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41화 (40/264)

#41

다시 사는 인생 - 41

침샤츄이의 한 호텔에 도착한 경환은 체크인을 마치고, 최석현과 가까운 커피숍으로 향했다. 수정은 케이트의 안내를 받아 주변을 관광하겠다는 말로 자리를 피해준 상태였다.

“팀장님, 어제 오후 400만 불은 구좌에 입금이 되었습니다. 확인해 보십시오.”

초조하게 기다리던 400만 불이 도착했다는 소리에 경환은 최석현이 내민 서류를 일일이 확인하고 있었다. 비용은 들었지만 처음부터 변호사를 찾아 일을 진행한 만큼, 흠 잡을 곳이 없을 정도로 서류는 완벽했다.

“우선 자금은 팀장님의 결재가 있어야 인출이 되도록 준비를 해 두었습니다.”

경환은 최석현의 말을 들으며 슬쩍 웃음을 보였다. 견물생심이라고 400만 불이라는 큰 돈 앞에서 흔들리지 않을 인간은 없었다. 최석현은 경환의 지시는 없었지만, 자금의 인출을 경환의 지시에만 가능하도록 조치를 해 두었다. 경환은 그런 최석현의 마음을 고맙게 느끼고 있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이 회사명으로 명함을 준비해 주십시오. 저는 팀장으로 해 주시고, 계장님은 차장으로 하세요. 오늘부터 승진하셨습니다.”

“하하하, 두 계단이나 뛰었네요. 감사합니다. 팀장님.”

첫 식구였기에 홀대하고 싶은 생각이 경환은 없었다. 물론 능력이 남들보다 조금 떨어지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과 믿음으로 평생을 갈 수 있는 사람이 경환에게는 필요했다.

“그리고 내일 저와 은행에 같이 가셔서 10만 불을 인출해 드리겠습니다. 차장님 개인구좌에 입금을 하신 후에 급여와 기타 경비로 사용을 하시기 바랍니다. 일 년 후엔 홍콩을 떠날 생각이니 충분 하실 겁니다.”

“알겠습니다. 월별로 사용내역을 정리해서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최석현 역시 10만 불이란 적지 않은 돈을 자신에게 맡길 정도로 믿어 주는 경환이 고마웠다. 화성산업을 박차고 나올 때도 경환과 함께 한다는 것이 기뻤을 뿐 조금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팀장님, 제가 앞으로 홍콩에서 하게 될 일을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경환은 자신이 생각하는 사업적 구상에 대해 최석현에 말해 줘야 될 시기라고 생각했다.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중국 비즈니스가 곧 시작이 될 것입니다. 지난번 말씀 드렸듯이 유연탄 수입이 시작이 된다면, 커미션과 기타 발생이익을 홍콩을 통해 처리를 해야 됩니다. 이 부분을 당분간 차장님이 맡아 주세요. 자그마한 사무실을 얻으셔서 준비를 먼저 해 주시고, 저와 미국에 같이 들어갈 때까지는 모든 부분을 혼자서 하셔야 됩니다.”

중국 사업이 시작된다면 블랙머니의 처리 부분도 당분간 홍콩을 통해 처리할 생각이었지만 아직 이 부분은 최석현에게 알릴 내용은 아니었다. 최석현은 자신이 할 업무에 대해 메모지에 정리를 하고 있던 최석현은 순간 경환을 올려다보았다.

“팀장님, 저도 미국에 같이 가나요?”

“차장님은 제 첫 식구입니다. 앞으로 제가 가는 길에 차장님은 항상 같이 하게 될 것입니다. 중국과 홍콩을 맡길 사람은 이미 봐 두었으니, 그때까지만 수고를 해 주세요.”

경환은 중국 비즈니스를 북경에 있는 김창동에게 맡길 생각이었지만, 아직은 확실치가 않았다. 대기업을 나온다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 경환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창동 문제는 당분간 지켜 볼 수밖에는 없었다.

“그나저나 케이티라는 아가씨와는 어떻게 된 겁니까?”

열심히 경환의 지시사항을 메모하고 있던 최석현은 흠칫 놀라며 적고 있던 메모지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경환을 향해 입을 열려던 순간, 관광을 마치고 돌아오는 수정과 케이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자기야, 케이티 덕분에 구경 잘 했어요. 얘기는 다 끝내셨어요?”

“어, 얘기는 다 했어. 구경하느라 배고팠을 텐데, 같이 저녁이나 하러 가자. 케이티 오늘 수고 많았어요.”

케이티가 궁금했던 경환은 수정의 빠른 등장으로 잠시 궁금증 해결을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케이티는 뭐가 부끄러운지 얼굴이 빨개져 최석현만 쳐다보고 있었다.

“차장님, 좋은 곳에서 넷이 식사를 하고 싶은데, 제가 아는 곳이 없으니 부탁드리겠습니다.”

최석현은 미리 준비를 해 놓은 듯, 케이티와 말을 나눈 후 경환과 수정을 안내하며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도착한 식당은 화려해 보이지는 않지만 손님들로 빈자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북적거렸다. 예약된 조용한 룸으로 들어간 일행은 케이티가 지정해 주는 좌석에 따라 자리를 잡고 앉았다. 최석현이라면 그 당시 한국 관광객들에게 유명했던 JUMBO라는 식당을 예약했겠지만, 이 식당은 케이티가 준비한 식당이었다.

음식들이 하나 둘 테이블 위에 놓이고 네 사람은 조용히 식사를 시작했다. 도저히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던 경환은 케이티를 보며 말을 걸었다.

“케이티, 최 차장의 일을 도와주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우리와 일을 해 보고 싶나요?”

경환의 갑작스런 질문에 케이티는 먹던 음식이 목에 걸렸는지, 급히 찻잔을 들어 마시고는 빨개진 얼굴로 경환을 쳐다보았다. 최석현이 옆에서 케이티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지금 도움을 줄 수는 없었다.

“저…, 사장님께서 젊으신 분이실 줄은 몰랐습니다. 전 그냥 석현 씨를 도와주는 것이 즐겁습니다. 제가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일을 해 보고 싶습니다. 아니 열심히 할 수 있습니다.”

“미스터 최도 아니고 석현 씨라고 부르시네요? 제가 케이티를 잘 모르는데 소개를 해 주시겠습니까? 그리고 저는 팀장으로 불러 주세요.”

경환은 최석현과 케이티가 짧은 시간이긴 하지만 보통 사이는 아니라는 것을 눈치로 알고 있었다. 영국식 악센트가 섞여 있는 영어였지만, 케이티의 영어실력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아직 어려 보이는 케이티를 최 차장이 어떻게 잡았는지, 경환은 도저히 이해 불가라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저는 홍콩대학에서 국제경제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이번이 마지막 학기입니다.”

경환은 케이티가 홍콩대 학생이란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세계에서도 상위권에 드는 홍콩대학 학생이 아직 이름밖에 없는 회사에 와서 일을 하겠다는 말이 통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케이티, 뭔가 착각을 하는 모양인데, 우린 아직 정식 회사도 없이 일을 하고 있어요. 홍콩대에서도 국제경제를 공부한다면 여러 업체에서 제의가 들어 올 텐데, 후회할지도 모릅니다.”

경환의 말에 케이티와 최석현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당황해 하고 있었다.

“팀장님, 사실….”

“차장님, 전 케이티의 말을 직접 듣고 싶습니다.”

최석현은 마음이 급해 경환에게 해명을 하려 하였지만, 경환은 급히 최석현의 말을 막았다. 케이티는 결심이 섰는지 깨물고 있던 아랫입술을 풀며 입을 열었다.

“사실 석현 씨를 만나기 전, 영국유학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석현 씨를 만나게 되었고, 자신이 믿는 사람을 위해, 정말 열정적으로 일하는 모습에 감동을 했습니다. 그러다 우연찮게 석현 씨의 여자가 되었습니다. 사실 제가 원한 것이기도 했고요. 그래서 제가 배운 것을 석현 씨와 석현 씨가 믿는 팀장님을 위해 써 보고 싶습니다. 진심입니다.”

케이티의 말을 들은 경환은, 어리고 예쁜 케이티를 단번에 엎어트린 최석현이 대단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경환은 수정에게 케이티의 말을 통역해 주었고, 수정은 입을 쩍벌린 채 최석현을 도둑놈이란 듯이 쳐다보았다.

“케이티, 솔직히 말해 줘서 고맙습니다. 아직은 사무실도 없는 이름만 가지고 있는 회사이지만, 반드시 케이티가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있게 노력을 해 보겠습니다. 그러나 조건이 있습니다. 우선 양가 부모님들께 인사를 드리고 빠른 시간 내에 결혼을 하세요. 내년이면 나나 최 차장님은 미국으로 사업체를 옮겨 갈 겁니다. 케이티는 최 차장님과 함께 미국에 가서 먼저 전공 공부를 하세요. 학비는 회사에서 부담을 하겠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졸업 후에는 우리와 같이 일을 하는 조건입니다. 동의를 한다면 우리와 같이 일 하는 걸 진심으로 반기겠습니다.”

경환은 여러 가지 국제경제에 대한 질문을 했고, 케이티는 막힘없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해 나갔다. 조금 더 공부를 하고 실무를 익힌다면 충분히 자신의 몫을 해 낼 인재라고 경환은 판단을 했다. 다른 곳으로 도망가기 전에 최석현과 결혼부터 시켜야 안심을 할 수 있었다. 최석현과 케이티는 경환의 조건에 흔쾌히 동의를 하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 쉴 수 있었다. 두 번째 식구까지 얻은 경환은 기분이 좋아서인지 만취를 하게 되었고, 홍콩에서의 첫날밤을 기대하고 있던 수정은, 술에 떡이 돼 인사불성이 된 경환을 보며, 남 몰래 한숨을 지어야만 했다.

다음날 수정과 케이티가 홍콩관광을 나간 사이 경환은 최석현과 함께 은행을 찾았다. 빅토리아 피크를 등에 업고 서있는 H은행은 웅장해 보이기까지 했다. 전면 유리로 되어 있는 건물 입구엔 두 마리의 석조로 된 사자상이 버티고 있었고, 계단 옆으로 흐르는 물은 중국인들이 얼마나 풍수에 민감한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팀장님, 올라가시죠.”

최석현의 안내에 따라 외환거래 창구에 도착한 경환은 의자에 앉아 최석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창구에서 여직원이 나와 최 차장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미스터 최, 저희가 VIP룸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따라 오시겠습니까?”

최석현은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경환을 바라보았다.

“팀장님, 꼬투리 잡힐 일은 없는데, 변호사를 부를까요? 사실 우리 일을 봐주는 변호사가 케이티 친 오빠입니다.”

경환은 황당한 얼굴로 최석현을 쳐다보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도대체 최석현이 뭐가 좋다고, 집안 좋고 학벌 좋은 케이티가 이 정도로 빠졌는지 알 수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괜찮습니다. 400만 불이 적은 금액도 아니고, 은행에서 VIP로 대우해 주는 건 당연한 거니까요. 우선 따라 들어가 보시죠.”

여직원을 따라 들어간 VIP룸은 화려한 인테리어로 치장되어 있었고, 가죽소파가 가운데 자리를 잡고 있었다. 여직원이 만들어다 준 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 문이 열리고 머리를 무스로 넘기고 슈트 차림을 한 서양인이 들어와 악수를 청했다.

“반갑습니다. 투자컨설팅을 담당하는 에릭존슨이라고 합니다.”

최석현과 경환은 통성명을 하고 자리에 다시 앉았다.

“미스터 존슨, 구좌에서 10만 불을 인출하려고 합니다. 그 외에 저희와 다른 일이 있으신가요?”

최석현은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 듯 에릭을 향해 의아한 표정으로 질문을 했지만, 경환은 아무런 말없이 에릭을 쳐다보고 있었다.

“하하, 죄송합니다. 400만 불이 한꺼번에 입금이 되다 보니 은행에서 나름 조사를 했습니다. 요새 불법자금 문제로 복잡한 문제가 많아서요. 그 부분은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KBR이라는 미국업체와 정상적인 거래를 통한 입금이란 걸 확인했습니다.”

경환은 코웃음을 치고 있었다. H은행의 태생이 불법자금으로 시작된 은행이고, 지금도 여러 불법적인 자금세탁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두 분께 투자 제안을 드리기 위해 이 자리로 모셨습니다. 저희 은행만큼 고 이익을 창출하는 은행은 없습니다.”

에릭은 말을 마치고 준비해온 각종 투자관련 브로슈어를 테이블 위에 펼쳐 놓았다. 경환은 브로슈어를 쳐다보지도 않고 소파에서 등을 세웠다.

“미스터 존슨, 죄송하지만 투자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앞으로 더 많은 자금이 이 구좌로 들어 올 것입니다. 적당한 시기가 되면 이 자금은 다시 미국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만약 미스터 존슨이 앞으로 우리의 편의를 봐 주신다면, 미국으로 자금 투자를 했을 때, 미스터 존슨의 이름으로 미국 현지 H은행에 구좌를 개설할 용의가 있습니다. 어떠십니까?”

에릭은 머리로 주판알을 굴리고 있었다. 이보다 더 많은 자금이 들어오고 투자는 아니지만 자신이 관리를 해 주게 된다면, 자신의 실적에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특히 잘 하면 자신이 가고 싶던 영국 본점이나 미국지점으로 갈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었기에, 경환의 이 조건을 마다 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 에릭이었다.

“감사합니다. 제가 앞으로 이 구좌를 관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언제든지 필요한 부분이 있으시다면 연락을 주시기 바랍니다.”

이빨이 보이도록 환한 웃음을 짓는 에릭에게 10만 불이 개인구좌로 들어갈 수 있도록 서류상 편의를 요청했고, 에릭은 잠시 기다려 달라는 말과 함께 VIP룸을 빠져 나갔다.

“차장님, 이 친구 앞으로 관리 좀 하십시오. 때 되면 용돈도 자주 챙겨 주시고, 가끔씩 술도 같이 하세요. 앞으로 도움 받을 일이 많이 있을 거 같습니다.”

경환은 중국의 블랙머니를 처리하기 위해서라도 은행에서 자신의 일을 봐 줄 사람이 필요했다.

“알겠습니다. 팀장님.”

30분 만에 인출과 송금을 마친 에릭은 서양인 특유의 과장된 몸짓으로 자신의 능력을 과시했고, 경환은 그런 에릭에게 악수를 청해 앞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자는 말을 마치고 은행을 나올 수 있었다.

경환은 호텔로 돌아가기 전, 임대한 아파트를 확인하자며 최석현을 끌다시피 데리고 갔다. 아파트는 크지는 않았지만, 깨끗했고 주변 환경이 괜찮아 보였다. 아마도 케이티의 입김이 많이 작용한 거 같아 보였다. 아직 청소가 되어 있지 않은 방에는 두 사람의 옷이 널려 있었다. 동거까지는 아니더라고 케이티가 이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 보였다.

“최 차장님, 케이티 확실하게 잡으세요. 대단한 집안인 거 같아 보이지만, 해병대 뚝심으로 결혼 승낙 받아내세요. 그런데, 밤 기술이 얼마나 대단하기에 케이티가 차장님한테 정신을 못 차리는지…, 좀 가르쳐 주실래요? 밤 기술 노하우.”

최석현은 하늘만 쳐다보며 헛기침만 연신 해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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