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46화 (45/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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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인생 - 46

    경환은 용보원이 비워 둔 강단에 올라가 청중을 바라 봤지만, 과연 이들 중에서 몇 명이나 이해할 수 있을지 답답했다.

    “자문위원으로 위촉 받아 연구원들과 같이 개선방안 연구에 참여한 이경환이라고 합니다.”

    짧게 소개를 마친 경환은 용보원이 놓아 준 개선방안 서류를 힐끗 쳐다보고는 경무부 부장을 향해 질문에 대한 답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부장님께서 주셨던 질문에 간략하게 결론을 말씀 드리자면 현 시점에는 적용이 불가능 하다고 말씀 드리겠습니다.”

    경환의 말이 끝나자 청중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질문을 했던 부장의 얼굴이 굳어진 것을 확인 한 왕샹첸은 경환에게 자세히 설명을 하라는 눈짓으로 재촉을 하고 있었다.

    “복잡한 인허가내용을 정확히 이해하고 투자자들의 입장에서 시작과 끝을 책임져줄 전문성을 지닌 인원이 전혀 없고, 관공서와 브로커들 간의 이권에 따른 유착관계를 지금으로서는 풀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두 가지를 해결할 수만 있다면 해외 자본의 투자유치는 날개를 달 것으로 판단됩니다.”

    “우리 중국의 관공서들이 비리의 온상이란 소립니까?”

    경무부 부장은 경환의 답변이 끝나기도 전에 불편한 심기를 내 보였다.

    “이것은 중국만의 경우는 아닙니다. 알면서도 고칠 수 없는 고질병 같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한국에서 왔지만 한국 역시 이런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누가 이런 문제를 빨리 척결하느냐가 더 중요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적용시킬 수 없겠지만 중국도 서비스에 대한 국민들의 요구가 거세질 거라고 봅니다. 그때를 대비를 하기 위해서라도 집중적인 연구가 계속 필요할 거라고 판단됩니다.”

    경환은 이 말을 마치고 마이크를 용보원에 넘기고 강단에서 내려 왔다. 왕샹첸이 급히 경환의 옆으로 다가와 소곤거렸다.

    “자네 오늘 좀 위험했어,”

    “충격요법이 더 잘 먹힐 때도 있습니다.”

    두 번 다시 볼 사람들이 아니라고 생각해서인지 경환은 주위의 못 마땅한 시선에도 망설임 없이 자신의 소신을 밝히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 달여의 연구소 생활은 막을 내렸다고 생각한 경환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연구소를 정리하고 일상생활로 돌아올 수 있었다.

    연구소의 생활을 정리한지도 벌써 2달이란 시간이 흘렀다. 경무부의 의뢰를 마친 경환은 다시 학교생활로 복귀하였지만, 작년과는 달리 별 무리 없이 학교생활에 적응을 해 나가고 있었다.

    홍콩의 최석현은 무슨 수를 썼는지 케이티 집안의 동의를 얻어 동거생활을 시작했고, 케이티와 같이 한국을 방문하여 최석현 부모님의 허락까지 받아 놓은 상태였다. 졸업과 동시에 결혼을 준비하고 있는 두 사람은 경환의 지시를 받아 홍콩의 자금을 관리하고 있는 중이었다.

    “하하하, 샤오 리, 내가 요사이 정신없이 바쁘다 보니 오늘에서야 자네를 보는구먼.”

    “일이 우선이죠. 사업은 잘 되시죠?’

    장성궈는 약속장소에 미리 와 경환을 맞이하고 있었다. 지난번 만남 이후 꽤 시간이 흘렀지만, 경환은 조급해 하지 않고 장 사장의 연락을 기다렸다.

    “식사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일 얘기부터 하지. 자네도 기다렸을 테고 말이야.”

    왕 씨 형제와 장성궈가 차기 정권의 라인이란 사실을 확인한 후부터 경환은 이미 준비를 시작하고 있었다.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고, 내년 3월이면 중국의 정권도 바뀌게 되기 때문에 왕 씨 형제의 비자금을 조성하고 있는 장 사장도 안정적인 비자금 루트가 필요할 것이라고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의 대기업들이 유연탄과 관련해서 많은 접촉을 해 오고 있는 게 사실이네. 전부를 자네에게 줄 수는 없지만 우선 30만 톤을 성사를 시켜보게. 그 후에 점차 수량을 늘려 가는 거로 하고”

    “흠.”

    경환이 예상한 양보다는 한참 못 미치는 수량이었다. 호형호제를 하기론 하였지만, 아직 신뢰의 단계까지는 가 있지 못한 상태였기에 우선은 이 정도의 양에 만족 할 수밖에 없었다.

    “감사합니다. 저에게 그래도 과분한 양이네요. 형님께서 산서성의 많은 광산을 움직이고 있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가격을 정해 주시면 한국기업과 중계무역 형식으로 거래를 성사 시키겠습니다.”

    “현 수출가격에서 10불 내려서 자네에게 주겠네. 어떤가?”

    경환이 장 사장에게 요구한 마진은 3불이었다. 한국기업에 2불 정도의 메리트를 준다면 5불의 비자금을 경환이 처리를 해 줘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2000년 중반 이후로는 이런 말도 안 되는 거래는 꿈도 꿀 수 없었지만, 지금은 아직 중국의 무역시스템이 미비한 시대였고 뒤를 봐주는 고위공직자가 있다면 충분히 가능한 거래라고 경환은 판단하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나머지 부분은 제가 관리를 해 드리겠습니다. 따로 필요하시게 되면 연락을 주십시오. 액수가 크지 않기 때문에 당분간은 홍콩구좌를 이용하겠습니다. 금액이 커질 때를 대비해서 따로 분산계획을 짜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선은 형님 회사에서 30만 톤에 대한 거래를 승인한다는 문서를 제 홍콩회사로 발급을 해 주십시오. 그걸 가지고 담판을 지어 보겠습니다.”

    “하하하, 샤오 리, 내가 동생은 잘 뒀구먼. 말이 통해서 좋아. 그 부분은 나중에 따로 지시를 내리겠네. 자네가 제일그룹과 연결이 되어 있다는 건 알고 있으니까 우선은 제일그룹을 잘 설득해봐. 사업얘기는 그만하고 오랜만에 맛있는 요리나 먹어 보자고.”

    중국을 떠나기 전 유연탄사업을 안정시키고 이 자금으로 주식과 부동산에 투자를 할 계획은 가지고 있었지만, 이건 경환이 할 일은 아니었다. 아직까지 김창동으로부터는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고 있었다. 자신을 대신해 중국 사업을 이끌어갈 사람이 절실히 필요한 때였다.

    김포공항으로 홍콩 발 항공기가 도착하고 입국장으로 경환과 수정의 모습이 나타났다. 아직 학기 중이었지만 5월1일 노동자 날을 맞이해 중국은 일주일간의 휴무가 시작되었고, 경환은 이 기간을 이용해 유연탄 사업을 위해 급히 한국을 찾게 되었다.

    오성물산 회의실에는 석탄사업부장과 경환이 마주하고 있었다.

    “건설의 황 부장님에게서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석탄사업부를 맡고 있는 이형식이라고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경환입니다. 많이 황당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제가 이쪽으로는 아는 분이 안 계시니 부득이 황 부장님께 부탁을 드렸습니다.”

    이형식은 황태수의 연락을 받고 긴가민가한 상태에서 경환의 만남을 받아 들였다. 황태수의 부탁과 자신의 상관이 무조건 만남을 받아들이라고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그때 회의실 문이 열리고 전승희 이사가 들어왔다.

    “물산의 전승희 이사라고 합니다. 한번은 뵙고 싶었는데, 유연탄 사업까지 손대고 있는 줄 몰랐습니다.”

    오성에서는 KBR과의 기술제휴가 실패한 이후 다방면으로 기술제휴를 추진하고 있었지만, 뜻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중 경환의 연락을 받은 황태수가 경환을 이용해 다시 KBR이나 화성산업과의 업무제휴를 추진하자는 제안을 전승희가 받아들인 상태였다. 경환이 무리한 요구만 하지 않는다면 플랜트와 유연탄을 맞바꾸는 형식으로 거래를 승인할 생각이었다. 이런 내용을 아는지 모르는지 경환은 한 통의 서류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이 서류를 확인해 보시면 아시겠지만, 중국유연탄의 수출쿼터 20%를 가지고 있는 중국화동진출구총공사가 저에게 한국 수출물량의 일부를 넘겨주겠다는 내용입니다. 시작은 30만 톤이지만 수교 후부터는 양을 최대한 늘려갈 생각입니다. 탄의 스펙은 현 수입되고 있는 호주 탄과 동일한 스펙조건입니다.”

    이형식은 서류를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북경에 나가있는 주재원으로부터 화동에 사실여부를 이미 확인을 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내용은 이미 확인을 한 상태입니다. 그러나 중국기업의 신뢰도가 워낙 좋지 않아서 이경환 씨를 통한다 하더라도 리스크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는 쉽게 답변을 드리기가 어렵습니다.”

    이형식의 말을 모르지 않았다. 중국기업과의 거래는 그 당시 잘해야 본전이란 생각이 많았던 때였다. 오성전자가 가전부분의 중국투자를 검토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물산 쪽은 중국과의 무역거래를 신중하게 생각하고 있던 시기였다.

    “잘 알고 있습니다. 현재 일본의 마루보시상사를 통해 중계무역을 함으로서 그런 리스크를 줄여나가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언제까지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일본 업체에게 막대한 커미션을 제공 하려고 하시나요? 제가 일본 업체가 부담하는 리스크를 해결해 보겠습니다. 가격적인 면에서도 현재 중국수출가격과 동일한 금액으로 공급을 하겠습니다. 일본에 제공하는 커미션과 생각하면 적지 않은 금액이라고 생각하는데요.”

    “흠…,”

    이형식은 고민 할 수밖에 없었다. 리스크만 해결할 수 있다면 경환이 제안한 조건이 그리 나쁜 조건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형식은 쉽게 결정을 내릴 수는 없었다. 경험이 미천한 그리고 아직 대학도 졸업하지 않은 경환을 믿고 사업을 진행하기엔 사업의 규모가 너무 컸다.

    “이경환 씨 들리는 소문에 화성산업의 주주시더군요. 10%의 지분을 가지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오성엔지니어링에서 실수를 많이 했다고도 들었고요.”

    이형식이 고민하고 있던 사이 전승희가 중간에 말을 끊고 화제를 바꾸고 있었다. 경환은 전승희에게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어 주었다.

    “화성산업에서도 KBR만 믿고 가기엔 어려운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서 저를 중간자로 넣은 것뿐입니다. 지분은 가지고 있는 게 사실이지만 제 것은 아닙니다. 때가 되면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을 생각입니다.”

    경환은 전승희의 의도를 확인하고 자신의 지분이 아니라는 말로 사전에 전승희의 의도를 봉쇄해 버렸다. 전승희는 경환을 향해 묘한 웃음을 보이는 것으로 대신하고 있었다.

    “유연탄 부분은 저희가 심각하게 고려를 해서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가능하면 이경환 씨와 거래가 성사될 수 있도록 긍정적인 검토를 하겠습니다. 이경환씨도 저희와의 거래를 잘 검토해 주셨으면 합니다.”

    경환은 소기의 목적을 이뤘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과 악수를 나눈 후 오성물산을 빠져 나갔다. 그날 경환은 카롱물산과 대후 석탄사업부를 방문한 후에야 하루의 일정을 마칠 수 있었다.

    “실장님, 이경환이가 한국에 돌아온 건 알고 있는데 제 예상과는 다른 행동을 하고 있어 찾아 왔습니다. 혹시 실장님께 연락을 한 적이 있나요?”

    “그게 무슨 말인가?”

    김세동 부장은 급히 이 실장을 찾아 경환에 대한 보고를 하고 있었다. 북경사무소를 통해 경환이 유연탄 30만 톤을 확보 했다는 소식은 듣고 있었고, 당연히 자신부터 찾아 올 줄 알았지만, 경환은 연락도 없이 제일그룹의 경쟁사들과 미팅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게…. 지난번 보고를 드렸다시피 많은 양은 아니지만 30만 톤을 확보를 한 상태입니다. 당연히 우리에게 올 줄 알고 석탄사업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려고 했는데, 오성물산과 카롱물산 대후 쪽에 거래를 제안하고 있다고 합니다. 카롱물산을 통해 알아본 결과 나쁜 조건은 아닌 거 같습니다. 단지 이경환 개인이 이 일을 할 수 있냐는 것과 신뢰성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아 검토만 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이런, 만약 이경환이가 다른 쪽에 탄을 넘기게 된다면 우리 쪽 피해는 없나?”

    “울산 공급 분은 괜찮지만 인천 지역의 공급물량에 대한 입찰이 얼마 남지 않아서 가격적인 부분에서 저희가 실패할 확률이 꽤 됩니다.”

    김세동은 경환의 행동에 기기 막혔다. 대학생이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게 제일의 경쟁사에게 먼저 거래 제안을 함으로서 결국은 제일그룹을 압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값싼 중국 탄이 안정적으로 공급이 확인되어 경쟁사가 경환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라도 한다면 인천발전소의 입찰 건은 물 건너갔다고 봐야 했다.

    “허…, 참, 그 놈 능구렁이를 쳐 먹은 놈이네. 학비며 생활비는 우리한테 받아 쳐 먹고, 제안은 경쟁사들에게 하고 다니니…, 김 부장은 어쩔 생각인가?”

    김세동이라고 좋은 방법이 있을 수 없었다. 찾아와서 사정을 해도 시원찮을 판에 한국에 들어 왔다는 연락조차 하지 않고 있으니 김세동도 답답하긴 마찬가지였다.

    “실장님, 아쉽기는 하지만 우리가 먼저 연락을 취해 봐야겠습니다. 적어도 우린 계약서는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 계약서라는 게 우리는 반드시 공급을 받아야 되지만, 이경환이가 우리에게 반드시 공급을 해야 된다고 쓰여 있는 건 아니지 않나? 생각할수록 여우같은 놈이야.”

    “그렇긴 하지만 계약을 한 내용을 경쟁사들 쪽으로 흘리고 도의적인 차원으로 압박을 해 보겠습니다. 이경환이가 모레면 출국을 합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오성물산과 중국 사업에 큰 관심을 두고 있는 대후 쪽에서 이경환이의 제안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합니다.”

    김세동과 이영수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을 하고 있었지만, 경환은 수정과 오래간만의 데이트를 즐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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