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42화 (41/264)

#42

다시 사는 인생 - 42

경환은 케이티를 직원으로 채용하는 것에 동의를 하고 최석현에게 위임을 해 주었다. 결혼부터 먼저 할 것을 신신당부를 한 후 경환과 수정은 북경 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최석현의 밤 기술 노하우를 습득하지 못한 채,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의 춘절은 정월대보름까지 약 15일간 연휴가 지속되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북경은 한산하기만 했다. 한국과 홍콩에서의 바쁜 일정을 보내느라 개인적인 휴식을 하지 못한 경환은 남은 구정 연휴 동안 중국에서의 일을 정리하고 있었다. 중국에서 일을 시작하게 된다면 자신이 떠난 후라도 일을 맡아줄 사람이 필요했지만 불확실한 김 차장을 제외하고는 눈에 띄는 사람은 나타나질 않고 있었다. 중국방송에서는 연일 춘절관련 쇼 프로가 나오고 있었고간간히 한국과의 외교수립이 막바지에 와 있다는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김창동 식구들도 구정을 한국에서 보내고 들어온 듯 보였다.

“자기야, 인준이 엄마 한국에서 돌아 오셨어?”

“아까 통화 했어요. 김치 많이 가지고 왔다고, 와서 가지고 가라고 하던데요.”

경환은 옷을 차려 입고 겸사겸사 김창동의 집을 방문했다. 마침 구정연휴라서 그런지 다행히 김창동은 집에 있었다.

“오래간만에 뵙는데 소주한잔 하러 왔습니다. 밥도 한 끼 주시면 좋고요,”

“잘 오셨어요. 나도 적적했는데 소주한잔 같이 하시죠.”

수정은 김치를 통에 담느라 정신이 없었고, 김창동이 가지고 온 참치 캔을 앞에 두고 경환과 김창동은 소주잔을 기울였다. 반 년 후면 정식 외교관계가 수립되기 때문에 김창동의 귀국도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다. 경환은 김창동의 의중이 궁금했다.

“본사로 귀임하시게 되면 어떤 일을 하시게 되나요?”

경환의 말에 김창동은 얼굴이 급격히 변했다. 동기들 보다 진급이 늦은 상태에서 이번 북경주재원 발령은 등 떠밀리며 나온 파견근무였다. 능력이 출중해서라기보다 남들이 꺼려하기에 자신이 발령받아 나온 자리였기 때문에, 본사로 복귀를 한다 하더라도 쉽게 자리가 날 것 같지는 않았다. 지방으로 발령이나 나지 않으면 다행으로 생각해야 될 판이었다.

“글쎄요. 잘 되겠죠. 일할 자리하나 없겠나요.”

자신의 넋두리를 경환의 앞에서 했다는 사실에 김창동은 허탈한 웃음을 보이며 술을 권했다. 경환도 그 나이에 등 떠밀리듯 명퇴를 당했기에, 김창동의 고민을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았다. 김창동의 말을 들었는지 김창동의 부인이 불안한 듯 김창동을 바라보고 있었다.

“차장님, 제가 제일그룹과 유연탄을 가지고 거래를 한 사실 들어서 아시죠?”

김창동은 알고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석탄사업부장으로부터 내용은 들어 알지만 김창동도 경환이 할 수 있는 비즈니스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제 아내가 인준이 어머니를 많이 따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 드리는 겁니다. 춘절연휴가 끝나면 저는 대외경제무역부의 자문위원으로 위촉이 될 겁니다.”

김창동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대외개방을 추진하고 있는 중국의 핵심부서에서 경환을 자문위원으로 위촉한다는 사실이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그게 정말입니까?”

“유연탄과 자문위원을 걸고 거래를 했습니다. 아직 제일그룹에서 알 필요는 없지만 차장님에게만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김창동은 경환이 자신에게 이런 얘기를 왜 하는지 쉽게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일은 많은데 사람이 없습니다. 제 일을 좀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뭘 해달라는 것은 아닙니다. 수교는 8월초라고 들었습니다. 그 전에 차장님께서는 복귀발령이 나시겠지요. 그 전에 결정을 해 주셨으면 합니다.”

경환은 홍콩의 외환구좌 복사본을 김창동에게 건네주었다. 자금 내역을 확인한 김창동은 심각한 눈으로 경환을 바라보았다.

“이상한 돈은 아닙니다. 제가 컨설팅을 해 준 업체의 적당한 대가를 받은 것입니다. 사모님과 잘 협의를 해 주십시오.”

김창동의 결정이 어떻게 될지는 지금으로선 알 수 없지만, 만약 거절을 한다면 깨끗하게 김 차장을 포기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김창동에게 시간을 줄 수밖에는 없었다.

춘절연휴가 끝나기 무섭게 대외경제무역부는 경환을 독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 석탄에 대한 확실한 답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먼저 자문위원에 위촉되기를 꺼려한 경환은 대외경제무역부의 독촉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유연탄이 아쉽기는 하지만, 자문위원에 목매달 정도는 아니었다. 중국인들과의 비즈니스는 그들보다 더 느려야 된다는 생각을 경환은 가지고 있었다. 중국에서의 사업은 급한 쪽이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는 걸 경환은 전생의 기억으로 알고 있었다.

‘되면 좋고, 안되면 말고’

이후로도 며칠을 피하자 왕샹첸이 직접 경환을 찾았다. 왕샹첸과 약속된 왕푸징의 식당을 찾은 경환은 종업원의 안내에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먼저 고개를 숙인 경환은 왕샹첸이 청한 악수를 나누고 맞은편 의자에 몸을 앉혔다.

“연구소장이 연락을 많이 했다고 하더군요. 특별히 문제되는 일이라도 있나요?”

시치미를 떼는 왕샹첸은 경환의 시선을 피한 채 찻잔을 들어 뜨거운 차를 입술에 적시고 있었다.

“특별한 문제는 없습니다. 단지 제가 아직은 학생의 신분이고 그렇게 큰 연구소의 자문위원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지 그게 고민이 돼서 망설이고 있는 중입니다.”

경환이 제안한 ONE-STOP SERVICE는 삼킬 수도 뱉을 수도 없는 뜨거운 감자라는 걸 눈치로 알고 있었다. 아직 세부계획은 경환의 머리에 있는 이상 세부지침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경환의 참여가 필요한 상태였다,

“그런 고민은 연구에 대한 자문을 해 가며 차차 생각해도 될 것 같은데요. 가능하면 바로 참여를 했으면 합니다.”

경환은 한 번 더 머리를 굴려 답을 할지 직설적으로 말을 꺼낼지 잠시 고민을 한 뒤 왕샹첸을 바라 봤다. 이미 사업자금은 홍콩에 충분히 있었기 때문에 왕샹첸에게 끌려가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경환보다 먼저 왕샹첸이 입을 열었다.

“한국에서 많은 일을 하셨더군요. 화성산업이란 곳에서도 일을 하셨고, KBR이란 곳과도 관계가 있으시네요.”

뒷조사를 할 거라는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왕 조리의 입에서 이런 사실을 듣게 된 경환은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그러나 자신 혼자 와 있는 북경이 아니다 보니 걱정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자문위원 위촉을 준비하셨다면 기본적인 제 생활은 당연히 조사를 하셨겠지요. 중국에서 나가라고 하신다면 제가 여러 곳에서 욕을 좀 먹긴 하겠지만 미련 없이 나가겠습니다. 왕 조리님이 어렵게 가자고 하시니 제가 미련을 버리는 게 빠르겠습니다.”

왕샹첸은 재미있다는 듯 경환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경환에 대한 사회안전부의 조사내용을 살펴본 왕샹첸은 젊은 나이에 뛰어난 사업적 감각과 국제적인 마인드까지 갖춘 경환에 다시 한 번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도 자신이 머리를 숙일 수는 없었다.

“왕 조리님, 제가 성격이 급하다 보니 언중유골 식의 대화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서로 필요한 거주고 받는 게 어떠십니까? 서로 필요한 게 없다면 이런 만남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왕샹첸은 직접적으로 필요한 거주고 받자는 경환의 황당한 답변에 웃음으로 답을 대신하고 있었다.

“뭐, 좋습니다. 시간은 얼마나 필요한가요?”

“한 달 안에 제안에 대한 기본 틀을 완성시키겠습니다. 왕 조리님은 시간이 얼마나 필요하십니까? 제가 알기론 8월초에 수교가 된다고 들었습니다.”

자신도 아직 정확한 수교날짜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있었지만, 경환은 어디에서 정보를 입수했는지 8월초로 못을 박고 있었다. 순간 당황한 왕샹첸은 다시 찻잔을 들어 입술에 붙이고는 고민에 빠졌다.

“다음 주부터 연구소에서 자문위원 역할을 해 준다면 이번 달이 가기 전에 소식을 드리겠습니다.”

경환은 고개를 끄덕이며 서류 한 장을 왕샹첸에 건네주었다.

“제가 원하는 석탄의 SPEC입니다. 저도 제 아이디어를 아낌없이 드리는 만큼 가격적인 면에서 최소 톤당 5불은 만들어 주셨으면 합니다. 2불은 남겨 놓겠습니다.”

왕샹첸은 2불을 남겨 놓겠다는 경환의 말에 알 수 없는 미소를 보이며 그에 대한 답은 경환에게 주지 않았다. 이번 만남으로 경환은 자문위원을 수락할 수밖에 없었지만 학교를 다니는 거 보단 백 번 낫다고 자위하고 있었다.

북경시내 허름한 건물 사이로 경무부연구소라는 현판을 발견한 경환은 차를 몰아 주차장으로 향했다. 미리 연락을 해 놓아서 인지 연구소 정문으로 지난번 제안서 브리핑을 했을 당시 안면이 있던 연구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저는 연구소장 양청웨이입니다.”

경환은 양청웨이와 함께 제 2분과라고 쓰인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사무실 안에는 십여 명의 인원이 모여 경환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오늘부터 자문위원으로 우리와 같이 연구 활동을 벌일 이경환 선생입니다. 참고로 여러분들이 검토하고 있는 제안서를 만든 작성자이기도 합니다. 짧은 기간이 되겠지만 같이 협력해서 좋은 결과를 만들도록 해 봅시다.”

양청웨이의 말이 끝난 후 경환은 연구원들을 향해 머리를 숙여 인사를 했고 연구원들은 무표정으로 박수로서 경환을 환영해 주었다. 경환은 배정된 자리에 앉았지만, 할 일은 전혀 없었다. 연구소라 하지만 책상 위에는 서류를 빼 놓고는 컴퓨터 한대 보이지 않았고 달랑 전화기 한대가 전부였다. 읽을 책 한 권 없이 경환은 지루한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권한이 없는 자문위원은 막말로 빛 좋은 개살구였다. 연구원들 또한 경환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자신들끼리 대화를 나누며 열심히 받아쓰기를 하고 있었다. 그때 문을 열고 왕샹첸이 들어왔다.

“이경환 씨 제안한 내용 중에서 투자유치 활성화 방안에 대해 연구원들에게 설명을 해 주실 수 있나요?”

왕샹첸의 질문에 경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작성한 기본적인 개념은 투자유치를 위해 관공서의 서비스를 개선하자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많은 분들이 아직 서비스가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는 상태에서 이 개념을 설명하기란 쉽지 않을 거 같습니다. 저에게 연구원 두 분과 함께 정리를 할 수 있게 해 주셨으면 합니다.”

경환의 말을 듣던 연구원들은 자신들이 무시를 당했다고 생각을 했는지 불편한 얼굴을 숨기지 않고 있었다. 경환은 일일이 그런 연구원들까지 생각해 줄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좋습니다. 용보원 연구원과 콩하이위엔 연구원이 이경환 씨와 같이 작업을 하도록 하세요.”

양청웨이의 명령으로 두 연구원이 경환에게 배정되었다. 사무실 옆 조그마한 회의실에 모인 세 사람은 서로 뻘쭘하게 마주 보고 있었다.

“제가 중국인이 아니고 나이도 어리다 보니 믿음이 많이 안 가시나 봅니다. 제가 느낀 중국의 관공서와 기업의 국제경쟁력에 대해 말씀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경환은 두 사람을 향해 웃음을 보이고 있지만 두 사람의 표정은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

“중국인들은 자신이 맡은 일에 대해서는 상당한 전문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바꿔 말하면 자신의 맡은 일 이외에는 전혀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습니다. 기업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일본기업의 영업사원은 혼자서 영업, 기안, 제안서, 견적, 계약, 관리, 정산 이 업무를 다 처리합니다. 그러나 중국이라면 최소한 6명 이상이 한 업무를 처리합니다. 인건비가 싸서 경쟁력이 있다고 말 할 수도 있겠지만 경쟁력은 효율을 우선시 합니다. 한 사람이 한 시간 안에 처리를 하는 것을 여섯 명이 여섯 시간 이상 걸린다면 효율성이 높다고 볼 수는 없겠죠. 이런 불합리한 것을 바꾸는 게 서비스의 큰 개념이라고 봅니다.”

경환의 말이 끝나자 두 연구원의 얼굴을 울그락불그락 가관도 아니었다.

“우리 중국인들이 일본인들 보다 못하다는 말입니까?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의 방식이 있는 겁니다.”

용보원이 발끈했지만, 경환은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이제야 대화가 시작 되었다고 생각이 들어서였다.

“절대 못하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배울 것은 배워야 된다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창피한 얘기지만 한국도 일본을 따라 배웠습니다. 배워서 내 것으로 만들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투자유치도 투자자들에게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면 자연적으로 투자유치는 증가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아직은 시기상조이고 힘들지만 지금부터 검토하고 연구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경환의 말에 두 연구원들은 인상이 굳어졌지만 마땅히 반론을 제기하기가 어려웠다.

“기본 방향은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두 분이 도와주신다면 현 중국시스템에 가장 합리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서비스 개선방향을 연구해 보고 싶습니다. 도와주십시오.”

경환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연구원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두 연구원도 경환이 작성한 제안서 내용에 심적인 동의는 하고 있었지만, 현 중국의 시스템에 적용시키기엔 무리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당신의 말에 확실한 믿음이 있는 건 아니지만, 같이 검토는 해 봅시다.”

두 연구원의 동의를 얻어 낸 경환은 자존심 강한 중국인들과 일을 할 생각에 머리부터 지끈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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