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다시 사는 인생 - 45
두 연구원들은 머리를 맞대고 서류와 법령집을 뒤적이고 있었지만, 마땅한 대안은 나오지 않는 듯 했다. 경환이 작성한 제안서의 내용을 열심히 살피고는 있었지만,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될지 헤매고 있었고 아직 학생신분인 경환에게 물어보는 게 자존심이 상했던지 끙끙 앓고만 있었다.
경환은 그런 두 연구원들을 무시한 채 자신이 맡은 일을 빠르게 정리하고 있었다. 두 연구원이 자신을 찾지 않는 상태에서 굳이 나서서 그들에게 팁을 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두 연구원과 약속된 시간을 확인한 경환은 먼저 일어나 회의실로 향했다. 이주 후에는 결과를 보고해야 되었기에 오늘은 대략적인 윤곽과 방향은 잡아 놓아야 했지만 두 연구원의 표정은 어둡기만 했다.
“우선 두 분이 정리하신 인허가절차의 개선방안에 대해 토론을 했으면 합니다. 정리된 서류를 보여 주십시오.”
용보원은 한참을 쭈볏쭈볏거리다 손으로 정리된 서류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서류를 꼼꼼히 살펴 본 경환은 예상한 결과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근접한 연구 자료를 탁자 위에 내려놓은 뒤 용보원에게 질문을 던졌다.
“고생하셨습니다. 용 연구원께서 개선방안에 대해 설명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경환은 용보원의 자존심을 생각해서 처음부터 박살을 낼 생각은 없었다. 용보원은 경환의 눈치를 보며 설명을 시작했다.
“인허가 절차가 복잡한 부분이 있다는 것은 모두 알고 있다고 봅니다. 각 부서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법령을 간소화 시킨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무리가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투자자의 입장에서 인허가를 간소화 시키는 것보다는 편의를 제공하자는 차원에서 개선방안을 검토했습니다. 우선 투자유치를 주관하는 저희 부서로 인허가와 관련된 각 부서의 인원들을 파견 받아, 투자유치와 동시에 인허가에 대한 절차에 대해 상세히 지도를 해 준다면 투자자들의만족도 개선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봅니다.”
용보원의 설명을 들은 경환은 한숨밖엔 나오지 않았다. 특별히 기대를 한 것은 아니었지만, 기대 이하의 원론적인 얘기만 되풀이 하고 있는 모습에 경환은 짜증이 몰려들었다. 서류를 날리고 의자를 던져야 직성이 풀렸겠지만, 경환은 큰 심호흡을 하며 최대한 절제를 하고 있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했다는 경환의 말에 용보원은 고개를 뻣뻣이 쳐들고 자신이 할 일은 다했다는 듯이 의기양양했다.
“그런데,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각 부서에서 직원들을 지원받아 인허가절차에 대한 편의를 제공 한다고 하셨는데, 외국투자자 입장에서 보면 이 또한 번거롭지 않을까요? 그 많은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확인을 해야 되고, 또 파견 나온 직원들이 전문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장을 할 수도 없지 않겠습니까?”
경환의 지적에 의기양양 했던 모습은 사라지고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 마냥 헛기침을 하며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다.
“현실적으로 법을 따 뜯어 고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런 모습에 자존심이 상한 콩하이위엔이 경환을 향해 도발을 감행했다. 경환은 왜 자신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를 자책하고 있었다.
“법을 뜯어 고치는 것은 나중 문제입니다. 시간이 없으니 간단히 제 의견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용 연구원께서 제안하신 내용을 약간 수정하는 방향으로 검토를 하자는 게 제 의견입니다.”
경환은 똥고집으로 뭉쳐 있는 두 사람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는 중이었다. 용보원은 자신이 연구한 틀 안에서 수정하자는 경환의 말에 똥 씹은 얼굴이 다시 펴지고 있었다.
“각부서의 인력을 파견 받아 운영하는 방안 보다는, 새롭게 경무부 내에 투자상담전담반을 구성해서 각 부서의 인허가 절차에 대한 숙지와 교육을 완벽히 이수 시키고 각 투자기업에 대한 인허가를 절차를 전담반에서 대신 진행을 하는 방안입니다. 이럴 경우 각 투자기업들은 인허가에 소요되는 시간을 절약할 수 있고 이것은 만족도를 높이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용보원은 뭔가 말을 하려다 급히 멈추었다. 경환은 용 연구원을 향해 억지스러운 미소를 보내고는 말을 다시 이어갔다.
“용 연구원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현재 각 관공서와 연결된 브로커들이 인허가 업무를 대행하면서 과도한 수수료를 요구하고 이를 관공서와 배분을 하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이 제도를 시행한다면 브로커와 연결된 관공서들의 반발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반발을 안다면 이 제도가 현실과 많은 괴리가 있다는 것도 알 텐데, 무리하면서까지 이 개선방안을 보고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두 연구원은 서로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들이 총대를 멜 필요가 있겠냐며 경환이 제시한 방안에 대해 불만을 표출했다.
“이 제도를 쓸지 말지는 우리들이 결정할 사항이 아닙니다. 중국이 언제까지 낙후된 관공서시스템을 유지할거라고 보십니까? 연구원들의 연구는 10년, 20년 뒤를 예측해야 됩니다. 단지 현실과 맞지 않는다고 해서 연구조차 하지 않는다면 중국의 미래는 없다고 봅니다. 이주 후에 경무부 부장님을 모시고 브리핑이 계획되어 있습니다. 브리핑은 용 연구원이 하셔야 되니, 제가 드린 과제를 빨리 정리하셔서 브리핑에 만전을 기하십시오.”
용보원은 부장 앞에서 브리핑을 하라는 소리에 입이 함박 만하게 벌어졌다. 부장의 눈에 든다면 자신의 앞길을 탄탄대로가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며칠 전 연구소장의 부탁으로 브리핑은 두 연구원 중에서 하게 해 달라는 부탁을 경환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외국인이 부장 앞에서 발표를 하는 걸 극히 꺼려 한다는 걸 눈치로 안 경환은 개의치 않고 동의를 해 주었다.
동기 부여가 되었는지 두 연구원들은 경환이 제시한 방안과 경환이 작성해서 넘겨준 외국계기업에 종사하는 중국근로자들에 대한 마인드 개선방안을 가지고 브리핑 자료를 만들고 있었다. 우선 급한 불을 막은 경환은 이후의 모든 일을 두 연구원에게 맡기고 북경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새로운 학기가 시작된 학교는 여기저기 바쁘게 움직이는 학생들로 정신이 없었다. 오랜만에 학교를 찾은 경환은 마 교수의 사무실을 먼저 찾았고 마침 수업이 없던 마 교수는 경환을 반겨 주었다.
“자주 찾아오지 못해 죄송합니다. 교수님 덕분에 제가 아주 바빠서요.”
“허허, 나한테 투정이라도 부릴 심산인 거 같구먼.”
경환은 마 교수의 말을 웃음으로 받아 넘겼다. 마 교수의 악연으로 중국까지 왔을 땐 원망이 가득했지만 미래를 준비하는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 년이란 시간이 아쉽기는 했지만, 그 이 년을 충분히 활용하려고 마음을 먹고 있었다.
“일이 이상하게 꼬여서 경무부 자문위원을 맡긴 했지만, 저한테도 좋은 경험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아직 중국시스템이 따라 오지는 못하고 있지만요.”
마 교수는 차 한 잔을 경환에게 주며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경환을 바라보았다.
“중국은 지금 여러 모순이 존재하고 있는 나라라네. 그걸 60년대의 한국과 같다고 볼 수 있겠지. 자넨 한국의 미래를 어떻게 보나?”
생각하지도 못한 질문에 경환은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7년 후에 찾아 올 IMF는 한국의 경제시스템과 산업구조를 한 순간에 무너트리고 한국인들을 절망으로 빠트리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걸 말해 줄 용기는 없었다.
“뜨는 해가 있으면 지는 해도 있겠죠. 모든 역사가 그렇지 않습니까? 해가 지려할 때 어둠을 밝힐 수 있느냐 없느냐고 봅니다.”
경환은 두루뭉술하게 마 교수의 질문을 받아 넘기고 있었다.
“내가 한국에서 자네를 만났을 때 자네는 중국의 미래에 대해서 상당히 도전적인 자세로 바라보고 있더군. 마치 그 시대를 살아 본 사람처럼.”
경환은 흠칫 놀라 마 교수를 바라보았지만, 마 교수는 경환의 시선을 피한 채 뜨거운 찻잔을 입으로 불어가며 차를 마실 뿐이었다.
“저도 미래의 한국과 중국에서 살아 보고 싶네요. 어떻게 변화하는지 제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서요. 흠,···. 사실 뭣 좀 여쭤보려 찾아 왔습니다.”
“말해 보게.”
경환은 혹시라도 자신의 정체가 들통이라도 날까 서둘러 말을 바꿨다.
“왕 씨 형제들은 누구 줄에 서 있습니까? 차기인지 차 차기인지 그게 좀 궁금해서요. 교수님이라면 알고 계실 거 같은데 알려 주실 수 있으십니까?”
경환은 앞으로 바뀔 중국의 지도자들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왕 씨 형제가 누구 쪽에 속하는 지를 확인해야만 했다. 그래야 앞으로의 중국사업의 계획과 방향을 가장 좋은 방향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호형호제를 한다고는 하지만 서로간의 벽은 항상 존재 할 수밖에 없는 사이란 걸 경환은 알고 있었다. 서로 필요한 부분을 채워주고 경환은 자신이 말한 신뢰를 보여 주려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왕 씨 형제나 장 사장 역시 경환의 생각과 매매한가지 일 것은 뻔했다.
“흠···. 자네 보면 볼수록 속을 모르겠구먼. 그게 자네의 앞길에 중요한가 보지?”
말을 자꾸 돌리는 마 교수를 보며 경환은 슬슬 짜증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정치인들의 변죽은 교수님도 잘 아시리라 봅니다. 전 단지 대안이라도 만들어 놓으려는 겁니다. 저나 그들을 위해서요.”
경환은 마 교수의 면전에 목소리를 높였지만, 마 교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랜 시간을 찻잔만 만지작거리던 마 교수는 입을 열었다.
“글쎄 자네에게 도움이 된다니 말은 해 주겠네. 양씨 형제의 고향은 양주라네.”
마 교수의 끝까지 본인의 입으로 말하지 않았다. 차기 주석의 고향이 양주니 왕 씨 형제는 차기 주석의 라인이란 소리였다. 중국 사업은 길게 끌 생각이 없었던 경환에게는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신세는 나중에 꼭 갚겠습니다. 왕 씨 형제들과는 호형호제를 하기로 했습니다. 알고 계십시오.”
호형호제를 하기로 했다는 소리에 마 교수는 놀란 눈을 크게 뜨고 경환을 바라보았지만 경환은 급히 인사를 한 뒤 사무실을 빠져 나간 상태였다.
브리핑이 오후로 잡혀 있는 상황에서 경환은 용보원의 리허설을 최종 점검해 주고 있었다. 경무부 부장을 비롯해 관련부서에서 참석하다 보니 용보원은 인상부터 굳어져 있었다. 속은 쓰렸지만, 경환은 사비를 털어 두 연구원의 보너스까지 깔끔하게 처리를 했기 때문에 오늘 있을 브리핑을 끝으로 지긋지긋했던 연구원 생활을 정리할 생각이었다.
“ONE-STOP SERVICE가 중요한 포인트인 만큼 이해할 시간이 없으니 외우세요. 브리핑이 끝나면 여러 질문들이 나올 수 있는 만큼 어제 드린 예상 질문지를 다시 한 번 숙지해서 토씨 하나 빼지 말고 암기하시기 바랍니다.”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참석자들과 눈의 맞춰가며 아이컨텍을 하는 게 중요합니다. 그렇게 땅바닥만 쳐다본다고 돈이 나옵니까!”
“자신이 만든 연구결과에 그렇게 자신이 없다면 그걸 듣는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겠습니까! 좀 더 강하게 밀고 나가세요.”
며칠째 용보원의 브리핑 리허설을 도와주고 있었지만, 북경대 출신이란 사실이 무색하게 감을 전혀 못 잡고 있었다. ‘될 대로 돼라’라고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하루에도 열두 번씩 들었지만, 용보원이 경환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지는 통에 어쩔 수 없이 준비를 도와주고 있었다. 몇 번의 리허설을 더 한 후에야 그나마 봐 줄만 한 상태가 되었고, 연구소 전체 회의실로 하나 둘 참석자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대외경제무역부(이하 경무부) 부장을 끝으로 전체 회의실엔 빈자리 하나 없이 참석자들로 꽉 차있었고 용보원은 강단에 서서 브리핑을 시작했다.
“해외 투자 유치 활성화 계획 및 확대방안에 대해 브리핑을 맡은 용보원 연구원입니다. 이번 연구의 주목적은 대외투자유치에 서비스란 개념을 도입하여, 해외 투자자들의 입장에서 지금까지 고질병으로 존재하는 인허가 절차의 간소화, SOC투자 확대를 통한 해외투자자의 만족도를 증가시킨다는 것입니다······.”
용보원은 계속된 브리핑을 통해 약간의 어색함을 제외하고는 무리 없이 브리핑을 소화해 나가고 있었다. 30분이 넘게 진행된 브리핑은 특별한 실수 없이 무난하게 마무리를 지을 수 있었다. 질의질문 시간에도 경환이가 작성해준 예상 질문지의 범위를 크게 넘어가지 않고 있었다. 경환은 한 달 피 말리는 연구소 생활을 끝냈다는 안도의 한숨을 내 쉴 무렵 경무부 부장이 급히 용보원에게 질문을 던지는 모습이 보였다.
“개선방안 잘 들었습니다. ONE-STOP SERVICE를 현 시점에 적용하기 위해선 어떠한 조치가 필요한지 설명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예상치 못한 부장의 질문에 용보원은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고 경환은 깊게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부장의 옆에 있던 왕샹첸이 급히 부장에게 귓속말을 전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 연구에 자문위원으로 위촉된 이경환 위원이 발언을 해 주셨으면 합니다.”
느닷없는 왕샹첸의 발언에 경환은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용보원 옆으로 걸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