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43화 (42/264)

#43

다시 사는 인생 - 43

초등학교 때나 사용했을 법한 나무책상에는 도저히 연구원이라고는 볼 수 없는 덥수룩한 머리카락과 허름한 외모의 사람들이 앉아 담배를 피워가며 잡담을 나누고 있었지만, 평소 내복을 즐겨 입지 않은 경환은 그들 사이에서 북경의 차가운 겨울날씨에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벽에 붙어있는 스팀으로는 유리창 사이로 새어 나오는 칼바람을 막을 수는 없었다. 경환의 모습이 애처로웠던지 콩하이위엔이 다가와 뜨거운 찻잔을 경환의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북경의 추위는 무섭습니다. 차 한 잔 하면서 몸을 녹여 보세요.”

“감사합니다.”

뜨거운 차를 넘기고 나서야 경환은 얼었던 몸이 풀리는 거 같았다. 이런 추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도 하루라도 빨리 성과물을 내 놓을 필요를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경환은 중국인들의 근무시간 때문에 다시 한 번 절망을 할 수밖에 없었다. 8시 30분 출근해서 잡담으로 시간을 때우다 11시 30분에 점심을 먹기 위해 퇴근을 하고, 오후 2시부터 오후일과를 시작해 4시 30분이면 퇴근을 해 버린다. 도저히 이런 환경에서 업무성과를 빠른 시간 안에 내어 놓을 수는 없었다. 혹시라도 한국의 근무시간을 적용시키려고 한다면 아마 입에 거품을 물고 뒤로 넘어가 버릴 것이라고 경환은 생각했다.

“용 연구원님, 콩 연구원님 회의실에서 저 좀 잠깐 보실 수 있으시겠어요?”

경환의 요청을 받은 두 사람은 노트를 집어 들고 마지못해 자리에 일어나 회의실로 향했다. 경환은 연구에 대한 성과물을 내 놓기 전까지는 근무시간을 조정을 해 보려고 했지만 쉽지 않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회의실에 도착한 두 사람은 뜨거운 차를 마시며 경환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현재 연구소의 근무시간으로는 이 연구가 언제 결과물을 내어 놓을 수 있는지 아무도 장담을 할 수 없습니다. 한시적으로 근무시간을 조정해 보려고 하는데 두 분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점심시간을 한 시간 단축하고 퇴근시간을 한 시간 늦추자는 게 제 생각입니다.”

경환의 말에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표정으로 매서운 눈빛을 한 채 경환을 바라보았다.

“점심을 어떻게 한 시간 반 만에 먹을 수 있습니까? 점심을 굶으라는 소리입니까? 그리고 퇴근시간은 국가에서 정한 일입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두 연구원은 격앙된 목소리는 가뜩이나 추위에 떨고 있는 경환을 더 지치게 만들고 있었다. 그 당시 중국인들은 점심을 집에서 해결하고 있어 그 사정을 모르지는 않았지만 이 방법이 아니고서는 연구결과를 제 시간에 맞춰 완성할 수는 없었다.

“이런 방법은 어떻겠습니까? 외근이 많아 질 겁니다. 외근 중에는 밖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내근 중에는 제가 점심을 해결 하겠습니다. 또한 근무시간이 늘어난 만큼 근무외시간을 적용해서 수당을 두 분께 드리도록 소장님과 왕 조리를 설득하겠습니다. 월 300원의 수당이면 동의하시겠습니까?”

두 연구원은 점심을 해결시켜준다는 말 보다는 300원의 수당을 준다는 소리에 귀가 솔깃했다. 자신들의 월급이 채 400원도 안 되는 상태에서 300원은 큰돈이었기 때문이었다.

“정말 수당을 책임질 수 있겠습니까?”

경환은 중국의 만만디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중국인들의 성격이 느긋해서 만만디가 아니라 사회주의 체제에서 책임지지 않으려고 타인에게 그 책임을 전가시키는 과정에서 나오는 결과라고 보고 있었다. 집단이 아닌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중국인들 보다 빠른 사람들은 아마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 한 달 안에 우리 세 명이 결과물을 완성시킬 수가 있다면 수당 300원 외에 1000원씩의 보너스가 지급 되도록 하겠습니다. 제 이름을 걸고 드리는 말씀입니다.”

두 연구원은 생각이고 자시고 고개만 연신 끄덕이고 있었다. 한 달 안에 결과를 완성시킨다면 석 달 치 급여를 받을 수 있는 일을 거절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경환은 왕 조리가 책임을 지지 않는다 해도 자신이 부담을 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보너스까지 합쳐 26만원 정도였기에 충분히 감당을 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 두 사람의 동의를 얻어 낸 경환은 일단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점심을 해결해 줘야 될 일이 남아있긴 하지만, 어쩔 수없이 수정에게 도시락을 부탁 할 수밖에는 없었다.

“용 연구원님은 금요일 전까지 외상투자유치에 관한 법령을 중앙정부와 지방정부로 분리해서 조사해 주시고, 콩 연구원님은 현재 외국기업의 투자에 따른 인허가 절차와 실태를 조사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중국에 진출한 외국기업의 만족도 조사를 하겠습니다.”

두 연구원은 풍족히 들어올 보너스를 생각하며 급히 자신의 일을 찾아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무실의 다른 연구원들은 갑자기 진지하게 일을 시작하는 두 연구원을 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들이었지만 경환은 개의치 않았다.

경환은 연구소를 빠져 나와 호텔커피숍에 도착해 있었다. 호텔정문으로 들어오는 안젤라의 모습이 경환의 눈에 비쳤다. 외국계기업의 만족도 조사를 위해서는 안젤라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었다.

“안젤라 오랜만입니다. 화성산업과 계약체결은 차질 없이 진행이 되고 있나요?”

안젤라는 예전의 태도와는 확연히 다른 표정으로 경환을 대하고 있었다. 윌리엄까지 경환을 인정하고 있는 마당에, 자신과는 다른 레벨에서 놀고 있는 사람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네, 제임스. 이번 달 말에 본사에서 정식계약을 체결하는 거로 알고 있어요. 오늘은 무슨 일로 저를 보자고 하셨나요?”

경환은 사무적인 안젤라의 태도를 보며 안심하며 살짝 미소를 보였다. 경환은 서류가방에서 서류뭉치를 꺼내 안젤라의 앞으로 밀어 보냈다.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안젤라는 북경에 진출한 외국계기업들과 교류가 많다고 들었습니다. 중국의 투자환경과 외국계 기업의 만족도를 조사하는 설문자료입니다. 가능하면 금요일까지 조사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안젤라는 경환이 건넨 서류를 꺼내 천천히 살폈다. 안젤라 자신이 보더라도 설문내용들이 항목별로 잘 정리가 되어 있었다. 본사에서 관심을 갖고 관리를 하고 있는 경환의 부탁을 무시 할 수는 없었다.

“알겠어요. 금요일까지 최대한 많이 준비를 해 볼게요.”

“고마워요. 점심이라도 같이 하시겠어요? 이 호텔 일식이 괜찮다고 하던데.”

“다음에요. 제가 따로 약속이 있어서요. 금요일 오전에 연락을 드릴게요.”

말을 끝낸 안젤라는 서류를 들고 빠르게 호텔 문을 벗어났다. 큰일을 하나 해결하게 된 경환은 점심을 고민하다 도시락을 수정에게 부탁을 하기 위해 차를 몰아 집으로 향했다.

다음날부터 동기부여를 받은 두 연구원은 특별한 지시가 없더라도 알아서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경환은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부탁한 수당을 연구소장은 난색을 표하며 불가능 하다고 손사래를 쳤기 때문이었다. 수당과 보너스는 온전히 경환의 주머니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경환은 의자에 머리를 뒤로 기대고 열악한 환경에 탄식을 내 쉬었다. 연구하라고 보낸 왕 조리는 아무런 지원도 해 주지 않고 있었고, 경환의 요구사항인 석탄사업에 대한 답변도 아직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썩을, 왕 조리 그 인간한테 당한 거 아닌지 모르겠네.’

이미 자문위원으로 발을 담근 이상 자신의 오점을 남기지 않기 위해 연구는 마무리를 질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지긋지긋한 곳을 떠나기 위해서는 하루라도 빨리 일을 마치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이때 콩하이위엔이 경환을 찾았다.

“저…, 회의실에서 잠시 회의를 했으면 합니다.”

경환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준비된 회의실로 들어갔다. 두 연구원은 그 동안 수집된 자료를 놓고 경환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사 정리는 대략 마무리 단계입니다. 정리가 완료되면 그 후의 일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중국인들의 한계였다. 사회주의 체제에 익숙한 사람들이다 보니 독창적이고 능동적인 모습은 거의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지시가 없다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두 연구원은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그들의 정신세계까지 뜯어 고치기에는 시간이 너무 없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정리된 자료와 외국계기업의 설문자료를 병합해 현 제도의 개선방향을 연구해야 될 것입니다. 기본적인 ONE-STOP SERVICE의 방향은 투자자의 입장에서 최상의 편의를 제공한다는 원칙을 적용해야 되지만 가장 심각한 문제는 여러분들조차도 서비스란 개념이 약하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우선 자료가 취합되고 연구를 하는 과정에서 다시 논의를 하겠습니다.”

두 연구원은 경환의 말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우뚱거렸지만 경환은 일일이 설명을 할 시간이 없었다. 취합된 자료를 가지고 방향을 설정해 가며 설명을 해 줄 예정이었다. 그래도 이해는 못하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겨울이라 그런지 어둠이 빠르게 찾아오고 있었다. 중국의 가장 큰 도시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북경의 중심가인 장안가는 가로등의 불빛마저 그 어둠을 밝혀 주지는 못하고 있었다. 왕바오밍의 전화를 받고 경환은 서둘러 약속장소로 향하고 있었다. 기다리던 왕 조리의 연락은 아직도 오지 않아 경환의 심기는 좋지 못했다. 어두운 뒷골목에서 번득이는 네온사인을 확인한 경환은 문을 열고 들어가 지정된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왕바오밍 씨,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얼굴이 더 좋아 보이십니다.”

경환은 불편한 심기를 빗대어 비꼬았지만 왕바오밍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껄껄거리며 경환의 심기를 더 자극하고 있었다.

“요새 큰일을 한다고 들었습니다. 좋은 결과가 나오기를 기대하고 있어요. 아, 그리고 잠시 후에 손님 한 분이 더 오십니다. 왕 조리님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으신 분이니 경환 씨가 필요한 부분을 도와 줄 수 있을 겁니다.”

경환은 왕바오밍의 말에 불편했던 심기를 거둬들였다. 아마도 자신이 부탁한 석탄과 관련된 인물이란 걸 어렵지 않게 유추해 낼 수 있었다. 고급공무원인 왕샹첸이 이 자리에 나오지 않은 이유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마침 문이 열리고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허름한 옷차림의 남자가 들어와 왕바오밍의 양손을 붙들고 격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라오(윗사람을 지칭) 장, 그 동안 격조했습니다. 자주 뵈었어야 했는데.”

“샤오(아랫사람을 지칭) 왕, 나보다야 자네가 더 바쁠 텐데. 양친은 다 무고하시지?”

경환은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두 사람의 계속되는 인사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한참을 서 있은 후에야 왕바오밍은 경환을 가리켰다.

“라오 장, 샹첸 형님이 말했던 그 친구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경환입니다.”

“하하하, 말 많이 들었습니다. 경무부 자문위원으로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거기에 북경대학에서 유학을 하고 있다고도 들었고요. 대단한 실력을 가지고 있으신 분을 만나게 되어서 제가 오히려 영광입니다.”

경환은 온갖 화려한 미사여구를 늘어놓으며 상대방의 기분을 올려주는 사람의 신분이 무척 궁금했다. 중국에서 가장 조심하여야 될 것이 중국인의 화려한 언변이란 것을 경환은 진작 알고 있었기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았다. 경환은 최석현이 보내온 명함을 급히 건네주었다. 상대방도 경환의 명함을 건네받고는 엉겁결에 자신의 명함을 꺼내 경환에게 건네주었다.

‘중국화동진출구총공사 총경리 장성궈’

경환은 명함을 살핀 후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기대하던 석탄공업협회의 인물이 아니라 실망은 되었지만, 한국의 종합상사와 같은 진출구공사의 사장이란 명함에 일말의 기대는 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왕 조리에게 말은 많이 들었습니다. 석탄일을 해 보고 싶다고 하셨다고요?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석탄일을 하기엔 힘든 점이 아주 많을 텐데요.”

장성궈의 간보기에 경환은 실소를 지었다. 물론 석탄에 대한 경험은 없지만 무역실무만큼은 지겹도록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경험을 가지고 시작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무역실무에 대한 지식은 장 사장님 회사 누구보다도 뒤지지 않을 자신은 있습니다. 석탄쿼터를 귀사에선 어느 정도 확보를 하고 계신지요?”

장성궈의 자존심을 세워 주고 싶었지만, 자신을 간보고 있는 사람에게 호의를 베풀고 싶지는 않았다.

“하하하, 자신감이 대단한 청년입니다. 말씀 드리죠. 중국에서 수출되는 탄의 20%정도의 쿼터를 저희가 가지고 있습니다. 양이 좀 적나요?”

20%라면 엄청난 양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을 단순한 청년으로 밖에는 인식하고 있지 않은 장성궈를 설득할 수만 있다면 경환이 원하는 양은 한 번에 해결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원하는 가격으로 공급을 받을 수 있느냐였다.

경환과 장성궈의 신경전이 부담스러웠던지 왕바오밍이 중간에 나서며 두 사람을 진정시키려 했다.

“하하하, 두 사람의 입담이 대단하네요. 자, 자. 좋은 날 술이 빠져서야 되겠습니까? 좋은 요리도 나왔으니 목 좀 축이시죠.”

술이 잔에 채워지고 세 사람은 잔을 들어 왕바오밍의 제안으로 건배를 하며 술을 들이켰다. 경환은 능구렁이 장성궈와의 협상을 위해 빠르게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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