.

    “처가가 이 근처라 금방 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기까지 오시라고 해서 죄송하기도 해서 좀 서둘렀습니다.”

    경환의 맞은편에 앉은 두 사람은 경환의 양해를 얻은 후 담배를 입에 물었다. 경환도 담배 생각이 간절하긴 했지만, 연배차이가 많이 나는 사람들 앞이라 담배의 욕구를 참을 수밖에 없었다. 담배를 한대 핀 김세동이 먼저 말을 꺼냈다.

    “좀 섭섭했습니다. 저를 처음 찾아오실 줄 알았는데 다른 업체를 먼저 방문을 하셨다고 들었거든요. 저희와 한 계약은 잊으셨나 봅니다.”

    경환은 당황했다는 듯이 김세동을 향해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부장님께서 오해하셨을 줄을 몰랐습니다. 계약은 했다지만 곰곰이 예전의 부장님 말씀을 생각해 봤습니다. 제가 부장님께 탄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부담을 많이 드린 거 같아서 차마 찾아 뵐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확보한 탄을 썩힐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해서 다른 업체를 찾아간 것입니다. 다른 업체에서도 거래를 하지 못한다고 하면 그냥 포기하려고 생각했습니다. 오해를 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청산유수처럼 말을 장황하게 늘어놓고 있는 경환을 패주고 싶었지만, 김세동은 웃음 띤 얼굴로 경환에게 손사래를 쳤다.

    “오해라니요. 그래 다른 업체에서는 뭐라고 하던가요? 쉽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만.”

    “저는 잘 모르겠지만 대후 쪽에서는 제가 확보한 물량 전체를 계약하고 싶다고 하더군요. 오성물산도 조건이 붙긴 했지만 긍정적으로 검토를 하겠다고 합니다. 지금 상황에서는 대후 쪽과 연결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도 난처하네요. 다들 거절 할 줄 알았었는데.”

    경환은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급히 커피를 홀짝거리고 있었고, 김세동과 이영수는 분노를 속으로 삼키기 바빴다.

    “이경환 씨, 상도의라는 게 있습니다. 유연탄에 대해서 우리가 계약을 한 사실을 잊으셨나요? 당연히 우리와 먼저 협의를 했어야 되는 게 상식 아닙니까? 북경에서의 편의와 지원도 저희가 해 주고 있는데 말입니다.”

    이영수는 참았던 감정을 폭발시켜 버렸다. 경환은 이영수의 감정 섞인 말을 묵묵히 듣고서도 아무런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실장님, 편의와 지원을 말씀 하셨는데, 제가 가고 싶어 간 중국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억지로 등 떠밀려 간 중국입니다. 계약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제가 제일그룹을 먼저 찾아 갔다면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전문가이신 김 부장님이 공정하게 일을 처리하셨을까요? 그리고 제가 계약을 위반한 사실이 있습니까?”

    경환은 웃음기 사라진 얼굴로 이영수를 똑바로 쳐다보았고, 김세동은 급히 중간에 나서 분위기를 바꾸려 하였다. 대후나 오성에 싼값의 탄이 공급되는 건 최대한 막아야 될 상황이었다.

    “실장님께서 많이 섭섭해서 그러신 겁니다. 북경사무소를 통해서 내용은 알고 있습니다. 제가 실수를 한 걸 인정하겠습니다. 화동을 뚫으실 줄은 전혀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다른 진출구회사에서도 화동의 눈치를 보고 있다 보니 가격조정이 쉽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경환은 말해 주지 않아도 될 사항을 스스로 털어 놓는 김세동을 의외란 듯이 쳐다보았다. 역시 연륜은 못 속인다고 생각한 경환은 김세동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다른 쪽에 제안을 한 내용을 알고 있습니다. 그 제안에서 1불 다운해서 우리에게 공급을 해 주십시오. 북경지사를 통해 현지 서베이를 진행하고 샘플링을 하겠습니다. 성분분석에 문제가 없다면 전량 우리가 공급을 받고 이후의 양도 이경환 씨를 통해 공급을 받겠습니다.”

    김세동은 역시 노련했다. 톤당 1불이면 자존심도 버릴 수 있다는 김세동의 생각에 경환도 이 정도면 할 만큼 했다라고 판단이 들었다.

    “부장님이 이렇게 말씀해 주시니 제가 더 버티질 못하겠습니다. 계약은 중계무역으로 제 홍콩법인과 체결하는 조건이고 PB(계약이행보증)를 요구 하지 않으신다면 현 중국시세의 탄 가격에서 2불 다운 시켜 드리겠습니다.”

    경환의 홍콩법인은 아직 PB를 발행할 만한 능력이 되지 못했기에 경환은 PB의 면제를 위해 1불을 더 인하시켜주는 안을 제시했다. 이것은 김세동으로서도 쉽게 답을 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이미 대후에서는 컨펌을 하겠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제일그룹이 안되면 저는 어쩔 수 없이 대후에 물량을 넘길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경환으로서도 중국에 전투적인 투자를 하는 대후와의 거래가 편하긴 하였지만, 한국의 정권이 바뀌게 되면서 대후는 2000년을 넘기면서 해체가 되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대후와의 거래를 꺼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이영수나 김세동은 알 수가 없었다.

    “우리 선에서 결정될 사항이 아니지만 긍정적으로 검토를 하겠습니다. 아니 계약이 되도록 하겠으니 우리 쪽에 넘기시고, 중계무역은 동의를 하시만 최종 SUPPLY인 화동의 계약이행 확인서를 첨부해 주세요.”

    경환은 흔쾌히 동의를 하고 본 계약은 한 달 후 북경에서 체결하는 조건으로 김세동이 준비해온 MOU에 사인을 했다. 김세동은 화동에게 공급하는 탄의 가격을 끈질기게 물어왔지만, 경환은 웃음만 보일 뿐 자신의 패를 보여주지는 않았다.

    제일그룹과의 유연탄계약 소식은 오성건설의 황태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다. 경환이 직접 전화를 걸어 사실을 통보 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경환은 중국으로 출국을 하기 전 황태수의 의중을 확인 할 필요가 있었다.

    “오늘은 제가 부장님을 모시겠습니다. 드릴 말씀도 있고요.”

    경환은 지난번 만남을 가졌던 송정에서 황태수를 다시 만나고 있었다. 황태수는 나이도 어린 경환의 주도면밀함에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이번 유연탄 건은 오성이 들러리를 섰던 게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번 유연탄은 이미 제일그룹을 선정해 놓고 우릴 들러리 세운 거 아닙니까? 괜히 우리가 뇌화부동 한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절대 아닙니다. 만약 물산에서 다른 조건을 걸지 않았다면 저는 아마 오성과 거래를 했을 겁니다. 부장님의 입김도 상당히 작용을 했다고 생각하는데요.”

    황태수는 경환이 따라 주는 술을 받자마자 급히 잔을 비우고는 경환에게 그 잔을 돌려주었다.

    “지난번 오성그룹에서 화성산업에 했던 일을 반면교사로 삼았습니다. 오성과는 이미 인연의 끈이 떨어졌다고 생각하지만 부장님은 쉽게 포기가 안 되네요. 그렇다고 제가 마냥 부장님을 짝사랑 할 수도 없는 입장이고요.”

    황태수가 따라준 술을 마시며 경환은 흔들리는 황태수의 눈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경환 씨는 무슨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까?”

    경환은 황태수를 향해 웃음을 보이며 비워 있는 술잔에 술을 따른 후 안주머니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황태수에게 건네주었다.

    “아직은 회사라고 할 수는 없지만 홍콩에 법인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회사를 바탕으로 중국 사업을 시작을 할 겁니다. 그렇다고 제가 중국에 뼈를 묻는 건 아니고요. 내년에 미국에 진출해 투자 및 컨설팅 회사를 만들어 볼까 생각 중입니다. KBR을 포함한 플랜트 업계에 대한 컨설팅 업무는 부장님이 전적으로 맡아 주셨으면 합니다. 투자업무는 이미 다른 인물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회사가 성장하기 전까지는 전권을 드릴 수는 없지만,언젠가는 전권을 드리겠습니다.”

    황태수는 경환의 말을 듣고 고민을 하고는 있지만, 아직 미래에 대한 확신을 하기에는 오성건설이라는 대기업이라는 타이틀을 쉽게 놓을 수 없었다. 그러나 요즘 부쩍 회사 내에서의 자신의 입지가 작아진다는 생각에 흔들리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경환이 그 동안 보여준 능력과 행동이 황태수를 더 고민에 빠트리고 있었다.

    “아직은 확신을 못 내리겠습니다.”

    “이해합니다. 부장님도 오성이라는 한 우물만 파 오신 분이란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시간을 많이 드릴 수는 없습니다. 부장님이 안 되신다면 저도 대안을 찾아야 돼서요. 8월 중국과 수교가 되고 10월이 가기 전까지는 부장님의 답변을 기다리겠습니다. 그 이후엔 저도 부장님을 포기 하겠습니다.”

    경환은 더 이상은 기다려 줄 수가 없었다. 내년에는 KBR과 나이지리아 프로젝트를 진행을 해야 되었기에 황태수가 안 된다면 다른 인물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전생의 인연으로 황태수를 끈질기게 설득하고는 있지만 경환 스스로도 확신을 갖지는 못하고 있었다.

    “부장님, 제가 실패 할 수도 있습니다. 제가 다른 길로 빠질 때 부장님 같으신 분이 제 뒤를 봐 주셨으면 합니다. 전 제 사람은 절대 포기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경환의 마지막 한마디에 황태수는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나 경환에게 답을 줄 수는 없었다. 그 만큼 황태수도 지키고 싶은 것들이 많이 있었다.

    서울의 일정을 마친 경환은 처가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고 있었다. 처가 식구들이 모두 모여 저녁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경환은 곤혹스러운 밤을 보내고 있었다.

    “자네 애기는 도대체 언제쯤 가질 생각인가?”

    동거기간까지 포함하면 일 년이 훨씬 넘었다는 걸 아시는 수정의 부모님은 아직 자식을 갖지 않고 있는 두 사람에게 은근히 압력을 행사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마도 경환이 당분간 애기를 갖지 말자고 한 말을 수정이 부모님들에게 말을 전한 거라고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저희들은 아직 젊고 중국에서 애기를 갖는다는 것이 아직은 여러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의료시설도 열악하고 한국에 자주 나올 수도 없고……”

    경환은 말을 더듬으며 수정을 쳐다봤지만, 수정은 경환에게 눈길을 주지 않고 있었다. 수정의 부모님은 이참에 경환에게 확답을 받을 요량으로 경환을 더욱 압박을 하고 있었다.

    “결혼을 한 이상 하루라도 빨리 젊었을 때 아기를 갖는 게 좋지 않겠나? 사돈께서도 은근히 손주를 기다리고 있다는 건 자네도 알지 않나.”

    경환도 자식에 대한 욕심이 없는 건 아니지만, 최소한 첫째는 전생의 딸이기를 바라고 있었다. 설명할 수 없었기에 경환은 답답함에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중국의 의료시설이 열악하다는 말에는 뭐라 하지 않겠네. 중국유학 마치고 돌아와서 바로 아기를 갖는 거로 알고 있겠네. 더 이상 미루지 않기를 바라겠네.”

    경환은 아무런 대답도 못하고 죽어가는 표정으로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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