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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인생-44화 (43/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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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인생 - 44

    사업얘기는 뒤로 밀리고 독한 백주만 정신없이 테이블 위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서 이미 술독에 빠져버린 경환은 정신을 차리려 했지만, 눈앞에 작은 별들이 돌아다니고 입 주위로 사정없이 흐르는 침은 이미 신호가 왔음을 알리고 있었다. 경환은 비틀거리는 몸을 이끌고 간신히 화장실에 도착하자마자 자신의 손가락을 혀 깊숙이 찔러 넣어 토악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아, 돌겠네. 내가 술이 이렇게 약했나.

    오성건설 영업맨 시절 접대로 일가견이 있었던 경환이었지만, 그건 입사를 한 후의 일이고 지금은 대학생이란 사실을 경환은 술에 취해 인식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속을 모두 게워 낸 경환은 종업원에게 부탁하여 홍차 한잔을 마시고 나서야 뒤집힌 속을 진정시키고 다시 방에 들어 갈 수 있었다.

    “하하하, 샤오 리, 자네 꽤 버티는군. 아주 맘에 들어. 사내라면 당연히 그래야지.”

    장성궈는 경환을 편하게 하대를 하고 있었지만 경환은 개의치 않았다. 그 정도로 경환은 이미 맛이 가 있었다.

    “장 사장님이나 왕 선생을 술로 따라가려고 한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제가 한잔 따르겠습니다.”

    경환은 최대한 정신을 집중하여 술병을 들어 장성궈의 잔에 첨잔을 했다. 장성궈는 그런 경환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술병을 들어 경환의 빈 잔에 술을 한잔 가득 따라주었다.

    “나랑 한잔 더 하겠나? 사내는 자고로 술하고 여자 앞에선 꼬리를 말면 안 되는 걸세.”

    이미 한번 게워내고 왔기에 아직은 술 마실 여력이 있는 경환은 빙빙 자신의 주위를 돌고 있는 술잔을 집어 들었다.

    “죽기야 하겠습니까. 술은 피하지 않지만, 전 아내를 무서워합니다. 그래서 여자 앞에선 꼬리를 말 수밖에 없습니다.”

    경환은 말을 마치고 술을 단번에 입에 부어 넣었다. 그런 경환을 보며 장성궈도 자리에서 일어나 경환과 같이 술을 털어 넣었다. 경환은 한계가 왔음을 알았고 더 이상 술은 마실 수 없는 상태였다.

    “이봐, 샤오 리. 자네가 나이답지 않게 총명하단 것은 봐서 알겠네. 그렇지만 중국에서 하는 사업이 만만치 않다는 걸 모르는 거 같아 걱정이야. 그래도 자네 한번 해 보겠나?”

    ‘이봐, 나도 중동 모래 먹어가면서 산전수전 다 겪었어! 라는 말이 목구멍으로 나오는 걸 겨우 참은 경환은 최대한 정신을 집중하고 장 사장의 눈을 직시했다. 말을 돌리는 거 보다는 까놓고 얘기를 하는 편을 선택한 경환이었다.

    “중국에서의 일이 외국인으로서 쉽지 않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또한 비즈니스 내적으로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부분도 이해하고 있습니다. 장 사장님, 제가 아직 어리다고는 하지만 사업의 기본이 신뢰라는 것을 알 정도는 됩니다. 장 사장님이 저를 도와주신다면, 저도 사장님의 가려운 부분을 긁어 드리겠습니다.”

    장성궈는 경환의 말에 순간 놀란 표정을 하며 왕바오밍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이왕 술김에 말이 나온 만큼 경환은 왕바오밍의 얼굴로 가까이 다가가 최소한의 목소리로 속삭였다.

    “왕바오밍 씨, 이 방은 안전한가요?”

    왕바오밍은 순간 당황하여 경환을 바라보고는 고개를 아래위로 끄덕였고, 급하게 방 안에서 술을 따라주던 여 종업원을 급히 밖으로 내 보냈다. 주위를 확인 한 경환은 정신을 집중하며 천천히 말을 꺼냈다.

    “제가 홍콩에 회사를 가지고 있다는 건 명함을 드렸으니 아실 겁니다. 중국에서 사업을 하던 정치를 하던 많은 돈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전 욕심 없이 톤당 3불과 선임에서 1불만 먹겠습니다. 나머지 부분은 여러분들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이미 제 뒷조사는 다 하셔서 알고 계시리라 봅니다. 젊은 나이지만 신용으로 이 자리까지 왔습니다. 제가 외국인이라 불안해하실 수도 있으시겠지만 제가 외국인이기 때문에 더 안전할 수도 있습니다. 두 분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경환은 말을 끝낸 후 급격히 몰려드는 취기에 의자에 몸을 기대 깊게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왕바오밍과 장성궈는 황당한 표정으로 경환의 말에 일절 대꾸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자네 계획은 뭔가?”

    장성궈는 아까의 호탕했던 모습은 온데 간데 사라지고 날카로운 눈으로 경환을 바라보며 물었다.

    “한국과 수교가 되면 ,아니 이미 한국으로 유연탄은 수출되고 있다고 압니다. 수교 전에라도 제 홍콩회사를 한국기업의 중개업체로 지정을 해 주십시오. 그렇다고 비싼 가격에 수출이 되면 안 됩니다. 정상가격에서 제 부분을 생각해 주시고 나머지는 장 사장님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또한 다른 진출구업체나 석탄공업협회를 움직여 주셨으면 합니다.”

    “하하하.”

    경환의 말이 끝나자 장성궈는 뭐가 그리 좋은지 목젖이 보이도록 대소를 했다.

    “결국은 굳은 일은 내가 하고 자네는 앉아서 돈만 벌겠다는 소리군. 내가 자네를 어떻게 믿을 수 있겠나?”

    장성궈는 중국인 특유의 의심 병으로 경환을 다시 간보기를 하고 있었다. 왕바오밍은 뭐가 재미있는지 경환과 장성궈의 대화를 들으며 실실 웃고 있었다.

    “믿어 달라고 하지 않겠습니다. 사업이 시작 되지도 않았는데 제가 어떻게 믿음을 보여 드리겠습니까? 배포가 크신 사장님께서 딱 10년만 밀어 주십시오. 그 이후에 제가 믿을 놈인지 죽일 놈인지 판단을 해 주시면 됩니다.”

    석탄은 2005년도를 넘어가면서 내수물량 증가와 자원보호라는 명목 하에 수출쿼터가 빠르게 줄어들기 시작한다는 것을 경환은 알고 있었다. 10년 이후에는 하고 싶어도 못하는 사업이었다.

    “푸하하, 자네 나보다 배포가 더 크군. 샹첸이의 말이 틀리지 않았어. 사업얘기는 나중에 다시 하기로 하고, 자네 내 아우가 되지 않겠나? 여기 왕바오밍도 자네 형님이 될 텐데 말이지.”

    경환은 장성궈가 왕 씨 집안의 뒷배를 봐주는 인물이란 것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경환은 밖에 있던 종업원을 불러 술잔 세 개를 준비토록 하여 가득 잔을 따랐다.

    “제가 오늘 두 분 형님을 갖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말을 마친 경환은 술 석 잔을 쉬지 않고 마셨다. 왕바오밍과 장성궈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술 석 잔을 따라 마시고는 세 사람은 깊은 포옹과 함께 술자리가 새롭게 시작되었다.

    심한 갈증과 두통으로 인해 깊은 잠에 들지 못한 경환은 침대에서 일어났지만 옆에 보여야 될 수정이 보이지 않았다. 급한 마음에 거실로 달려 나간 경환은 불도 켜지 않고 소파에 쭈그리고 앉아있는 수정을 발견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 쉴 수 있었다.

    “자기야, 왜 안자고 나와 있어?”

    경환은 심한 갈증에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벌컥거리며 마시고 있었지만 수정은 자세를 바꾸지 않고 그대로 앉아 있었다. 수정이 걱정이 된 경환은 소파에 다가가 수정이의 어깨에 손을 얹었지만 수정이의 어깨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소리 없이 울고 있는 수정이의 모습에 경환은 심장이 내려앉는 듯 했다.

    “자기야. 무슨 일 있는 거야? 어제는 일 때문에 과음을 한 거야.”

    항상 밝은 모습만 보여주던 수정이의 우는 모습이 낯설게 느껴지고 있었다.

    “아니에요. 그냥 자기가 너무 고생하는 게 맘이 아파서 그래요. 난 많은 것도 바라지 않는데….”

    수정의 말을 들은 경환은 가슴이 먹먹해지기 시작해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지키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렸지만 그런 모습이 수정은 많이 불안하게 느꼈다는 걸 알게 된 경환은 그 동안 혼자 맘 고생했을 수정이가 너무 안쓰럽고 미안했다. 경환은 수정의 옆에 앉아 수정을 깊게 안아 주었다.

    “맘 아프게 해서 미안해. 내가 좀 더 자기를 생각해 줘야 했는데, 너무 내 생각만 했어.”

    수정은 계속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남편 하나 바라보고 따라온 타지에서 혼자 겪었을 일들을 생각하니 경환의 마음도 좋질 못했다.

    “자기야. 난 일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게 자기와 앞으로 태어날 우리 자식들이야. 자기가 당장이라도 모든 걸 놓으라고 하면 그렇게 할게. 절대로 자기를 힘들 게 하고 싶지 않아. 이건 내 진심이야.”

    “아니에요. 너무 힘들게 일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건강도 신경 써 주고요. 나도 최선을 다 할게요.”

    경환은 수정에게 입맞춤을 하고는 수정일 안고 천천히 침대로 향했다.

    연구소에 출근과 동시에 왕바오밍의 전화가 숙취에 몸부림 치고 있는 경환을 깨웠다.

    “샤오 리, 몸은 좀 어때? 며칠 후에 샹첸 형님이 자리를 만들겠다고 하니까 그때 다시 보자고. 그리고 성궈 형님이 자네에게 좋은 소식을 줄 거니까 기다려 보고.”

    “알겠습니다. 형님. 우선은 연구소 일에 매진을 좀 해야 될 거 같습니다. 형님 편하실 때에 다시 연락을 주세요.”

    왕바오밍과의 전화를 끝낸 경환은 홍콩의 최석현에게 연락을 취해 준비를 지시하고 싶었지만 사방에 깔린 눈들 때문에 연락할 마땅한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우선은 연구소 일부터 빠르게 처리를 해야만 했다.

    마침 안젤라에게 부탁한 자료가 인편으로 도착하여 경환은 빠르게 분석을 하고 있었다. 숙취에 속이 뒤집히고 있었지만, 미룰 수는 없었다. 집에서 들고 온 컴퓨터와 프린터로 설문자료의 분석을 마친 경환은 두 연구원을 회의실로 불러 들였다.

    “제가 드린 서류는 60여 개의 외국계기업의 중국 투자환경에 대한 만족도 조사 설문자료를 정리하고 수치화한 것입니다.”

    두 연구원은 경환의 작업속도에 입을 벌리고 놀라워하고 있었다. 오전에 도착한 서류가 한나절도 가기 전에 분석이 완료되었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두 사람은 서류를 바라보며 서류가 진짜인지 확인하는데 정신이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두 사람이 영어해독이 가능했다는 점이었다.

    “수치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인프라를 포함한 중국의 투자환경과 인허가 절차에 대한 만족도는 70%이상이 부정적으로 나와 있습니다. 싼 임금에 대한 만족도를 제외 하고는 전무합니다. 대외투자유치를 주관하는 부서의 직원으로서 느끼시는 점이 없으신가요?”

    두 연구원은 경환이 건네준 서류와 설문지 내용을 번갈아 쳐다보며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경환을 바라보지도 못하고 연신 담배 연기만 뿜어대고 있었다. 중화라는 자존심으로 가득 차있던 두 사람은 한국이라는 조그만 땅에서 온 젊은 청년에게 무참히 박살 난 기분에 인상이 굳어졌다.

    “앞으로 우리가 연구할 대상은 이 설문조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세 항목을 중심으로 연구를 진행하겠습니다. 첫 번째로 복잡한 인허가절차의 개선방안, 두 번째로 SOC투자 확대방안, 마지막으로 외국계기업에서 일하는 중국공인들의 마인드개선방안 이 세 가지입니다. 우선 용 연구원님이 첫 번째 항목을 받아 연구해 주시고 콩 연구원님이 두 번째, 제가 세 번째 항목을 가지고 연구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주 목요일까지 개선방안에 대해 연구를 해 주시고 금요일 회의를 통해서 정리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주에 두 분께서 조사하신 자료는 복사를 해서 서로 공유를 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두 연구원은 정확한 방향을 잡지 못했는지 경환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질문 있으시면 해 주세요.”

    두 연구원들의 표정을 읽고 있던 경환이 그들의 질문을 유도했다.

    “저…. 이 위원님이 만드셨던 첫 제안서를 참고하고 응용해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제가 만든 제안서뿐만 아니라 현재 서구에서 진행되고 있는 서비스에 대한 각종 자료까지 참고 하셔야 될 것으로 봅니다.”

    두 연구원이 아무리 참고하고 응용을 한다 하더라도 그들 스스로 개념이 잡혀 있지 않은 상태에서 개선방안이 쉽게 나오지 않을 것이란 건 불 보듯 뻔했다. 한국이었다면 책상을 뒤집어엎어서라도 교육시키고 가르치겠지만, 똥 같은 자존심으로 꽉 차있는 중국인들을 상대로 그런 방법은 오히려 악감정만 쌓게 하는 지름길이란 것을 경환은 알고 있었다. 그들이 만들어 온 개선방안을 가지고 모순점을 하나하나 설명을 해 줄 생각이었다. 경환은 자신이 중국에서 태어나지 않은 걸 다시 한 번 하늘에 감사를 드렸다.

    “연구를 하시다 막히시는 부분이 많이 생기실 거라고 봅니다. 혼자서 고민하지 마시고 셋이서 머리를 맞대면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하니, 언제든지 막히시면 회의를 요청하시기 바랍니다.”

    “저…. 문제가 하나 있어, 말을 하겠습니다.”

    콩하이위엔이 머뭇거리다 입을 떼며 죽어가는 소리로 말을 꺼냈다.

    “SOC투자 확대방안은 사실 너무 광범위 합니다. 저희가 주무부서도 아니고요. 일주일 안에 나올 수 있는 방안이 아니라고 봅니다.”

    경환은 콩하이위엔에게 웃음을 보였다.

    “콩 연구원님의 말씀이 맞을 수도 있겠네요. 그럼 우선 SOC부분은 제가 만든 제안서를 약간 손보는 것으로 하고 콩 연구원님은 용 연구원님을 도와 인허가 절차 개선방안을 같이 연구하시면 어떻겠습니까?”

    경환의 말을 들은 콩하이위엔은 그제야 맘이 놓여 그렇게 하겠다는 답변을 했지만, 용보원은 아직도 감을 잡지 못하고 있어 보였다. 경환은 스스로 물어 보지 않는 것을 일부러 알려 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두 연구원들의 고민은 생각하지 않고 경환은 맡은 일을 빨리 마무리 하려고 서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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